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탑이 있는 학가산 마을(글/윤천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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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딜방아의 단상
옹천에서 예천으로 나가는 길. 2차선 국도는 학가산의 품 속으로 파고 들어 그 발치를 휘돈다. 학가산의 발치를 휘돌아 나가며 그 동북방향으로 길을 따라 펼쳐놓고 있는 마을, 그것이 바로 석탑마을이다.
2005년 1월 말. 석탑마을을 찾아 갔다. 아침 9시 반. 산 속을 뚫고서 오르고 내리는 2차선 도로는 차갑게 얼어 있다. 햇기는 옹천마을 주변을 어른거리고 있을 뿐, 아직 학가산 속 마을까지를 비추어 녹여주고 있지는 못하다. 마을들은 산자락의 경사진 그늘 속에 들어앉아 그저 햇빛 쨍하게 비추이는 아침을 준비 중일 뿐이다.
산촌의 아침은 겨울과 다른 계절이 유별나게 서로 다르다. 다른 계절의 아침은 여명이 밝으면서 시작된다. 어둠이 밀려나면서 생활의 두선거림이 빠르게 마을을 지배해 나가게 마련인 것이다. 그러나 겨울의 산촌은 여명 만으로는 깨어 일어나지 못한다. 어둠이 밀려나는 것만으로 산촌의 하늘이 해빙의 능력을 갖추지 못하는 탓이다. 어둠이 밀려난 곳에도 산그늘의 냉기가 그 위력을 상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빛의 광망이 조금씩 포위망을 넓혀오고, 마침내 산촌의 하늘 위로 노랗고, 하얗고, 붉은 빛으로 촘촘히 짜여진 그물망을 던져 냉기들을 걷어올려 버린 다음에야 산촌은 갑작스러운 활동을 시작한다.
우리가 처음 차를 멈춘 곳은 석탑리 끝 마을, 사람들이 석탑리 본동이라고 말하여 준 곳이다. 정식 이름으로는 구석들. 마을은 산그늘 속에 가라앉아 있고, 개 짖는 소리만 요란하였다. 흙벽돌로 지은 옛 건조실이 이곳 저곳 버티고 서서 그 위용을 자랑하는 마을 한쪽으로 실개천을 따라 시멘트 길이 계곡을 파고 올라간다.
그곳으로 몇 걸음 걸어 올라가 보았다. 길과 동행하며 길게 자리잡고 있는 붉은 흙벽돌 집. 건조실이 위로 솟은 흙벽돌집이라면, 이것은 옆으로 누운 흙벽돌집이다. 그 엷은 황토색의 색감은 아직 산그늘의 냉기 속에 들어앉아 있는 구석들 마을을 조금은 따스한 느낌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화력 건조방법이 일반화됨으로써 이제는 쓰임이 끝난 수직의 흙벽돌 건조실이 여전히 제 모습을 지키고 있는 이유가 궁금하지만,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줄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이 수평의 흙벽돌 집은 누가 말해주지 않더라도 오늘의 쓰임이 어떠한지를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어떤 집의 행랑채처럼 자리잡고 있으면서 퇴락하여 가고 있는 흙벽돌 집, 그 한쪽의 방은 길 쪽의 벽이 무너져 있었고, 다른 벽들은 문도 없이 막힌 모습이었다. 무너진 벽을 통하여 사람들이 들고나는 흔적이 역력하였고, 그 안에는 디딜방아가 시침 뚝 따고 의젓한 모습으로 들어앉아 있었다. 디딜방아는 여럿 보았지만, 현재 쓰여지고 있는 것으로는 여기 이 디딜방아가 처음인 것이 내 경험의 한계이다.
바닥은 깨끗하게 쓸려 있고 다져진 흙의 표면이 매끈한 윤기를 드러내기까지 한다. 바닥 한 켠에 표면을 알뜰하게 쓸어내는데 사용하였을 작은 비 한 자루가 누워 있다. 탈곡이 끝난 수수 목을 이용하여 어떤 촌부가 정성스레 엮었을 비는 이제는 닳고닳아 앙상한 뼈만 남아 있다. 바닥의 한 켠에는 돌 확이 박혀 있다. 폭이 좁은 돌절구를 박아 놓은 것인가? 절구구멍은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소량의 곡물을 빻는데 이용하는 디딜방아임을 알게 해 주는 부분이다. |
돌 확 속에는 나무공이가 날렵하게 내려앉아 있다. 나무공이의 아래쪽이 허옇게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끊임없이 돌 확 속으로 내리 박히곤 하였던 역사의 흔적이리라. 내리 박히고 또 내리 박혀서, 곡물의 작은 낱알을 부수고, 껍질을 벗겨내고 하였을 그 역사는, 스스로의 몸에도 닳고닳은 상처를 만들어 낸 것이다. 어울려 살며 갈등하고 이익을 찾는 모든 행위들이 결국은 서로의 상처를 나누어 갖고, 서로에 대한 연민을 키워 가는 일임을, 상처입고 타격을 당하는 것들에 대한 애정을 스스로의 마음 속에서 길어내지 못한다면 상처 주는 행위는 횡포와 야만 이상일 수 없음을, 상처 입고 타격 당하는 것들에 대한 애정을 상처 주는 자가 그 마음 속에 길어 가질 수 있을 때 상처 주는 자의 행위는 비로소 창조의 역사가 되고 상처받는 자의 인고는 드디어 상생의 훈장으로 변환될 수 있는 것임을, 이 방아공이의 허옇게 속살을 드러내 맨질 거리는 부분은 어떤 웅변보다도 더 커다란 목소리로 증언해 주고 있었다.
방아공이를 움켜 쥔 방아대는 길게 일선으로 뻗어나가다 두 갈래로 갈라진다. 두 갈래로 갈라지는 부분, 가늘고 짧은 나뭇가지를 또 직선으로 교차하며 몸 속에 심고, 그 가늘고 짧은 나뭇가지는 양쪽에 같은 크기로 나란히 박혀 있는 판석 위에 내려앉아 머물러 있다. 판석은 윗부분이 오목하게 처리되어 가로대로 박혀있는 가늘고 짧은 나뭇가지가 제대로 조금씩 구를 수 있도록 만들어 두었다. 양쪽으로 벌려선 두 개의 판석과 가늘고 짧은 나뭇가지는 서로 맞물려 돌며 마찰한다. 두 갈래로 갈라져 있는 방아대의 끝 부분을 누르면 여기 판석들과 가는 가로대의 맞물린 구조가 중심점이 되어 방아공이가 높이 들리고, 방아공이는 비로소 곡물들을 타격할 힘을 갖추어낸다.
권력은 방아공이의 몫이지만, 방아공이라는 권력에게 힘을 부여하는 것은 이 맞물린 구조이다. 그러므로 맞물린 구조는 방아공이의 권력보다도 더 큰 권력을 자체 속에 갈무리해 두고 있는 것일 터이지만, 절대로 앞에 나서는 법이 없고, 절대로 높이 위치하는 법이 없다. 그것은 아래에 있을 때 방아공이에게 힘을 주는 권능을 갖는다. 방아공이와 같은 높이에 이르면, 그 힘은 상실된다. 그러므로 이 맞물린 구조는 늘 아래에 서서 힘을 마련하는 지혜를 갖추어 내었다. 아래 서 있는 자, 뒤에 머물러 있는 자의 가치와 권능을 이보다 더 여실하게 보여주는 것이 또 있을 것인가?
방아대는 끝 부분에서 둘로 갈라진다. 그 부분의 천장에는 굵은 동아줄 두 개가 내려와 있다. 끝을 묶어서 뭉툭하게 처리된 두 줄의 동아줄과 두 갈래의 방아대가 뜻하는 바는 협력이다. 방아대는 한 가닥으로 뻗을 수도 있고, 두 가닥으로 나뉘어질 수도 있다. 하나로 뻗게 하느냐, 둘로 나뉘어지게 하느냐는 만드는 자의 선택일 것이고, 이 지역에 뿌리내린 문화일 것이다. 문화는 선택을 지배한다. 두 갈래 방아대는 백제형이라 하는데, 여기에 들어와 있음은 그것이 한 갈래 방아대 보다 더 인간적 면모를 풍부하게 함축하는 때문일까? 그리하여 그것이 우성문화로써 후대인의 의식을 지배해 온 탓일까? 어쨌든 두 갈래 방아대를 효과적으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3인의 협력이 필요하다. 방아대를 밟는 사람 둘에 돌 확 속의 곡물을 흩어지지 않게 잘 살피는 사람 하나. 작은 디딜방아 하나가 사회적 도구로 읽혀져야 하는 이유이다.
방아대의 저쪽 벽에 기대 세워진 짧은 방망이는 그 제 3의 인물이 안전하게 돌 확 속 곡물을 관리하는데 쓰여진 것이리라. 방아공이의 위협 앞에 돌 확 속으로 손을 밀어 넣는 것은 위험한 일이 아니겠는가?
좁직한 디딜방아의 공간은 잡티 하나 없이 잘 쓸려 있었으므로, 그리고 방아대의 위 아래, 천장에서 내려진 동아줄 끝에 사람의 손이 닿았던 흔적이 역력하였으므로, 그것이 그저 관상용으로 배치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형 문화임을 알게 한다. 학가산 속 마을, 동서남북이 산들로 뒤덮여 일견 고독한 섬처럼 느껴지는 이 외진 곳을 내가 기웃거리는 것은 그 속에서 밖의 세상에서와는 다른 것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하는 탓일 터인데, 이 디딜방아는 그런 점에서 상당히 매력적인 물건이라 할 수 있었다. 학가산 속이라 하여서 다름이 어디 다른 나라, 다른 문화권처럼이야 나타날 수 있는 것이겠는가? 문화적 시간의 더딤 이상일 수는 없는 것이리라. 나는 디딜방아 주변에서 오래 머물렀고, 그것으로 이 아침에 차가운 냉기를 덮어쓰고 있는 학가산 속 작은 산마을 속까지 비집고 들어와 기웃거리는 데 대한 충분한 보상을 받았다는 생각을 하였다. |
버스 정류장에 모인 사람들
디딜방아를 오래 보고 있다가 그 위쪽으로 뻗은 시멘트 포장도로가 어떤 비밀과 맞닿아 있는가 마음이 쓰여 추적추적 몇 걸음 걸어 올라가고 있는데 한 아주머니가 골짜기 속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그 좁직한 시멘트 도로 위에 나타났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기다렸다. 저 위, 시멘트 도로가 끝나는 곳에 무엇이 있는지 알기 위해 추적거리며 걸어 올라가는 것보다 아주머니에게 물어보는 것이 더욱 경제적이리라는 생각을 하였기 때문이다. 아주머니는 잘 차려입은 모습이었다. 한 손에 작은 손가방까지 들고 있으니 미상불 출타하는 모양이 분명하였고, 그것은 시멘트 도로가 끝나는 계곡 속 깊은 곳에 인가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아주머니는 게랄마을에서 내려오는 길이라 하였다. 4집이 사는 마을이라던가? 내려오는데 30분이 걸린다고 하니, 시멘트 도로는 꽤 오래 골짜기를 비집고 상승하는 모양이었다. 날씬한 몸매, 날렵한 발걸음, 가벼운 말씨--- 아주머니인지 할머니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모습이다. 요즘 아주머니들은 나이를 가늠하기 어렵다. 시골마을에서 만나는 아주머니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시골마을에서는 대개는 할머니들을 만나게 되지만, 외양에서 풍기는 모습은 할머니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게 한다.
아주머니는 내 질문에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2차선 국도를 향하면서 가볍고 짧은 답변으로 일관한다. 미상불 긴한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는 태도이다. 산그늘 속에 차갑게 가라앉아 있는 마을 속으로 들어가 개 짖는 소리를 어지럽게 불러일으키면서 산 마을 사람들의 아침을 어지럽힐 배짱은 없었으므로, 취재를 위해서는 요행히 만난 게랄 마을의 아주머니를 그냥 스쳐보낼 처지가 아니었다. 나는 아주머니의 태도는 개의치 않고 옆을 따라붙었다.
겨울의 햇빛은 이제 막 2차선 도로의 서쪽 반절쯤을 밝게 비춰주고 있었다. 나머지 반절쯤은 여전히 그늘 쪽이었고, 마을은 그늘 쪽에 붙어 있었다. 2차선 도로의 서쪽 끝에 만들어져 있는 정류장 대기소는 밝은 태양 빛 속에 투명한 유리막을 통째로 들여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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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랄마을의 아주머니가 2차선 도로의 그늘 쪽 반을 지나 햇빛 쪽으로 들어섰을 때 아주머니가 내려온 계곡 쪽의 시멘트 도로 위를 한 소년이 울면서 달려 내려왔다. 김상후. 아홉 살이란다. 초등학교 3학년 생. 이 석탑마을을 통틀어 유일한 초등학생이라고 하였는데, 내가 제대로 들은 것인지 모를 일이다. 문수 초등학교에 다닌단다. 석탑리에서 20리. 통학버스가 다니겠지만, 그래도 만만치 않은 거리이다. 상후는 게랄마을의 아주머니, 그러니까 장씨 아주머니의 손자란다. 역시 게랄마을의 아주머니도 아주머니가 아니라 할머니였던 셈이다. 아이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손에서 키워지고, 아이의 부모는 여기 살지 않는다고 한다. 석탑리는 어거지로 상후라는 초등학교 학생을 하나 갖게 된 것이다. 불모의 산촌, 노인들만 남아있는 산촌의 현상을 알려주는 부분이다.
게랄마을의 장씨 할머니와 그 손자인 상후의 출현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마을 쪽에서는 한 할머니가 나오고, 길 건너편 점방 안에서는 또 두 할머니가 나왔다. 네 명의 할머니와 소년 하나, 사진기를 들고 설치는 방장과 종이 쪽지에 난필로 끄적거리는 나--- 석탑리 본동, 구석들 마을 앞 버스 정류장은 금방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형상이 되었다. |
오늘은 27일, 안동 장이 열리는 날이다. 장씨 할머니는 요즘 병원에 출입하는 중이었다. 요 전에도 상후는 병원에 가는 할머니를 따라 가겠다고 떼를 썼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던 모양인데, 이번에는 소원을 성취할 수 있게 되었다. 큰길까지 쫒아 내려왔으니 혼자 되돌려 보낼 수 없고, 할 수 없이 데려가야 겠다는 장씨 할머니의 말을 들으며 상후는 비로소 우는 소리를 멈추었다. 보따리를 여럿 해서 이고 들고 정류장에 나온 할머니는 영해 박씨라 하였다. 연세는 60. 딸이 두부, 묵 같은 것을 해달라고 해서 만들어 갖고 안동 딸네 집에 가려고 나선 길이었다. 도토리 묵이냐는 물음에 할머니는 메밀묵이라고 하면서, 도토리묵보다는 메밀묵이 더 낫다고 하였다. 서대만 쑤어도 스무 모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인데, 그것이 많이 나는 것인지 아닌지 나로서는 요량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저 빨간 보자기, 노란 보자기에 쌓인 두부와 묵을 생각하며 군침을 흘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장씨 할머니와 박씨 할머니의 출타는 장날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반면에 일찍 나와 점방에 앉아 있다가 시간 맞춰 정류장에 모습을 보인 다른 두 할머니는 장날을 택하여 길을 나섰다고 할 수 있었다. 튀밥도 튀기고, 고추도 빻고, 기름도 짜겠다는 것이었는데, 미상불 장 구경을 하는 것도 빼 놓을 수 없는 목적일 터였다. 햇살은 2차선 도로의 중간선을 지나 동쪽으로 영역을 넓혀가고, 점방 지붕 어림에 이르러 있었다. 그러나 마을의 중심부는 여전히 산그늘의 냉기 속에 가로놓여 있었다. 버스 정류장의 이마 위에는 석탑리라는 글자를 중앙에 두고 한쪽에는 영주, 다른 한쪽에는 옹천이라는 글씨가 씌여져 있었다. 시간은 10시를 향해 움직여 가고, 정확히 10시가 되자 영주 쪽으로 표시된 곳으로부터 버스가 와서 섰다. 할머니들과 상후가 우르르 타고, 버스는 옹천 쪽을 향하여 떠나 갔다. 버스 안에는 10명의 얼굴이 보였다. 상후와 어떤 남자 어른 하나를 제외하고, 나머지 승객들은 모두 할머니 들이었다. 버스는 하루에 세 번 들어 온다고 한다. 첫차가 아침 10시, 두 번째 차가 오후 4시, 마지막 차가 오후 6시. 안동에서 들어온 차는 고개 너머 내성천 이쪽에 서서 기다리다가 시간을 맞춰 돌아 나온다. 내성천 건너편에는 영주에서 버스가 들어오고, 그 사이에는 내성천 다리가 놓여져 있다. 상후와 할머니들이 떠난 정류장에는 방장과 나 만이 남겨져 있다. 햇살은 길 건너평 점방의 지붕 위에 밤새워 내렸던 냉기를 녹이고, 그것들은 슬레트 지붕의 골을 타고 흘러내려 똑똑 바닥의 시멘트 위에 떨어져 화음을 만들며 깨어져 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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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탑과 석탑사
이 마을 이름은 석탑으로부터 왔다. 구석들이 자리잡고 있는 골짜기 안, 석탑과 구석들은 서로 그 한 끝을 장악하고 있다. 그 사이에는 또 석탑사가 놓여진다.
석탑과 석탑사는 표고농장으로 포위되어 있다. 검은 그늘망을 덮어 씌운 표고 하우스들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널려 있다. 2차선 길 가에는 쓰임이 끝난 폐 골목들이 담을 이루듯 쌓였다. 석탑 주변에는 새로 마련해 놓은 골목들이 또 줄을 지어 벌려 서 있다. 때가 되면 그것들도 몸 속에 표고 종균을 심고 또 하우스 속에 세워 지리라. 석탑은 5층이다. 꼭대기에는 작은 비석돌을 세웠다.
“이 적석탑은 신라 시대 이후 일반화되어 있는 유형에서 벗어난 것이다. 이런 유형은 의성 안평면의 방단식 석탑이나 경남 산청군 극서면 화계리 전구형 왕릉 적석유구에서 볼 수 있다. 이곳 북후면 방단식 석탑은 자체만으로 축조 연대나 성격을 분명히 알 수 없으나 의성과 산청의 적석유구와 비교하면 고려시대 또는 조선 초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측된다.”
석탑 안내판의 기록 중 일부이다. 석탑은 경북 문화재 자료 343호로 지정되어 있다. 석탑의 바깥으로는 4방 돌아가며 초파일 연등이 매달려 있다. 초파일이 지나면 연등은 될 수 있는 한 빨리 거두어져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인데, 다른 사람은 어떤지 모르겠다. 어쨌든 여기 석탑에서는 때 지난 연등이 탑의 단일한 미학을 해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석탑의 맨 아래 단은 가로 세로가 약 18걸음씩 되는 정 4각형의 몸체를 하고 있다. 그저 자연석을 가져다 쌓아놓은 형상으로, 높이는 약 1미터 50센치 정도 된다. 그 위로는 조금 들여서 쌓여진 2층이 있고, 또 그 위에 조금 들여서 쌓여진 3층이 있다. 그렇게 모두 비슷한 높이를 가진 5층의 구조를 갖추고 있는 것이 이 석탑이다.
오래된 느티나무 하나가 한쪽에 서서 석탑을 지켜보고 있다. 그것은 오랜 세월을 석탑과 함께 해 온 이 골짜기의 파수꾼이다. 주변에는 석탑사가 있지만, 이 절은 위쪽 골짜기 한 켠에 있던 것이 옮겨온 것으로, 석탑을 원래부터 지키고 있던 것이라 하기 어렵다. |
석탑사에는 스님 한 분이 있다는데 출타 중이었고, 처사 한 분이 우리를 맞았다. 요사채의 뜨락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신발들로 보아 처사는 가족을 거느리고 살며 절 집 일을 보아주는 모양이었다. 이 살림집 외에 석탑사는 원통전, 범종각, 산신각으로 이루어진다. 범종각과 산신각이 새로 조성한 것임을 염두에 둔다면 살림집과 원통전 만이 석탑사의 역사를 담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살림집의 벽기둥에는 입춘대길만사형통이라는 한문 글씨가 나붙어 있었다. 처마 밑으로는 손가락 크기 만큼씩이나 패인 낙수물 구멍이 일선으로 일정한 간격을 지으며 뻗어나가고 있었다. 그 낙수물 구멍의 선을 조금 연장한 지점에 원통전은 서 있었다. 살림집과 원통전은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건물이기는 하지만, 둘 다 작고 아담한 규모였다. 원통전 안에는 한쪽 벽에 정의무적이라는 한문 편액이 달려 있는 것이 이색적이었다. 산신각은 범종각 앞에 있었는데, 무너져서 뒤쪽으로 옮겼다고 하였다. |
감나무골 이야기
석탑사를 떠나 옹천 쪽으로 나오다 보면 왼쪽으로 새터마을이 보이고, 그로부터 조금 지나면 오른 쪽으로 감나무골이 보인다. 2차선 길은 깨끗하게 비어 있다. 10시의 안동 버스가 지나간 후, 이 길을 지나는 차는 한 대도 보지 못하였던 듯 하다. 햇살은 골짜기 한가운데로 비집고 들어와, 골짜기 안의 도로는 대부분 태양 빛 속에 놓여져 있다. 도로 위에서 보는 골짜기 안 그늘과 양지의 대비는 너무 극명하다. 전면에는 첨탑을 올려 세운 학가산의 정상부분이 명암이 뒤섞인 산기슭과 부연 안개 조각을 뒤집어 쓴 채 높이 가로놓여 있다.
새터 마을에는 이제 막 햇살이 사선으로 비쳐든다. 가파른 산기슭의 불룩 나온 능선을 이용하여 자리잡은 마을이다. 마을이 자리잡느라고 풀과 나무가 제거된 능선이 너무 가파른 각도를 그리고 있다. 군데군데 능선의 경사면을 문지르고 들어가 자리잡은 집들이 인간의 악착같은 삶을 증거하여 주는 느낌이다.
새터마을 아래, 계곡 바닥을 흐르는 시내는 하얗게 얼어 있다. 나이를 확인하기 어려운 장년의 사내가 얼음장을 깨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고기라도 잡으려는 모양이다. 새터 마을 표석이 서 있는 곳에 한 노인이 돌아 서 있다. 맹인인 모양이다. 새터마을을 멀리 보고 지나쳐 가는 우리를 맹인이 뒤따라 온다. 맹인은 고개를 약간 옆으로 돌리고, 허리는 빳빳히 펴고, 지팡이로 길바닥 한켠을 두드리며 걷는다. 이 아침, 맹인은 학가산 속을 관통하는 도로를 어렵게 걸어 어디로 가려하는 것인가? 새삼스럽게 그의 목적지가 궁금하여 진다. 그러나 나는 내 마음 속에 이는 의문을 아예 무시한다. 인간에게 진실로 목적지는 있는가 하는 엉뚱한 상념이 나를 사로잡기도 한다. |
지금 우리의 목적지는 감나무골이다. 새터는 들어갈 생각이 나지 않았다. 너무 가파른 경사면에 위태롭게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인가? 막 마을을 사면으로 비추기 시작한 햇살의 기운이 아직 마을 안을 두드려 깨우지 못하였다고 판단한 때문일까?
10시가 넘은 시각이었지만, 산촌에서는 그것은 여전히 너무 이른 시간이라는 느낌이다. 그러한 느낌이 새터에서만 주어지는 것이고, 감나무골에서는 상황이 다를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감나무골은 새터보다는 크고 넓은 마을이다. 감나무골은 넓게 열리는 산기슭을 이용하여 집들이 수평으로 펼쳐져 있다. 감나무골 안에는 감나무가 많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감나무골이라는 이름이 어디 생으로야 붙여졌을 것인가? 감나무골 안에 감나무는 많았으나 사람들은 만나기 어려웠다. 20여호의 집이 수평으로, 수직으로 배열되어 있었지만, 집들은 텅텅 비어 있다. 폐허가 되어 있는 집도 여럿 있었고, 주인이 출타하고 없는 집도 많았다. 우리가 주목한 집, 감나무골의 제일 위에 있고, 대나무가 뒤 울을 장식하고 있는 집도 비어 있었다. 장날이라서 장에 간 노인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마을의 위쪽 논을 돌보러 나온 할머니는 질문이 많은 나를 이상하게 보았는지 별 대꾸를 해 주지 않았다. 마을 골목길에서 만난 할아버지는 빈 집을 기웃거리는 우리를 감시의 눈초리로 쳐다보고는 들어가서 말도 건네지 못하게 하였다. |
우리는 마을 아래 쪽으로 돌아나와 예천에서 시집 오셨다는 박씨할머니를 붙들고 겨우 제대로된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가 있었다. 19세에 시집와서 50년 동안 이 마을에 살았다는 박씨 할머니였다. 영감님은 8년 전에 타계하시고, 아들 3형제는 외지에 나가 산다고 하였다.
“아들이 용돈 주는 것 가지고 살아요.”
박씨 할머니의 말이다.
“아들네 가서 사는 것은 식모 신세지요. 가는 날부터 편치 못하게 돼요. 여기 집 팔고, 땅 팔고, 다 팔아 올라가서 써 버리고 맨 몸으로 돌아 온 사람도 있어요. 돌아와선 남의 집 살이를 하게 되지요. 여기 촌에 그런 사람들 많아요.”
할머니가 아들네에 가지 않고 혼자서 감나무 골에 사는 이유였다. 한참 번성하던 때는 15-16호가 살던 감나무골 이지만, 지금은 여남은 집이 사는 것이 고작이다. 감나무골, 새터, 구석들, 구름실, 안냉골, 게랄, 천골 등 일곱 골로 이루어진 석탑리가 다 그런 상황이라 하였다.
“천골은 이제 한 집도 안 살아요.”
비어 가는 산촌의 오늘의 상황을 감나무골이라 하여서 어디 피해갈 수 있는 것이겠는가?
“우리 마을에서 제일 나이 적은 이가 65살이예요.”
할머니가 덧붙였다. 마을 안 여기 저기서 개들이 짖는 소리가 들린다. 사람보다 개가 많은 마을이라는 느낌이 들기까지 하였다.
할머니를 하직하고 나와 길 가에 새로 지은 벽돌집에서 또 다른 할머니를 만났다. 68세의 김씨 할머니.
“전체 아홉 집이 사는가?”
김씨 할머니가 말하였다.
“사람은 11명 사나 그래요. 다들 한 사람씩 살고 우리 집이 둘, 또 도시서 들어 온 조씨 성 가진 사람이 둘. 조씨 성 가진 사람은 젊지요. 50대지요. 여기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어요. 농사 지을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예요.”
김씨 할머니는 당신은 김해 김씨이지만 감나무골은 경주김씨 마을이라 하였다. 우리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도 김씨 할머니는 지게를 찾아 어깨에 메고 있었다. 나무 해 들이는 것이 당신의 소일거리라는 것이었다. |
학가산 속 사람들
산은 사람을 품고, 사람은 산에 기대 산다. 학가산 같은 넉넉한 품을 가진 산은 많은 사람들을 그 가슴에 품어 살게 하여 주게 마련이다. 그러나 산이 사람을 품어 주는 것은 언제나 변할 수 없는 일이지만, 사람이 산에 기대 사는 것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할 수 밖에 없는 일이다. 사람이 변하기 때문이다.
산 속에 산다는 것은 자연이 허용하는 대로 살아가기를 선택한 것이다. 자연의 한계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삶에 대한 더 큰 욕망을 갖는다면, 사람은 절대로 산에 기대서 살아갈 수가 없다. 욕망은 사람을 산으로부터 떠나게 하고, 도시 주변을 기웃거리게 한다. 도시 주변이라고 하여 욕망을 만족시킬 수 있는 뾰족한 수단이 지천으로 널려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가능성만은 누구에게나 주어질 수 있는 것이고, 이 가능성이 사람들을 부추기고 끌어당기는 것이다.
학가산 속 사람들. 학가산은 여전히 동 서 남북으로 많은 마을을 품고 있다. 그러나 학가산 속 산촌들은 이제 많은 상처를 안고 있다. 사람들이 떠나는 마을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 점을 석탑리의 여러 마을들도 여실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산은 이제 등산의 대상일 뿐이지 현대인의 삶터가 될 수는 없다는 선언인 것인가?<안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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