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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21세기 선교지도력
1. 누가 지도자를 만드는가
지도자는 태어나는가 또는 만들어지는가?
전자일 경우 세습제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그러나 역사 속의 대부분의 지도자는 후자에 속한다. 비록 세습제일지라도 바른 지도자는 만들어지는 것이다.
지도자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그가 처한 상황 속에서 만들어진다. 곧 그가 자란 환경, 문화, 그리고 당시 상황이 그 지도자의 형태를 규정짓게 한다.
농경사회에서는 주로 외침을 막기 위한 지도력이 필요했고, 산업사회에서는 개인과 집단의 이익추구에 부합하는 지도자상이 요구되었다. 군사문화에서는 피라미드 구조에 맞게, 또 그 조직 속에서 파생될 수밖에 없었다.
지식정보사회에서는 지도자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사이버스페이스(가상 공간 또는 정보공간)에서 만들어진다. 가상공간에서 소리 없이 만들어지고 있다. 그것은 기존의 모든 조직을 해체하면서 기존 지도자의 모습을 전혀 닮지 않는 새 패러다임을 가지고 출현한다. 과거 지도자의 그늘에서 수련받는 것도 아니요, 어떤 스승 밑에서 수학을 한 것도 아닌, 사이버 공간에서 홀연히 나타나는 지도자, 그것이 오늘과 미래의 지도자의 모습이다.
사이버스페이스에서 만들어지는 지도자는 그 지도력의 행사도 일찍이 우리가 그 유형을 찾을 수 없는 전혀 낯선 것이다. 영향력을 행사하는 스타일이나, 목적을 이끌어 가는 그 힘도 가공하리만큼 위력이 있고 때로는 엉뚱하기도 하다. 어떤 때는 인물이 아닌 그 어 떤 것이 지도력을 발휘하기도 할 것이기 때문에 불안과 혼란은 상당 기간 계속될 것이다.
한 사람의 지도력이나, 피라미드 구조 속의 리더십 행사는 어차피 그 한계를 드러낸 지 오래다. 정보분석, 정보유통의 광역화, 정보생산의 전문화를 주도하지 못할 경우 그 지도력은 이미 폐기물이다. 아무도 기다려 주지 않고, 아무도 물어오지 않고, 아무도 관심 가져주지 않는 그 지도력은 과거 속으로 사라졌다.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한 대로 같은 냇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기 때문이다.
사이버스페이스에서 만들어진 지도력은 어떻게 행사될 것인가.
입력된 프로그램에 의해서 신경망처럼 반응하며 최선의 선택을 위해서 생각의 속도로 확산될 것이다. 가치관의 판단도,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결단도 신경반응처럼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미래의 지도자는 리더십 실행 과정이 디지털 프로그램에 의해서 그 정당성, 그 개연성이 진행과정에서 스스로 점검 받으면서 이루어나갈 것이다. 그것은 살아있는 신경망을 통해서 창의력을 발휘하는 하이터치 리더십이다.
기존의 리더십 교본은 통째로 폐기 처분해야 할 때가 이미 지났다. 지도자의 덕목이나 역할이 새로 논의되어야 할 때다.
우선 미래의 지도자가 만들어지고 있는 그 토양을 살피고 그 새싹부터 잘 가꾸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가꾼다고 하는 말은 다분히 인위적이고 제도적인 뉘앙스가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토양이란 환경이며 문화를 말한다. 곧 정신을 말한다.
바른 정신문화의 토양을 가꾸어 놓을 때 미래의 지도자들은 그 바른 토양에 뿌리를 내리고 다양하게 자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농경문화의 비유로 표현한 것에 신선감이 없을 줄 안다. 이 토양을 곧 사이버스페이스의 무한한 정신적 공간으로 확대할 때 이해의 폭이 균형을 나타낼 줄 안다.
이제 우리는 미래의 지도자를 위한 사이버스페이스의 토양을 진단하고 그 오염도를 낮추어 가는 데 온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오늘 우리가 소프트웨어다, 하드웨어다 하고 눈을 부라리고 있는 동안 우리의 세포는 초광속으로 사멸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소름끼친다.
사이버스페이스에서의 정신적 토양을 가꾸는 것, 그것은 미래를 준비하는 첫 단추가 될 것이다.
2. 미래는 인물이다
리차드 울프는 그의 저서(Man at the Top)에서 지도자의 궁핍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플라톤은 미래의 지도자를 이렇게 비유했다. 선장이 나이 많아 귀도 어둡고 눈도 멀자 선원들은 그 선장이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죽어야 그 자리를 차지하고, 또 각자에게 승진의 기회가 오기 때문이다. 선장이 되려면 지리와 천문학에 밝아야 하고, 또 항해술을 익혀야 하는데 그런 것에는 관심 없고 그 자리만 노리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모습이 만에 하나 한국교회의 모습이라면 우리의 미래는 어떤 빛깔로 열릴 것인가.
앨빈 토플러는 미래의 힘을 정보로 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이동(power shift)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 힘의 이동이 곧 변화라는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무엇이 그 힘을 다스릴 수 있는가. 물론 인간이다. 정보의 생산도, 유통도, 저장도 인간이 그 중심에 있다. 디지털 신경망도 운용은 인간이 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운용하는 인간의 인격, 그 윤리 수준만큼 그 프로그램이 창조되기 때문이다.
이는 구속사적 시각의 역사인식과 맥을 같이한다. 하나님은 시대에 따라 인간(인물)을 그의 파트너로 쓰신다.
이스라엘 민족의 남북왕조 말기에 기라성 같은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그 민족의 미래에 대하여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했다. 이는 곧 사무엘 시대부터 대선지자의 주변에 생도들이 모여들어 공동생활을 하며 신앙과 학문을 닦아왔기 때문에 가능했다. 즉 인물을 기르고 있었다는 말이다. 바로 그 인물들이 민족의 위기에 눈부신 활약을 한 것이다.
오늘의 한국교회의 모습은 어떠한가. 영향력 있는 대지도자가 있으며, 또 그 지도자 주변에 인격적 감화를 받고 있는 차세대들이 얼마나 되며, 새 인물을 탄생시킬 만한 영적 환경과 문화적 토양이 조성되어 있는가.
오늘의 선지학원(신학교)들은 어떠한가. 2백여 년 전의 서구신학교의 커리큘럼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지 않는가. 과거 지향적인 낡은 지식과 학습방법으로 어떻게 첨예화된 영적 전쟁의 군사를 배출시킬 수 있단 말인가. 한국교회의 지난 한 세기는 서구학문의 유통업 종사자들로 황금시대를 이루었다. 이제 그 시대는 끝났다. 이 땅에 외국어 어학수준이 향상되었고, 다양한 번역서들이 출판되었으며, 인터넷을 통한 학문탐구 영역의 정보가 보편화되었기 때문이다.
신학연구방법 또한 낡았다. 창의성 없는 지식전달식은 미래의 인물을 창출해 낼 수 없다. 기존의 내용 소개식 강의는 엄청난 소비행위다. 그런 자료와 정보는 이미 사이버스페이스에 공유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안은 무엇인가.
미래사회를 바르게 이끌 미래 지향적이고 창조적인 지도자 훈련이 시급하다. 이를 위해서 교회는 과감한 지원이 있어야 한다. 한국교회는 인적 자원이 풍부하다. 이 장점을 지혜롭게 활용해야 한다. 기존의 지도자 양성 기관을 혁신시켜야 한다. 혁명적 구조조정이 있어야 하고 새 시대에 맞는 근본적인 개혁이 있어야 한다.
지도자 훈련을 위한 새로운 기관의 탄생은 필연일지 모른다. 신앙의 지성과 감성을 갖춘, 그리고 정보마인드가 있는 지도자를 배출하지 못하면 우리의 미래는 암울한 잿빛일 수밖에 없다.
초고속 정보망이 구축되고, 정보유통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시시각각 생활의 변화를 경험하고 있는 오늘의 세대는 어떤 모습인가. 초고속 정보망을 타고 악의 세력은 가공할 위력으로 확산되고 있지 않는가. 인간을 위해 개발된 첨단기기들이 오히려 인간을 망가뜨리고 있지 않는가.
인간이 만든 덫에 인간이 걸리지 않기 위해서는 미래를 경영할 바른 인물을 길러야 한다. 바른 인물이 바른 미래를 전개하기 때문이다.
3. 정보사회 다음은 무엇이 올 것인가?
엄청난 충격으로 소용돌이쳤던 제3의 물결, 그 정보사회의 태양이 서서히 석양을 맞고 있다. 인류가 정보사회에 대한 혜택을 20%밖에 누리지 못하고 있는데 '90년대를 정점으로 이제 그 사회는 다음 물결에 자리를 내어 줄 차례다.
20년 전에 시작된 사회가 이렇게 단명한 것은 바로 사회유형의 변화속도가 가속화되어 가고 있음을 말한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로, 정보사회는 빠르게 빠르게 변화되었다.
이제 그 다음은 어떤 유형의 사회가 도래할 것인가.
메이너드(H.B. Maynard)와 머턴스(S.E. Mehrtens)는 「제4의 물결」(The Fourth Wave)에서 삶의 통합이 이루어질 것을 예측하였다. 따라서 생명에 대한 책임과 공동창조를 위한 컨소시엄을 예견했다.
최근 인간게놈 프로젝트가 발표되면서 그것이 생명과 인류사회에 미칠 파장을 제4의 물결로 명명하기도 한다.
롤프 옌센(R. Jensen)은 「드림 소사이어티」(The Dream Society)에서 정보사회의 뒤를 이어서 꿈과 감성의 사회가 등장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마치 빙하처럼 천천히 다가오고 있으며 우리가 지혜롭게 대처하지 않으면 그 거대한 빙하에 깔리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렇다고 정보사회의 흔적이 모두 사라지는 것은 물론 아니다. 선진국들은 모두 인터넷의 온라인 상에 연결되어 있고 누가 인터넷 대통령이 되느냐가 두려운 관심사이기도 하다. 곧 정보사회, 후기 산업사회가 공존하는 가운데 감성의 사회를 맞게 되는 것이다.
감성의 사회에서는 상품이 아니라 상품에 담겨있는 ‘멋진 이야기’를 팔아야 한다고 옌센은 말한다. 즉 모험을 즐길 수 있는 상품, 그 이야기, 스포츠나 문화상품이 모험과 연결되는 것이 시장을 점유할 것으로 본다. 따라서 감성시대의 시장은 연대감, 친밀감, 우정과 사랑을 소재로, 마음의 평온을 찾는 것, 자기에 대한 정체 확인, 어떤 신념을 위한 주제들이 삶의 전 영역과 의식의 전 영역에서 요구될 것이라고 봤다.
물질 위주의 프로젝트들은 종지부를 찍을 것이라고 본다. 다만 인간이 환경문제와 사회의 갈등극복, 윤리적 성숙이라는 과제를 함께 풀어갈 때 미래는 밝을 것으로 전망했다.
옌센이 제시한 대안은 녹색전망에 기초한다. 생태환경이 회복되고 자원고갈 등의 인류를 위협하는 요인들이 긍정적인 요인으로 바뀔 때 꿈과 감성이 아름답게 꽃피게 될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렇다. 미래가 아무리 예측할 수 없게 전개되는 사회라 할지라도 그 사회를 밝게 하는 것은 인간의 도덕적 혜안에 달린 것이다.
지금 한국의 인터넷 인구는 1천5백만에 달한다고 한다. 우리 사회에 선을 위한 커뮤니케이션의 엄청난 인프라가 구축된 것이다. 이것은 미국이나 영국 등의 선진국 수준이다. 우리 사회에 선을 심는 데 그만큼 빠르게 작용할 수 있다. 동시에 악이 팽창하는 데도 가공할 만큼 가속화될 수 있는 인프라가 구축된 셈이다.
문제는 꿈과 감성의 시대에 선한 이야기를 창조할 것이냐 아니면 악한 이야기를 창조할 것이냐일 것이다.
꿈과 감성의 씨알은 정신과 영혼이다. 곧 정신과 영혼을 살리는 일은 누가 할 수 있는가. 바로 교회이다. 미래사회를 바르게 꽃피워 열매맺게 해야 할 교회가 깨어 있지 못한다면 ‘외출한 배심원들이 돌아와 내릴 판결’은 비극밖에 기대할 것이 없다.
에릭 홉스봄(E. Hobsbawm)은 「새로운 세기를 위한 인터뷰」(Interview on the New Century)에서 미래는 선택의 시대라고 했다. 엄청나게 다양한 선택의 기회가 주어지는 세기라고 했다.
선택은 누가 하는가. 자기 자신이 하는 것이다. 우리의 미래도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엄숙한 요청 앞에 우리는 지금 서 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오직 하나의 선택이 있을 뿐이다.
4. 선교의 미래 장미빛인가
적색 경보 발령!
전방위에서 동시다발로 터치는 요란한 경보음….
한국 교회 해외선교의 심상찮은 조짐이다.
‘우리 안에 있는 과시적인 선교성과에 대한 강조, 현지문화에 대한 둔감성, 선교사 훈련, 선교연구와 전략, 그리고 국내외 협력분야의 부족 등을 고백한다. 이로 인해 한국선교 내에 낡은 패러다임, 경쟁과 갈등, 중복투자와 비효율성이 존재하게 되었음을 통감한다.’
2000년 8월‘21세기 선교전략회의’선언문의 일부이다. 늦었기는 하지만 이런 문제들이 선교현장의 선교사들과 선교단체 임원들에 의해서 제기되었음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1백40개국에 8천여 명의 선교사가 파송되었고(지난 7년간 파송 수는 100% 증가), 한국 선교사들의 생활비 수준이 서구 선교사들 수준을 넘어서기 시작했고, 사업비 투입이 천문학적 수준으로 증가 추세에 있다. 이에 한국교회는 세계선교가 잘못 번진 산불이 되지 않기 위해서 이렇게 물어야 할 것이다.
어떻게 잡초를 제거할 것인가.
어떻게 새로운 전략을 모색할 것인가.
어떻게 시행착오를 예방할 것인가.
이 세 갈래의 물음을 아우르는 정답 찾기의 대안은 무엇인가.
첫째, 목회자의 선교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이 시급하다. 선교는 교회가 모체이다. 교회 지도자의 선교에 대한 학문적, 성서적, 전략적 접근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 교회 목회자의 수준이 곧 그 선교지의 선교수준이기 때문이다.
둘째, 선교연구소 시대를 열자. 한 세기 가까운 선교역사를 가진 한국교회가 제대로 된 선교연구기관 하나 없다는 것은 기적 중의 기적이다. 급변하는 다중화의 길목에서 선교리서치, 정보의 생산과 유통 그리고 공유는 선교의 인프라에 속한다. 인해전술 식 원시 선교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셋째, 평가제도를 도입하자. 객관적 시각에서 열린 자세로 우리의 현실을 진단하고 분석하는 것은 모든 사역의 ABC에 속한다. 선교 평가단(목회자, 선교학자, 선교전략가, 선교사, 리서치 전문가, 회계사, 국제문제 전문가 등으로 조직)을 상설기구로 설치하여 공동 운영하자. 문화권별, 국가별, 혹은 선교사별 평가결과는 효율적인 선교정책 개발의 나침반이 된다. 곪은 환부를 더 이상 방치하지 말자.
넷째, 선교은행을 설립하자. 선교비의 효과적 집행과 투명한 관리, 그리고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지혜가 필요하다. 선교재정은 수치로 나타낸 선교내용 그 자체이다. 선교재정의 기록, 보존, 분석은 선교의 공신력 제고는 물론 물량선교의 구조조정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다. 금과 은은 차고 넘치는데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 사라질까 두렵다.
다섯째, 도시문화권에 도전하자. 지난 10년간 다행히 한국선교사들은 대도시에 집중 배치되고 있다. 그러나 답답하게도 도시문화권을 공략할 전략은 없다. 즉 그 도시문화를 변혁시킬 수준급 선교사를 파송했는가 하는 물음이다. 안디옥교회는 그 교회에서 가장 역량있는 두 지도자 바나바와 바울을 선교사로 파송하여 그들이 도시문화권에 복음을 전파했다. 이방 도심의 거리를 유리 방황하는 선교사를 더 이상 양산하지 말자.
여섯째, 현지 단체와 협력하자. 선교지에도 현지 선교단체들이 있다. 그 단체들과 자매관계(또는 동반자 관계)를 맺고 컨소시엄을 구축할 때 그 효과는 엄청나다. 한국 선교사 한 가정을 후원하는 선교비로 현지 지도자 10-20명을 쓸 수 있다. 현지의 사역전개에서도 그 효율성이 매우 높다. 현지의 지도력을 육성하고 자립과 자전, 자치의 길을 열어 주는 쌍방향 동역관계일 때 성공적인 토착선교를 이룰 수 있다. 필요할 경우 우리는 비거주 순회선교사제도를 활용할 수 있다. 선교사 파송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
일곱째, 사이버 선교에 대비하자. 땅 끝은 더 이상 지리적 개념이 아니다.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문화권, 그것은 사이버스페이스의 무한한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사교집단들은 오래 전부터 사이버 공간에 침투했다. 이미 국경 없는 영적 전쟁이 치열하다. 한국교회의 21세기 세계선교의 패러다임은 무엇인가. 농경사회의 낡은 무기로 제5물결의 영적 전쟁에 나설 셈인가.
우리 모두가 우리 모두의 미래를 생각하자. 장밋빛 아침을 말이다.
5. 멀티미디어의 충격
뉴미디어의 출현은 우리의 삶의 현장에 충격적인 변화를 던지고 있다.
문자, 음성, 영상, 음악과 데이터를 동시시청은 물론 가공, 처리, 축적까지 하는 멀티미디어(Multi-media)의 등장으로 변화는 초고속으로 휘말려들고 있다.
이와 같은 디지털화에 의한 미디어의 통합으로 기존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게 되었고 노동력의 흡수와 능률 위주의 새 의식 사회를 가져왔다.
우선 멀티미디어는 시청각적인 전달 체계를 통해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을 갖게 한다. 집중력, 동기부여, 흥미, 빠른 인식과 판단을 할 수 있게 하는 이 특성은 우리(수용자나 생산자)로 하여금 열린 마음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일차적 요청이 있다.
이제는 시청각적 기능을 무시한 강의나 설교는 전달과정의 저항뿐 아니라 혐오감마저 유발시키는 시대가 되었다.
다음으로 멀티미디어의 특성은 쌍방향성(Inter-activity)이다. 일방적인 선포 형식의 전달 체계가 아닌 상호 정보교환의 방식으로 소비자(수용자)가 함께 참여하는 열린 마당을 말한다. 이 시대에는 독자나 청중은 더 이상 침묵하는 로보트가 아니다. 수용자가 선택하는 시대, 그것은 소비자의 대혁명이다. 일방통행 시대에는 대 교회, 대 설교자의 탄생이 가능했지만 쌍방향 시대에는 불특정 다수의 선택이 피라미드형의 영웅을 거부하며 그런 영웅들이 서야 할 공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쌍방향 시대에는 소품종 대량생산은 이미 낡은 발상이다. 이제는 다품종 소량생산이 상식이다. 수용자의 선택도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양자택일이 아니라 다종 선택이라는 새로운 흐름이 지배적이다.
쌍방향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혼자 독점하려는 의식을 시급히 버려야 한다. 정보화 시대는 정보를 혼자 독점하고 있을 때 그것은 이미 무용지물이 된다. 정보의 공유, 그것은 열린 마음이 우선되는 성숙한 마인드가 있어야 미래를 창조할 수 있다.
쌍방향 시대는 무엇이나 혼자 하려는 영웅주의자를 순식간에 절해의 고도로 유배시키고 만다. 다원화 사회에서 다양한 분야의 전문성을 혼자 섭렵한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지만 혼자서 그 다양한 분야를 일방적으로 콘트롤하려는 모험은 위험스런 게임이다. 대화, 강의, 설교 등에서 일방적인 방법은 우둔한 소비행위일 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했던 하나님의 미디어, 구약시대 선지자들의 메시지를 담았던 미디어,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쌍방향 대화들은 바로 오늘 우리들에게 신선한 도전을 주는 선교의 도구들이다(출 19:16-19, 겔 1:4-28, 눅 24:13-32).
멀티미디어가 반드시 효율성만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다. 역기능이 있음도 주의해야 한다.
우선 정보의 수명이 단축된다. 그에 따라 정보를 분석하고 판단하는 것도 순간에 이루어져야 한다. 이에 창의성이 저하되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정보의 양도 대량생산되어야 하는 엄청난 부담이 있다. 이에 질적 격차에서 오는 대인관계가 미묘해진다. 양과 질에서 격차가 발생하고 필연적으로 치열한 경쟁이 따른다. 이런 분위기에서 인간들은 소외, 초조, 불안 등이 가중되어 스트레스가 쌓이고 마침내 환자가 된다.
윤리의식은 어떻게 될 것인가. 섹스, 폭력 등은 가상공간에서 즐기게 되고 그로 인해 상상과 현실을 구별 못하는 비극이 일어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멀티미디어를 통해서 프라이버시 침해, 시스템 파괴와 변경, 소거 및 불법사용이 보편화될 것이다. 전통적 윤리관은 이미 옛 윤리교과서로 도피해 버린 도덕 부재 공간이 무섭게 덮쳐오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멀티미디어 시대 그 한가운데 서 있는 오늘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첫째, 멀티미디어의 순기능을 최대한 활용하는 지혜를 서둘러 개발하자.
둘째, 이 미래의 미디어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를 심각한 문제로 수용하자.
셋째,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윤리감각을 익히자.
6. 거시적 시각으로
사물인식에는 두 시점이 있다.
미시적 시각과 거시적 시각이다.
미시적 시각은 자신의 주변에서 출발하여 제한된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고방식이다. 흔히들 소시민적 의식이라고 본다.
거시적 시각이란 그 사물인식의 대상을 통전적으로 확산하는 시각을 말한다. 때로는 자신을 초월하기까지 하는 이 시각은 흔히들 지도자의 덕목에 필수로 넣는다.
우리는 사물을 미시적으로 보는 데 익숙하다. 그것은 우리의 시야가 자신의 주변으로부터 처음 열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해관계에 예민하고, 또 자신의 체험의 범주에 맹목적으로 확신을 갖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미래가 불안할수록, 또 사회구조가 그 본래적 소임을 다하고 있지 못할 때, 그리고 도덕적 해이가 심각할 때 더 지배적이다.
우리는 이 현상을 극복해야 한다. 왜냐하면, 미래는 변화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변화의 시대에는 거시적 시각이어야 살아남을 수 있으며 창조적 대응을 할 수 있다.
기원 전 6백여 년 경 다니엘은 한 시대와 한 민족을 넘어서 영원한 메시야 왕국을 바라보았다. 그가 바로 거시적 시각을 가지고 미래를 예측했다. 곧 오늘의 지식 정보사회를 내다본 것이다.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단 12:4).
왜 미래에 거시적 시각이 요청되는가.
첫째, 거시적 시각은 나의 세계에서 우리의 세계로 이끌어 주기 때문이다.
정보사회는 더불어 살 수밖에 없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나만의 세계가 아닌 곧 공동체의 삶이 우선되는 사회다. 자신의 이해관계에만 집착하고 있으면 그 밖의 세계는 모두가 암흑일 뿐이다. 또한 자신의 이익을 벗어난 모든 것은 부정적인 시각으로 볼 수밖에 없는 비극에 빠진다. 이런 함정은 자신뿐 아니라 공동체를 오염시켜 공멸을 자초할 수 있는 암적 요소이다.
둘째, 거시적 시각은 균형을 찾아주기 때문이다.
햇빛이 있으면 반드시 그늘이 있기 마련이다. 사물인식의 바른 자세는 바로 편협의 노예에서 해방되어 균형을 찾는 데 있다. 긍정적인 면이 있으면 또 부정적인 면도 수용해야 한다. 이 두 면은 긴장과 창조의 두 바퀴요, 두 날개며, 두 기둥이다. 부분에 집착한 나머지 통전적인 것, 즉 온전한 것을 놓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몸체는 인식 못한 채 지극히 작은 한 지체만을 붙들고 그것이 모든 것인 양 핏대를 올리는 부류들을 볼 때는 연민의 정마저 느끼게 된다.
셋째, 거시적 시각은 미래를 창조한다.
변화의 소용돌이에 스트레스를 받는 무리 중에 과거로 도피하려는 유형이 있다. 또한 기득권자들은 오늘에 안주하려 한다. 그것은 빅뱅과도 같이 총체적으로 밀려오는 미래변화의 실체를 바로 인식하지 못한 데서 오는 미시적 시각의 부류들이다. 멀리, 그리고 넓고, 높게 내다볼 줄 아는 거시적 시각만이 오늘도 어제도 내일도 아름다운 장밋빛으로 보장할 것이다.
거시적 시각, 그것은 고독한 행진이다. 그렇다. 그것은 당장 우리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후대, 또는 여러 대가 지난 후에 비로소 열매를 맺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인내가 필요하다. 조금은 참고 견디며, 때로는 넉넉한 너그러움으로, 그리고 ‘나’만의 입장에서 ‘우리’라는 평균대 위에서 서로를 이해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거시적 사고는 곧 거시적 생활을 낳는다.
지금 우리 사회는 바로 이 거시적인 실존을 실험할 수 있는 적합한 풍토가 조성되었다. 이는 미래창조의 기회가 온 것이다.
기회는 오직 그것을 잡는 자의 것이다.
7. 뉴 밀레니엄 뉴 밸런스
문 두드리는 소리
다급한 발자국 소리
일제히 비상하는 날개짓들 ....
누가 우리를 깨우는가.
새 천년 맞이의 요란스러움이 잠자고 있는 우리를 일깨우고 있다.
분명 그것은 들뜬 축제분위기 같은데 정작 그렇지가 않다. 모두의 눈빛에, 얼굴에 불안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 단순한 밀레니엄의 기원 표시가 아니다.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 구비치는 분수령이다. 그것 자체가 얼마나 큰 충격인가.
그뿐이랴. 농경사회에서 정보사회로 뒤집어지는 빅뱅을 맞는 사람들은 얼마나 황당할 것인가. 사실 정보화를 수용할 인프라 구축이 없는 풍토에서의 이런 급변은 예측할 수 없는 불안과 공포의 소용돌이다.
차라리 변화를 거부한 채 살아갈 수 없을까. 더 이상의 욕심도, 야망도, 오르고픈 꿈도 사치스럽다. 그냥 오늘에 만족하는 실존은 어떤가.
정체된 실존, 그것은 결국 단절이며, 고립일 수밖에 없다. 환경이 변해가고 있는데 나만이 그냥 오늘에 취해있다면 심해선 밖의 한 점 고도밖에 되지 않는다.
움직인다는 것, 변한다는 것, 거기에는 부정할 수 없는 원리가 있다. 빠르다는 것, 불확실하다는 것, 총체적이 되는 것, 그래서 우리를 긴장시킨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소용돌이 속에서 어떻게 주체와 객체가 더불어 공존할 수 있을 것인가. 한 건물을 떠받치고 있는 두 기둥처럼, 비상하는 두 날개처럼, 앞으로 나아가는 두 바퀴이듯 말이다.
형식과 내용이
원심운동과 구심운동이
개미 스타일과 거미 스타일이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피라밋 구조와 네트워킹 구조가
세계화와 한 민족이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이
신지식과 기초과학이
개인과 집단이
풍요와 빈곤이
소유와 무소유가
타문화와 동질문화가
네티즌과 컴맹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낡은 관념으로는 불가능하다. 권력과 돈, 물리적인 것이 힘일 때의 권위주의적 발상으로는 밸런스를 도출해 낼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뉴 밸런스를 창출할 것인가. 점은 선으로 연결하는 것, 이것이 정답이다. 각각의 점들을 그물코로 연결할 때 공동체가 탄생한다. 나에게서 우리에게로의 새로운 관계가 형성된다.
개체만이 강조되던 시대의 폐해를 우리는 뼈저리게 경험해 왔다. 테크닉이 첨예화할수록 우리가 없는 사회에서는 악의 상승, 총체적 비극만이 확산될 뿐이다.
뿐만 아니라 아무리 유익한 것, 절박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 한편에만 무게를 실어주게 되면 균형이 깨지게 된다.
이스라엘의 지도자 예레미야가 여호와께로부터 받은 메시지는 균형잡힌 메시지였다. 즉, 뽑아내고 넘어뜨리는 한편 심고 세우라는 명령이었다.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그에게 여호와께서는 바로 밸런스를 가르쳐주신 것이다.
언어의 기능을 아는 사람일수록 언제나 균형을 깨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 모두가 더불어 사는 지혜이기 때문이다.
뉴 밀레니엄, 그렇다. 앞에 보이는 휘황한 빛만을 움켜잡으려다 난간을 헛디딜까 가슴 졸인다. 그것이 희한하게 새로운 것이라고 할지라도 유황불 속에 뛰어들어 움켜잡으려 해서는 현명하지 못하다.
뉴 밀레니엄, 그렇다. 내가 가만히 떠오르는 태양만 바라보고 서 있으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오직 단절되었던 관계들을 회복할 선의 연결이 시급하다. 수평의 관계, 수직의 관계, 생명과 생명의 관계를…
서둘러 내가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 밸런스를 잡자. 나 때문에 우리가 언밸런스여서는 안된다.
저기 뉴 밀레니엄의 새 아침이 밝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