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과 고요의 시간
2020. 12. 백란주
해가 저물면 도시는 화려한 불빛을 갈아입고 다시 태어난다. 도심 한가운데에 우뚝 솟아 화려한 불빛을 비추는 고층 빌딩과 오색찬란한 네온사인, 촘촘히 서 있는 가로등과 자동차 전조등까지, 도시의 밤은 빛의 잔치가 펼쳐진다. 특히 한 해를 보내는 아쉬움과 새해를 맞이하는 설렘으로 들뜨는 성탄절과 연말연시가 다가오면 거리는 빛이 부리는 마술의 세계로 빠져든다. 그렇게 우리가 빛이 펼쳐 보이는 환상의 세계를 즐기는 동안, 촘촘한 꼬마전구와 전선을 온몸에 휘감고 서 있는 가로수의 기분은 어떨까?
겨울에 온도가 5˚C 이하로 내려가면 나무는 광합성과 증산 같은 생리 작용을 거의 하지 않는다. 잎을 모두 떨어뜨리고 휴면 상태를 맞게 된다. 곰이 겨울잠을 자듯 11월~2월에는 나무도 휴식 시간을 갖는다. 그런데 국립산림과학원의 조사에 따르면 가로수에 설치하는 전구의 밝기는 평균 300럭스(lx) 내외이고, 발열 온도는 28˚C 정도라고 한다. 이것은 휴식기를 맞은 나무에는 너무 밝고 뜨거워서 엄청난 스트레스가 된다.
이 빛은 식물 내부의 생체 리듬을 어지럽히고, 밤을 낮으로 인식하여 낮에 일어나야 할 광합성을 하게 만든다. 밤에 일어나야 할 생리 반응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생체 대사 균형이 깨진다. 그래서 나무가 겨울을 나고 봄을 대비하는 데 필요한 적응력이 약해진다.
인공 불빛의 피해는 사람에게도 이어진다. 우리나라의 도시에 사는 아이들은 시골 아이들보다 안과를 자주 찾는다. 세계적인 과학 잡지인 《네이처》에는 밤에 항상 불을 켜 놓고 자는 아이의 34%가 근시라는 연구 결과가 실렸다. 불빛 아래에서 잠이 드는 데 걸리는 시간인 수면 잠복기가 길어지고 뇌파도 불안정해지기 때문이다.
사람의 몸에는 멜라토닌이라는 생체 리듬 호르몬이 있다. 멜라토닌은 강력한 산화 방지 역할을 하며 노화를 억제하고 면역 기능을 강화한다. 이 멜라토닌이 부족해지면 면역 기능이 떨어지고 암에 걸릴 수도 있다. 2004년 영국 런던에서 열린 ‘국제아동백혈병학술회의’에 참가한 학자들은 야간 조명이 암을 발생시킬 수 있다고 경고했다. 야간 조명이 세포의 증식과 사멸을 조절하는 멜라토닌 분비를 방해해서 암과 연관 있는 유전 변이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생물체가 건강하게 살아가려면 햇빛 못지않게 어둠과 고요의 시간도 필요하다. 어둠 속에서 편히 쉬어야 다시 생기를 얻을 수 있다. 어둠의 시간이 있어야 박꽃이 뽀얗게 피어나고 달맞이꽃이 노란 꽃잎을 연다. 밤을 보낸 곤충은 아침에 이슬을 털고 힘차게 날아오르고, 사람도 깊은 잠을 자야 다시 일어설 수 있다.
그러나 도시의 밤은 더 이상 어둡지가 않다. 온갖 조명과 네온사인과 가로등 빛이 반사되어 붉게 달아오른 하늘에서는 별빛 한 점 찾아볼 수가 없다. 별 볼 일이 없는 밤, 전등 스위치를 끄고 어둠 속에서 가만히 기다리면 우주 저편에서 수십 광년 전에 잠시 반짝였던 불빛이 조용히 등 하나를 내걸어 줄 것이다.
-박경화, 「도시의 밤은 너무 눈부시다」 전문-
십일월 끝자락, 오후 햇살은 컨디션이 좋은지 아스팔트길에 금빛 가루를 뿌린 듯 반짝거린다. 봄 길이 꽃길로 유혹했다면 늦가을 길은 보석길이 되어 다시 설레게 한다.
다른 날과 별반 다르지 않는 컨디션이었다. 교문 앞 지킴이 아저씨께서 체온을 잰다. 체온이 높다며 다시 잰다. 작은 학교다보니 어느 때부터인지 일주일에 한번 방문하는 나의 컨디션을 알 만큼 반가운 거리에 있다. 37.5도부터 출입제한인데 37.4~5가 나온다고 한다. 별다른 증상이 없었기에 아침 체온을 체크하지 않고 나온 나의 실수를 인정했다. 담당선생님과 통화를 한 후 보건실에서 발열체크를 하기로 했다. 보건실까지 가는 중에 혹여나, 하는 마음으로 다가오는 아이들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다. 잠시 격리실 같은 곳에서 혼자 있었다. 10분 후 체크하니 37.3이 나왔다. 1교시 수업한 후 다시 체크하기로 했다.
혹여 몰라서 일회용 장갑을 끼고 아이들과 수업을 했다. 안기기 위해 다가오는 아이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무증상 환자도 있다고 하니 괜히 걱정이 되었다. 2교시 수업하러 온 아이들을 두고 보건실로 내려갔다. 37.5가 나왔다. 2,3교시 수업을 못했다. 보건선생님께서 짐을 챙겨 주었다. 아이들에게 아무런 설명도 하지 못하고 피하듯 학교를 나왔다.
차를 한적한 곳에 세우고 ‘코로나 증상’에 대해 검색했다. 금요일 오후가 되면 무사히 일주일이 지나갔다는 증명서처럼 내게 찾아오는 몸살기운으로 생각했다. 그럼에도 몸이 조금 더 아픈 느낌이 든다. 약국을 방문하기도, 병원을 방문하기도 망설여졌다. 만약 확진자라면 피해를 키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집에 있는 딸아이에게 감기몸살 약을 부탁했다. 상황을 설명했더니 아이는 말한다.
“혹 모를, 다른 사람 피해를 줄이는 것이 최선책이니 일단 먼저 보건소에 문의해보세요”
담당자는 전화로 나의 동선을 확인했다. 비록 확진자와 동선이 겹치지 않지만 주말에 외부 다녀온 것, 아이들과 만나는 일 등 보건소에서 의논 후 전화를 주겠다고 했다. 아이들 수업을 하니 일단 선별진료소에 와서 검사를 받으라고 한다. 분명 이 계절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나의 컨디션에 따른 감기몸살 같지만 응할 수밖에 없었다. 결과 나올 때까지 집에서 마스크를 착용하라는 당부를 한다.
별일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바이러스라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만약 양성으로 나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이 앞섰다. 수업 다니는 학교에 설명을 해야 하며 문어발처럼 선별진료소를 찾아가야할 숫자를 상상하다보니 아찔했다.
긴장감을 풀기 위해 “나 선별진료소 갔다 온 여자라서 저녁밥은 못함. 시켜먹기!” 저녁준비를 거부했다. 스무 살이 넘어도 여전히 모닝뽀뽀를 하는 작은딸은 “만약 엄마가 확진자면 나는 100퍼 확진자라서 엄마랑 같이 입원할 테니 너무 걱정마세요” 위로를 해준다.
다음날 아침, 음성통보를 받을 때까지 애써 선별진료소 갔다 온 여자라고 위로 아닌 위로를 했지만 그 무거운 기분은 표현할 수가 없다. 불가피한 외출 외에는 하지 않는 편인데도 확진자가 되었을 때 받게 될 불편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오이 밭에서는 신을 고쳐 신지 말고, 자두나무 아래에서는 갓을 고쳐 쓰지 마라’고 했던가. 요즘에는 사람들 앞에서 기침만 해도 괜히 민망해질 때가 있다. 지나가는 감기몸살이었는데 코로나라는 두려움은 나를 위축하게 만들었다. 나로 인해 펼쳐질 시나리오를 밤새 각색했다.
중학교 배치고사를 앞두고 있었다. 교장선생님의 호출이라는 말을 듣고 교장실로 갔다. 시골중학교라서 인근의 여러 초등학교 아이들이 모인다. 교장선생님께서 우리들 중에서 배치고사 1등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당부를 전했다.
교장실청소를 하던 내게 교장선생님께서 만약 1등을 한다면 소원 하나 들어주겠다며 열심히 하라고 하였다. 나는 학교선생님들이 그리 어렵거나 무섭지 않았다. 교장실을 갔다 온 친구들은 목표를 정하고 열심히 했을 것이다. 그때의 나는 공부에 대한 열정보다 스포츠에 대한 관심이 더 많았기에 배치고사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독감이 유행했다. 유행이란 단어에 민감한 나의 몸이 그냥 지나칠 리 없다. 시험을 앞두고 열이 났다. 우등상보다 개근상을 더 중요하다고 가르쳐주었던 아버지, 어른이 되었을 우리들이 가졌으면 하는 성실, 책임에 대한 아버지의 기준이었을 것이다. 담임선생님께서 “내일 배치고사는 치지 말고 그냥 초등학교 성적으로 대신하자.” 하셨다. 내일 시험을 치러 가겠다고 했다.
약을 먹었지만 시험을 치는 동안 열이 나고 눈앞이 뜨거운 느낌, 엄마는 학교 앞 매점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지금 생각하면 이 또한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 다른 사람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하지 못한 무지였고 배려가 부족했다. 시험을 치겠다는 개인의 정정당당함 앞에서 다수를 위한 정의로움을 놓쳐버렸다. 엄마는 버스를 타고 오는 동안 시험에 대해서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괜찮냐고만 물었다. 집에 다 와 갈 즈음 결국 열을 이기지 못하고 코피가 쏟아졌다. 당황한 엄마는 버스에서 내려 엄마 옷으로 닦았다. 지혈이 되고 엄마랑 집으로 오는 길이 춥지 않았다.
유행하는 무엇들을 쉽게 비켜가지 못했다. 면역력이 약함을 알기에 조심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을 때, 나는 발목을 잡힌다.
연말이 다가옴을 알려주는 네온 불빛이 아파트 입구 화단에도 찾아왔다. 휴식을 해야 할 그들의 쉼이 사라졌다. 어느 순간부터 나무에 드리운 전구 불빛은 그리 달갑지 않았다. 올해부터 우리 아파트 화단에도 네온 불빛이 반짝거린다. 문득 그들에게 처음 이 빛이 닿았을 때 신종바이러스로 인식되지 않았을까. 백신치료제를 개발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과 달리 나무는 백신 개발이 아닌 인간들의 인식만 바꿔주면 된다고 간절히 원할지 모른다.
소나무 재선충으로 숲이 몸살을 앓았을 때, 내 일이 아니기에 애타지 않는 관심이었다. 어쩌면 저들도 인간에 드리운 재앙이 그리 애타지 않을지 모른다. 내 일이 아니면 느끼는 체감온도는 다르기 때문이다. 변종바이러스가 일어난다지만 인간의 지나침이 사라지면 바이러스도 거리를 둘지 모른다. 나무에 드리운 전구만 제거하면 그들이 겪는 신종바이러스는 차단되듯이.
자연은 인간의 관점으로 더하거나 빼지 않고 그 모습대로만 바라보길 원할 것이다. 햇빛 못지않게 어둠과 고요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에 나는 공감한다. 열심히 일만 한다고 성공하는 것이 아니듯 돌아보는 쉼이 있어야 앞으로 나아갈 동력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햇빛만 생물을 살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겨울의 쉼이 있어 봄의 화려함이 우리를 반기듯 지금 코로나라는 동면이 우리 인간들에게 봄을 알려주기 위한 가르침일지 모르겠다.
스포츠 경기도 한 시즌이 끝나면 휴식기를 갖는다. 그동안 연봉협상도 하고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기도 한다. 가끔 자신을 돌아보는 어둠과 고요의 시간을 거친 2군선수가 경기를 지배하기도 한다.
그들이 거친 어둠이 빛으로 향하는 간절함이 되었듯이, 지금 우리가 겪는 연봉협상의 시간, 바이러스와 사투하는 시간이지 않을까. 인간이 얼마나 자연에 대해 함부로 했는지를 돌아보며 침묵하는 시간을 갖게 하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어둠이라고 믿는다.
잃어보면 안다고 나의 삶에서 가치로운 것이 무엇인지 하나씩 경고등 앞에서 우리는 말한다. 우리의 지나침을 고백한다. 3초간의 노란불이 초록불과 빨간불 사이에서 깜빡여주는 쉼을 생각해볼 때다. 생물체가 건강하게 살아가기 위한 어둠과 고요의 시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