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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을 버리지 않는 선지자
예레미야애가 3장 19-39절
이란에서 2007년에 17세 ‘발랄’이 다른 청년과 싸우던 중에 격분하여 상대방을 살해해서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7년 후, 사형 집행 당일에 피해자 부모님도 자식을 죽인 살인범을 처형하는 장면을 보기 위해 사형장에 참석했었습니다. 피해자 아버지는 발랄에게 ‘마지막으로 할 말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 살인범은 ‘부모님을 봐서라도 살려 달라.’고 말했습니다. 피해자 어머니는 화가 나서 사형수 따귀를 치면서 ‘너는 우리에게 무슨 자비를 보여주었냐?’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잠시 있다가 한 마디 하길, ‘우리는 너를 용서한다.’라는 말을 남기고, 사형수 의자를 빼서 사형시키는 대신 목에 밧줄을 풀어주었습니다. 이 장면은 TV중계가 되어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본문은 예레미야애가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락입니다. 1-3장까지는 무너진 예루살렘을 목격했던 것에 대한 비참한 현실을 토로한 내용이었습니다. 본문에서는 비참한 현실에 낙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희망과 믿음으로 바뀌는 극적인 전환이 나타납니다. 성벽과 성전이 파괴된 현장에서 탄식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고백과, 무너진 터를 회복시키실 하나님에 대한 소망으로 바뀌어 나타납니다.
성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찬양(19-24)
선지자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마음에 품고 새로운 희망을 가집니다. 하나님께서 성실하신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치욕을 참으며 하나님께서 베푸실 구원의 때를 잠잠히 기다려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신속하게 인자를 베푸실 것입니다.
19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20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21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22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23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24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19-24)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비참한 멸망인 하나님의 심판을 보고 울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이 이렇게 심각한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고 나서, 하나님의 징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완전히 진멸되는 않는 사실에 대해서 오히려 감사했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가 품은 소망은 당면한 재난과 참상을 경감시킨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을 의지하지 않으면 가질 수 없는 마음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파괴 되었어도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선하신 분이십니다. 그렇게 하신 행하신 일도 옳으신 분입니다.
⑴ 고통을 기억해 달라는 선지자(19-21)
선지자는 하나님께 이스라엘이 당하는 고난과 재난을 기억해달라고 강청합니다. 하나님께서 아주 철저하게 버리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당하고 있는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동일시하면서, 자기 문제처럼 아파하면서 이스라엘을 향해 회개하자고 부르짖었습니다. 이제 선지자는 고통스런 상황에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기억하소서!’는 ‘은혜를 베풀어 달라’는 기도합니다. ‘기억’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의 시작이며 하나님의 구원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고통당하는 것을 보시고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기억하셨습니다. 이로써 출애굽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고난을 기억해달라고, 그리고 구원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선지자는 ‘내 마음이 반드시 기억한다’고 고백하는 동시에 낙담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여기서 선지자가 기억하는 것은 고난과 재난이었지만, 이것을 마음에 담아두었기 때문에 소망이 되었다면서 갑자기 분위기를 전환합니다(21). 이것은 하나님께서 소유하신 사랑의 성품들이었습니다.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기억하며 소망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⑵ 긍휼하심을 고백한 선지자(22-23)
선지자는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끝이 없다고 고백하는데, 직역하면 ‘하나님의 자비로 참으로 우리는 끝나지 않습니다. 그의 긍휼은 참으로 멈추지 않습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끝이 없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자비와 긍휼은 하나님의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34:6-7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신 인자 그리고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고 소개하십니다. 선지자는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으로 인해 현재는 힘들지만, 자신들이 완전히 망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침마다 새롭다’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증거들을 날마다 새롭게 경험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성실함이 크다’라는 말은 하나님께 대한 신뢰의 고백과 찬미로 하나님이 성실하시기 때문에 약속을 반드시 지키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때리셨지만,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자비를 풍성하게 내려 주실 분이기 때문입니다.
⑶ 절망에서 소망을 보는 선지자(24)
선지자는 비참한 상황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소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스스로에게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라고 하며, 그 때문에 자신은 끝까지 소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를 바라리라’(24)는 ‘나의 소망이 되었다’(21)와 동일한 의미의 문장입니다. ‘여호와가 나의 기업’은 세상의 모든 기업을 빼앗겨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허락하실 기업은 남아 있다는 의미입니다. 선지자는 이것을 믿고 끝까지 기다리겠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믿음에 대한 태도를 보면서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 환경만 바라보면 아무런 희망이 없고 절망만 보일 뿐이지만 모든 성도들이 희망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면 그곳에서 희망의 불빛이 비추어진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징계 중에도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이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호세아서 6: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너무 힘이 들더라도 잠시 하늘을 바라보며 끝까지 하나님의 긍휼을 기다려야 합니다.
성도들이 실천해야 할 일들(25-30)
하나님께서는 긍휼을 베푸실 때, 사람들이 원하고 길들려지지 않은 방식으로 은혜를 내려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이 몇 번 실패했다고, 성도를 향해 기대를 버리진 않으십니다. 끝까지 성도들을 바라보시면서 소망과 기대를 가지고 계십니다.
25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26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27사람은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28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그에게 메우셨음이라 29그대의 입을 땅의 티끌에 댈지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지로다 30자기를 치는 자에게 뺨을 돌려대어 치욕으로 배불릴지어다(25-30)
징계를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차피 받아야할 징계라면 달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징계를 받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긍휼을 기다리는 동안 태도로 기다려야 할지에 대해 소개합니다. 특히 본문 25-27절에서는 동일한 형식으로 세 가지 좋은 방법을 제시합니다.
⑴ 여호와의 선하심을 기다림(25-26)
선지자는 여호와를 기다리고 찾는 자들에게 그는 선하신 분이라고 찬양합니다. 좋은 것을 잊어버렸는데(17), 좋은 것 되시는 여호와를 다시 기다리고 찾습니다(25). ‘여호와를 구하다’는 ‘여호와께 묻고 도움을 요청한다’는 의미입니다. 계속해서 기다림의 동기가 이어집니다(26). 화자는 잠잠히 여호와의 구원을 기다리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시간이 시작될 때까지, 즉 구원을 하나님의 주권에 맡겨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할 때,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태복음 6:6)고 하셨습니다. 조용한 시간에 오직 하나님과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의미로 선지자는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⑵ 여호와의 해방을 기다림(27-28)
선지자는 젊었을 때는 멍에를 메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27). ‘멍에’는 노예나 포로를 상징합니다. 누구나 멍에는 맺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멍에를 젊었을 때 메는 것이 좋다’는 것은 아직 어려움을 견딜만한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늙어서 당하면 자신의 몸도 지탱할 힘도 없는데 고난까지 겹치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래서 조금이라도 젊은 나이에 겪는 것이 좋다는 의미입니다. 멍에에 대한 것이 이어 지는데, 홀로 조용히 그 멍에를 묵묵히 감당하라고 말합니다(28). 이 멍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 때문에 놓으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풀어주실 때까지 감당해야 합니다. 여기서의 침묵은 절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징벌의 시간을 끝내고 다시 구원을 시작하실 날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기다리는 것으로 곧 희망의 시간입니다.
⑶ 여호와의 소망을 기다림(29-30)
선지자는 ‘입을 티끌에 둔다’(29)는 의미는 얼굴을 땅바닥에 붙여야 한다는 표현입니다. 즉 이것은 자신을 최대한 낮추는 행동입니다. 이렇게 최대한 낮추고 침묵하며 견디는 것은 혹시 여호와가 구원해주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철저히 낮아져서 하나님의 처분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다고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회복하신다는 보장은 없지만, 아주 조심스럽게 작은 소망이라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이런 기간 동안에 받는 치욕도 견디라는 의미입니다(30). 왜냐하면 이런 치욕은 죄를 범한 이스라엘 백성이 감당해야할 몫이며, 이런 치욕의 기간이 지나야 비로소 여호와의 구원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선지자의 모습에서 고난을 대하는 좋은 자세를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와 긍휼을 믿고 지금의 상황들, 심지어 치욕까지도 잘 견디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도 자신의 죄악을 하나도 빠짐없이 낱낱이 아뢰는 동시에, 하나님께로부터 용서와 구원이 임하신 것을 믿고 잠잠히 기다려야 합니다.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고난 중에 있는 사람들과 죽음의 길을 가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함께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죄에 대해 의로우신 하나님(31-36)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위한 심판, 징계를 위한 징계를 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자하심과 긍휼하심 때문에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죄인들을 위해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로 십자가의 은혜를 요청할 만큼에 가난하고 애통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31이는 주께서 영원하도록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며 32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33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34세상에 있는 모든 갇힌 자들을 발로 밟는 것과 35지존자의 얼굴 앞에서 사람의 재판을 굽게 하는 것과 36사람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것은 다 주께서 기쁘게 보시는 것이 아니로다(31-36)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이 고생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럼에도 자녀들에게 징계하신 것은 죄악으로 인해 더 이상이 기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긍휼도 베풀어 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⑴ 긍휼하게 여기실 하나님을 소망(31-32)
본문에서는 ‘왜냐하면’으로 시작하면서, 현재의 고통과 고난을 왜 참고 기다려야 하는지 이유를 설명합니다. 주님께서 영원히 이스라엘을 내쫓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70년 뒤에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돌아오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를 징계하시지만 영원히 버리는 분이 아니십니다. 고통스럽게 하실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인자하심이 많기 때문에 끝내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⑵ 본심은 자녀를 사랑하는 하나님(33)
선지자는 인간을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는 게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아무리 범죄한 이스라엘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을 벌하는 것을 기뻐하시지는 않습니다. 즉, 현재 이스라엘에게 내려진 고난과 슬픔은 이스라엘의 죄 때문이지 하나님의 변덕이나 악함 때문이 아닙니다.
⑶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세 가지(34-36)
세상이 혼란스러운 가운데도 성도들은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세 가지 악한 행동을 언급합니다. 이 행동은 하나님의 정의로운 성품과 연결됩니다. 어두운 세상 속에서도 성도들은 힘들고 어렵더라도 바른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① 갇힌 자를 밟는 것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것 중, 첫 번째, 세상의 모든 갇힌 자를 발로 밟는 것입니다. 여기서 갇힌 자는 포로로 끌려온 자들입니다. 그들은 포로로 끌려온 약자입니다. 약자를 학대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시편 68:5-6에서는 여호와가 특별히 돌보신 사람들이 고아와 과부와 함께 갇힌 자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발로 밟는 것’은 학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약자에 대한 학대를 하나님께서는 결코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② 재판을 굽게 하는 것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두 번째, 지존자의 얼굴 앞에서 사람의 재판을 굽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정의를 훼손한다는 의미입니다. 재판은 하나님의 정의를 이 세상에 드러내는 기본적인 제도입니다. 그런데 이런 행동을 이스라엘은 몰래도 아니고 뻔뻔스럽게 하나님이 보시는 앞에서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하나님의 심판을 좌초한 것입니다. ③ 억울한 재판하는 것 마지막으로 재판과 연결된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재판을 억울하게 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십니다. 이런 악한 행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지도자나 힘 있는 자들입니다. 지도자들이 솔선수범해야 하지만 앞장서서 재판으로 악을 행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선지자는 특별히 힘 있는 자들에게 약자들을 억울하게 만들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지금까지 선지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 가운데 기억해야할 것은 하나님의 심판은 우연히 진행된 것이나 강대국 바벨론의 횡포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난을 받은 하나님께서 재판장으로 공정하게 심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인정해야만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강조(37-39)
부모님들은 자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마음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이 잘못된 것을 보면 가슴이 아파합니다. 때로는 자녀가 지나치다 싶으면 채벌하기도 하지만, 자녀를 벌하면서 마음이 좋은 부모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책망하실 때 동일합니다.
37주의 명령이 아니면 누가 이것을 능히 말하여 이루게 할 수 있으랴 38화와 복이 지존자의 입으로부터 나오지 아니하느냐 39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 죄들 때문에 벌을 받나니 어찌 원망하랴(37-39)
하나님의 심판은 정치적인 희생양이 아니라 죄에 대한 대가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바벨론에 심판당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대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하나님께 대한 신뢰로부터 시작합니다.
⑴ 비극적인 명령하신 하나님(37)
선지자는 다시 자신들에게 일어난 재난과 비극이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말한 것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명령은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비극적인 일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비극적인 것을 명령하신 분이지만 그러한 일들을 기뻐하신 분은 아닙니다.
⑵ 화복을 주관하신 하나님(38)
선지자는 이제 화와 복이 동일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다고 고백합니다. 결국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받고 있는 벌은 자신들의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다시 고백하는 셈입니다. 그러면서 선지자는 산 사람이 어찌 불평하는냐고 합니다. 여기서 비록 현실은 힘들지만, 그래도 살아있는 것에만도 감사하는 선지자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⑶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말 것(39)
결국 선지자로 하여금 끔찍한 슬픔 가운데서도 희망을 가지게 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과 진실하심을 의지하는 믿음입니다. 이런 선지자의 믿음은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이 배워야 할 참 신앙의 모습입니다.
선지자는 고난 중에도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소망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는 사실입니다.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회개하는 백성들을 향해 긍휼과 인자가 무궁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변함없는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반드시 회복시킬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힘겹더라도 마음을 다해 주께 온전히 돌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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