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뼈다귀와 같은 감각적 욕망, 알라갓두빠마경 (뱀에 대한 비유의 경, M22)
4부 니까야의 특징
시절인연이 되어서일까 불자들은 부처님의 원음이 담긴 말씀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빠알리니까야를 우리말로 번역한 초기경전을 마음만 먹으면 지금 당장 구입해 볼 수 있다. 그런 경전 중에 맛지마니까야가 있다. 맛지마니까야는 어떤 성격의 불교경전일까.
초기불교에 네 개의 경전이 있다. 각각 특징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디가니까야의 경우 대외적으로 불교를 널리 알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그리고 사건적으로 소설적 구성과 문학적 상상력이 첨가 되어 교리적으로는 종합적으로 구성된 것으로서 후기에 편집된 경전으로 본다.
상윳따니까야는 부처님의 일체에 대한 근본적인 통찰과 정신적인 해탈의 독특한 길을 열어주는 짧고 함축적인 경전들을 주제별로 조직적으로 편집한 것이다. 4부 니까야 중에 가장 먼저 성립되었다.
앙굿따라니까야는 세속적이고 윤리적이고 정신적인 이 세상에서의 실천적인 생활과 관련된 재가의 재가자들에게 설하는 경전이 두드러진 것이라 한다. 법수와 관련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체계적인 편집 형태를 보여 주고 있는데, 4부 니까야 중 가장 후대에 편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맛지마니까야는 어떤 성격일까. 전재성박사의 해제글에 따르면 맛지마니까야는 실재했던 인물로서의 부처님에 대한 찬탄과 승단의 화합과 공동체안에서의 수행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따라서 전문적인 수행집단의 구성원들이 철저한 명상수행을 닦기 위해서 필요한 체계화된 교리의 전형을 보여 주면서도, 교리와 관련된 사건과 대화가 풍부하다고 한다. 4부 니까야 중에 상윳따니까야 다음으로 오래된 경전으로 보고 있다.
뱀에 대한 비유
맛지마니까야는 수행과 교리에 대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비유가 많이 들어 있는데, 특히 교리에 데하여 이해 하기 쉽게 설명되어 있다. 그런 비유에 대한 경이 있다. 알라갓두빠마경 Alagaddūpamasutta , M22)이다. 우리말로 ‘뱀에 대한 비유의 경’이라 한다.
경에서 부처님은 뱀에 대한 비유를 들어 교리를 설명하고 있다. 그런 뱀의 비유는 어떤 것일까.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예를들어 수행승들이여,
어떤 사람이 뱀을 원하고 뱀을 구하여 뱀을 찾아서 가는데, 큰 뱀을 보고는 그 몸통이나 꼬리를 잡으면, 그 뱀은 되돌아서 그 사람의 손이나 팔이나 다른 사지를 물것이고, 그 때문에 그는 죽거나 죽음에 이를 정도의 고통을 맛볼 것이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뱀을 잘못 붙잡았기 때문이다.
(알라갓두빠마경-Alagaddūpamasutta- 뱀에 대한 비유의 경, 맛지마니까야 M22, 전재성박사역)
뱀을 잘 잡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뱀을 잡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들은 몸통이나 꼬리를 잡았을 때 뱀에 물릴 수 있다. 그럴경우 치명적인 독으로 인하여 목숨까지 잃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뱀을 잘 잡을 수 있을까. 이어지는 법문은 다음과 같다.
예를들어 수행승들이여,
한 사람이 뱀을 원하고 뱀을 구하여 뱀을 찾아서 가는데, 큰 뱀을 보고는 염소발과 같이 생긴 몽둥이집게로 그 머리를 붙잡으면, 그 뱀은 되돌아서 그 사람의 손이나 팔이나 다른 사지를 물지 못할것이고, 그 때문에 그는 죽거나 죽음에 이를 정도의 고통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뱀을 잘 붙잡았기 때문이다.
(알라갓두빠마경-Alagaddūpamasutta- 뱀에 대한 비유의 경, 맛지마니까야 M22, 전재성박사역)
뱀을 잡으려면 머리부분을 잡아야 된다는 것이다. 그래야 뱀을 제압할 수 있어서 물리지 않을 것이라 한다.
왜 뱀의 비유를 들었을까?
이와 같은 뱀의 비유는 상식을 가지고 불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왜 뱀의 비유를 든 것일까. 이는 다름 아닌 다음과 같은 말씀을 전달하기 위해서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같이 이 세상에 어떤 훌륭한 사람들은 경·응송·수기·게송·감흥어·여시어·전생담·미증유법·교리문답과같은 가르침을 두루 배우고, 그 가르침을 배워서 그 가르침에 관해 지혜로서 그 의미를 규명하고, 가르침에 관해 지혜로써 그 의미를 규명하여 성찰을 얻고, 남을 비난하기 위하여 가르침을 배우지 않고, 논쟁에서 이기기 위하여 가르침을 배우지않으므로 그 참다운 의미를 경험한다.
(알라갓두빠마경-Alagaddūpamasutta- 뱀에 대한 비유의 경, 맛지마니까야 M22, 전재성박사역)
부처님은 가르침을 배우는 목적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런 가르침이 단지 남을 비난하거나 논쟁에 이기기 위하여 배워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였을 경우 뱀의 몸통이나 꼬리를 잡는 것 같아 크게 다칠 염려가 있고 심지어 죽어서도 고통을 맛 볼 수 있다고 말씀 하신다.
이렇게 부처님은 가르침일 배워 쓸데 없는 소모적인 논쟁으로 활용하지 말 것을 주문 하였다.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부처님은 또 ‘뗏목의 비유’로도 말씀 하셨다.
금강경에서 본 뗏목의 비유
뗏목의 비유는 매우 유명하다. 불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내용이다. 조금이라도 불교에 대하여 아는 사람이라면 금강경에 실려 있는 뗏목의 비유를 떠 올리게 될 것이다. 금강경에서 뗏목의 비유에 대한 것은 다음과 같다.
以是義故 如來常說 이시의고 여래상설
汝等比丘 知我說法 여등비구 지아설법
如筏喩者 法相應捨 何況非法 여벌유자 법상응사 하황비법
이런 이유로 내가 항상 이르되
나의 설법을 뗏목을 비유하였느니라.
법도 버려야 하는데 하물며 비법에 매여서 되겠느냐.
(금강경 제6분 정신희유분-正信希有分)
이 게송에서 핵심어는 ‘법상응사 하황비법’이다. “법도 버려야 하는데 하물며 비법에 매여서 되겠느냐”라는 뜻이다.
무비스님의 해석을 보면
이 부분에 대한 무비스님의 해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강을 건널 때만 필요한 거예요. 뗏목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거든요. 뗏목을 탔다면은 강을 건너는 것이 목적이라, 강을 건너고 나면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린다구요. 강을 건너주는데 그렇게 고마운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뒤돌아보지 않고 그냥 가버리거든요, 그게 방편이라.
강 건너는데 필요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그래 부처님의 모든 설법을 여벌유자(如筏喩者)니라.
지아설법(知我說法)을 여벌유자(如筏喩者)니라.
내 설법에 대해서 너희들이 어떻게 이해하는 게 바람직하냐, 뗏목의 비유처럼 이해하는 게 가장 바람직하다. 뗏목은 뭡니까, 방편이다. 강을 건너는데 필요한 방편이다.
우리 쉬운 표현으로 모든 불교적인 그런 그 수행법이 결국은 이 한마음 깨닫는데 방편이다 이렇게 이제 우리가 아는 것이 바람직하죠.
그거 보면 방편이라는 낱말을 잘 알 수가 있습니다.
(무비스님)
무비스님의 유마경 강설에서 금강경의 뗏목에 대한 비유의 설명이다. 스님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방편에 비유하였다. 본성을 깨닫기 위한 방편을 말한다. 그래서 한번 건넌 뗏목은 뒤도 돌아 보지 않고 가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한 다른 스님들의 해석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알라갓두빠마경에서 본 뗏목의 비유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다르다. 맛지마니까야 알라갓두빠마경에 실려 있는 뗏목의 비유는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존]
“예를들어, 수행승들이여, 어떤 사람이 여행을 가는데 큰 물이 넘치는 강을 만났다. 이 언덕은 위험하고 두렵고 저 언덕은 안온하고 두려움이 없는데 이 언덕으로부터 저 언덕으로 가는 나룻배도 없고 다리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생각했다.‘내가 풀과 나무와 가지와 잎사귀를 모아서 뗏목을 엮어서 그 뗏목에 의지하여 두 손과 두 발로 노력해서 안전하게 저 언덕으로 건너가면 어떨까?’
수행승들이여,
그래서 그 사람은 풀과 나무와 가지와 잎사귀를 모아서 뗏목을 엮어서 그 뗏목에 의지하여 두 손과 두 발로 노력해서 안전하게 저 언덕으로 건너갔다. 저 언덕에 도달하자 그는 이와같이 생각했다.‘이 뗏목을 머리에 이거나 어깨에 메고 갈 곳으로 가면 어떨까?’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렇게 하는 것이 그 사람이 그 뗏목을 제대로 처리하는 것인가?”
(알라갓두빠마경-Alagaddūpamasutta- 뱀에 대한 비유의 경, 맛지마니까야 M22, 전재성박사역)
금강경의 뗏목의 비유와 똑같은 내용의 비유가 초기경에 실려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대부분 불자들이 대승경전을 접하고 난 후 초기경을 접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기경이 먼저 성립 되었으므로 원전은 초기경전이라 볼 수 있다.
대승경전에 실려 있는 뗏목에 대한 이야기는 구체적인 설명이 없다. 단지 ‘여벌유자(如筏喩者)’라는 네 글자로 되어 있다. 이는 한문경전의 한계이다. 뜻글자로 되어 있는 한문은 글자 하나가 이미지로 되어 있어서 갖가지 해석이 가능하고 그에 따라 논리적 설명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빠알리니까야의 경우 우리말과 같이 소리글자로 되어 있어서 얼마든지 논리적인 표현이 가능하다.
뗏목의 처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비스님의 설명에 따르면 강을 건넌다음 뒤돌아보지 않고 그냥 가버리는 것이라 하였다. 부처님의 말씀은 방편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라 한다. 그렇다면 초기경에서 부처님은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 이어지는 부처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해야 그 사람이 그 뗏목을 제대로 처리하는 것인가?
수행승들이여,
그 사람은 저 언덕에 도달했을 때 ‘이제 나는 이 뗏목을 육지로 예인해 놓거나, 물속에 침수시키고 갈 곳으로 가면 어떨까?’라고 생각했다. 수행승들이여, 이와같이 해야 그 사람은 그 뗏목을 제대로 처리한 것이다. 이와같이, 수행승들이여, 건너가기 위하여 집착하지 않기 위하여 뗏목의 비유를 설했다.
수행승들이여,
참으로 뗏목에의 비유를 아는 그대들은 가르침마저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가르침이 아닌 것임에랴.”
(알라갓두빠마경-Alagaddūpamasutta- 뱀에 대한 비유의 경, 맛지마니까야 M22, 전재성박사역)
뗏목으로 무사히 강을 건넜다하여 이를 지고 갈 수 없다. 여기까지 대승경전이나 초기경전에서 공통되는 사항이다. 그러나 뗏목의 처리에 대한 문제가 남아 있다.
금강경에서는 ‘여벌유자’ 다음에 곧바로 ‘법상응사 하황비법’이라 하여 뗏목에 대한 처리설명이 없다. 그래서 뒤도 돌아 보지 않는 것으로 무비스님은 설명한다. 심지어 어떤 이는 뗏목을 불살라 버리는 것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육지에 예인해 놓거나 물속에 잠겨 놓는 것이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다음 사람을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다. 강을 건널 사람이 분명히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뗏목의 비유를 제대로 아는 것일까.
담마삐 워 빠하땁바 빠게와 아담마( 法相應捨 何況非法)
경에서 부처님은 “가르침마저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가르침이 아닌 것임에랴”라 하였다. 이말이 경에서 부처님의 핵심가르침이다. 이를 빠알리어로 ‘dhammāpi vo pahātabbā, pageva adhammā(담마삐 워 빠하땁바 빠게와 아담마)’이다. 이를 한자어로 ‘법상응사하황비법 (法相應捨 何況非法)’ 이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주석에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dhammāpi vo pahātabbā, pageva adhammā : 여기서 가르침(dhamma:法)은 Pps.II.109에 의하면, ‘멈춤과 통찰(samathavipassana: 止觀)을 말하고 이 문장은 ‘수행승들이여, 나는 멈춤과 통찰과 같은 고요한 상태에 대한 탐착과 집착마저 버리라고 가르치는데, 아릿타(Arittha)가 다섯가지 감각적 쾌락에 대한 탐욕에 장애가 없다고 주장할 때에 그가 무해하다고 보는 저 저열하고 비속하고 경멸스럽고 거칠고 더러운 것에 대해 말해서는 무엇하랴?’는 뜻이다.
MN.66에서는 멈춤(止 samatha)에 대한 집착을 버릴 것을, MN.38에서는 통찰(vipassana: 觀)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 날 것을 부처님께서 설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러나 버려야 할 것은 뗏목의 비유처럼 포기되어야 할 선한 진리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라는 말이지, 선한 진리자체를 버리라는 말이 아님에 주의해야 한다. 부처님의 이러한 태도는 MN.76에서 경고하듯이 도덕적 허무주의로 오해되거나 깨달은 님은 선악에 걸림 없이 행동한다는 식으로 오해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여기서 진리는 부처님의 말씀이고 그 진리를 올바로 이해해서 실천하는 것이 진리를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아릿타는 부처님의 말씀을 가지고 논쟁하거나 토론하는데 그치고 있다.
(알라갓두빠마경 주석, 전재성박사)
여기서 아릿타(Arittha)는 사람이름을 말한다. 경에서 아릿타는 부처님의 제자이지만 예전에 독수리 조련사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경에서는 그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세존께서 장애라고 설한 것들도 그것들을 수용하는 자에게는 장애가 되지 않는다”라고 삿된 견해가 생겨난 것으로 경이 시작 되고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은
아릿타에게 삿된 견해가 생겨난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문제이다. 이런 욕망은 깨달음에 이르는데 있어서 장애요인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아릿타는 이는 수용하는 자에게 있어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마치 깨달은 자라 하여 막행막식하는 자들의 논리와 유사하다. 그런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주석에 따르면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은 빠알리어로 까마(kamā)라 한다. 까마는 네가지의 뜻이 있는데, 첫째로 객관적 감각적 쾌락으로서 이는 감각적 향락 또는 감각적 쾌락의 대상을 말한다. 둘째로 주관적 감각적 쾌락이 있는데, 이는 감각과 연결된 주관적인 오염, 즉 감각적 욕망을 말한다. 세번째로 성적교섭이 있고, 네번째로 포옹하고 쓰다듬는 것등의 애정표현이 있다.
무엇을 버려야 하는가
이와 같은 네 가지 감각적쾌락에 대한 욕맘이 수용하기 따라 장애가 되지 않는 다고 말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먼 것이다. 깨달은 자라 하여 막행막식 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될 수 없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부처님은 뗏목의 비유를 들어 설명한 것이다.
그런 뗏목의 비유는 주석에서와 같이 “멈춤과 통찰과 같은 고요한 상태에 대한 탐착과 집착마저 버리라고 가르쳤는데, 무해하다고 보는 저 저열하고 비속하고 경멸스럽고 거칠고 더러운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에 대해 말해서는 무엇하랴?”라는 뜻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버려야 할 것은 집착이라는 것이다. ‘법상응사’라 하였을 때, 진리(법)를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집착하는 그 마음을 버리라는 것이다.
“지혜도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이에 대한 좋은 예를 보았다. 다음과 같은 카페의 글이다.
< 질문 >
경행을 하던 중에 망상이 일어나고 사라짐의 알아차림을 반복하던 중 오래간만에 집중을 할 수 있었습니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느낌이 불만족스럽고, 그 느낌들은 일어나고 사라지고를 반복한다는 것을 느끼던 중에,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으로 윤회하는 생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온몸에 전율을 느끼면서 집중을 계속 할 수 있었습니다.(약 20분 정도)
어릴 때부터의 주변 사람들이 필름이 지나가듯이 순간순간 빠르게 지나가면서 미워했던 사람들, 좋아했던 사람들 등 모든 이들이 너무나 고맙고, 소중하게 생각되어졌습니다. 그리고 좌선 중에도 어느 정도 느낌이 이어지다가 사라졌습니다.
캐나다에서 거의 매일 법사님의 법문 듣고, 책을 봅니다. 인터뷰도 못하고 홀로 매일 두어 시간 정도 수행하고 있습니다. 몸으로 하는 일을 하느라 수행에 많은 시간을 못 내고 있습니다. 아직 한국에 갈 수 있는 조건이 아닌 가 봅니다.
< 답변 >
수행 중에 지혜가 생기면 누구나 좋아하게 됩니다. 이때 알아차림을 놓칩니다. 그래서 지혜가 났을 때 다시 알아차려서 좋아하지 않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최고의 지혜가 나도 좋아하지 않고 그냥 알아차리셨습니다.
지혜가 났을 때 좋아하는 것은 이것이 나의 지혜라는 유신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혜가 났을 때도 계속해서 알아차리면 내가 사라져서 더 큰 지혜를 향해서 가게 됩니다. 수행은 지혜의 단계적 과정이 있기 때문에 항상 알아차려야 합니다.
수행을 하면서 지혜가 나면 몸에 전율이 일어나는데 이것도 수행의 과정입니다. 이것은 집중력이 생겨서 수행이 발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알아차리시기 바랍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는 것은 탐욕이 아닌 관용을 갖는 순간이며, 성냄이 아닌 자애를 갖는 순간이고, 어리석음이 아닌 지혜가 난 순간입니다.
타국에서 고생을 하시면서 수행을 하는 것이 힘든 일임에도 불구하고 계속 수행을 하신다니 매우 훌륭하십니다. 선한 원인을 만들면 반드시 선한 결과가 있습니다.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그냥 묵묵히 수행을 하십시오. 이것이 행복입니다.
묘원 올림
(지혜도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한국명상원 2012-11-14)
지혜도 알아차릴 대상이라 한다. 지혜가 일어 났을 때 이에 대하여 좋아 하는 마음을 내었을 때 이는 ‘집착’이라 한다. 이렇게 지혜마저 알아차려야 한다는 것은 법에 대한 집착을 하지 말라는 말이지 지혜 그 자체를 버려야 된다는 말은 아니다.
만일 법 그 자체를 버려야 한다면 뗏목이라는 방편을 떠 내려 보내거나 불태워 버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뗏목을 육지로 예인해 놓거나, 물속에 침수시키고 가는 것이 뗏목을 제대로 처리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는 진리 그 자체를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는 말과 같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과 막행막식
최근 불교닷컴에 따르면 수좌회 원로 H스님이 성추행 혐으로 피소 당했다고 한다. 기사에 따르면 지난 8월 R씨에게 차를 마시자고 처소로 불러 “월경불순이 있으니 한창 때인데 여자가 여자 노릇을 못하니 어쩌면 좋냐”고 말한 뒤 건강을 진단한다면서 수맥탐지용 도구(엘 로드)를 몸에 갖다 대고 “가슴이 봉긋하다. 무엇을 넣었느냐”는 등 성추행 발언을 했다는 것이다. 이에 수치심을 느낀 R씨가 소리를 지르며 일어서려 하자 H 스님은 R씨의 손목을 붙들고 가슴을 움켜쥐는 등 성추행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왜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아무래도 승가의 막행막식 전통에서 찾아야 될 것 같다.
한국선불교의 중흥조로 불리우는 경허스님의 막행막식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스님의 막행막식에 대한 비판 논문을 실었다 하여 한 계간지가 폐간되기에 이르렀다. 소위 깨달은 자들의 막행막식에 대한 이야기는 불교계에 하나의 전설처럼 알려져 있고 이를 본받아 계율을 어기는 행위가 마치 자랑처럼 여기는 풍토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알라갓두빠마경에 따르면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는 즐거움은 적고 괴로움이 많고 근심이 많으며, 재난은 더욱 많다고 하였다. 이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추구하면 할수록 더욱 더 괴로워 지고 결국 재난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막행막식을 일삼는 자들은 한결같이 결말이 좋지 않아 보인다.
“즐거움은 적고 괴로움이 많고”
그렇다면 괴로움과 근심과 재난을 초래하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경에서 다음과 같은 비유로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
“벗이여, 아릿타여,
그렇게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세존의 가르침을 왜곡하지 마십시오. 세존의 가르침을 왜곡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세존께서는 그렇게 설하지 않으셨습니다.
벗이여, 아릿타여, 여러 가지 법문으로 세존께서는 장애가 되는것들이 어떻게 장애가 되는가와 그것들을 수용하는 자에게도 어떻게 장애가 되는가에 대해 설하셨습니다. 세존께서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는 즐거움은 적고 괴로움이 많고 근심이 많으며, 재난은 더욱 많다고 설하셨습니다.
또한 세존께서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관해 해골의 비유를 설했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관해 고깃덩어리의 비유를 설했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관해 건초횃불의 비유를 설했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관해 숯불구덩이의 비유를 설했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관해 꿈의 비유를 설했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관해 빌린 물건의 비유를 설했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관해 나무열매의 비유를 설했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관해 도살장의 비유를 설했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관해 칼과 창의 비유를 설했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관해 뱀머리의 비유를 설했는데,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는 즐거움은 적고 괴로움이 많고 근심이 많으며, 재난은 더욱 많다고 설하셨습니다.
(알라갓두빠마경-Alagaddūpamasutta- 뱀에 대한 비유의 경, 맛지마니까야 M22, 전재성박사역)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수 많은 비유로 말하고 있다. 이중 가장 첫번째로 언급된 것이 ‘해골의 비유’이다. 해골의 비유란 무엇일까.
개뼈다귀와 같은
해골의 비유에 앞서 일묵스님의 개뼈다귀 이야기를 보면 다음과 같다. 일묵스님은 불교TV에서 각각적 욕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부처님께서는 하늘에 황금비가 내려도 중생들은 만족하지 않는다고 그래요. 황금비가 내리면 왜 다이아몬드비가 안내리냐 이러겠죠? 그죠? 그래서 만족을 모르는 것이 탐욕의 특징이구요. 또 비유로서 탐욕의 성질을 뭐라고 비유를 하냐하면 뼈다귀 같다 해요. 개뼈다귀. 왜 뼈다귀같다고 이야기하냐 하면 개가 뼈다귀를 먹으려고 하면, 막상 먹으려고 하면 먹을 건 없어요. 그죠? 거기서 고깃덩어리 몇 개 남아있지도 않으니까, 먹을 건 없는데, 그 뼈다귀에서 나는 냄새가 너무 좋아서 사람이 이걸 떠나지를 못하는 거에요.
그런 것처럼 보통 우리 범부들의 마음도, 사실 감각적 욕망이라고 하는 것이, 그것을 추구를 해보면, 막상 거기서 얻어지는 행복이 그렇게 크지를 않습니다. 하고 나면 항상 허전하고, 뭔가 더 많은 것을 얻으려하고, 갈증만 나지, 막상 그것으로 인해서 만족이 일어나거나,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편안해 지거나 이러지는 않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거를 떠나지를 못해요. 계속 주위를 맴돌면서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모습을 비유를 해서 뼈다귀같다. 이렇게 표현을 한 거죠. 그래서 감각적 욕망이 왜?, 보통 성냄은 사람들이 다 누구나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성냄이 일어나면 괴롭거든요. 일단 자기가. 괴롭고. 그 성냄으로 인해서 고통이 따라오니까, 성냄은 버리려고 하는 마음이 쉽게 나는데, 탐욕이라는 것은 이 탐욕 자체가 달콤해요. 아까 말했듯이, 뭔가 개뼈다귀처럼 먹을게 있다고 생각해요.
개뼈다귀처럼 약간 달콤한 것도 있고, 그런데 막상 먹어보면 그것은 우리에게 계속 갈증만 일으키지 실제로 우리마음을 흡족하게 해 주는 요소는 없단 말이에요. 탐욕이라고 하는 감각적 욕망, 이거는 이 자체가 즐거움으로 느껴지거든요. 왜냐하면 달콤한게 있으니까. 즐거움으로 느껴지는데, 막상 이것이 나중에 가지고 오는 결과는 이것이 사라졌을 때 오는 고통이라든가 여러 가지 고통이 따라옵니다. 사실은 이것은 이런 비유도 있습니다. 마치 독과 같다, 그래요. 달콤한 맛을 가진 독과 같다고 얘기를 하는데. 이것이 뭔가 달콤해서 추구를 하는데, 막상 그것은 우리에게 큰 손해를 일으킨다 이거죠. 그래서 감각적 욕망은 굉장히 행복으로 포장된 괴로움이라는 거에요.
(팔정도수행 바로알고 내려놓기_제5회 5장애요소와 무명 (19:57), 일묵스님 불교TV )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욕망이라는 것은 한마디로 말하여 개뼈다귀와 같은 것이라 한다. 개뼈다귀는 냄새와 모양이 먹음직 스러워 보이지만 막상 먹으려고 보면 먹을 것이 없기 때문이라 한다.
개 같은 수행자
일묵스님은 방송에서 개뼈다귀의 예를 들어 실감나게 설명하였는데, 부처님은 경전에서 해골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였다. 해골의 비유는 맛지마니까야 뽀딸리야경(Potaliya sutta, M54)에 실려 있다.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장자여, 한 마리의 개가 굶주림과 허기에 지쳐서 푸줏간 앞에 나타났다고 합시다. 그 개에게 숙련된 도살자 내지 그 제자가 완전히 잘 도려내어져서 근육 한 점 없이 피만 묻은 해골을 던져주면, 장자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 개는 그 완전히 잘 도려내어져서 근육 한 점 없이 피만 묻은 해골을 씹으며, 그 굶주림과 허기에 지친 것을 채울 수 있습니까?”
(뽀딸리야경-Potaliya sutta, 맛지마니까야 M54, 전재성님역)

사진 : 개와 뼈다귀
굶주린 개가 해골뼈를 발견하고 먹으려 한다. 그러나 그 해골은 먹을 수 없다. 피만 잔뜩 묻어 있을 뿐 살점하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개뼈다귀 비유와 같은 말이다.
부처님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추구하는 자들에 대하여 굶주리고 허기진 개로 보았다. 그리고 각각적 욕망의 대상에 대하여 피가 잔뜩 묻어 있을 뿐 살점하나 없는 해골바가지로 보았다.
수행자가 깨달았다고 하여 막행막식하는 자는 개와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욕망의 대상은 먹을 것 하나 없고 피로 범벅된 해골바가지와 같다. 그래서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면 할수록 괴로움과 근심과 재난을 야기할 뿐이라 한다.
일곱가지 비유
그런데 경에서 부처님은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에 대하여 해골바가지를 포함하여 무려 10가지의 비유를 들고 있다. 그런 비유가 뽀딸리야경에 언급되어 있는데 일곱가지이다. 이를 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뗏목을 버림이 북방 대승에서는 법도 비법도 버리는 비유로 비약해서 졸지에는 땡중의 악취공까지 왔는데...
뗏목의 버림은 성불의 방편이 아니다. 법과 성불은 대승의 열반에서라면 없어지는 것인지는 몰라도, 그 경우에도 법은 소멸하고 성불만 남는 다는것은 모순이다. 둘다 없어져야 한다.
초기불교의 유여열반은 둘다 소멸한 것이 아니다. 즉 법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법은 개념을 말하는 것인데, 아라한의 개인적 입장에서 인식이 없어지는 것 아닌가! 그런데 대승에서의 법공은 전형적인 악취공으로 개인적 인식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대상을 망상이라하여 무시하는 막행막식의 악취공이라는 것이다. 법공아유이지...
왜? 대승인 선종이 유식으로 말하지 않는지 참 아이러니다.
이런 문장 장 알것이다. <이언진여> <의언진여> 이 말에 대입해서 해석해도 뗏목을 버린다는 해석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뗏목을 버리고 달랑 성불만 남을 수는 없다. 아들이 엄마의 자궁에서 뽕 하고 나왔으니 이제 엄마는 없다는 것이다. 엄마가 없어도 아이 그 자체 존재한다. 엄마가 있어도 그 자체는 존재한다. 그러면 굳이 엄마를 버릴 이유가 어디 있는가?
아라한이 되었다고, 세상을 버렸다고 세상에서 사라지는가? 무슨 억지 설법들이야? 굳이 그런 비유, 더군다나 얼토당토 않는 비유야!
뗏목의 비유는 버림에 대한 비유가 아니라, 대승에서는 의언진여. 이언진여라는 유식의 비유에 더 가깝다.
초기불교는 버림이 아니라 방편으로서의 불요의 방편문이라고 생각한다. 버리는 것이 아니라 수행의 경계에서 대상을 버리고 수순하는 수행의 비유이지 목적으로서의 마지막 버림이 아니라는 말이다.
목적지로 해서 버리면 인과적으로 의리도 없고, 무례하고, 결론은 막행막식의 악취공, 지 편의만 취하는 땡중의 지름길이다...()...
다원님 글을 내가 알아듣지 못하겠으니 지우고 새로 쓰주시면 좋겠습니다.
용어를 쓸 때는 그 용어에 대한 주석도 함께 넣어주어야 읽는 사람이 불편치 않겠죠? ㅎㅎㅎ...
이것은 이글을 불편하게 읽으라고 불편하게 쓴 글이오. 내 견해를 쓴글로 안보이오?
공감하면 좋기도 하고 공부가 된사람은 주석이 아니라도 들은바 있어서 알아 들을 것이고...
내 지금까지 주석이나 경전을 인용해서 글써본적도 읍다...
몇가지 용어가 나오기는 한데 주석까지 인용해야 할 일도 아니고... 쯥
이런 글에 주석까지 요구하다니...
저 글도 문장을 보면 억지를 부리듯이 주절거리는 것도 있으나... 생각이 있는 사람은 의도를 알아차릴 것이고...
내 이 글에 흐름이 젊잖고 조리있고, 교학적이고 그렇지 않다는 것이 보일 것인데...
지금 내 말은 단현님한테 하는 소리가 아니여...
단현님도 저 덧글이 나한테 하는 말이 아니고...
단현님이야. 나하고 통화를 하루에 3번씩 하는 분인데...
나보고 성깔 죽이고 좀더 부드럽게 잘 써보라는 이야기고... 칭찬이여...
내가 단현님 말 잘 않듣거든... 잘할 수도 있다는 걸 아는 분이라..
다른 사람 욕할 까봐 대신 자신이 먼저 욕 한마디 한 것이여... 고로 의도는 칭찬이고... 관심이 있다는 것이여...
글 끝에 바라 --==> <ㅎㅎㅎ>
참괴는 저기다 숫가락 올리면... 에라이... 그런짓은 마라잉~
나는 성깔 드러버도... 고런 처신은 해본적이 읍다..
가만히 생각하면 해볼수록 드럽고 거시기 한... 한... 머시기...머시기.....다...잉~!
에이그...
단현님이 못알아 들어서 하는 소리로 알면 큰 오해여...
그리고 나는 글쓰기가 재주가 없다고 했고... 글쓰기가 힘들다고 했고... 그런 것은 기대하지마~!
그러면 글쓰지 말라고? 무슨 권리로? 또 무슨 규칙이라고 있는 것이여?
말했잖여... 떡만 먹질 말라고... 내 글이 영판 엉뚱한 것도 아니지만...
모르고 읽으면 에피타이즈고... 알고 읽으면 디저트 같은 것이여...
에이 고만... 힘들다...()...
믿음 – 맹목적인 믿음에서 경험에 근거한 믿음으로 다시 확신에 찬 믿음으로..
신, 구, 의로 항상 바른 행위를 하도록 한다.
탐. 진. 치 – 성냄이 가장 없애기 쉬우며 그 과보 또한 크다.
미워하고 질투하고, 화내고, 악의를 품지 않는다.
학인의 길을 걷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일곱가지 올바른 성품 – 1) 믿음 2) 부끄러워할 줄 안다.
3) 창피스러워할 줄 안다. 4) 많이 배운다. 5) 열심히 노력한다. 6) 사띠를 확립한다. 7) 지혜를 지닌다.
그리고, 항상, 자애의 마음과 연민의 마음, 남과 더불어 기뻐하는 마음, 평정의 마음을 개발한다.
머리깍은 수행자도 아나가리카도, 재가자도 항상 염두에 두며 악하고 불건전 한 것에서 떠나고, 버리고 , 멀리 여의고, 소멸해야 한다.
또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같이 말할 때는 부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내용도 좋고 형식도 완성된 것으로 할려고 노력하는 것이
부처님께 진정 귀의한 사람들이 해야할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늘 행복하시고 향상일로 하시기를
나무석가모니불 _()_
연꽃님의 법문 잘 들었습니다.
뗏목의 비유, 법마저 버리는 것이 아닌 법에 대한 취착을 버리라는 말씀이네요.
열반을 성취하신 부처님께서 왜 계속해서 명상을 하시는지 이해되지 않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지혜 또한 알아차림의 대상이니 열반을 성취한 이후에도 알아차림의 끈을 놓지 않으셨지요.
댓글논쟁 또한 알아차림의 대상이니 이 또한 뗏목의 비유에 등장하는 뗏목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다원님의 좋은 말씀을 100% 모두 이해를 못해서 안타깝습니다.
한자엔 젬병이라서요... 시간나면 네이버 검색해가면서 함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부처님의 법이 널리 퍼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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