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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호세아 6장 1-3절
힘써 여호와를 알자
호세아 선지자는 앞선 장에서 북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을 말했습니다. 북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남유다를 향한 징계와 심판도 경고했는데, 왜 하나님께서 징계와 심판을 말씀하시느냐? 그들의 죄 때문입니다. 특히 호세아서는 하나님을 섬겨야 할 자들이 하나님이 아닌 이방신을 섬기는 것에 대하여 음행하였다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그런 음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호세아 5장 15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그들이 고난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리라”는 말씀을 이루기 위한 것으로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시는 이유, 징계하시고 심판하시는 이유는 죄에서 돌이키도록 하기 위해서요,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구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점에서 고난이나 징계,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을 구하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무익한 것이 아니라 유익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난이 어떻게 유익합니까? 징계와 심판이 어떻게 유익합니까? 그러나 시편 119편에서는 고난의 유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기도 합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즉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은 비록 죄로 말미암은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배운다는 측면에서 분명 유익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고난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유익하게 하실 목적을 가지신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죄로 말미암은 고난이긴 하지만 하나님은 죄조차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광야 40년을 생각해 보십시오. 왜 그들이 광야 40년 길을 걷게 되었는가?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종 때문이요, 그들의 죄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로 말미암은 40년 광야 생활을 어떻게 사용하셨는가 하면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 알도록 하기 위한 과정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죄로 말미암은 벌이지만, 그런 벌조차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한편 인간이란 존재는 고난의 현장, 징계와 진노의 현장에서 낙심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하나님 자신을 구하도록 하기 위해서 고난을 주시고, 징계와 심판을 행하기도 하시는 것인데, 고난과 징계와 심판의 현장에 있는 자들은 너무나도 쉽게 낙담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고난의 유익, 징계와 진노의 유익을 보지 못하고 고난과 징계, 진노만 보기 때문에 그런 것일 수 있습니다. 혹은 고난의 유익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인간의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낙심하게 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낙심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때로는 본문과 같은 말씀을 더하시기도 하시는데, 오늘 본문 1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우선 선지자는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고 말합니다. 이것은 앞서 “...그들이 고난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리라”(호5:15)는 말씀과 관련하여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고난을 받기 전에는 누구에게 구했는가? 호세아 5장 13절에 의하면 에브라임은 앗수르로 가서 야렙 왕에게 사람을 보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강대국에게 도움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도움이 되는가? 전혀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내리시는 징계와 진노로 인한 고난은 하나님보다 더 높고 강한 자가 아니면 해결할 수 없는데, 아무리 강대국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약소국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신 바가 “... 에브라임은 앗수르로 가서 야렙 왕에게 사람을 보내었으나 그가 능히 너희를 고치지 못하겠고 너희 상처를 낫게 하지 못하리라”(호5:13)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북이스라엘은 본격적인 고난을 주시기 전에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혹 고난이 시작되었다 할지라도 고난 중에서라도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박국 3장 2절의 말씀처럼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죄를 버리고 멀어지고 있는 하나님께로 돌이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이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는 요청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이미 우리가 살펴 본 것처럼 북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징계와 진노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만큼 북이스라엘이 완악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노를 내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들에게 고난은 필수적입니다. 그래서 앞서 말한 것처럼 낙심할 수 있습니다. 낙담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저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는 말씀입니다.
계속해서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왜 찢으시는 일이 있는가? 왜 치시는 일이 있는가? 저들의 죄 때문입니다. 저들의 죄에 대한 고집 때문입니다. 돌이키도록 말씀하고 또 말씀하시지만 돌이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호세아 5장 14절에서 에브라임에 대하여 사자와 같은 모습으로 너희를 대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같은 장 12절에서는 내가 에브라임에게 대하여 좀과 같이 하겠다고 도 하셨습니다. 특히 사자와 같다고 할 때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찢으시겠닥, 치시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한 마디로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킬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소망의 말씀을 더하시는데, 찢으시지만 낫게 하겠다는 것이요, 치셨지만 싸매어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낙심할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낙담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고난은 필수적이지만 고난이 고난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너희를 유익하게 하기 때문에 소망을 가지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대하실 때 은혜와 긍휼을 빼고 대하시는 법은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볼 때 엄격하게 대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거기에도 하나님은 은혜와 긍휼의 자리를 남겨 두십니다. 달리 말하면 찢으시는 일이 있고 치시는 일이 있지만 은혜와 긍휼 없이 그렇게 하시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낙심, 우리의 낙담은 찢으시고 치시는 거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자주 한탄의 목소리를 높입니다. 꼭 찢고 치셔야만 했습니까? 꼭 고난의 길을 걸어가야만 합니까? 영광을 길을 걸어가면 안 됩니까? 그러나 찢으셔야 하고 치셔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고난이 있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앞에서 언급한 시편 119편에 근거하자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우리 안에 남아 있는 부패성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살려고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세상의 원리를 따라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고치시기 위해서 찢으시고 치시는 일이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찢으시고 치시는 일은 결코 우리의 영원한 멸망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잠시 잠깐의 고난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천상에서 영원한 영광을 입기 위하여 지상에서 잠시 잠깐 고난을 받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죄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는 것이 칭찬 받을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2장 20절에 보면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라는 말씀도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로 말미암은 고난조차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게 되는 유익이 있도록 하십니다. 죄로 말미암은 고난조차도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셔서 우리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신다는 겁니다.
때문에 우리는 언제든지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는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내 모습은 이것 밖에 되지 않는데...” 라고 하면서 미뤄서는 안 됩니다. 혹 하나님께서 찢으시고 치시는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찢으심이 있고 하나님의 치심이 있지만 바로 그 하나님께서 찢으신 것을 낫게 하시고 치신 것을 싸매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2절에서는 찢으셨으나 낫게 하실 것이요,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어떤 이들은 셋째 날 우리를 일으키실 것이라는 말로 인해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표 한다고 설명하지만 칼빈을 비롯하여 개혁자들은 그렇게 풀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칼빈은 그의 주석에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라는 말씀에 대하여 다니엘 7장 25절과 비교를 하는데, 다니엘 7장은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어떤 환상을 보여주신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환상이 무엇을 뜻하지는 번민하게 될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려주게 되는데, 그 해석이 17절 이하의 내용입니다. 대략 정리하자면 네 큰 짐승이 세상에 일어날 것인데, 그것은 네 왕국을 의미합니다. 그 가운데 네 번째 왕국은 앞선 세 왕국과는 달리 무서운 모습을 하고 있고 그들이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될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와서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을 위하여 원한을 풀어 주십니다. 그리고 때가 이르면 성도들이 나라를 얻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때 네 번째 왕국이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는 내용을 설명하는 것이 23절에서 25절입니다. “모신 자가 이처럼 이르되 넷째 짐승은 곧 땅의 넷째 나라인데 이는 다른 나라들과는 달라서 온 천하를 삼키고 밟아 부서뜨릴 것이며 그 열 뿔은 그 나라에서 일어날 열 왕이요 그 후에 또 하나가 일어나리니 그는 먼저 있던 자들과 다르고 또 세 왕을 복종시킬 것이며 그가 장차 지극히 높으신 이를 말로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와 법을 고치고자 할 것이며 성도들은 그의 손에 붙인 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 그러나 누가 오셔서 성도들의 원한을 풀어주시는가? ‘옛적부터 항상 계시 이’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26절과 27절 말씀이 이것입니다. “그러나 심판이 시작되면 그는 권세를 빼앗기고 완전히 멸망할 것이요 나라와 권세와 온 천하 나라들의 위세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거룩한 백성에게 붙인 바 되리니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라 모든 권세 있는 자들이 다 그를 섬기며 복종하리라”
이런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25절에 나오는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라는 표현은 성도의 고난의 시기입니다. 본문의 경우는 ‘이틀 후’, ‘셋째 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만 의미에 있어서는 다르지 않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틀 후에 살리시며 셋째 날에 일으키실 것이지만 살리시고 일으키시기 전에 고난의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1절에서 찢으시고 치시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는 겁니다.
이런 표현은 다니엘서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라 요한계시록에서는 좀 더 다양한 표현으로 나옵니다. 일단 다니엘서와 같은 표현이 요한계시록 12장 14절에 나옵니다.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 여기서 여자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로 갔다고 되어 있고, 거기서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는다고 설명합니다. 광야에서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게 되는데, 동일하게 고난의 때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양육을 받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고난의 때이지만 그것이 곧 양육의 때라는 것입니다. 서두에 광야 40년에 대한 설명과 같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한 때를 1년으로 계산하기도 하고 1일로 계산하기도 합니다.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는 1년으로 계산하면 3년 6개월입니다. 달수로는 마흔 두 달입니다. 날수로는 한 달을 30일로 할 때 일천 이백 육십 일입니다. 그러니까 요한계시록에 보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1년으로 해서 마흔 두 달이라는 표현으로 나오기도 하고, 일천 이백 육십 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한 때를 1일로 계산해서 사흘 반으로, 삼일 반으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몇몇 부분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요한계시록 11장 2절입니다. “성전 바깥 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3절도 보시면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2절의 경우는 고난의 때를 말합니다. 그런데 그 고난의 때에 어떤 일이 있는가? 예언하는 일이 있습니다. 즉 한편으로는 고난의 때이지만 그 고난의 때에 예언, 즉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에서 고난의 때에 양육을 받는다고 했는데, 이 양육이 말씀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1장 9절도 보겠습니다.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보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여기서는 사흘 반이라는 표현으로 나옵니다. 계속해서 11절도 보시면 “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매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9절에서는 시체로 사흘 반 동안 있게 됩니다. 고난의 때입니다. 그러나 11절에서는 그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 살아난다고 설명합니다. 어떤 면에서 오늘 본문의 내용과 가장 흡사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으로 넘어가면 6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천이백육십 일 동안 그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앞에서 본 14절과 같은 내용이지만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1년으로 해서 날 수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런 이해 속에서 다시 본문으로 오시면 이틀 후, 셋째 날이라는 표현은 단지 3일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1년이 될 수도 있고 그 이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비유적인 표현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틀 후에 살리시며 셋째 날에 일으키실 것이라는 것을 통해 비록 고난의 때가 있지만 살리실 때가 있고 일으키실 때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다니엘서나 요한계시록에서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라고 할 때 고난의 시기가 한 때일 때는 어느 정도 참을 수 있는 그런 시기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난의 시기라도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때에 이어 두 때일 때는 한 때보다 긴 시기입니다. 한 때보다 더 긴 시기이기 때문에 더욱 어렵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참을 수 없습니다. 참을 수 없기에 그때서야 비로소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러나 찾는다고 해서 곧바로 응답하시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회개하고 하나님을 찾는 자를 외면하시는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저들의 죄악을 고치시기 위해서, 그리고 그들을 양육하시기 위해서 좀 더 오랜 시간 고난을 주십니다. 그러나 회복시키실 때가 가까워 온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마지막에는 반 때라고 하십니다.
이틀 후에 살리시며 셋째 날 우리를 일으키신다는 표현도 동일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째 날에는 고난 가운데서도 그들 스스로 참습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틀이 되면 고난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찾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로 그때가 하나님께서 그들을 살리시는 때입니다. 그러나 살려주시지만 일으켜주시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고난을 통해 우리를 양육하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럼 언제 일으켜 주시는가? 셋째 날입니다. 고난 이후, 고난 가운데 양육 받은 이후 하나님께서는 일으켜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찢으시고 치시는 이유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고치시기 위해서입니다. 죄를 고집하는 우리를 고치시기 위해서란 것입니다. 얼마나 죄를 고집하는지 잠시 잠깐의 고난으로는 고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은 생각보다 오랜 시간 고난을 주십니다. 처음에는 고난이 당황스럽지만 참습니다. 그러나 내 힘으로 참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게 만드십니다. 호세아 5장 15절의 말씀처럼 “...그들이 고난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리라”는 말씀을 이루십니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은 용서할 마음을 가지시며 또한 실제로 용서하십니다. 그러나 때를 따라서는 우리의 뿌리 깊은 죄를 완전히 뽑기 위하여 고난의 시간을 더하시기도 하십니다.
때문에 우리는 고난의 시간이 길다고 해서 원망 불평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한 때와 두 때를 지나 이제 반 때가 남았다는 것을 알고 소망 가운데 더욱 하나님을 불러야 합니다. 그리고 인내해야 합니다. 계속되는 고난의 때이기 때문에 답답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자기 백성을 일으켜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마르다가 그의 오라비인 나사로가 죽어 나흘이나 지났을 때, 그리고 시체에서는 썩은 냄새가 날 정도가 되었을 때 예수님을 뵌 내용이 있습니다(요11장). 사람 생각에는 시체가 썩어가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아무런 소망이 없는 것처럼 비춰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를 살려주셨습니다. 비록 썩었지만 그래서 냄새가 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능력으로 그를 다시금 살게 하셨던 겁니다. 이런 하나님께서 어떻게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일으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고난의 시간이 긴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짧아서가 아니라 그만큼 우리를 양육시키기 위한 시간으로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왜 예수님께서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까?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능력으로 하자면 죽었다가 한 시간 만에 부활하실 수 있습니다. 혹은 1년 뒤나 그 이후에 살리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한 시간이면 충분한 것입니다. 죽으면 시체가 썩는데, 썩어 없어지고 난 뒤 다시 부활하시면 과연 죽었던 예수 그리스도가 맞는가 의심할 수 있기 때문에 죽었다는 분명한 사실만 확인하는 시간이면 족한 것입니다. 나아가 실제로 죽었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키기 위해서 부활을 삼일 동안 미뤄두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죽은 자도 부활하게 하실 뿐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친히 죽으셨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나셨다면 죽어가는 자신의 몸 된 교회를 내버려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다만 고치시기 위하여 미루는 것처럼 보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마흔 두 달, 일천 이백 육십 일, 사흘 반, 삼일 반 외에도 고난의 때를 천 년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요한계시록 20장에 이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 역시 실제적인 연대가 아니라 비유입니다. 요한계시록 20장을 천년왕국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그리스도의 통치 기간을 천년 동안을 제한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 천이라는 수는 교회의 영원한 복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지상에서 수고하는 동안에 당할 각종 곤란에만 적용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1559, 3권 25장 5).
아울러 요한계시록 20장은 19장 이후 시간적 순서를 따라 나오는 역사가 아니고, 앞서 나온 6장 이하 19장까지의 내용의 핵심을 함축하여 반복하고 있는 부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때문에 6장 이하에 나오는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과 관련된 내용들은 단순히 시기적 순서에 따른 징조를 알리는 것이 아니라, 오가는 모든 세대의 교회가 겪었고 겪게 될 고난을 알리는 것으로 이 모든 것을 천 년이라는 비유로 재차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왜 이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본문 2절에서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신다고 할 때 그 시기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고난의 때가 있다고 할 때, 그것이 우리의 죄로 말미암았다고 할 때, 회복의 궁극적인 시기는 결국 마지막 때라는 것을 염두 해 두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셋째 날 우리를 일으키신 후에는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고 말씀하시는 내용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회복시키신 후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게 된다는 말씀과 함께 궁극적으로는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천상에서 살게 될 내용까지 생각해 볼 수 있는 말씀입니다. 지상의 교회는 전투하는 교회로 있습니다. 전투하는 교회로서 죄와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기 위해 말씀으로 양육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천상의 교회는 승리의 교회입니다. 그때는 하나님 앞에서만 살 수 있게 됩니다. 이 천상의 삶을 위해서 하나님은 지상의 삶을 살게 하시는 겁니다. 바로 고난의 시간을 보내게 하시는 겁니다.
어쨌든 이런 소망과 위로의 말씀을 주심으로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3절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이미 여러 차례 언급한 바가 있지만 저들이 하나님을 떠나 이방신을 섬기고 거짓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는 열매로 가득하게 된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음란한 마음이 저들 안을 가득 채우고 있어서 하나님을 알려고 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난을 통하여 그들 마음 안에 있는 음란한 것들을 제거하십니다. 하나님을 구하도록 만드십니다. 그리고는 그 마음 가운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채워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하여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권면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비록 지금은 짙은 어둠으로 있지만 그는 반드시 새벽에 빛을 비추는 것처럼 그렇게 나타나실 것이란 것입니다. 물론 앞서 살핀 말씀을 생각해 볼 때 당장 빛이 비춰지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밤이 지나고 난 뒤에는 반드시 작은 빛이 비춰 어둠을 서서히 물리칠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역사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비와 같이,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랜 가뭄으로 말미암아 메마르게 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비를 주심으로 땅을 비옥하게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특히 ‘늦은 비’라는 표현은 곡식을 여물고 익게 하는 데 필요한 비로 이해하는데, 열매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비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여호와를 알아야 한다고 할 때는 단지 이방신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 그리고 거짓 예배를 버리고 참된 예배로 나아오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자리까지 나아도록 하실 목적을 가지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여호와를 알라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실 때는 목적하시는 바가 있습니다. 에베소서 1장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고 우리를 택하여 부르셨습니다. 그런 우리가 거룩하고 흠이 없는 방향이 아니라 그 반대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죄만 짓고 있다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가만두실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고치십니다. 고치기 위해서 징계하십니다. 고난을 주십니다. 때문에 고난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치기 위한 징계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징계 가운데서 우리는 여호와 알기를 힘써야 합니다. 왜냐하면 죄의 일부분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부재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만이 우리의 생명의 시작이고, 하나님을 아는 것만이 시작된 생명으로 하여금 풍성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영생은 곧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는 것입니다(요17:3).
우리는 우리 평생을 두고 하나님 알기를 소망해야 하고, 또한 실제로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힘을 써야 합니다. 이 땅을 살아가기 때문에 이 땅에서 필요한 지식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필요한 지식이 영생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아는 지식, 그리고 그 지식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을 계시하신 이 말씀 안에서만 영생이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 아는 일에 힘을 써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