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태현 전 주베트남 대사의 격주기획연재 4
베트남과 호치민 – 애국심에 눈 뜬 꾸옥 혹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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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7년 터인이 입학한 꾸옥 혹(국학) 정문
이 학교는 서구식
교육으로 엘리트 관료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되었으나
타인은 애국적인
교사들의 영향을 받아 저항 정신을 키워나갔다
애국심에 눈 뜬 꾸옥 혹 시절
휘 관직을 받아드리다
1905년
여름 타인(호치민 주석)은 아버지 친구의 도움으로 프랑스어와
프랑스 문화를 공부하기 시작했고, 그 해 9월 휘(호치민 주석의 아버지)는 두 아들을 빈에 있는 프랑스식 예비학교에
입학시켰다. 타인과 형은 본격적으로 프랑스어를 공부하기 시작했고 꾸옥 응우(國語 ; 현재 베트남 글자로서 17세기
선교사들이 처음 도입했으며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함)도 공부하기 시작했다.`
포방에 급제하고도 관직을 거부하던 휘는 1906년 5월 다시 부름을 받았을 때는 이를 받아들였다. 휘가 이를 받아드린
것은 그의 친구 카오 수언 득(Cao Xuan Duc, 高春德)의
설득 때문이었다. 그것이 휘가 후에에 남아 두 아들을 가르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었다. 휘는 관직을 받아들이되 부패한 체제에 봉사하는 일은 피할 수 있는 낮은 자리를 얻는데 동의했다. 당시 베트남의 관칙은 조선시대와 같이 9계급이 있고 각 계급은 2등급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휘가 받은 관직은 7급의 2등급(종7품)인 의전관이었다. 까오 수언 득은 휘와 같이 과거에 급제하여 일찌감치
관직을 얻어 상당히 높은 지위에 올라 있었으나 휘의 인품과 신념을 존중하여 많은 도움을 준 친구였다. 휘가
후에에 처음 도착했을 때 집을 얻기 전에 득의 집에서 기거했다는 사실을 볼 때 두 사람은 다른 길을 가고 있었지만 의기가 상통하는 고향 친구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휘는 관직을 수행하기 위하여 고향의 집은 딸에게 맡기고 두 아들을 데리고 다시
후에로 갔다 휘가 배정 받은 숙소는 전에 보병 막사였으나 조정의 하급 관리들의 숙소로 쓰는 건물로 침대 하나와 탁자 하나가 들어가면 끝이고 부엌이나
수도는 따로 없어 동네 우물이나 운하를 이용해야 했다. 식사는 간소하여 소금에 절인 생선, 채소, 볶은 참깨와 밥이 전부였으며 나이가 어린 타인이 주로 밥을
지었다. 이런 생활은 농촌에 사는 대부분의 농민들보다는 낫다고 할 수 있지만 조정의 관리들이 누리는
편한 생활에 비하면 초라한 것이었다.
아들의 교육을 위하여 관직을 받아드렸으나 조정에서 휘의 일은 매우 불쾌한 경험이었다. 그는 외국 통치자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꼭두각시에 불과한 군주를 섬기는 일이 도덕성 때문에 점차 마음이 불편해졌다. 휘가 공부한 유교적인 관료제는 도덕적 설득력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것이
과거제도를 통하여 선발된 고위 공직자들의 능력과 성실성을 유지하는 수단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공동체에
대한 봉사, 개인적 청렴, 인에 기초한 사회적 윤리를 주입
받아온 관리들은 이런 원리들을 토대로 백성에게 자신의 권위를 행사해야 했다. 만약 관리들이 오만과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워 본분을 다 하지 못하면 통치자가 이를 통제해야 한다. 그러나 당시 베트남은 조정이 허약해지면서
유교제도가 붕괴하고 군주의 존엄과 권위가 무너져서 관리들을 통제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관리들은 양심의 가책을 못 느끼고 부정한 방법으로 사리사욕을
채우고 전통적으로 가난한 농민들의 몫인 공유지를 차지하고 세금도 면제 받는 경우가 많았다.
꾸옥 혹에서의 저항 활동
휘는 후에에 도착한 직후 까오 쑤언 득의 조언데 따라 두 아들을 중학교에 입학시켰다. 이 학교는 새로운 프랑스 식 교육제도의 일부였는데 휘의 숙소인 동바에 위치하고 있어 거리가 가까웠다. 타인은 아직 서구적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원칙적으로는 이 학교에 등록할 자격이 없었으나 고향에서
프랑스어를 조금 배워 면접을 잘 했기 때문에 초급반에 입학할 수 있었다. 학교 벽에는 <자유> <평등>
<우애> 라는 유명한 프랑스 혁명의 구호가 붙어있었다. 나막신, 갈색 바지와 셔츠 차림에 머리가 긴 타인은 세련된 급우들
사이에서 촌스럽게 보였을 것이다. 타인을 놀림을 피하기 위해 당시 유행하던 머리 모양을 하고 옷도 남들처럼
입기도 했다. 오랜 세월 뒤 한 친구는 타인은 열심히 공부했고 노는 모습을 거의 볼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 방과 후엔 한 교사의 집에서 숙제를 하고 밤에는 친구들과 배운 것을 복습했다.
특히 프랑스어 공부에 열성을 보여 친구들과 발음 연습을 하고 단어장을 만들어 가지고 다니며 외우고 했다. 이런 노력의 보람으로 그는 2년 과정을 1년 만에 끝냈다.
1907년
가을 타인과 형은 후에 최고의 수준의 프랑스식 국립학교인 꾸억혹(Quoc Hoc, 國學)에
합격했다. 꾸옥 혹은 1896년 타인 타이(Thanh Thai,成泰)황제의 포고에 따라 세워진 학교였으나 프랑스 고등 주차관(지역 총독에 해당)의 관할 하에 있었다. 조정은 꾸옥 혹을 세워 꾸억 테 잠(국자감)을 대신하여 서구식 교육을 받은 학생을 배출하여 고급 관료로 기용하고자 했다.
따라서 교과 과정은 프랑스 언어와 문화에 중점을 두었으며 이 지역에서는 꾸옥 혹을 ‘천국의
학교’ 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학생들은 매우 다양했다. 타인 형제처럼
장학금을 받고 다니는 학생들은 걸어서 학교에 왔다. 부유한 가정의 학생들은 학교 기숙사를 이용하거나
마차를 타고 왔다. 이 학교의 교장은 프랑스인이었으며 당시의 전통에 따라 학교는 학생들을 엄하게 다루었고
야만적인 처벌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타인은 이 학교의 일부 교사들의 야만적인 태도를 비판적으로 이야기
하곤 했지만 공부를 열심히 하면서 경험을 쌓았다. 그의 급우들은 그가 늘 교실의 뒤편에 앉아 교실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고 회상한다. 그러나 그는 질문을 잘 하는 것으로 유명했으며 프랑스어에
능숙하여 대부분의 교사들이 그를 좋아했다.
파리의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갓 부임한 레 반 미엔 선생은 타인이 좋아하는 교사였다. 미엔은 식민지 정부를 비판하는 이야기를 자주 했지만 프랑스 문화에 익숙하다는 점 때문에 프랑스인 거주자들 사이에서
우호적인 평판을 얻어 파직을 면하고 있었다. 미엔은 학생들에게 파리의 발전된 모습을 이야기 해 주곤
했으며 타인은 이에 자극을 받아 더욱 열심히 공부해서 교사들 사이에서 정말 똑똑하고 탁월한 학생이라는 평판을 얻었다. ‘그러나 타인의 솔직한 언행과 촌스러운 행동은 세련된 급우들과 문제를 일으켰다. 타인의 심한 사투리 때문에 그를 호박이라고 놀렸다. 타인은 처음에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나 한 번은 그를 괴롭히는 한 학생을 때렸고 인내심을 잃었다는 이유로 교사에게 심한 꾸중을 들었다.
타인의 애국심을 주로 자극한 사람은 한문 선생 호앙 통이었다. 프랑스에 반대하는 그의 입장은 학교에서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나라를 잃은 것이 가족을 잃는 것 보다 더 심각하다고
말하곤 했다. 타인은 통 선생의 집을 찾아가 그의 서재에 있는 책을 열심히 읽었다. 그 곳에는 프랑스, 중국, 베트남의
개혁주의자들이 쓴 저작들이 많았다. 통 선생은 비밀 정치 활동에 관여하고 있었으며 타인은 그를 통해
제국 조정과 프랑스 식민지 체제에 반대하는 지역 내 저항조직과 접촉했다는 설이 있다. 타인이 그런 활동에
얼마나 관여했는지는 알려진 바 없으나 그가 당국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점차 높여 갔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는 운동장에 모인 학생들 앞에서 제국 조정의 비굴한 행동을 비판하고 지역 농민에게
부과 해온 부당한 세금의 경감을 요구하기도 했다. 한 학생이 타인의 그런 행동을 고자질하는 바람 에
타인은 교장실로 불려가 심한 질책을 받았다. 교장의 꾸중을 듣고 타인은 판 쭈 찐을 비롯한 개혁 주의자들이
이미 제기한 불만을 그대로 옮겼을 뿐이라고 대꾸했다. 결국 교장은 교사들에게 그의 행동을 통제하지 못하면
경찰을 불러들일 것이고 그렇게 되면 선생들 역시 해고 될 줄 알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1920년 2월 23일자 프랑스 경찰 보고서에도 이 사건이 기록되어 있으며 “타인과 그의 형이 당국에 대한 명백한 저항 행동을 하여 학교 직원들이 심하게 꾸중했다” 고 적고 있다.
1907년
가을 무렵에는 정치적 긴장이 점차 고조되고 있었다. 프랑스에 의해 제위에 오른 타인 타이 황제는 저항
운동 가담을 의심 받아 폐위되고 8살 난 후계자 유이 떤(Duy
Tan) 은 프랑스에 대한 감정이 훨씬 강하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그러나 다수의
진보적인 베트남 인들은 황실에서 반 프랑스적인 행동을 할 것이라는 기대를 접고 있었다.
1907년
초 하노이에서 진보적인 지식인 집단이 모여 동 낀 응이아 툭(Dong Kinh Nghia Thuc,東京義塾)을
결성하였다. 이 학교는 일본의 게이오 의숙을 본뜬 것으로 서양의 진보적 사상을 전파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독립적 교육기관이었다. 동 낀 응이아 툭의 지식인 응웬 꾸이엔(Nguyen
Quyen, 阮 權)은
모든 베트남인에게 봉건적 과거를 거부하는 상징적인 행동으로 단발을 할 것을 호소하는 시를 썼다. 이
시를 읽고 영향을 받은 타인은 수업을 빼 먹고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단발을 해 주었다. 원하는
사람들만 해주 는 것이 아니었다. 이런 행동은 프랑스 당국을 불안하게 했고 통킹 정부는 동경의숙을 폐쇄하기에
이르렀다.
(달랏대학교
한국학과 강사, 럼동성 한국 관계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