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 잡는 특무대장 김창룡 제11회 》
11. 불발로 끝난 인민해방군 사건
인민군 해방군사건은 부산ㆍ경남지역을 중심으로 남한에서 암약하고 있는 남로당 간첩들과 군인 신분의 간첩들이 신생정부를 폭력으로 전복하기 위해 준비하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다.(14연대 반란사건과 별개)
그 사건을 일으키기 위해 군부 책임자로 여수 14연대장 오동기 소령이 무기, 탄약 등을 확보하는 책임을 맡아 동서남북으로 뛰던 중, 정보망에 걸려 사전에 체포되었다.
오동기 소령은 14연대 반란사건이 발생하기 2주 전 10월 5일에 해임되고 인민해방군 사건에 가담한 죄로 체포되어 10년 징역형을 받고 복역중 6.25 전쟁 시 인민군에 의해 석방되어 그들에게 협조하였으나 북으로 가지는 않고 서울에 남았다가 9.28수복후 특무대에 의해 다시 체포되어 형을 살았던 기구한 운명이었다.
그는 1903년 경기도 이천에서 출생하여 서울 중동학교 야간부를 다니다가 중퇴하고 중국으로 건너가 낙양의 오패부(吳佩浮) 부대에 입대하여 군관교육을 받고 소위로 임관여 소대장을 하다 중국 중앙군 18군으로 옮겨 포병소령이 되고 대대장으로 항일전쟁에 참가하다 해방을 맞아 귀국하였다.
귀국 후에는 광복청년단 훈련부장으로 추대되었다가 경비사관학교 3기로 입교하여 소위로 임관하였으며 임관 후에는 남로당 군내 책임자인 김종석. 오일균 등과 가까이 지내면서 초고속 승진을 하여 동기생인 김지회, 홍순석 등이 중대장을 할 때 그는 48년 7월에 14연대장으로 부임했다.
그 14연대에 김지회, 홍순석, 지창수 등 반란의 주모자들은 연대장 묵인하에 병사들에게 밤마다 적기가를 가르치고 좌익사상을 주입시켜 빨갱이로 물들여 놓았던 것이다.
#인민해방군 사건은 북조선의 김두봉과 허가이로부터 지령을 받고 경남지역에서 활동하던 한인식이 1947년 경상남도 군사위원회를 조직하여 총참모장으로 취임하고 부산ㆍ진주ㆍ사천ㆍ남해 일대에 연대단위를 조직하였다.
마치 군대조직 같이 정찰대, 선전선동대, 전투대 등으로 조직을 편성하고 47년 10월 말까지 정예요원 830명과 폭동에 동원할 일반시민 3만 6천명을 획보하였다.
이렇게 준비를하던 중에 부산 경찰청에 탐지되어 주모자 등 400여명이 검거되었는데, 국방경비대 요원 45명도 가담한 것으로 판명되어 오동기소령이 체포되고 행동대원 부사관들도 함께 체포되어 전원 실형을 선고 받았다.
1945년 해방은 되었지만, 한반도 남쪽은 빨갱이들 때문에 하루도 마음 편하게 살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