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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진리는 유능지자(有能知者) 또 불능지자(不能知者)
(1956년 7월 20일)
금(今) 여년(余年) 84 우리 집 接牒上父祖以 上享壽之多至余最高 삼고(三考,재성) 65세(74세) 별세, 선고(先考) 49세 별세, 余見世人中 堂上有白髮雙親者면 문득 선모(羨慕)가 생(生)하여 潛然幽陵를 금치 못하였다. 정리(情理)로 그럴 뿐 아니라 우리 형제 5인 중 장형(長兄) 수(銖)는 결혼 후 4개월 별세 형수 경주(慶州) 이씨(李氏)는 절효탁세(節孝卓世)하되 부모의 비상(悲傷)을 위하여 한 번도 청상(靑孀) 된 슬픔을 보이지 않고 효봉(孝奉)을 마지않았다. 이것은 나의 유시(幼時) 목견(目見)이다.
여년(余年)이 초장(稍長)에 시각(時刻)을 머물지 않으시고 제이(第二) 자부(子婦)를 영(迎)하는데 문경(聞慶) 벌족(閥族) 순천(順天) 김씨(金氏)를 영(迎)하여 결혼하였다. 부모님 생각에 제이 자부에게 혈괴(血塊)가 생긴다면 제일(第一) 자부에게 양자를 줄 예정이다. 다행히도 64년 계미(癸未 1893년) 1월 16일에 장자 덕영(悳永)이 생하니 우리 어머님과 형수는 둘도 없는 희망으로 기르셨다. 친부모는 손도대지 못할 지경이다. 덕영 부처가 양모(養母) 이(李) 부인을 잘 받들어 봉양하였다. 이부인은 청상(靑孀)으로 70여년 기절(奇節)하시고 부모에게 효하시고 자녀를 잘 기르시고 거룩하고 깨끗하게 경성 이태원 덕영의 주택에서 영면(永眠)하신 고로 유해는 상주(尙州) 공검면(恭儉面) 상율(尙栗) 별(別) 선산 형님과 합굴(合窟)을 모시였다. 이런 참경(慘境)을 보인 우리 부모님을 끝까지 모시지 못한 나의 원한은 말할 수 없다.
나의 역경도 참독(慘毒)하였다. 서대문감옥 출개(出開) 시 일인(日人)들의 고문은 진실로 견디기 어려웠다. 오늘까지 귀가 어둡고 눈이 쉬 어두운 점이 그 까닭이다. 세(世)에 생존이 필경 오래지 못할 것을 자각하고 죽기 전 전도에 힘써보자 결심하고 청진(淸津)까지 파송을 받아가서 준 8년 동안 있었다. 소련군 상륙 시 쫓겨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는 줄 알았더니 다행히도 떨어진 곳이 물속이라 옷은 버려도 사람은 살았다. 이렇게 고생하여 다시 교회를 찾아 돌아와 있다가 소련군에게 피검이 되어 조선인에게 무고한 고문을 받고 소련군에도 심각한 고문을 받았다가 컴컴한 지하실에 갇혀 거의 실명 지경이다. 다행히 석방되어 살았다.
이런 경과를 보와 실 같은 잔생(殘生)이 이 땅위에 오래 있으리라 생각할 수 없는 것은 자타가 다 인정하는 바인데 어찌하여 오늘까지 생존하였는지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은 물질이 있어야 사는 것은 누구나가 아는 일이다.
나는 6.25 사변에 산으로 굴속으로 숨어 다니다가 9월에 국군에 수복되어 다시 살았고 또 1.4후퇴 시에는 자식들과 친구와 교회직원들의 권고로 빈손을 쥐고 떠났다. 미련한 생각에 며칠만 강을 건너 남방에 가 있다 곧 돌아오리라 하고 의복과 집물(什物)은 교회 지하실에 묻어두고 교회 물품도 그렇게 같이 두었다. 더러는 땅에 독을 묻고 넣어두고 떠났다.
그날은 1.4 전인 12월 25일이다. 성탄주일도 볼 사이가 없이 떠났다. 빈손이다. 떠날 때 행보가 부족하여 구루마를 타고 영등포에 가니 밤은 많이 깊었는데 기차는 근본 무임 운송인데도 불구하고 차 뚜껑에까지 사람이 올랐고 차내에는 감히 생지(生志)할 수 없었다. 동행 중 최(崔)덕모군이 15만을 주고 차표를 샀다. 대금(代金)을 나누어 물고 차를 탔다. 밤 자정이나 되어 차가 떠나 그 다음해 1월 5일에 부산(釜山)에 도착하였다. 차중곤란(車中困難)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수중소지(水中所持)한 금품은 고갈하고 식구가 전혀 계책이 없었다.
이때 차에 내려 다른 사람들은 다 지정처(指定處)가 있어 가거니와 전재숙(田在淑) 양과 1) 나는 갈 곳 없어 길가에서 바장이었다. 누가 말하기를 장로교 성산교회(聖山敎會)로 가라 지시하여 갔더니 더러 아는 사람이 있어 그 곳에서 며칠 지난 후에 사월(史越)목사를 만나 가덕도(加德島)로 가라 하는 고로 그 이튿날 기동선(機動船)을 타고 가덕도를 가니 그날은 1월 9일이다.
감리교 목사만이 모인 수용소이다. 그날부터 선교회 배급을 받았다. 돈도 주고 쌀도 주어 밥을 지어 먹게 되었다. 배급 사무를 다행히도 전희철(田熙哲) 목사의 주관인 고로 편리하게 되어 오늘부터 식생활의 걱정 없이 지내였다. 허약하여 병으로 죽을 것은 틀림없이 자신 있게 된 나로서는 오늘까지 산 것은 참 기적적이라 아니 할 수 없고 또 식생활의 예산도 없고 계책이 전무한데 어찌하여 살어 왔는지 꿈인가 싶다. 가덕도(加德島)로 진해(鎭海)로 거쳐 삼년 후인 1953년 9월 18일 귀경하였다. 이아(二兒) 희영(喜永)이 부산(釜山) 약산(藥山) 하에 있는 아비를 와보고 특차를 예비하여 올라오게 되었다.
상경 후에 희영의 집에 잠시 유하게 되었다. 희영의 말에 제가 생활이 웬만하면 아버님의 계실 집을 한간 예비하여 만년에 자부(子婦)를 거느리시고 종용히 계시도록 하려는데 소위 영업인 광업(鑛業)이 잘되지 않는 고로 맘뿐이올시다. 희영아 너는 아비 생활을 염려치 말아라. 아비의 오늘까지 살아 온 것이 없는 가운데 있게 하시는 하나님 은혜로 살아 왔으니 앞으로도 또 그럴 것이다. 생명을 염려함으로 유지하겠느냐. 교회에서 황송하게도 소위 원로란 이름을 주어 오늘까지 은급 몇 천 원씩 주어 받았다.
원로 목사중 배형제(裵亨堤) 씨는 나보다 한해가 앞이오나 모두 건강한데도 별안간 세저(歲底)에 떠나고 배 목사보다도 훨씬 앞에 되는 유시국(劉時國) 목사도 지난봄에 별세하였다. 비약*석(非約*夕)이요 금일명일하고 기다리는 이 노물은 아직도 살어 있으며 전전(前前) 주일에는 당 교회 목사 최요한 씨 요청으로 설교까지 하고 움직일 수 있게 되었으니 지금 같아서는 그렇게 속히 떠날 것 같지 않으니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요한 웨슬레 선생의 말과 같이 사람이 잘 살기보다 잘 죽기 어렵다 하시니 그러므로 나는 기도한다. 사는 동안 병으로 남을 괴롭게 하는 자가 되지 말고 떠날 때에도 노래하며 떠나게 해달라고 원하였다. 그러니 먹게 되는 것도 살게 되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작정이요. 사람의 뜻으로 되는 것 아니니 참 알 수 없다.
오늘 정부에서는 간소화 문제가 있다. 그 이유는 공무원의 봉급의 너무 박하여 살 수 없는 고로 공무원을 1/3을 감원하고 봉급을 증가하여 평균 삼 만원을 주자는 것이다. 그러면 그전 봉급은 얼마인가 보통 삼천 원이 평균이다. 그러나 삼천 원을 가지고 살 수 없는 것은 당국에서도 밝히 아는 바이다. 공무원 모집 광고가 있으면 머리를 동이고 달려든다. 그가 공무원이 된다면 삼천 원 가지고 넉넉히 살 수 있으니 이것이 무슨 까닭인가.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그에게 물어 보아도 알 수 없다 한다. 그 내용을 밝힌다면 별의 별 한 일이 있지만 무를 필요도 없거니와 나의 생활에 비하여 물어본다면 조건을 들어 대답할 수 없어도 그렇게 어려워도 자식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이 분명하다.
자식은 제 자녀가 팔남매이고 늙은 아비의 세 식구를 어찌 감당할 것인가. 돌무더기와 싸우는 자식의 생활은 땅 속에 있는 금돌을 캐내어 매매하는 것이다. 누구를 속이는 것도 아니요. 해하는 것도 아니요. 오히려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이 일하고 날마다 오백 원의 금전을 얻어 사는 사람이 근 백명 된다 하니 이것 고마운 일 아닌가 후대하기를 나는 부탁하였다. 날마다 광부들에게 돈을 주어야 하고 또 식구가 살아야 하니 그 예산을 따지고 물어보면 알 수 없다 한다. 역시 하나님이 주셔서 사는 것이라 답할 수밖에 없다 한다.
어쨌든 산 것은 진리이다. 또 정직하게 살았으니 진리이다. 진리는 알 수 있는 것도 있고 알 수 없는 것도 있다. 나의 생활전부가 이것이다. 아-거룩다 진리여. 참되다 진리여. 어길 수 없다 진리여. 나를 살게 하신다. 진리여 나를 죽음에서 구원하시는 진리여 나는 진리로 살다가 진리로 떠나기를 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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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재숙 : 전희철 목사의 딸, 전재숙은 조내과 원장과 결혼 조정자, 조일형을 낳았고 뉴욕으로 가서 살다가 소천. 전재후는 유원석과 결혼하여 궁정교회 장로. 3남 2녀를 두었다. 전실, 전성근 전인실 전성진, 전성림. 맏손자인 전성근 - 궁정교회 집사 4째 교인. 인실과 성진은 미국, 성림은 한국 거주. 전희철의 차녀 전재은은 이북에서 내려오지 못하다. 3녀 전재순은 미국 거주.
<현대한국어로 편집>
161. 진리는 아는 사람도 있고 모르는 사람도 있다
(1956년 7월 20일)
지금 나이 84세인데, 우리 집안의 기록상 조상들의 수명 중 내가 가장 길다. 삼대조부께서 65세(74세)에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49세에 돌아가셨다. 내가 세상 사람들 중 양친이 모두 살아계신 분들을 볼 때면 부러움이 생겨 슬픔을 금치 못했다. 정으로 그럴 뿐만 아니라, 우리 형제 5명 중 큰형 수(銖)는 결혼 후 4개월 만에 돌아가셨는데, 형수 경주 이씨는 절개와 효심이 뛰어났으며 부모님의 슬픔을 생각해 한 번도 청상과부가 된 슬픔을 내비치지 않고 효도를 다하셨다. 이는 내가 어릴 때 직접 본 일이다.
내가 조금 자랐을 때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아내를 맞이했는데, 문경의 명문가 순천 김씨를 맞아 결혼했다. 부모님 생각에는 둘째에게 자식이 생기면 첫째 형수에게 양자를 보낼 예정이었다. 다행히도 1893년(계미년) 1월 16일에 장자 덕영이 태어나니 우리 어머님과 형수는 더없이 기뻐하며 키우셨다. 친부모는 손도 대지 못할 정도였다. 덕영 부부는 양어머니 이씨를 잘 모시고 봉양했다. 이씨는 청상과부로 70여 년을 절개를 지키시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자녀를 잘 기르셨으며, 경성 이태원 덕영의 집에서 거룩하고 깨끗하게 영면하셨다. 그래서 유해는 상주 공검면 상율의 별도 선산에 형님과 함께 모시게 되었다. 이런 비통한 상황을 겪으신 우리 부모님을 끝까지 모시지 못한 나의 한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나의 시련도 매우 고통스러웠다. 서대문감옥에서 풀려날 때 일본인들의 고문은 정말로 견디기 어려웠다. 오늘날까지 청력이 약하고 시력이 쉽게 나빠진 것이 그 때문이다. 세상에 오래 살지 못할 것을 깨닫고 죽기 전에 전도에 힘써보자고 결심하여 청진까지 파송되어 약 8년간 머물렀다. 소련군이 상륙했을 때 쫓기다가 절벽에서 떨어져 죽을 뻔했는데, 다행히 물속으로 떨어져 옷은 잃었지만 목숨은 건졌다. 이렇게 고생하며 다시 교회로 돌아와 있다가 소련군에게 체포되어 조선인에게 근거 없는 고문을 당하고 소련군에게도 심한 고문을 받았으며, 어두운 지하실에 갇혀 거의 실명할 뻔했다. 다행히 풀려나 살아났다.
이런 일들을 겪어보니 나같은 미약한 목숨이 이 세상에 오래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 누구나 인정하는 바인데, 어째서 오늘까지 살아있는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은 물질적 기반이 있어야 산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나는 6.25 전쟁 때 산과 굴속을 옮겨다니며 숨어 지내다가 9월에 국군이 수복하면서 다시 살아났고, 1.4 후퇴 때는 자녀들과 친구, 교회 직원들의 권유로 빈손으로 피난을 떠났다. 어리석게도 며칠만 강을 건너 남쪽에 가 있다가 곧 돌아오리라 생각하고 옷가지와 살림살이는 교회 지하실에 묻어두었고 교회 물품도 같이 보관했다. 일부는 땅에 독을 묻어 넣어두고 떠났다.
그날은 1.4 후퇴 전인 12월 25일이었다. 성탄절 예배도 드리지 못하고 떠났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걸어갈 힘이 부족해서 수레를 타고 영등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는데, 기차는 원래 무임승차였음에도 불구하고 지붕까지 사람들이 올라탔고 차 안에는 도저히 들어갈 수 없었다. 동행한 최덕모 군이 15만원을 주고 차표를 샀다. 비용을 나누어 내고 기차를 탔다. 자정쯤 기차가 출발하여 다음 해 1월 5일에 부산에 도착했다. 기차 안에서의 어려움은 말할 것도 없었고, 가진 돈은 다 떨어지고 가족들은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이때 기차에서 내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갈 곳이 정해져 있어 떠났지만, 전재숙 양과 나는 갈 곳이 없어 길가에서 방황했다. 누군가 장로교 성산교회로 가보라고 알려주어 갔더니 아는 사람이 몇 있었고, 그곳에서 며칠을 지낸 후 사월 목사를 만나 가덕도로 가라는 말을 듣고 다음 날 동력선을 타고 가덕도로 갔는데, 그날이 1월 9일이었다.
감리교 목사들만 모여 있는 수용소였다. 그날부터 선교회의 배급을 받았다. 돈도 주고 쌀도 주어서 밥을 해먹을 수 있게 되었다. 다행히도 배급 업무가 전희철 목사의 관할이어서 편리하게 지낼 수 있었고, 그때부터 식생활의 걱정 없이 지냈다. 허약해서 병으로 죽을 것이라고 확신했던 내가 오늘까지 산 것은 정말 기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고, 또 생활비 계획도 없고 아무런 대책이 없었는데 어떻게 살아왔는지 꿈만 같다. 가덕도에서 진해를 거쳐 3년 후인 1953년 9월 18일에 서울로 돌아왔다. 둘째 아들 희영이가 부산 약산 아래에 있는 아버지를 찾아와서 특별히 차를 마련해 주어서 올라오게 되었다.
서울에 올라와서 희영이의 집에서 잠시 머물게 되었습니다. 희영이가 말하길, "아버님이 계실 집을 한 칸 마련해서 노후에 며느리와 함께 평안히 사실 수 있게 하고 싶었는데, 제가 하는 광산 사업이 잘 되지 않아서 마음뿐입니다."라고 했습니다.
"희영아, 네 아버지의 생활을 걱정하지 마라. 아버지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왔으니 앞으로도 그럴 거다. 생명을 걱정한다고 해서 살아지는 게 아니다. 교회에서는 고맙게도 원로라는 직함을 주어 지금까지 매달 몇 천 원씩 연금을 받았다."
원로 목사 중 배형제 씨는 나보다 한 살 많았지만 건강했는데도 갑자기 연말에 돌아가셨고, 배 목사보다 더 연장자이신 유시국 목사님도 지난봄에 돌아가셨습니다. 약속되지 않은 시간이고, 오늘 내일 하며 기다리는 이 늙은이는 아직도 살아있으며, 얼마 전 주일에는 우리 교회 목사님이신 최요한 씨의 요청으로 설교까지 했고 움직일 수 있으니, 지금으로서는 그렇게 빨리 떠날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정말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요한 웨슬리 선생님 말씀처럼 사람이 잘 사는 것보다 잘 죽는 것이 더 어렵다고 하셨으니, 그래서 나는 기도합니다. 살아있는 동안 병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떠날 때도 노래하며 떠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먹고 사는 것 모두가 하나님의 뜻이지, 사람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니 참으로 알 수 없습니다.
요즘 정부에서는 간소화 정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공무원들의 봉급이 너무 적어서 살기 힘들기 때문에, 공무원 수를 1/3로 줄이고 봉급을 올려서 평균 3만원을 주자는 것입니다. 이전의 봉급은 평균 3천 원이었습니다. 3천 원으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당국에서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공무원 모집 공고만 나면 사람들이 앞다투어 지원합니다. 이들이 공무원이 되면 3천 원으로도 충분히 살 수 있다고 하니, 이게 무슨 까닭일까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본인들에게 물어봐도 설명할 수 없다고 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굳이 묻지 않아도 되겠고, 내 생활과 비교해 물어본다면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렇게 힘들어도 자식들의 도움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제 자식은 자기 자녀가 여덟이나 되는데, 늙은 아버지 식구 셋을 어떻게 부양할 수 있을까요? 광산에서 일하는 자식의 생활은 땅속에서 금광석을 캐내어 파는 것입니다. 누구를 속이는 것도 아니고 해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이 일해서 매일 500원씩 벌어가는 사람이 100명 가까이 된다고 하니, 이것이 감사한 일 아닐까요? 나는 그들을 잘 대해주라고 부탁했습니다. 매일 광부들에게 급여를 지급해야 하고 가족들도 살아야 하니, 그 예산을 따져 물어보면 설명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역시 하나님이 주셔서 사는 것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어쨌든 살아있다는 것은 진리입니다. 또 정직하게 살았다는 것도 진리입니다. 진리는 알 수 있는 것도 있고 알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내 삶의 전부가 이것입니다. 아, 거룩하도다 진리여. 참되도다 진리여. 어길 수 없도다 진리여. 나를 살게 하신다. 진리여, 나를 죽음에서 구원하시는 진리여, 나는 진리로 살다가 진리로 떠나기를 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