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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ICBM은 나 개인에게도 최고의 무기>의 줄거리:
북한의 김정은 정권이 대륙간탄도미사일 ICBM을 소지하고 있는 나라들의 대열에 끼기 위하여 여념이 없다는 사실이 연일 뉴스의 화제거립니다. 그러나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ICBM은 국가 단위가 아니라 개개인이 가질 수 있는 무기입니다. 즉 ICBM의 원리는 얼마든지 개별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상의 원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교회 안에 ICBM 원리를 생활화하는 참 선민과 전혀 무관하게 사는 가짜 선민이 있어 각별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ICBM은 나 개인에게도 최고의 무기
(역대하 13:1~22)
8. 이제 너희가 또 다윗 자손의 손으로 다스리는 여호와의 나라를 대적하려 하는도다 너희는 큰 무리요 또 여로보암이 너희를 위하여 신으로 만든 금송아지들이 너희와 함께 있도다
9. 너희가 아론 자손인 여호와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쫓아내고 이방 백성들의 풍속을 따라 제사장을 삼지 아니하였느냐 누구를 막론하고 어린 수송아지 한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를 끌고 와서 장립을 받고자 하는 자마다 허무한 신들의 제사장이 될 수 있도다
10. 우리에게는 여호와께서 우리 하나님이 되시니 우리가 그를 배반하지 아니하였고 여호와를 섬기는 제사장들이 있으니 아론의 자손이요 또 레위 사람들이 수종 들어
11. 매일 아침 저녁으로 여호와 앞에 번제를 드리며 분향하며 또 깨끗한 상에 진설병을 놓고 또 금 등잔대가 있어 그 등에 저녁마다 불을 켜나니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계명을 지키나 너희는 그를 배반하였느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ICBM은 나 개인에게도 최고의 무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ICBM은 나 개인에게도 최고의 무기’
TV에서는 북한의 김정은 정권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보유하기 위한 뉴스가 연일 보도되고 있습니다. 이들의 마지막 목표는 미국의 하와이와 본토공격이 가능한 ICBM을 개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공할 무기인 ICBM의 원리는 미국을 향해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수직으로 대기권 바깥으로 발사하여 로켓은 무중력상태에서 미국 쪽으로 방향을 틀어 400~500km를 가게 됩니다. 그리고 레이더로 표적을 찾고 나면 엔진을 꺼버립니다. 그러면 무중력상태에서 날아온 로켓은 관성에 의해서 미국본토까지 날아가게 되고 자유낙하를 하며 목표지점에 떨어지는데 이 기술이 아무나 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니라고 합니다.
핵을 만들고 경량화에 성공해서 로켓의 머리 부분에 실을 수 있게 하였다고 하더라도, 로켓을 대기권 바깥으로 쏘아올리고 방향을 틀고 관성의 법칙으로 날아가게 하고 목표지점에 자유낙하를 시키는 기술이 필요해서 지금 북한의 김정은 정권이 애를 쓰고 있습니다.
핵무기는 가공할 위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반핵을 위한 단체도 많고 핵에 대한 논란은 끊이질 않습니다. 그런데 비유적으로 이 ICBM의 원리가 모든 개인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적용이 되어야만 합니다. 물론 이러한 비유는 북한이나 핵에 대한 옹호가 아닙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사탄을 상징하는 뱀을 들어서 ‘뱀처럼 지혜로우라’고 하셨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 ICBM은 북한의 김정은 정권이 가지고 싶어 하는 최고의 무기일 뿐만 아니라, 비유적으로 우리 개인에게 있어서 우리의 삶을 가장 멋지게 살게 하는 최고의 무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남 왕국 유다의 제2대 왕이고 다윗 왕조의 4대째가 되는 아비야 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열왕기상 15장에서는 아비얌으로 나왔습니다. 열왕기상에서는 “아비얌이 그의 아버지가 이미 행한 모든 죄를 행하고 그의 마음이 그의 조상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하지 못하였으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다윗과의 언약을 위해 유다를 보존시키셨는데, 그 외에는 아비얌과 여로보암 사이에 전쟁이 있었다고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역대기에서는 이 아비야를 굉장히 좋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모든 부정적인 평가와 왕으로서 행한 정치나 경제 치적에 대해서는 모두 생략하고 북 왕국과의 한 번의 전쟁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집중합니다. 아비야는 통치기간도 3년 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전쟁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지만 실제로 오늘 본문의 몸통이 되는 것은 아비야의 연설문입니다. 지금 북 왕국의 여로보암이 팔십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남 왕국을 침공하였습니다. 그러자 아비야 왕은 사십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양대 진영이 마주하여 동족상잔의 전쟁을 벌이기 직전에 남 왕국의 아비야 왕이 북 왕국의 방백들을 향해서 연설을 합니다.
이 연설문의 내용은 남 왕국과 북 왕국의 하나님에 대한 관계를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오늘 역대기를 기술한 에스라의 의도는 아비야 왕의 역사적인 치적을 기록하려 함이 아닙니다. 열왕기에는 기록되지 않은 아비야 왕의 연설문을 통해서 남 왕국과 북 왕국의 하나님에 대한 관계가 어떠했는가를 비교하는 것입니다.
먼저 북 왕국의 실정을 8절에서 소개합니다. ‘여로보암이 너희를 위하여 신으로 만든 금송아지들이 너희와 함께 있도다’라고 합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북 왕국의 백성들이 남 왕국의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지 못하도록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킨 신으로 숭배하게 하였습니다.
이어서 9절을 보면 ‘너희가 아론 자손인 여호와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쫓아내고 이방 백성들의 풍속을 따라 제사장을 삼지 아니하였느냐 누구를 막론하고 어린 수송아지 한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를 끌고 와서 장립을 받고자 하는 자마다 허무한 신들의 제사장이 될 수 있도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방에서는 돈만 내면 제사장의 직분을 얻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반면에 남 왕국에 대해서는 10~11절에서 ‘여호와를 섬기는 제사장들이 있으니 아론의 자손이요 또 레위 사람들이 수종들어 / 매일 아침저녁으로 여호와 앞에 번제를 드리며 분향하며 또 깨끗한 상에 진설병을 놓고 또 금 등잔대가 있어 그 등에 저녁마다 불을 켜나니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계명을 지키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두 차이가 어떤 것일까요?
먼저 북 왕국에서 아론의 후손인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쫓아내었다는 것은 하나님과 백성들을 잇는 길을 포기하였음을 뜻합니다. 하나님께 갈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남쪽에서는 성전의 규정을 따라서 아론의 후손 제사장들이 제사를 드리면서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과 백성들을 잇는 길을 내셨는데 그 길을 굳게 붙잡고 있었다는 것으로서 하나님께 가려는 마음을 가지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또 북 왕국에서는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출애굽을 시킨 신으로 섬기도록 하였는데, 금송아지와 예루살렘 성전 법궤 속의 십계명 돌판을 비교해볼 수 있습니다. 십계명의 돌판은 생각하시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반면에 금송아지는 인격성이 제거된 단순한 형상덩어리인데 그것이 출애굽을 시켰다고 합니다.
출애굽은 안 좋은 상황으로부터 바람직한 상태로 빠져나오는 것을 상징합니다. 내가 지금 돈이 없다면 이 상황에서 빠져나와 돈이 있는 상황으로 가기를 원할 때에 금송아지에게 와서 절하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건강이 안 좋아서 건강해지고 싶고, 직장에서 승진을 하고 싶다면 금송아지에게 와서 절하라는 것인데 금송아지에 출애굽을 이루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붙였습니다.
선민들은 가짜와 진짜가 있는데 이들을 나누는 특징이 있습니다. 가짜는 이 땅에서 자기가 원하는 상태로 빠져나가기 위해 여호와의 이름을 부릅니다. 나의 판단과 생각으로 부르는 여호와의 이름에는 하나님의 판단과 인격성은 완전히 제외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11절에서 진짜 선민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여호와 앞에 번제를 드리며 분향하며 또 깨끗한 상에 진설병을 놓고 또 금 등잔대가 있어 그 등에 저녁마다 불을 켜나니’라고 합니다. 이는 곧 성전의 구조대로 이행하고 있는 것인데 이것이 진짜 선민의 삶입니다.
지성소의 얘기는 하지 않았는데 번제에 포함된 것입니다. 지성소 안에 법궤의 모습은 내 마음의 지성소 안에 하나님의 이름만을 붙잡는 것을 뜻합니다. 내가 기쁘고 만족하기 위한 유일한 근거로 하나님만을 붙잡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계속해서 세상 것이 없음으로 인해서 걱정하거나 슬퍼하고 기대합니다. 그러한 나를 알기 때문에 번제단에서 죽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는 것입니다. 그리고 분향합니다. 분향은 곧 붙잡은 이름이 가리키는 존재를 추구함입니다. 떡 상은 그 존재를 추구함으로 인해서 배부름을 뜻합니다. 등대는 하나님으로 배부르게 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판단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왜 우리의 ICBM이 되는 것일까요?
말씀대로 ICBM은 대륙에서 대륙을 넘어가기 위해서 최소한 6,400km를 날아가게 됩니다. 금송아지를 숭배하는 자들은 돈이 없는 상태에서 돈을 가진 상태로 이동하기 위해서 금송아지를 숭배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되 인격성을 제외하고 그 이름만을 찾았던 자들입니다. 참 선민은 돈이 없는 상태에서 돈을 가지려는 상태로 넘어가려는 내 뜻이 잘못 되었음을 깨닫고 십자가에서 죽습니다. 돈이 없는 이 상태가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 뜻대로 이루어지길 바라는 것입니다. 즉 성전의 모습대로 산다는 것은 우리의 뜻이라는 대륙에서 하나님의 뜻이라는 대륙으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돈이 없을 때에 가짜 선민들은 돈을 달라고 기도하지만, 진짜 선민들은 이 돈과 관련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가짜 선민들이 마음을 수평적으로 움직여서 다른 상태로 빠져나가기를 원하지만, 진짜 선민들은 ICBM이 수직상승하는 것처럼 마음을 수직상승 시킵니다. 그래서 대기권 바깥 무중력상태까지 빠져나갑니다. 이는 곧 땅의 것들이 내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이 끊어지는 상태까지 내 마음을 올려 보내는 것입니다.
이 ICBM 로켓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는 것은 이 세상이 나를 당기는 힘이 끊어지는 무중력상태가 될 때까지 나의 죽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올라가게 되면 무중력상태에서의 이동공간이 있는 것처럼, 땅에서 잡아끄는 중력이 끊어진 상태에서 하늘의 하나님과 예수님의 교제에 참여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로 인해 기뻐하시고 만족하시는 것을 내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목표지점에 도달한 ICBM 로켓의 핵탄두가 땅으로 떨어지는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온전히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고 만족하게 되어 내 삶은 하나님의 뜻이 임하는 다른 대륙이 되어버립니다. 이전에는 인간의 욕망에 의해서 본능적으로 판단해서 나의 유익을 찾는 대륙이었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뜻이 임하는 대륙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만나든지 ICBM의 원리처럼 무조건 마음을 수직 상승시켜서 무중력상태로 올라가야만 합니다. 나의 마음을 잡아끄는 이 세상의 모든 힘이 끊어지는 무중력상태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대륙으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내가 사는 물리적인 공간에는 변함이 없지만 내용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대륙으로 옮겨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오늘 본문 마지막에서 실제로 전쟁의 모습을 묘사함으로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로보암이 팔십만 대군을 이끌고 내려와서 부대를 둘로 나누어서 남 유다의 사십만 군대를 앞뒤로 포위하였습니다. 이때에 남 왕국의 사람들은 성전에서 ICBM의 원리를 따라 산다는 아비야의 설교대로 제사장이 나팔을 불며 군인들이 여호와를 향해 소리를 지릅니다.
이것은 단순히 앞뒤로 포위당한 두려운 상황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부르짖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 이야기한대로 성전에서 드려지던 번제가 전쟁터에서 생활화되고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전쟁 상황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었다는 것은 내 마음이 전쟁에서 빠져나와서 하나님께 올라가기 원했음을 뜻합니다. 마음을 붙잡고 잡아끄는 전쟁의 흡입력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를 돕기 위해 제사장이 나팔을 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전쟁에서 나팔을 부는 이유는 사기를 진작시키고 전쟁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제사장의 나팔은 백성들을 움직이기 위한 나팔이 아니었습니다. 전쟁 같은 급박한 상황에서도 마음을 전쟁에 빼앗기지 않는 무중력상태로 올라가기 위해서 성전의 상번제 드리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던 것인데 사십만이 죽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마음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으로 포만감을 느끼게 되자 그 현장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대륙으로 옮겨가게 됩니다. 그러자 남 유다의 군사들이 싸운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여로보암의 군대를 치시게 됩니다. 이들이 혼비백산하여 도망하자 남 유다의 군사들이 쫓아서 승리하게 되어 팔십만 중에 오십만 명을 쓰러뜨리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개인에게 허락하신 일상화 할 수 있는 ICBM입니다. 어떤 상황이 주어지더라도 우리의 판단에 의한 수평면적인 개선을 위해 하나님을 찾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신앙은 북 왕국 이스라엘의 신앙이고 가짜 신앙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ICBM의 원리를 사용해서 십자가를 통해 내 마음을 삶의 문제의 힘이 끊어진 무중력상태인 대기권 바깥으로 올려 보내야 합니다. 나를 잡아끌고 지배하고 고민하고 생각하게 하는 것들을 끊어지게 하는 힘이 바로 십자가인 것입니다. 이렇게 무중력상태로 올라가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시는 것 같이, 기도를 통하여 그 기쁨을 내 기쁨으로 삼는 시간을 가지는 것입니다. 말씀 듣고 기도하며 이런 시간을 가질 때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이 떠지고 등불이 켜질 것입니다. 두려움과 걱정이 없어지고 기존의 문제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판단과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뜻이 임할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언제나 마음을 수직상승해서 하나님으로 배부르고 만족하여 평강을 찾기 위한 싸움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그렇게 찾아진 평강 속에서 떠오르는 생각과 떠오르는 판단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ICBM이 대륙을 넘어 다른 대륙에 떨어지는 것처럼 지금 나의 상황이 다른 대륙으로 옮겨가는 것이고 그 대륙에 내 생각과 판단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자유낙하하면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내 생애의 최고의 무기인 ICBM의 원리를 일상적으로 삶에서 적용하시며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의 ICBM원리로 이 세상을 살아서 언제나 내 본능적 욕구에 의해 움직이던 대륙으로부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대륙으로 옮겨가서 살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