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섶길 진위현길
진위역 - 에바다 - 진위공원 - 진위도서관 - 가곡리 - 이곡마을 - 진위초교 - 진위면사무소
6km, 2시간
진위역에서 출발전 준비운동
견산리성 뒤마을을 하북리라고 했다. 하북리의 자연마을은 성뒤(1리)·
대정촌(2리)·새마을촌(3리), 본래 성뒤는 광주이씨 동족마을이었다.
해방 전 하북은 30여 호에 불과했고 일제강점기 철길 건너편에 대정촌이 개척되면서
두 개 마을로 늘었고,1973년 경 하북1리에 국도가 확장되면서 새로 마을을 형성해
세 개가 됐으며,홍원제지 등 공장설립으로 가구가 늘어나 네 개로 분할됐다.
근대 이전만 해도 하북리는 오산천을 따라 바닷물이 유입되고 갯골이 형성됐던 마을이다.
당시에는 하천을 따라서 갈곶리까지 배가 들어갔으며 갈곶리 주변의 나루에서는
소금·젓갈·어물이 교역됐다. 바닷물이 들어오던 간석지가 개간된 것은 일제강점기였다.
하북리에서 간석지가 가장 많았던 곳은 대정촌 일대였다. 일제는 빈농들을 동원해
대정촌일대를 개간해 동양척식(주)에게 관리를 맡겼다. 동척농장이 만들어지자
몰려든 빈농들은 농장 주변에 집을 짓고 마을을 형성했다. 그래서 ‘벌말’이라고도 불렀고
대정(1912∼1926) 연간에 형성됐다고 해서 ‘대정촌’이라고도 했다.
하북리는 일제 말 공출미와 공출가마니를 집하하던 마을이다. 집하 장소는 하북육교 아래인데,
일제 말에는 하북장이 생겨났다. 하북장은 해방 후 시들해졌지만 한국전쟁 전까지는
명맥이 유지됐다. 이 마을은 근래 근교농업으로 유명하다. 특히 대정촌은 방울토마토·오이·
애호박 등을 재배해 출하하고 있다.
*자료출처 : 평택시사
하북감리교회
홍원제지
견산1리를 볼미라고 하는데 주민들은 벌미. 벌말이라고 부른다.
벌미는 벌판을 내다보는 위치에 마을이 형성돼 유래되었고 그래서 볼견자를 써서 견산이라고 한다.
견산리 일대는 조선후기 궁방전과 둔전이 많았다고 한다 . 궁방전·둔전은 일제강점기
총독부에 귀속돼 일본인 농업이민자들이나 동척농장이 됐다. 경작지가 농민들에게
분급된 것은 해방 후 적산농지불하와 농기개혁 이후다.
진위천과 신리 마을이 보이고
걷기 좋은 오솔길을 따라
진위 도서관
진위공원
가곡1리를 신가곡이라 부르며 신가곡은 경주이씨 상서공파의 사패지였다
상서공파는 조선 선조때 이항복 이후 크게 성장 하는데 신가곡은 이항복의 현손인
이정좌의 후손들이 세거했다
고종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은 후손이 없어 이석영을 양자로 들여 재산을 상속했다
1910년 이회영을 비롯해 6형제는 독립운동을 위해 전재산을 정리한다
노불리스 오불리주를 실천한 경주이씨 6형제의 이야기이다
이석영이 받은 신가곡 일대의 땅도 이때 제주 고씨에게 매각 되었다
지금도 마을 안에 경주이씨 재실이 있고 , 마을 입구에 경주이씨천 이라는 표석이 있다
삼남길
조선시대 대로 중에서 가장 긴 길로서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삼남지방을
관통하는 삼남길 이다.
그 길이 천리에 달한다고 하는데 해남부터 강진, 나주, 광주, 완주, 논산,
공주, 천안, 평택, 수원을 거처 한양(서울)에 이른다
1900년 4월7일 설립된 진위초교
진위군의 중심지였고 1926년 까지 군청 소재지 이었다
봉남리는 무봉산 남쪽 마을 이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