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향곡의 발전사에서의 브람스의 위상 '교향곡의 아버지’라 일컫는 하이든(Haydn, Franz Joseph:1732~1809)은 평생에 104곡에 달하는 방대한 작품을 써서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이른바 교향곡(Symphony)의 틀을 완전히 정착시켜 놓았다. 물론 그 이전에도 실험적인 형태의 교향곡이 존재하기는 했지만 그는 4악장제를 확립시켜 교향곡의 기초공사를 완벽하게 마무리 한 것이다. 그 후 음악사상 미증유의 대천재로 불리는 모차르트(Mozart, Wolfgang Amadeus:1756~1791)가 나타나 하이든이 닦아 놓은 교향곡의 기초공사 위에다가 훌륭한 주춧돌을 놓았다. 그는 36년의 짧은 생애에도불구하고 41개의 교향곡을 만들었는데, 만약 그가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교향곡의 발달은 지금보다 더욱 빨라지고 다채로워졌을 것이다. 하이든이 기초공사를 하고 모차르트가 주춧돌을 놓은 교향곡의 터전에다가 마침내 웅대한 대 건축물을 건립한 사람은 교향곡 사상 최고 최대의 거인으로 불리는 악성 베토벤(Beethoven,Ludwig van :1770~1827)이다. 베토벤에 의해 교향곡은 갈 데까지 갔고, 오를 데까지 올랐고 익을 대로 익어버릴 수 있었다. 이 세 사람의 고전주의 작곡가들이 이룩한 가장 혁혁한 성과가 교향곡이고, 때문에 교향곡은 고전주의 시대에 이미 최고의 절정에 달했으며, 그 절정은 지금까지 그 누구도 뛰어 넘을 수 없는 드높은 봉우리로 솟아 있었다. 베토벤 이후 무수한 작곡가들이 그 봉우리를 향하여 줄기차게 달려갔지만, 어는 누구도 소기의 성과를 이룩한 사람은 없었다. 다만 한 사람, 브람스 만이 그 봉우리에 가까이 다가선 교향곡 작곡가로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바로 여기에 브람스가 차지하고 있는 교향곡사의 뚜렷한 발자취를 보게 되는 것이다. |
■ 브람스의 교향곡(4곡) 베토벤이 죽고 난 뒤에 서서히 낭만주의 시대가 도래함에 따라 교향곡은 크게 빛을 보지 못한 채 구시대의 유물처럼 도외시 되고(실제로 1850~1870년에는 교향곡이 작곡되지 못했다), 그 대신에 리스트(Liszt, Franz : 1811~1886)가 교향시(Symphonic Poem)를 내놓으면서 좀 더 자유로운 인간의 창작의지를 대변하기 시작하였다(참조:브람스 소개). 그 선봉장인 리스트와 바그너(Wagner, Richard : 1813`1883)는 절대음악의 붕괴를 선언하고 나서면서, “교향곡은 베토벤으로 끝났다” 라고 부르짖으면서 다양한 악극형식을 통한 표제음악과 묘사음악의 시대를 외치고 나섰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도 교향곡의 절대가치를 그 누구보다도 확고하게 붙들어 잡고 이의 재건을 위해 정진한 브람스는 22세(1855년)때에 교향곡 제1번을 구상했으나, 건축가가 작은 건물을 여러 개 만들어 충분한 경험과 자신감을 얻고 나서 큰 건축에 손을 대듯이, 실내악과 같은 비교적 소규모의 악곡에 자신을 얻게 되자 곡을 가다듬어 마침내 21년이 지난 43세(1876년)때에 첫 번째 작품을 내놓음으로써 베토벤 이후 최대의 작곡가로 군림하게 되었다. 브람스가 이토록 산고를 겪은 이유는 “베토벤이 이룬 교향곡의 업적을 어떻게 하면 돌파할 수 있는가에 있었다. “베토벤이 항상 내 뒤에 거인처럼 버티고 서 있는 듯한 느낌을 가진다”는 브람스의 말은 베토벤이 자신의 배후에 있으며 반드시 극복해야 했던 전통의 부담을 잘 알고 있음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제1번 교향곡은 모든 면에서 베토벤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베토벤 10번 교향곡”이라고 불린다. 브람스는 이 후 1877년 제2번, 1883년에 제3번을 쓰고, 1885년에는 그의 마지막 교향곡이 된 제4번을 아주 짧은 기간 안에 완성시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