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baeti.org/
주소 : 충북 진천군 백곡면 배티로 663-13 (백곡면 양백리 471)
전화 : 043-533-5710
자차: 네비에 "배티성지" 입력/ 주차장 있음
대중교통 : 320,321 버스 (1일 6회)
미사시간
-화~일 오전 11시 대성당 /월요일 제외 (주일 야외미사가 있을 수 있으니 전화로 문의/단체순례객 식사 문의 가능)
개방시간
동절기(12월~2월) :오전9시 30분~오후 5시
<희망의 순례자> 책자 소개글
배티는 오래전부터 신실한 신자들이 모여 살던 교우촌이자, 조선에 파견된 많은 프랑스 사제들이
사목의 중심지로 삼아 활동했던 곳이다. 또한 조선에서 최초로 소신학교가 설립된 곳이기도 하다.
최양업 신부는 다블뤼 신부의 뒤를 이어 1853년 여름부터 1856년 여름까지 배티의 소신학교를
맡았으며, 1854년 3월에는 신학생 3명을 선발하여 말레이시아 페낭의 신학교로 유학을 보내기도
했다. (다블뤼 신부의 1853년 9월 6일 자 편지)
배티성지의 개요
경기도 안성시와 접하고 있는 충청북도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에 조성된 천주교 성지로, 지리적으로 서쪽은 안성, 용인, 서울, 남쪽으로는 목천, 공주, 전라도 그리고 동쪽으로는 문경 새재를 지나 경상도로 이어져 박해 시대에도 내륙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또한 배티는 ‘배나무 고개’라는 뜻으로 충북 진천에서 경기도 안성으로 넘어가는 고개 주변 동네 어귀에 돌배나무가 많은 배나무 고개라서 ‘이치(梨峙)’라고 불렸고 이는 다시 순 우리말로 ‘배티’라고 불리게 됐다.
배티 순교성지는 안성 칠장산에서 시작하여 태안반도 지령산으로 이어지는 금북정맥의 서운산(547m) 자락에 위치해 있으며, 예로부터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던 오지[1]인 데다가 충청 좌도와 우도, 경기도의 접경에 위치해 있어 박해를 피해야 했던 천주교 신자들이 숨어 살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기록상으로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배티 일대로 천주교 신자들이 숨어들기 시작한 것은 1801년 신유박해 이후이며, 계속되는 박해로 거주 신자들이 점차 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출처 https://namu.wiki/w/%EB%B0%B0%ED%8B%B0%EC%84%B1%EC%A7%80
배티성지의 의의
-조선시대 박해기간 교우촌 (한국천주교의 카타콤 catacomb)
-최초의 조선대목구 신학교 마을 : 신학교 교사 (소성당 및 사제관 겸용)으로 사용할 방 2칸짜리 초가집이 시작으로 다블뤼교장신부님에 이어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배티신학교를 맡게 되었다. 신학생중 1854년 3월, 3명의 신학생이 말레이시아 페낭신학교로 유학
-최양업토마스 신부님의 사목 중심지 : 최양업 신부는 1853년 조선대목구의 신학교 지도를 맡은 이후 3년동안 배티교우촌을 사목중심지의 본당으로 삼아 전국을 다니며 사목활동을 해 왔다. 사목 순방이 끝타는 9~10월에는 배티 사제관을 거처하면서 저술에 몰두하여 글을 잘 알지 못하는 교우들을 위해 여러 편의 천주가사를 짓고, '천주가사'와 성교공과를 번역한 최조의 한글 기도서'성교요리문당'을 지었다.
-복자 9위를 탄생시킨 순교자들의 본향 : 복자 오반지 바오로의 묘소를 비롯한 6인 묘와 무명의 순교자 14인 묘가 산재해 있으며 박해시기 배티 일대에서 체포된 순교자 수는 기록상만으로 34명에 이른다. 이 중 놋점 출신 오반지 바오로, 배티출신 장 토마스, 절골 출신 박경진 프란치스코 등과 최양업 신비의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는 2014년 8월16일 프린치스코 교황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볼거리
-최양업 신부 선종 150주년 기념 성당
-최양업 신부 탄생 175주년 기념 성당
-배티성지 옛성당 겸 신학교
-최양업 신부 박물관
-양업영성관 피정의 집
-순례길 : 십자가의 길 및 성체조배
-복자 오반지 바오로 묘, 무명의 순교자 묘, 삼박골 모녀 순교자 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