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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 24일 주일 메시지
누가의 두 번째 하나님 나라 이야기 13
제목: 구도(求道)와 선동(煽動)
사도행전 13:1~52
설교 목적
안디옥교회의 파송을 받아 선교사역의 길을 떠난 바나바와 사울이 처음 도착한 구브로와 그 후에 도착한 곳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일어난 일을 다루는 본문이다. 이 본문을 읽으면서 바나바와 바울이 느꼈을 심정을 생각해 보고 진리를 대하는 여러 사람의 태도를 비교해 볼 것이다. 이를 통해 오늘 우리들이 구도자로 살 것인지, 아니면 선동되어 살 것인지를 반성하고 결단하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설교 개요
1. 안디옥교회의 파송선교사, 바나바와 사울
2. 구브로에서 만난 구도자 서기오 바울
3. 비시디아 안디옥의 회당에서 설교한 바울
4. 유대인들이 예수를 배척한 까닭
5. 구도할 것인가, 선동될 것인가?
6.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1. 안디옥교회의 파송선교사, 바나바와 사울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안디옥교회가 두 사람의 선교사를 파송한 이야기입니다. 안디옥교회는 예루살렘에서 박해를 받은 제자들이 모여 다시 한번 부흥을 일으킨 교회입니다. 그 도시에서 제자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도시민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초기교회 시대에 기독교 신앙을 널리 전파하는 일에 안디옥의 신자들이 큰 기여를 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예루살렘에서 태어나서 안디옥이라는 요람에서 자라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안디옥은 헬라화된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가 출현하던 시대에 오랫동안 중요한 역할을 한 결과 ‘기독교의 요람’(The Cradle of Christianity)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안디옥(Antioch)의 도시 이름은 안티오쿠스(Antiochus)라는 사람의 이름을 따라서 지은 것입니다. 안티오쿠스는 셀류쿠스 니카노르1세의 아버지입니다. 그리고 셀류쿠스는 알렉산더 대왕을 따르던 장군 중에 한 사람입니다. 고대에 안디옥이라는 이름을 가진 도시는 여덟 개 정도가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 미국에는 안디옥(Antioch)이라는 이름의 도시가 22개나 있습니다. 이처럼 같은 이름을 가진 도시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송도(松島)가 두 곳 있습니다. 부산에는 송도해수욕장이 있고 인천에도 송도국제도시가 있습니다.
안디옥이라는 도시가 많았기 때문에 그 이름을 구별하여 불렀습니다. 바나바와 사울을 선교사로 파송한 안디옥교회가 있는 도시를 ‘시리아 지방의 안디옥’(Antioch of Syria)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제1차 선교여행에서 방문했던 안디옥을 ‘비시디아 지방의 안디옥’(Antioch of Pisidia)이라고 부릅니다.
안디옥교회의 신자들은 본래 선교활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온 이후로 계속 복음을 전했는데, 동족인 유대인뿐 아니라 헬라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안디옥에는 유대인과 헬라인들로 구성된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 교회에는 성경을 가르치는 다섯 사람의 교사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두 사람을 뽑아 다른 지역에 있는 동족에게 보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자고 교회는 결정했습니다.
일제 강점기 시절을 상상하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겠습니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국내에서 멀리 만주로 달아난 사람들이 있다고 합시다. 만약에 그들에게 국내의 어떤 갑부가 독립운동자금을 매우 많이 보내왔다고 한다면, 그들은 그 자금을 다른 지역의 운동가들과 나누고 싶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독립자금의 일부를 간도나 상하이(上海), 나아가 하와이에까지 나누어 줄 사람을 선정할 것입니다. 그런 것처럼 예루살렘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안디옥에 모여 큰 부흥을 경험했을 때, 사방에 흩어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생각났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도 이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물은 언제나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하나님의 부흥도 언제나 충만한 곳에서 흘러내리는 법입니다. 말씀이든 물질이든 사랑이든 믿음이든 충만해지면 넘쳐 흘러갑니다. 그것이 선교의 역사입니다. 안디옥에서 일어난 충만의 역사가 이제 바나바와 사울이라는 전령을 통해 사방에 흩어진 유대인들에게로 전달되려고 합니다. 그것이 안디옥교회의 선교입니다. 이 선교를 위해서 안디옥교회는 선교사들에게 경비를 제공할 것입니다.
누구든지 어떤 교회든지 무엇이든 충만하게 되면 흘러 넘칠 것이고 그것을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올 것입니다. 저는 지난 7년동안 은혜의 복음과 하나님의 경륜을 연구하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이제 첫번째 책을 출판했습니다. 이것은 제 안에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말씀이 충만한 증거입니다. 앞으로 더 차고 넘치기를 소원합니다.
또한 우리 교회는 선교에 대한 열정이 가득해졌습니다. 지금까지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선교사들을 위한 후원을 중단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 결과 작년에 우리는 가장 많이 선교후원에 동참할 수 있었습니다. 무릇 충만하면 넘치는 법입니다. 우리 모두 어떤 영역에서든지 무엇이든지 선한 것으로 충만하여 넘치고 나누는 일에 동참합시다. 그것이 바로 선교의 역사요 방법입니다.
2. 구브로에서 만난 구도자 서기오 바울
바나바와 사울은 가장 먼저 바나바의 고향(행 4:36)인 구브로 섬으로 복음을 전하러 갔습니다. 사람이 자신에게 일어난 가장 기쁜 일을 먼저 가족이나 친척에게 알려주고 싶을 것입니다. 이 선교사역의 인도자인 바나바는 먼저 자신의 출신지 구브로로 갔습니다. 구브로는 지중해에 있는 섬인데 키프로스 또는 싸이프러스(Cyprus)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바나바는 구브로 출신이면서 레위인입니다. 본래 레위인은 성전에서 일하던 경건한 가문입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고향에 와서 유대인의 회당을 찾아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구브로에서 바나바 일행이 선교활동을 하면서 그 섬의 총독을 만났다고 누가는 소개합니다:
6.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Paphos)에 이르러 바예수(Bar-jesus)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인 마술사를 만나니
7.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Sergius Pauls)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8. 이 마술사 엘루마는 (이 이름을 번역하면 마술사라) 그들을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
사도행전 13:6~8
여기서 총독은 그 섬의 최고위직 공무원입니다. 옛날 말로 하면 군수(郡守) 정도 될 것입니다. 그 총독의 이름은 서기오 바울입니다. 총독의 곁에는 바예수라는 유대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거짓 선지자이면서 마술사였습니다. 아마 일종의 참모 역할을 한 점쟁이가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보다 더 나은 지혜를 가진 사람을 경계하기 마련입니다.
구브로 섬의 총독 서기오 바울이 바나바와 사울을 청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했습니다. 아마 총독은 그 섬에 온 방문자들을 만나 인사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인사를 하는 중에 무슨 일을 하는지 물었겠지요. 바나바와 사울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했겠습니까? 아마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안디옥에서 파송을 받았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총독은 두 사람을 초대하여 그들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했습니다.
누가는 이 총독을 지혜 있는 사람이라고 설명했습니다(행13:7). 여기서 말하는 지혜로움(헬. 쒸네토스 synetos)은 한편의 이야기만 맹목적으로 믿는 외골수가 아니라 여러 의견을 듣고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그것은 지성인(a man of intelligence)의 자세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실수를 덜 하는 이유는 한쪽 말만 듣고 성급하게 판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공직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지혜가 꼭 필요합니다. 그런 지혜가 있는 총독 서기오 바울은 바나바와 바울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곁에 있던 점쟁이인 바예수는 총독이 그들의 말을 듣고 하나님을 믿게 될까 봐 바나바와 바울의 전도를 방해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자신의 지위가 흔들릴 수 있다고 생각했거나 아니면 자신이 가진 마술이나 점치는 능력이 별 것 아닌 것으로 판명나는 것이 두려웠을 수도 있습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사자처럼 담대하고(잠 28:1) 거리낄 것이 없으며 모든 일에서 배움과 깨우침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탐심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기의 위신과 체면, 그리고 영향력에 손상이 오지 않을까를 먼저 생각하고 그것에 해를 끼치는 존재가 있다면 그를 막으려고 노력합니다. 총독의 곁에 있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가 유대인이면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하나님을 알고 있을진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바나바와 바울을 대적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그 때 성령이 바울을 강하게 붙들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가로막는 거짓 선지자를 향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선포했습니다. 이것은 성령이 바울을 격동하여 말하게 한 것입니다:
9.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10. 이르되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11.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12.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놀랍게 여기니라
사도행전 13:10~12, 개역개정
바울이 보기에 이 점쟁이는 유대인입니다. 그는 바예수라는 유대인의 이름을 가졌습니다. 그는 할례도 받았을 것입니다. 즉, 몸에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표시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말씀도 언약도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가로막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 사람을 보면서 하나님의 성령이 어찌 탄식하지 않겠습니까? 공동번역성경은 이 구절을 실감나게 옮겼습니다:
9. 그러나 바울로라고도 불리는 사울은 성령으로 가득 차서 그 마술사를 쏘아보며
10. “기만과 죄악으로 가득 찬 이 악마의 자식아, 너는 나쁜 짓만 골라가면서 하는 악당이다. 언제까지 너는 주님의 길을 훼방할 셈이냐?
11. 이제 주님께서 손으로 너를 내리치실 것이다. 그러면 너는 눈이 멀어 한동안 햇빛을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하고 꾸짖었다. 이 말이 떨어지자 안개와 어둠이 내리덮쳐 그는 앞을 더듬으며 손을 잡아줄 사람을 찾았다.
12. 이 광경을 처음부터 보고 있던 총독은 주님께 관한 가르침에 깊이 감동되어 신도가 되었다.
사도행전 13:9~12, 공동번역
그렇게 바나바와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현장에서 첫 번째 신자가 탄생했습니다. 주님은 사도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을 통해 일하셨습니다. 특이한 점은 누가가 사도행전을 기록할 때 여기서부터는 사울의 이름을 바울이라고 소개하기 시작합니다(행 13:9). 그리고 바울이 선교사역에서 중심인물로 등장합니다. 여기서부터는 바울의 은사가 더 두드러지게 사용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두 사도는 여기서 떠나 다른 지역에 복음을 전하러 가기 위해 배를 탔습니다.
3. 비시디아 안디옥의 회당에서 설교한 바울
그렇게 개종자를 얻은 바나바와 바울은 배를 타고 밤빌리아 지역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도착하자 마자 두 사도를 수행하는 요한이 그들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요한은 본래 예루살렘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예루살렘에 안디옥교회의 구제금을 전달하러 갔다가 돌아올 때 바나바가 요한을 안디옥으로 데려왔습니다(행 12:25). 마가 요한은 바나바의 조카였습니다(골 4:10). 아마 요한은 두 사도가 선교사로 파송되는 것을 보고 따라가겠다고 나섰던 것 같습니다. 두 사도도 허락하고 그를 수행원으로 두었습니다(행 13:5). 그가 바로 훗날 마가복음을 기록할 요한입니다.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사도행전 13:13
젊은 사람의 호기심과 객기가 발동하여 요한이 바나바와 바울을 따라 나섰지만 그 헌신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그의 신앙심이 얕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기에는 아직 어려서 더 성숙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그의 이런 행동은 훗날 바울이 발탁한 청년 디모데와 비교가 됩니다(행 16:1~2). 디모데에 대하여 바울이 훗날 이런 평가를 했습니다: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빌립보서 2:22
사람을 인재(人才)라고 부를 때는 재주가 뛰어난 사람이라는 의미이지만, 인재(人材)라고 부를 때는 어떤 일을 맡기기에 적당한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마치 건물을 받치는 기둥을 세울 때 그에 적당한 재목(材木)이 필요한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모든 일에는 그에 맞는 인재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다 그 쓰임이 있습니다. 다만 때가 되었는가가 중요합니다. 요한은 바나바와 바울 일행을 떠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더 이상 선교사역을 지탱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에게는 좀더 성장할 시간과 경험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해서 바울 일행은 밤빌리아 지역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 곳을 찾았습니다. 회당에는 유대인들이 안식일마다 모이기 때문입니다. 평일에는 각자 생업에 종사하다가 안식일이 되면 모든 유대인 남자들은 회당에 모여 성경을 읽고 그것에 대해 토론을 하기도 합니다. 그곳은 복음을 전하기에 적당한 자리였습니다. 이제 바울 일행이 어떻게 했는지 보겠습니다:
14. (요한이 떠나고 나서) 나머지 사람들은 베르게(버가)에서 다시 길을 떠나 비시디아 안티오키아까지 갔다. 그들은 안식일이 되어 그 곳 회당에 들어가 앉아 있었다.
15. 회당에서 율법서와 예언서의 낭독이 끝나자 회당의 간부들이 사람을 시켜 바울로와 바르나바에게 “두 분께서 혹 격려할 말씀이 있거든 이 회중에게 한 말씀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청하였다.
사도행전 13:14~15, 공동번역
이렇게 바울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었습니다. 바울 일행이 유대인의 회당을 찾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곳은 사방으로 흩어진 유대인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인들이 해외로 이민을 가면 한인교회를 찾는다고 합니다. 이민자 교회에 가면 정보도 얻고 친구도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교회는 이민자들의 공동체에서 중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바울은 지중해 전역에 걸쳐 흩어져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의 회당에 들어가 앉아 함께 성경낭독을 듣고 거기서 이처럼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누가는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에 있는 회당에서 무슨 설교를 했는지 그 요점을 정리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누가가 들려주는 바울의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저는 지난 주에 서신서에 나타난 바울의 복음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충만이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었다는 말씀도 드렸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쓴 편지들은 사실 그 자체로 바울이 직접 작성한 설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설교를 잘 살펴보면, 유대인의 회당에서 했던 설교와 서신서에 나오는 설교의 주제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의 회당에서 설교를 하는 목적은 아직 주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성경을 통해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바울이 서신서에서 이야기하는 주제는 이미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는 공동체를 향하여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부름 받은 목적과 사명, 그리고 그 사명의 실천방법을 소개하고 격려하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도행전에 나오는 바울의 설교와 서신서에 나오는 바울의 메시지는 그 색깔을 달리합니다. 무릇 말은 그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달라지는 법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에 있는 회당에서 어떤 설교를 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4. 유대인들이 예수를 배척한 까닭
사도 바울은 비시디아 안디옥의 회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했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소개한 방식은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셨는가?’였습니다. 바울은 성경 전체를 종합하고 요약하면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분명하게 제시했습니다. 바울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경륜을 명쾌하게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그 메시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16.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그리고 하느님을 공경하는 여러분, 제 말을 들어보십시오.
17. 우리 이스라엘 백성의 하느님께서는 우리 조상들을 택하셔서 그들이 이국 땅 이집트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강대한 민족으로 키워주셨을 뿐만 아니라 크신 능력으로써 그들을 이집트에서 데려내오셨습니다.
18. 더구나 광야 생활 사십 년 동안은 그들이 저지른 온갖 잘못도 참아주셨습니다.
19. 그리고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에는 하느님께서 그 곳 일곱 민족을 쳐부수시고 그 땅을 그들에게 주셔서
20. 약 사백오십 년 동안 차지하게 하셨습니다. 그 뒤 판관들을 세워주셨고 예언자 사무엘 때에 이르러
21. 그들이 왕을 요구하자 하느님께서는 베냐민 지파 사람 키스의 아들 사울을 왕으로 세워 사십 년 동안 다스리게 하시다가
22. 그를 물리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이 다윗에 대해서는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찾아냈으니 그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요, 내 뜻을 다 이루어줄 사람이다.’ 하고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23. 하느님께서는 언약하신 대로 다윗의 후손 가운데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구세주 예수를 보내주셨습니다.
사도행전 13:16~23, 공동번역
바울은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부르시고 구원하시고 복을 주셔서 땅도 주시고 참고 기다리기도 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다윗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겠다고 말씀하신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고 소개했습니다. 바울은 이어서 세례 요한도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라고 소개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예루살렘에 있는 지도자들이 죽였다고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그들 관리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사도행전 13:27
바울의 메시지를 보면,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두 가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먼저,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선지자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매 안식일에 읽고 외우는 그 말씀을 깨닫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을 알아보지 못하기로 유명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배척을 당했습니다. 다윗도 온 이스라엘의 미움을 받아 원수의 나라로 망명하기도 했습니다. 수많은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전하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 선지자들이 기록한 말씀마저 깨닫지 못한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그리스도마저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예수님의 부활을 우리들도 보았고 갈릴리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 예수님을 따르던 수많은 사람들도 목격했다”고 증거했습니다. 그리고 사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도 시편 등에서 하나님이 이미 말씀하셨다고 성경을 인용하여 들려주었습니다(행 13:32~35, 시 2:7, 16:10). 그러므로 바울 일행이 그곳에 와서 이 이야기를 전하는 목적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 사함을 받을 뿐 아니라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죄를 용서받기 위해 이제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짐승을 잡아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됩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얻었는데 이제 예수를 믿으면 누구나 아브라함처럼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 이런 메시지는 그들에게 처음 듣는 신선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울은 회당에 모인 청중에게 이렇게 당부의 말씀을 합니다:
그런즉 너희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
너희에게 미칠까 삼가라
일렀으되 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놀라고 멸망하라
내가 너희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할 것이니
사람이 너희에게 일러줄지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
하였느니라 하니라
사도행전 13:40~41
바울 사도의 설교를 잘 살펴보면, 바울은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알아보지 못한 것과 선지자들의 글을 이해하지 못한 것을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자기 앞에 있는 회중에게도 사람의 말을 외모로 평가하지 말고 선지자들의 경고를 무겁게 받아 신중하게 판단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사람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기 쉽습니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갈릴리 출신의 예수를 시골뜨기라고 평가절하했습니다. 자신들의 독선과 편견에 빠져 예수님의 말씀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방인 총독 서기오 바울이 차라리 지혜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곁에서 점쟁이 거짓 선지자가 있어서 방해를 놓았음에도 바울과 바나바를 초청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거나 다른 사람의 선동에 미혹되는 사람들은 진실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들어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마음의 문을 닫아버립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보내신 말씀을 외면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버리고 말았습니다(행 13:26~27).
바울은 이스라엘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조상들이 그런 오류에 빠졌던 것처럼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잘못을 범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청중들에게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말라고 경고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어 죄 사함과 의롭다 함을 받으라고 권면했습니다.
이제 바울의 설교를 들은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에 모인 유대인들이 어떤 반응을 할까요? 그것을 살펴보겠습니다.
5. 구도할 것인가, 선동될 것인가?
그들이 나갈새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하더라
회당의 모임이 끝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사도행전 13:42~43
회당에서 설교를 마치고 바울 일행은 회당을 나가려 합니다. 그 때 회당에 모인 사람들이 부탁을 합니다. “다음 안식일에도 오늘 하신 말씀을 들려주십시요.” 이것은 회중이 바울의 메시지에 감동을 받았음을 보여줍니다. 이 귀한 말씀을 들어야 할 사람들이 더 있으니 그들을 불러와서 듣게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설교 후에 유대인과 경건한 유대교입교자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며 이것 저것을 묻습니다. 그렇게 회당에서 말씀 시간이 끝났는데 바울과 바나바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그 동안 궁금했던 말씀에 대하여 질문도 하면서 새로운 깨달음과 감동을 나누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복음의 말씀을 진지하게 들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새로운 감화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면 이제 다음 안식일에 어떤 일이 생길까요? 일주일 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일까요? 그들은 바울의 메시지를 듣고 어떤 반응을 할까요? 그 대목을 살펴보겠습니다: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
사도행전 13:45~46
이윽고 다음 안식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거의 다 회당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이것이 입소문이며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조용하던 회당은 이제 사람들로 만원을 이루어 밖에까지 사람들로 북적거렸을 것입니다. 지금 무엇인가 큰 잔치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전에 없던 일입니다. 유대인뿐 아니라 평상시에 장사하느라 바쁜 이웃집의 장사꾼들도 모두 모였습니다. 그만큼 바울의 이야기가 사람들의 마음을 잡아 끌었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하지만 이 많은 무리가 모인 것을 보고 유대인들 중에 시기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자기 위신과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전에 예루살렘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바리새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시기하여 죽인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회당의 지도자들이었을 것입니다. 그 회당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권력자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의 말씀을 제대로 들어보지도 않고 나사렛 예수는 이단이라 하더라는 이야기만을 믿을 뿐이었습니다. 전에 예수님을 이단이라고 거짓증거를 하고 사람들을 선동하던 예루살렘의 바리새인들처럼 지금 자기 스스로 따져보고 생각해 보지도 않은 채 다른 사람들의 말만 믿고 그렇게 사도들을 박해하고 있습니다. 아마 회당의 지도자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유대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처형한 사람들과 소식을 주고 받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리를 찾고자 하는 구도자와 거짓 소문을 만들어 사람들을 그릇된 길에 빠지도록 부추기는 선동가가 있음을 봅니다. 구도자(求道者)는 마음을 열고 자신이 직접 들어봅니다. 구브로의 총독 서기오 바울은 그런 사람입니다. 자신의 곁에 점쟁이 거짓 선지자가 있었지만 바울과 바나바를 초대하여 그들의 말을 들어보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 모인 사람들도 바울의 설교를 들었을 때 그들은 편견 없이 듣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메시지는 혼자 듣는 것이 아깝다며 다음 안식일에 사람들을 불러와서 같이 들어보자고 초대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거짓 선지자와 점쟁이 또는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처럼 진실을 알고자 하기보다 자신의 위신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욕심이나 고집 때문에 눈과 귀가 닫힌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미리 정한 결론을 가지고 모든 말에 대하여 꼬투리를 잡으려 하고 비방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제법 영향력이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말만 듣고 결론을 내버립니다. 즉,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내린 결론이니 맞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예수를 증거하는 바울을 반대하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도자가 아니라 선동가들이 일으키는 바람에 이리 저리 흔들리는 것입니다.
구도의 길을 걸어가려면 가장 먼저 진리를 알고자 하는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진리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을 때는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때 사람은 어떤 결론도 내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내린 결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진실이 무엇인지 알고자 노력하면 진실은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발견한 진리는 다른 사람에게 전해들은 말과는 다른 분명한 확신과 힘을 제공합니다.
구도의 길을 걸어가려면 사람들의 영향력을 벗어날 용기를 내야 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면서도 빌라도에게 예수를 죽이라고 내어준 결정을 한 곳이 산헤드린 공의회입니다(사도행전 13:28). 사실 선동(煽動)이라는 말은 ‘남을 부추기어 어떤 사상을 갖게 하거나 행동을 하도록 조장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선(扇)자는 손에 들고 바람을 일으키는 부채(a folding fan)를 가리킵니다. 자신이 배우고 확신한 것을 굳게 붙들지 못하면 선동되기 쉽습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이 불어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와서 쉴 수 있는 그늘을 제공합니다.
6.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이렇게 한 차례의 깊은 감동을 준 설교 이후에 다음 안식일에는 회당에서 소란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복음은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제 사도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비방이 있은 후에 바울과 바나바가 어떻게 했는지 누가는 이렇게 소개합니다:
46.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47.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49.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50.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니
51. 두 사람이 그들을 향하여 발의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사도행전 13:46~52
바울과 바나바는 유대인의 회당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방인에게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바울은 주님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아, 이래서 주님이 나에게 이방인의 빛이 되게 하겠다고 하셨구나!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신다는 말씀이 이것이었구나!’ 회당에 모인 유대인들은 편견과 아집에 사로잡혀 사람의 말에 휩쓸리기도 하고 선동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도리어 이방인들은 바울의 복음을 듣고 기뻐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어쩌면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사람들이었습니다(행 13:48). 그렇게 비방과 박해 속에서도 주의 말씀은 그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회당에서 바울과 바나바를 쫓아낼 뿐 아니라 돈 많은 사람들과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그 지역에서 쫓아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자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을 향하여 발의 티끌을 털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향했습니다. 발에 먼지를 털어버린다는 말은 자신을 비방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나쁜 감정도 갖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나쁜 감정을 가지게 되면 자신의 옷에 먼지가 가득하여 더러워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더러워진 옷으로 다른 곳에 가면 안 됩니다. 다시 세탁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미리 옷에 먼지를 다 털어 버리고 나면 새로운 마을에 가든지 새로운 사람을 만나든지 기쁨과 평안으로 마주할 수 있습니다. 그런 고로 바울과 바나바는 비록 박해를 받고 선교사역에 방해를 받았지만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여 새로운 전도의 길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행 13:52). 이것이 구도자의 길입니다.
이렇게 하여 하나의 안디옥은 선교의 중심지가 되고 기독교의 요람이 되지만, 다른 안디옥은 바울 선교단을 배척한 마을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하여 복음은 유대인을 떠나 이방인에게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달리 인정이나 혈통에 매이지 않으시고 믿음과 진실을 추구하는 이들을 통하여 언제나 새로운 싹이 나게 하시고 새 시대를 위한 하나님의 그루터기의 새순이 되게 하십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명심하고 선동되어 살지 말고 구도자로 살아가려고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주님은 언제까지나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통하여 새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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