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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분에 사로잡혀 병란을 부르다’라는 부제의 이 책에서 다루는 내용은 조선의 16대 왕으로 재위했던 ‘인조실록’에 해당한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쿠데타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정통성을 의식해 집권 내내 신하들의 눈치를 봐야만 했던 왕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역사에서는 ‘바른 것으로 돌린다’는 의미로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칭하지만, 광해군과 그의 아들인 세자까지 장성한 상태에서 쿠데타로 등극했다는 한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나아가 멸망해가는 명나라와의 의리를 내세우며 쿠데타를 실시했기에, 중국 대륙에서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청나라와의 대립으로 두 차례에 걸쳐 그들의 침략을 초래하기도 했다. 결국 청 태종이 대군을 이끌고 침략한 병자호란(1636)이 발생하자, 신하들을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피신을 했다가 한강변의 삼전도에서 항목 의식을 해야만 했던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
쿠데타가 아니었다면 왕위에 오를 수 없었다는 점이 정통성의 한계로 지적되었으며, 이와 더불어 청나라와 우호적이었던 광해군을 신하들의 거센 요청에도 불구하고 어찌할 수 없었다고 한다. 더욱이 명분을 중시하던 명나라에서조차 ‘왕을 시해하고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문으로 인해, 즉위한 지 22개월이 지나고 나서야 정식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중국 사신들에게 막대한 뇌물을 써야만 했고, 명나라 장수인 모문룡의 행패를 온전히 견뎌야만 했다고 한다. 명나라에 기댄 이러한 처신으로 인해 청나라의 견제에 이은 침략을 초래했고, 미처 강화도로 피신하지 못한 채 남한산성에 갇혔다가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이른바 ‘삼배고구두(三排九叩頭)’의 예를 시행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 이전에 쿠데타의 주역이었던 부원수 이괄(李适)이 자신의 아들을 역모 혐의로 하옥하려 하자, 대규모의 군사를 이끌고 반란을 이끌고 한양을 점령하자 인조는 충청도 공주까지 피신해야만 했던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처럼 인조 치세에는 ‘이괄의 난’(1624)이라는 내우(內憂)와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 등 두 차례나 청나라의 침략을 겪었던 외환(外患)이 이어졌다. 인조의 항복으로 남한산성에서 청나라와 맞서는 ‘척화(斥和)’를 주장했던 이들과 소현세자를 비롯한 왕자들이 인질로 청나라에 끌려가야만 하는 상황이 벌어졌던 것이다.
인질로 가있던 상황에서 소현세자는 그들이 발달된 문화를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만, 귀국 후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러한 결과는 결국 무능한 인조에 의해서 소현세자가 살해되었다는 추정으로 이어졌고, 소현세자의 비와 그 아들들까지 유배되었다가 죽음으로써 그러한 추론이 어느 정도 타당하다고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소현세자의 죽음 이후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을 후계자로 삼고, 1649년 26년의 재위를 마치고 죽음을 맞이하였다. 이로 인해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 역시 즉위 후에도 상당 기간 동안 정통성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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