아침에 일찍? 눈을 떠 해돋이나 볼까 하고 혼자 산책에 나갔다
장호항 케이블카 에서는 보일까 하고
그러나 장호항은 해돋이와는 인연이 없는 항구이다
날씨는 쌀쌀한데 서낭당만 보고 내려왔다
바닷가 뱃사람들에게 얼마나 안녕을 갈구하는 서낭당이었을까?
그 모습과 염원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오전엔 가까운 수로부인헌화공원을 찾았다
임원항 뒤편 남화산 정상에 위치한 수로부인 헌화공원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헌화가'와 '해가사' 속 수로부인 이야기를 토대로 만들어진 공원이다.
생각없이 탄 공원으로 오르는 엘리베이터 속도가 빠르다 보니 바깥 경치와 더불어 식겁했다
처는 고소공포가 없어 마냥 신난다
난 놀이공원에서 느끼는 스릴감이 엄습하며 고소공포로 인해 한동안 다리가 후들들하였다
오늘은 날씨도 쾌청해 여행의 즐거움을 더한다
조릿대 수풀 사이로 데크와 고무로된 산책길이 잘 조성되어 있었다
절세미인으로 알려진 수로부인은 신라 성덕왕 때 순정공의 부인이다. 남편이 강릉 태수로 부임해 가던 중 수로부인이 사람이 닿을 수 없는 돌산 위에 핀 철쭉꽃을 갖고 싶어하자 마침 소를 몰고 가던 노인이 꺾어다가 바치고, 가사를 지어 바친 것이 4구체 향가인 '헌화가'다.
임해정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용이 나타나 수로부인을 바다 속으로 끌고 갔는데, 백성들이 노래를 부르자 다시 수로부인이 나타났다고 한다. 이 노래가 신라가요인 '해가사'다.
공원에는 이 수로부인 전설을 토대로 한 다양한 조각과 그림 등이 조성돼 있다. 이와 함께 산책로, 데크로드, 전망대, 쉼터 등이 갖춰져 있어 탁 트인 동해 바다의 비경을 감상하면서 걷기 좋다.
공원의 상징물이라고 할 수 있는 초대형 수로부인 상은 높이 10.6m, 가로 15m, 세로 13m, 중량 500t에 달하며, 천연 돌로 조성돼 관광객들의 감탄을 자아낸다.
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천연오색 대리석 조각상들과 어우러진 아름다운 바다풍경이 장관이다.
먼 바다로 울릉도도 보인다는데 육안으론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정자 뒷편엔 12지신 조각상이 있는데 나름 신선한 표현으로 재미있게 조각되어 있었다
남화산 해돋이 명소 답게 풍광이 사방으로 시원했다
이 공원을 마지막으로 동해를 감상하고 떠나 다시 내륙으로 향했다
다시 봉화로 가는 네비게이션을 치니 국도가 아닌 지방도로 안내되었다
태백산맥을 넘는 것이 예전 경험으로 다소 부담되었지만 고개로 가는 길은 절경이라 좋았다
길 중간 산양서원이 나타나는데 이 서원은 1824년에 황희를 배향하기 위해 세운 소동사(召東祠)가 1857년에 서원으로 승격하였다.
1423년(세종 5)에 강원도관찰사로 부임한 황희는 이 지방에 흉년이 들자 백성들을 헌신적으로 구제하여 삼척지방에는 굶어죽은 자가 없었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삼척도호부 백성들은 그의 은덕을 잊지 못하여, 그가 왕래하며 쉬어 갔던 와현(瓦峴)에 돌을 모아 대를 만들어 소공대(召公臺)라고 하였다. 1515년(중종 10)에 무너진 소공대 자리에 소공대비를 세웠고 후에 삼척 사림들이 소동사를 건립하였다.
1861년(철종 12)에 묘정비를 건립하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건물은 그대로 있었으나 1913년에 일본 헌병의 만행을 규탄하는 유림에 대한 보복으로 서원 건물에 방화를 하여 소실되었다.
주변 용암산은 높이 100 미터 정도의 바위산으로 전체의 바위가 하나의 산으로 이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 기암 괴석으로 장관을 이루고 있어 찾는 이의 가슴을 후련하게 하고 있으며 , 용암산 옆 바위로 이루어진 계곡에는 해암사라는 절이 위치하고 있다 .
기곡, 가곡을 거쳐 덕풍계곡으로 오르는 태백산맥은 가히 곳곳이 절경으로 산 좋고 물 좋은 동네였다
다만 석포 방향으로 향하는 마지막 고갯길이 고불고불 경사도가 급해 2400cc에 해당하는 내 차도 낑낑거리며 올라야 했다
더우기 정상으로 오를수록 길가에 하얀 눈 자욱이 깔려있어 이런 경사에 차가 미끄러지지 않을까 신경이 곤두섰다
처는 어느새 내 심정도 모르고 콜콜 자고 있다
겨우 고개를 넘었다 다행히 눈길이 그리 많지 않아서였지 하루나 이틀 전 눈이 내렸으면 못 넘을뻔 했다
고갯길에 있는 안내도이다
봉화로 가는 길은 보통의 길이었다 가끔 안 녹은 응달길만 조심하면 된다
영주 부석사와 무섬마을을 목적지로 했으나 중간 사미정이 있어 잠깐 들렀다
봉화는 옛 고택들이 많아 마을들이 사뭇 민속촌이다
사미정으로 가는 길 한 마을에서 잠깐 멈추었다
대부분 이정도 마을은 현재 농촌전통테마마을로 지정되어 보존되는데 이 마을은 그렇지 않다
국가 세금으로 복원되는 전통도 누가 먼저 돈을 차지하는가 잇속 빠른 소인들의 차지가 되기 쉽다
요즘 며칠전에 들렀던 목포 근대유적 구역 지정으로 국가돈 500억 가까운 혜택을 보는 마을도 그곳 국회의원 민주당 손혜원 의원과 관계되어 그니의 사돈의 팔촌까지 미리 사들여 땅투기한 의혹을 받고 있다
과거엔 친일파들과 그와 연계된 경상도 보수파들, 조선 서인들 후손들이 그 짓을 많이 했는데 이 곳은 주로 영남 남인들의 주거지로 그들과 달라 그러한 힘도 없고 그렇게 하려는 마음도 없어 이리 된 듯 싶다
사미정도 마찬가지이다 주변 자연환경과 역사적 인물들과 관련하면 더 화려해야 하는 이곳이 쇠락해가는 모습으로 국가 세금들임 없이 그나마 보존되고 있다
사미정은 조덕린(1658∼1737) 선생이 말년에 수양하고자 경치 좋기로 이름난 곳을 찾아서 조선 영조 3년(1727)에 지은 정자이다.
계곡을 낀 경사진 곳에 자리잡고 있으며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에 마루를 중심으로 양쪽에는 온돌방을 두었다.
현판 ‘사미정’과 내현판 ‘마암’은 정조(재위 1776∼1800) 때 이름난 정승 채제공이 직접 썼다고 전하고 있다
조덕린 선생은 1725년(영조 1) 노론·소론의 당론이 거세지자 당쟁의 폐해를 논하는 10여조의 소를 올렸다가, 노론을 비난하는 내용이 있어 당쟁을 격화시킬 염려가 있다 하여 종성에 유배되었다.
1728년 3월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영남호소사(嶺南號召使)에 피임, 격문을 돌리고 일로(一路)의 의용병을 규합하여 대구사마방목에 내려갔으나 난이 평정되자 파병(罷兵)하였으며, 이 공로로 동부승지에 임용되고 경연(經筵)에 참석하였다. 얼마뒤 병으로 사직하고 세상에의 뜻을 버린 채 다시 환향하여 학문에 몰두하자 원근에서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1736년 서원의 남설을 반대하는 소를 올리자, 1725년의 소와 연관되어 노론의 탄핵을 받고 제주로 유배가던 중 강진에서 죽었다. 그의 상소는 몇 차례에 걸친 소론들의 재집권을 위한 난언(亂言)·벽서사건(壁書事件)의 실마리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나마 사미정 주변 옥계종택은 약간의 관리가 들어간 듯 하다
옥계종택은 전통 기와지붕 마루골 장식을 겸한 기와인 명문망와로 볼 때 1880년경에 건립된 건물로 볼 수 있다. 현재는 옥계 김명흠의 종택으로 보존되어 있는 건물로 옥계문집과 명문망와, 근대의 수리기록 등은 후대에 보존 되어야 할 자료이다. 옥계정침은 전형적인 ㅁ자형 건물로 중문 칸 좌측에 마구간과 창고의 기능을 하는 고방을, 그리고 우측에는 사랑채를 두었다.
안채 중앙에는 2칸 대청과 반칸의 퇴칸을 둔 상방이 있고, 좌측에 안방과 부엌을, 우측에 고방을 두어 익사를 구성하였다. 옥계종택은 안채 안방의 틀창문 위치와, 사랑채의 사랑방, 사랑마루 사이에 둔 전실을 기둥의 바깥에 만들어진 마루를 뜻하는 헌함까지 내밀어 방을 키운 점 등이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주거평면 유형의 변천과정을 엿볼 수 있다.
그 앞에 있는 졸천정사는 원명 옥계정(玉溪亭)으로 김명흠의 효행과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사림과 후손들에 의해 지어진 정자이다
김명흠 선생은 13세에 옥천 조덕린 선생 문하에 들어가 선생의 일언일동을 눈으로 보고 마음에 새겨서 문사와 구독을 익힐 뿐만 아니라 체행에도 힘썼다 옥천선생이 졸한 후에도 후사를 극진히 돌보아 인륜에 돈독하고 겸허하여 독실한 실덕의 제자로서 모범이 된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