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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十四回 衞侯朔抗王入國 齊襄公出獵遇鬼
제14회: 위혜공이 천자에 항거하여 복위하고 제양공이 사냥터에서 귀신을 만나다
卻說王姬至齊,與襄公成婚。那王姬生性貞靜幽閒,言動不苟。襄公是個狂淫之輩,不甚相得。王姬在宮數月,備聞襄公淫妹之事,默然自嘆:「似此蔑倫悖理,禽獸不如。吾不幸錯嫁匪人,是吾命也!」鬱鬱成疾,不及一年遂卒。襄公自王姬之死,益無忌憚。心下思想文姜,偽以狩獵為名,不時往禚。遣人往祝邱,密迎文姜到禚,晝夜淫樂。恐魯莊公發怒,欲以兵威脅之。乃親率重兵襲紀,取其郱、鄑、郚三邑之地。兵移酅城,使人告紀侯:「速寫降書,免至滅絕。」紀侯嘆曰:「齊吾世仇。吾不能屈膝仇人之庭,以求苟活也!」乃使夫人伯姬作書,遣人往魯求救。
한편, 왕희(王姬)가 제나라에 와서 제양공과 성혼했다. 왕희는 태어날 때부터 지조가 굳고 조용하며 심지가 깊고 여유로워서 말과 행동에 구차한 면이 없었다. 그러나 양공은 한낱 음란함에 미쳐 있는 위인이라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았다. 왕희는 궁중에 산 지 몇 달이 채 되지 않아, 양공이 그 누이를 범한 일을 소문으로 듣고 알게 되었다. 왕희는 혼자서 한탄하기를, “이것은 윤리에 어긋난 짓이니 금수보다 못하구나. 내가 불행하여 이런 악인에게 시집을 잘못 왔으니 이는 나의 운명일 뿐이다.” 하고, 속으로 고민하다가 병이 나서 일 년도 채 되지 않아서 죽었다. 제양공은 왕희가 죽은 이후로 더욱 거리낄 것이 없었다. 문강을 생각하다가 사냥을 핑계로 수시로 작(禚) 땅에 가서 사람을 축구(祝邱)에 보내 그녀를 몰래 데려와서 주야로 음탕함을 즐겼다. 노장공이 화를 낼까 보아 두려워한 양공은 군사의 힘을 과시하여 위협을 주려고, 친히 많은 군사를 인솔하고 기(紀)나라를 공격하여 병(郱), 자(鄑), 오(郚) 등 세 고을을 빼앗았다. 군사들을 휴성(酅城)에 옮겨놓고, 사람을 보내 기후에게 고하기를, “빨리 항복하는 문서를 써라. 그러면 종족을 없애는 것은 면해 주겠다.” 했다. 기나라 군주가 한탄하며 말하기를, “제나라와 우리는 대대로 원수다. 나는 원수의 뜰에 무릎을 꿇고 항복하여 구차히 목숨을 구걸하지 않겠다.” 했다. 그리고 부인 백희에게 글을 쓰게 하여 사람을 보내 노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齊襄公出令曰:「有救紀者,寡人先移兵伐之!」魯莊公遣使如鄭,約他同力救紀。鄭伯子儀,因厲公在櫟,謀襲鄭國,不敢出師,使人來辭。魯侯孤掌難鳴,行至滑地,懼齊兵威,留宿三日而返。紀侯聞魯兵退回,度不能守,將城池妻子,交付其弟嬴季,拜別宗廟,大哭一場,半夜開門而出,不知所終。嬴季謂諸大臣曰:「死國與存祀,二者孰重?」諸大夫皆曰:「存祀為重。」嬴季曰:「苟能存紀宗廟,吾何惜自屈?」即寫降書,願為齊外臣,守酅宗廟。齊侯許之。嬴季遂將紀國土地戶口之數,盡納於齊,叩首乞哀。
제양공은 (천하에) 영을 내리기를, “기나라를 구하는 나라는 과인이 먼저 군사를 동원해 토벌하겠다.”고 했다. 노장공은 사자를 정나라에 보내 힘을 합쳐 기나라를 구하려고 했다. 그러나 정나라 군주 공자 의(儀)는 정여공이 역성(櫟城)에 머물면서 정나라를 습격할 기회만을 노리고 있어서 감히 군사를 일으키지 못하고, 사람만을 보내 사정을 알렸다. 한 손바닥으로는 소리를 낼 수 없는 처지가 된 노장공은 활(滑)의 땅까지 왔으나, 제나라 군사들의 위세에 겁을 먹고 3일 동안 진을 치고 있다가 군사를 거두어 돌아가 버렸다. 기나라 군주는 노나라의 군사가 되돌아가 버렸다는 소식을 듣고, 기나라를 지킬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성지(城池)와 처자를 그의 동생 영계(嬴季)에게 맡기고, 종묘에 가서 이별의 절을 올리면서 한바탕 대성통곡을 한 후 밤에 성문을 열고 나가 여생을 마친 곳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영계가 기나라의 여러 대신들에게 말하기를, “순국하는 것과, 제사라도 보존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중한가?” 하니, 여러 대부가 모두 말하기를, “제사라도 보존하는 것이 중합니다.” 했다. 영계가 말하기를, “구차하기는 하지만 기나라의 종묘를 보존하려 하는데 내가 어찌 스스로 무릎 꿇는 일을 마다하겠느냐?” 했다. 즉시 항서를 써서 제나라의 외신이 되어 휴성의 종묘를 지키게 해 달라고 청했다. 제후가 허락했다. 영계가 곧 기국의 토지와 호구 등을 모두 제나라에 바치며 머리를 조아리고 애걸했다.
齊襄公收其版籍,於紀廟之旁,割三十戶以供紀祭祀,號嬴季為廟主。紀伯姬驚悸而卒。襄公命葬以夫人之禮,以媚於魯。伯姬之娣叔姬,乃昔日從嫁者,襄公欲送之歸魯。叔姬曰:「婦人之義,既嫁從夫。生為嬴氏婦,死為嬴氏鬼,舍此安歸乎?」襄公乃聽其居酅守節。後數年而卒。史官贊云:「世衰俗敝,淫風相襲。齊公亂妹,新臺娶媳。禽行獸心,倫亡紀佚。小邦妾媵,矢節從一。寧守故廟,不歸宗國。卓哉叔姬,《柏舟》同式!」按齊襄公滅紀之歲,乃周莊王七年也。
제양공은 기나라의 토지대장과 호적을 적은 문서를 받고, 기나라 종묘가 있는 땅 한쪽의 호구 30호를 떼어 주어 기나라 제사를 지내도록 허락하고 영계를 묘주(廟主)라고 부르게 하였다. 기나라 군주의 부인 백희는 너무 놀라고 상심한 나머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양공이 명하여 제후의 부인으로서 예를 갖추어 장례를 후하게 치르게 하여 노나라의 환심을 사려고 하였다. 백희의 동생 숙희(叔姬)도 옛날 백희가 노나라에서 시집올 때 따라와 기나라 군주의 후비가 되었었다. 양공이 그녀를 노나라로 돌려보내려고 하였으나 숙희가 말하기를, “부인의 도리는 한번 출가하면 그 지아비를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영씨의 부인으로 살았으니 죽어서도 영씨의 귀신이 되겠습니다. 여기를 버리고 어디로 가겠습니까?” 했다. 제양공이 듣고 숙희를 휴성에 살며 절개를 지키게 하였다. 숙희는 몇 년을 더 살다가 죽었다. 사관이 찬미하여 이르기를, “세상의 풍속은 갈수록 쇠미해져서, 음탕한 풍속은 대를 잇게 되었다. 제나라 군주는 자기 누이동생을 범하고, 신대의 주인(위선공)은 며느리를 차지했다. 행동과 마음이 금수와 같아, 윤리는 없어지고 기강은 사라졌으나, 동쪽의 조그만 나라의 잉첩이, 절개를 지켜서 일부종사했다. 오히려 시집의 종묘를 지키고, 친정으로 돌아가지 않았으니, 훌륭하도다, 숙희여! 백주(柏舟)를 부르던 위(衛)나라 공강(共姜)과 같구나.” 했다. 제양공이 기나라를 멸한 해는 주장왕 7년(기원전 690년)이었다.
是年楚武王熊通,以隨侯不朝,復興兵伐隨,未至而薨。令尹鬥祈,莫敖屈重,祕不發喪。出奇兵從間道直逼隨城。隨懼行成。屈重偽以王命,入盟隨侯。大軍既濟漢水,然後發喪。子熊貲即位,是為文王。此事不提。再說齊襄公滅紀凱旋,文姜於路迎接其兄,至於祝邱,盛為燕享。用兩君相見之禮,彼此酬酢,大犒齊軍。又與襄公同至禚地,留連歡宿。襄公乃使文姜作書,召魯莊公來禚地相會。莊公恐違母命,遂至禚謁見文姜。文姜使莊公以甥舅之禮,見齊襄公,且謝葬紀伯姬之事。莊公亦不能拒,勉強從之。襄公大喜,亦具享禮款待莊公。
그해에 초나라 무왕 웅통(熊通)은 수(隨)나라 군주가 입조하지 않자, 다시 수나라를 치려고 군사를 일으켰으나 수나라에 이르지 못하고 죽었다. 영윤 투기(鬪祁)와 막오(莫敖 ; 사마, 총사령관) 굴중(屈重)이 초왕의 상을 발표하지 않고 비밀리에, 샛길로 기습병을 출동시켜 수나라의 도성에 육박했다. 수나라가 두려워하여 다시 강화를 청했다. 굴중이 왕명을 가장하여 수나라 군주에게 초나라 진영에 들어와 맹약을 맺게 했다. (수나라에서 철수한) 초나라 대군이 한수를 건넌 다음에야 초왕의 상을 발표했다. 무왕의 아들 웅자(熊貲)가 즉위하였다. 이가 초문왕(楚文王)이다. 이 일은 더 이야기하지 않겠다. 한편, 제양공이 기나라를 멸하고 개선하자 도중에 문강이 마중 나와 축구로 데려가서 잔치를 크게 벌였다. 두 사람은 군주들이 만날 때 행하는 예를 취한 후에, 서로 술잔을 주고받았다. 제나라 군사들에게도 배불리 먹였다. 그리고 제양공과 함께 작(禚) 땅으로 가서 계속 머물면서 잠자리를 즐겼다. 제양공이 문강에게 편지를 쓰게 하여 노장공을 작 땅으로 불러 서로 만났다. 노장공은 어머니의 명을 어길 수 없어 작에 가서 문강을 뵈었다. 문강은 장공에게 조카가 외숙부를 대하는 예절로서 제양공에게 인사를 시켰다. 또 기나라 백희를 후하게 장사 지내준 것을 사례하게 했다. 노장공이 또한 거역하지 못하고 힘써 따랐다. 제양공이 크게 기뻐하며 역시 예절을 갖추어 노장공을 환대하였다.
時襄公新生一女,文姜以莊公內主尚虛,令其訂約為婚。莊公曰:「彼女尚血胞,非吾配也。」文姜怒曰:「汝欲疏母族耶?」襄公亦以長幼懸隔為嫌。文姜曰:「待二十年而嫁,亦未晚也。」襄公懼失文姜之意,莊公亦不敢違母命,兩下只得依允。甥舅之親,復加甥舅,情愈親密。二君並車馳獵於禚地之野,莊公矢不虛發,九射九中。襄公稱贊不已。野人竊指魯莊公戲曰:「此吾君假子也!」莊公怒,使左右蹤跡其人殺之。襄公亦不嗔怪。史臣論莊公有母無父,忘親事仇。作詩誚云:車中飲恨已多年,甘與仇讎共戴天。莫怪野人呼假子,已同假父作姻緣!
그때 제양공에게는 갓 낳은 딸이 하나 있었다. 문강이 노장공의 내실이 아직 비어 있다고 하면서 그 갓난아이와 약혼하도록 분부하였다. 노장공이 말하기를, “그는 아직 강보에 싸인 갓난아이이니 나의 배필이 아닙니다.” 하니, 문강이 화를 내며 말하기를, “너는 네 어미의 집안을 멀리하고자 함이냐?” 했다. 제양공도 역시 두 사람의 나이 차이가 너무 현격하여 싫어하였다. 그러나 문강이 말하기를, “20년만 기다렸다가 시집을 보내도 늦지는 않습니다.” 했다. 제양공이 문강의 뜻을 꺾지 못하고, 노장공도 또한 모친의 명을 거역할 수 없어, 두 사람이 어쩔 수 없이 약혼을 허락하였다. 제양공과 노장공은 외삼촌과 조카 사이인데, 다시 사위와 장인이 되었으니 그 정이 더욱 친밀하게 되었다. 두 나라의 군주가 수레를 나란히 하여 작 땅의 들판에서 사냥을 나갔다. 노장공이 쏜 화살은 빗나감이 없어 아홉 발을 쏴서 아홉 발을 다 맞추었다. 제양공이 보고 칭찬해 마지않았다. 야인이 몰래 노장공을 손가락질하여 희롱하기를, “우리의 저 임금은 가짜 아들이다.” 했다. 노장공이 성을 내어 좌우를 시켜 그 사람을 쫓아가 죽이도록 했다. 제양공도 또한 그 일을 비난하지 않았다. 사관이 ‘장공은 모친은 있지만 부친이 없다’고 한 말은 아버지를 잊고 원수를 모신 일을 풍자한 말이라고 하면서 시를 지어 비난하기를, “아버지가 수레 안에서 한을 품고 죽은 지 이미 오래되었다. 원수와 함께 즐거운 마음으로 같은 하늘 아래 즐기고 있으니, 야인이 가짜 아들이라고 한 말이 이상하지 않구나. 이미 원수를 장인으로 삼아 혼인하기로 하였으니.” 하였다.
文姜自魯齊同狩之後,益無忌憚,不時與齊襄公聚於一處。或於防,或於穀,或時直至齊都,公然留宿宮中,儼如夫婦。國人作《載驅》之詩,以刺文姜。詩云:「載驅薄薄,簟茀朱鞹。魯道有蕩,齊子發夕。汶水滔滔,行人儦儦。魯道有蕩,齊子遊遨。」薄薄者,疾驅之貌。簟,席;所以鋪車。茀,車後戶。朱鞹者,以朱漆獸皮。皆車飾也。齊子指文姜。言文姜乘此車而至齊。儦儦,眾貌;言其僕從之多也。
문강이 노나라와 제나라의 군주들과 같이 사냥한 후로는 더욱 거리낄 것이 없이 수시로 제양공과 같이 지냈다. 방(防)과 곡(谷) 땅을 오갔으며, 어떤 때는 제나라의 도성까지 달려가서 공공연히 궁중에 머물면서, 마치 부부처럼 지냈다. 나라 사람들이 <시경>의『재구(載軀 ; 수레를 달림)』라는 시를 지어서 문강을 풍자하기를, “수레를 끄는 말들의 발굽 소리는 가볍기만 하고, 방문석 가리개에 붉은 칠 가죽을 치장하였도다. 노나라로 가는 길은 훤히 뚫려 있는데, 제나라 공주가 이 밤에 집을 떠나네. 수레를 끄는 검은 네 마리 말은 씩씩한데, 드리운 고삐가 부드럽고 부드럽구나. 노나라로 가는 길은 훤히 뚫려 있는데, 제나라 공주가 즐겁고 화평하도다. 문수는 세차게 흐르고, 따르는 사람 많기도 하구나! 노나라로 가는 길은 훤히 뚫려 있는데, 제나라 여인은 참으로 기뻐하네! 문수는 도도히 흐르고, 따르는 사람은 떼를 지었구나! 노나라로 가는 길은 훤히 뚫려 있는데, 제나라의 여인은 놀러 다니며 즐기네!” 했다. 박박(薄薄)이란 말이 빨리 달리는 모양이고, 점(簟)은 수레 안의 바닥에 까는 대자리이고, 불(茀)은 수레의 뒤에 달린 문짝이며 주곽(朱鞹)은 붉은색으로 칠한 짐승 가죽으로 모두 수레의 장식이다. 제자(齊子)는 문강을 가리키며, 문강이 이 수레를 타고 제나라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표표(儦儦)란 여러 사람으로 종복들이 많음을 말한다.
又有《敝笱》之詩,以刺莊公。詩云:「敝笱在梁,其魚魴鰥。齊子歸止,其從如雲。敝笱在梁,其魚魴鱮。齊子歸止,其從如雨。敝笱在梁,其魚唯唯。齊子歸止,其從如水。」笱者,取魚之器;言敝壞之罟,不能制大魚,以喻魯莊公不能防閑文姜,任其僕從出入無禁也。且說齊襄公自禚回國,衛侯朔迎賀滅紀之功,再請伐衛之期。襄公曰:「今王姬已卒,此舉無礙。但非連合諸侯,不為公舉。君少待之。」衛侯稱謝。
또 <시경>에『폐구(敝笱 ; 해진 통발)』라는 시가 있는데, 노장공을 풍자하기를, “해진 통발을 징검다리에 놓았으나, 거기에 있는 고기 방어와 환어(곤이)로다. 제나라 공주가 시집가는데, 따르는 자들이 구름같이 많구나! 해진 통발을 어살에 놓았으나, 거기에 있는 고기 방어와 연어로다. 제나라 공주가 시집가는데, 따르는 자들이 빗물처럼 많구나! 해진 통발을 어살에 놓았으나, 거기에 고기가 들락날락하는구나. 제나라 공주가 시집가는데, 따르는 자들은 마치 쏟아지는 강물처럼 많구나!” 했다. 구(笱)는 고기를 잡는 통발이고, 해진 통발로는 큰 고기를 잡지 못한다고 하여, 노장공이 문강을 통제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녀를 모시는 종복들의 출입조차도 막지 못했음을 풍자했다. 한편 제양공이 작(禚) 땅에서 문강과 헤어져 귀국하자, 위나라 군주였다가 제나라에 망명한 삭(朔 ; 위혜공)이 기나라를 멸한 공을 치하한 후에 위나라를 정벌해 줄 것을 다시 청했다. 양공이 말하기를, “이제 왕희가 죽어서 위나라를 정벌하는 데는 걸릴 게 없다고 할 수 있으나, 단지 다른 제후들과 연합하지 않고는, 공식적인 거사가 되지 않으니, 그대는 잠시만 더 기다려 주시오.” 하니, 위나라 군주였던 삭이 감사의 말을 올리고 물러갔다.
過數日,襄公遣使約會宋、魯、陳、蔡四國之君,一同伐衛,共納惠公。其檄云:天禍衛國,生逆臣洩職,擅行廢立。致衛君越在敝邑,於今七年。孤坐不安席。以疆場多事,不即誅討。今幸少閒,悉索敝賦,願從諸君之後,左右衛君,以誅衛之不當立者! 時周莊王八年之冬也。齊襄公出車五百乘,同衛侯朔先至衛境。四國之君,各引兵來會。那四路諸侯:宋閔公捷,魯莊公同,陳宣公杵臼,蔡哀侯獻舞。衛侯聞五國兵至,與公子洩公子職商議,遣大夫寧跪告急於周。莊王問群臣:「誰能為我救衛者?」
며칠이 지난 후에, 제양공이 송나라, 노나라, 진(陳)나라, 채나라 등 네 나라의 군주들에게 사자를 보내어 함께 위나라를 쳐서 위혜공을 들이자고 하였다. 그 격문에 이르기를, “하늘이 위나라에 재앙을 내려 역신 공자 설(公子泄)과 공자 직(公子職)을 낳아, 멋대로 군주를 폐하고 세웠습니다. 위나라 군주(혜공)가 국경을 넘어 우리나라에 있은 지가 지금 7년이 되었습니다. 내가 앉아도 자리가 편안치 않았으나, 나라 안에 일이 많아서 아직껏 토벌하여 죄를 묻지 못했습니다. 지금 다행히 조금 한가하여 우리나라의 온 힘을 기울여서라도 여러 제후의 뒤를 따르고자 합니다. 위혜공을 도와서 부당하게 군주 자리를 찬탈한 자를 토벌하고자 합니다.” 했다. 그때가 주장왕(周莊王) 8년(기원전 689년) 겨울이었다. 제양공이 전차 5백 대를 동원하여, 위혜공 삭(朔)과 같이 위나라 경계에 먼저 도착했다. 네 나라의 군주들은 각기 군사들을 이끌고 속속 도착하였다. 네 나라 제후들은 송나라 민공(閔公) 첩(捷), 노나라 장공(莊公) 동(同), 진(陳)나라 선공(宣公) 저구(杵臼), 채(蔡)나라 애후(哀侯) 헌무(獻舞)였다. 위나라 군주 검모(黔牟)는 다섯 나라의 군사들이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공자 설과 공자 직을 불러 대책을 상의하게 하고, 영궤(寧跪)를 주나라에 보내 위나라의 위태로움을 고하게 했다. 주나라 장왕이 여러 신하에게 묻기를, “누가 능히 짐을 위해 위나라를 구하겠는가?” 했다.
周公忌父,西虢公伯皆曰:「王室自伐鄭損威以後,號令不行。今齊侯諸兒,不念王姬一脈之親,鳩合四國,以納君為名,名順兵強,不可敵也。」左班中最下一人挺身出曰:「二公之言差矣!四國但只強耳,安得言名順乎?」眾人視之,乃下士子突也。周公曰:「諸侯失國,諸侯納之,何為不順?」子突曰:「黔牟之立,已稟王命。既立黔牟,必廢子朔。二公不以王命為順,而以納諸侯為順,誠突所不解也!」虢公曰:「兵戎大事,量力而行。王室不振,已非一日。伐鄭之役,先王親在軍中,尚中祝聃之矢。至今兩世,未能問罪。況四國之力,十倍於鄭。孤軍赴援,如以卵抵石,徒自褻威,何益於事?」
주공 기보(忌父)와 서괵공 백개(伯皆)가 말하기를, “왕실에서 친히 정나라를 정벌하다가 위엄이 꺾인 이후로 왕명이 행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제양공 강제아(姜諸兒)가 왕희와의 한 가닥 인척임을 생각하지 않고, 네 나라의 군사를 합쳐 쫓겨난 군주를 복위시킨다고 하니, 명분은 옳고 병사는 강하여 대적할 수 없습니다.” 했다. 왼쪽 반열의 맨 끝에 서 있던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와 말하기를, “두 분의 말씀은 옳지 않습니다. 네 나라의 군사는 단지 강할 뿐이지 어찌 명분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했다. 여러 사람이 보니 그 사람은 하사(下士) 벼슬에 있는 자돌(子突)이었다. 주공(기보)이 말하기를, “제후가 나라를 잃어서, 제후를 복위시키는 일이 어찌 명분이 서지 않는다고 하는가?” 하니, 자돌이 말하기를, “검모가 위나라 군주 자리에 오른 일은 이미 왕께 품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이미 검모를 세웠으면 반드시 공자 삭을 폐해야 합니다. 왕명을 받아 행한 일을 두 분께서 명분이 없다 하시고, 왕명으로 폐한 제후를 다시 복위시키려는 일을 명분이 있다 하시니, 진실로 소신 돌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니, 괵공이 말하기를, “군사를 출동하는 큰일은 힘을 헤아려서 행해야 합니다. 왕실의 형세가 부진한 것이 이미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닌데, 정나라를 치는 전쟁에 선왕께서 친히 군사를 이끌고 나섰다가 축담(祝聃)이 쏜 화살에 맞았습니다. 지금 두 세대가 이미 지났어도 아직 그 죄를 묻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네 나라의 힘은 정나라보다 열 배나 강합니다. 외로운 군사를 가지고 원조에 나서는 것은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아서 다만 헛되이 스스로 위엄을 손상시킬 뿐,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했다.
子突曰:「天下之事,理勝力為常,力勝理為變。王命所在,理所萃也。一時之強弱在力,千古之勝負在理。若蔑理而可以得志,無一人起而問之,千古是非,從此顛倒,天下不復有王矣!諸公亦何面目號為王朝卿士乎?」虢公不能答。周公曰:「倘今日興救衛之師,汝能任其事否?」子突曰:「九伐之法,司馬掌之。突位微才劣,誠非其任。必無人肯往,突不敢愛死,願代司馬一行。」周公又曰:「汝救衛能保必勝乎?」子突曰:「突今日出師,已據勝理。若以文、武、宣、平之靈,仗義執言,四國悔罪,王室之福。非突敢必也。」
자돌이 말하기를, “천하의 일은 도리가 힘을 이기는 것을 상식이라고 하고, 힘이 도리를 이기는 것을 변칙이라고 합니다. 왕명이 있는 곳에 도리가 있을 뿐입니다. 한때의 강약은 힘에 있고, 천고의 승부는 도리에 있습니다. 만약에 도리를 업신여기면서 뜻을 얻는 자를 보고도 한 사람도 몸을 일으켜 그 잘못을 묻지 않는다면, 천고의 시비는 이로부터 뒤집혀서 천하에 다시는 왕명을 세울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여러 공들도 무슨 면목으로 왕이 계시는 조정에서 경사(卿士)라고 불리겠습니까?” 했다. 괵공이 대답을 못하자, 주공이 말하기를, “만일 오늘 위나라를 구할 군사를 일으킨다면 그대는 능히 그 일을 맡을 수 있겠는가?” 하니, 자돌이 말하기를, “구벌지법(九伐之法 ; 천자가 제후를 토벌하는 아홉 가지 경우)은 사마(司馬)가 주관하고 있습니다. 저의 직위는 미관말직이고 재주는 보잘것없어 진실로 그 임무를 맡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 일을 맡아 위나라를 구원하러 가고자 하는 사람이 없다면 제가 죽음을 무릅쓰고 사마를 대신하여 가기를 원합니다.” 했다. 주공이 다시 말하기를, “그대가 위나라를 구하러 가서 능히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겠는가?” 하니, 자돌이 말하기를, “제가 오늘 군사를 끌고 출동하면 이미 승리를 취한 바와 다름이 없습니다. 만약에 문왕과 무왕, 선왕과 평왕의 영령에 힘입어 의로써 제후들을 타일러, 네 나라의 제후들이 죄를 뉘우치게 되면, 그것은 왕실의 복이지, 제가 감히 반드시 이긴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했다.
大夫富辰曰:「突言甚壯,可令一往,亦使天下知王室有人。」周王從之。乃先遣寧跪歸報衛國,王師隨後起行。卻說周虢二公,忌子突之成功,僅給戎車二百乘。子突並不推諉,告於太廟而行。時五國之師,已至衛城下,攻圍甚急。公子洩公子職晝夜巡守,懸望王朝大兵解圍。誰知子突兵微將寡,怎當五國如虎之眾?不等子突安營,大殺一場,二百乘兵車,如湯潑雪。子突嘆曰:「吾奉王命而戰死,不失為忠義之鬼也!」乃手殺數十人,然後自刎而亡。髯翁有詩贊曰: 雖然隻旅未成功,王命昭昭耳目中。見義勇為真漢子,莫將成敗論英雄!
대부 부신(富辰)이 말하기를, “돌(突)의 말이 아주 장합니다. 그를 가게 해서 왕실에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제후들이 알게 하십시오.” 하니, 주왕이 그 말에 따랐다. 먼저 영궤를 위나라에 돌려보내어 알리게 하고, 천자의 군사들이 뒤따라 출발했다. 한편, 주공과 괵공 두 사람은 자돌이 성공할 것을 꺼려서, 겨우 전차 2백 승을 내주었다. 그러나 자돌은 결코 두 사람에게 원망의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고, 태묘에 고한 후에 출발했다. 그때는 다섯 나라의 군사들이 이미 위나라의 도성 밑에 이르러서 아주 급하게 포위 공격하고 있었다. 공자 설과 공자 직은 밤낮으로 성 주위를 돌아다니고 지키면서 천자의 군사들이 와서 포위를 풀어 주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돌의 군사가 너무 적어서 호랑이 같은 다섯 나라의 군사들을 당해 내지 못할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자돌이 진영을 세우기도 전에 다섯 나라의 군사들이 크게 한번 공격하니 200대 전차는 마치 끓는 물에 눈을 뿌린듯 한순간에 무너져 버렸다. 자돌이 탄식해 말하기를, “내가 왕명을 받들어 싸우다가 죽는 것은 충성과 의리의 귀신이 되는 일이다.” 했다. 자돌은 칼을 잡고 수십 명을 죽인 후에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염옹이 시를 지어 찬탄하기를, “비록 한 떼의 병사만으로 공을 이룰 수는 없었지만, 수많은 사람 앞에서 왕명을 밝히고, 진실로 남아 대장부의 의로움과 용기를 보였으니, 일의 성패로 영웅을 논하지 말라.”고 했다.
衛國守城軍士,聞王師已敗,先自奔竄。齊兵首先登城,四國繼之,砍開城門,放衛侯朔入城。公子洩公子職同寧跪收拾散兵,擁公子黔牟出走。正遇魯兵,又殺一場。寧跪奪路先奔,三公子俱被魯兵所擒。寧跪知力不能救,嘆口氣,奔往秦國逃難去訖。魯侯將三公子獻俘於衛,衛不敢決,轉獻於齊。齊襄公喝教刀斧手,將洩職二公子斬訖。公子黔牟是周王之婿,於齊有連襟之情,赦之不誅,放歸於周。衛侯朔鳴鐘擊鼓,重登侯位。將府庫所藏寶玉,厚賂齊襄公。襄公曰:「魯侯擒三公子,其勞不淺!」乃以所賂之半,分贈魯侯。復使衛侯另出器賄,散於宋、陳、蔡三國。此周莊王九年之事。
위나라 군사들은 왕실의 군사가 이미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제각기 흩어져 달아났다. 제나라 군사들이 먼저 성벽 위에 오르자, 네 나라 군사들도 그 뒤를 따라 성문을 부수고 위후 삭을 앞세우고 입성하였다. 공자 설과 공자 직 및 영궤가 남은 군사들을 수습하여 공자 검모를 모시고 성 밖으로 도망치다가 노나라 병사를 만나 한바탕 싸움이 벌어졌다. 영궤가 퇴로를 뚫고 먼저 달아났으나, 공자 세 사람은 모두 노나라 군사들에게 사로잡혔다. 영궤가 힘이 부쳐 그들을 구할 수 없음을 알고, 탄식한 후에 진(秦)나라를 향하여 망명의 길을 떠났다. 노장공이 세 공자를 포로로 잡아 위혜공 삭에게 바쳤다. 그러나 위혜공이 감히 스스로 처리하지 못하고 다시 제양공에게 바쳤다. 제양공은 도부수에게 명하여 공자 설과 공자 직을 참수하였으나 공자 검모는 주왕의 사위이며 자기와는 동서지간이라 차마 죽이지 못하고 주나라로 돌아가게 풀어 주었다. 위혜공은 종과 북을 울리며 다시 위나라 군주 자리에 올랐다. 이어서 위나라의 창고에 소장되어 있던 보옥을 제양공에게 뇌물로 바쳤다. 제양공이 말하기를, “노나라 군주가 세 공자를 사로잡은 것은 그 공로가 작지 않소.” 하고, 그 받은 뇌물의 반을 나누어 노장공에게 주었다. 다시 위혜공으로 하여금 따로 기물(器物)을 내어 송나라, 진(陳)나라, 채나라 군주들에게도 나눠주게 했다. 이는 주장왕 9년(기원전 688년)의 일이었다.
卻說齊襄公自敗子突,放黔牟之後,誠恐周王來討,乃使大夫連稱為將軍,管至父為副,領兵戍葵邱,以遏東南之路。二將臨行,請於襄公曰:「戍守勞苦,臣不敢辭,以何期為滿?」時襄公方食瓜,乃曰:「今此瓜熟之時,明歲瓜再熟,當遣人代汝。」二將往葵邱駐紮,不覺一年光景。忽一日,戍卒進瓜嘗新。二將想起瓜熟之約:「此時正該交代,如何主公不遣人來?」特地差心腹往國中探信,聞齊侯在穀城與文姜歡樂,有一月不回。連稱大怒曰:「王姬薨後,吾妹當為繼室。無道昏君,不顧倫理,在外日事淫媟。使吾等暴露邊鄙。吾必殺之!」謂管至父曰:「汝可助吾一臂。」管至父曰:「及瓜而代,主公所親許也。恐其忘之,不如請代。請而不許,軍心胥怨,乃可用也。」連稱曰:「善。」乃使人獻瓜於襄公,因求交代。
한편, 제양공은 자돌을 패퇴시키고 검모를 방면한 후에 주왕이 다시 토벌군을 보내지나 않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대부 연칭(連称)을 대장으로 삼고, 관지보(管至父)를 부장(副將)으로 삼아, 군사를 이끌고 규구(葵邱)에 가서 주둔하며 동남쪽 길을 지키도록 했다. 두 장군이 떠나면서 제양공에게 청하기를, “변방을 지키는 노고를 신이 감히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언제까지 지켜야 합니까?” 했다. 그때 마침 제양공이 참외를 먹고 있다가 말하기를, “지금이 참외가 익는 시절이다. 내년 참외가 다시 익으면 다른 사람을 보내 교대해 주겠다.” 했다. 두 장수가 규구에 가서 주둔했는데 어느새 일 년이 훌쩍 지나갔다. 어느 날 갑자기 군졸 하나가 참외를 가져와서 맛을 보라고 주니, 연칭과 관지보 두 장수가 참외가 익을 때가 되면 교대해 주겠다는 양공의 약속이 생각나서 이르기를, “지금이 바로 교대할 때인데 어찌하여 주공께서는 사람을 보내주지 않는가?” 하고, 특별히 심복을 뽑아 도성에 가서 알아보게 하였다. 심복이 돌아와서 제양공은 곡성(穀城)에서 문강과 환락을 즐기면서 도성에 돌아오지 않은 지 한 달도 더 되었다고 했다. 연칭이 크게 화를 내며 말하기를, “왕희가 죽은 후에 마땅히 내 누이가 정실 자리를 이어야 하는데, 무도한 혼군이 윤리를 돌아보지 않고 외지에서 날마다 음란을 즐기고 있으면서 우리를 변방에다 방치하고 있구나. 내가 반드시 그를 죽이리라!” 했다. 연칭이 관지보에게 말하기를, “장군은 나의 한 팔이 되어 도와주시오!” 하니, 관지보가 말하기를, “참외가 익으면 교대해 준다고 주공께서 친히 약속하셨습니다. 혹시 잊어버리고 있는지 모르니 우선 교대해 달라고 청하십시오. 그래도 만약 교대해 주지 않는다면 군심이 동요될 것인즉, 그때 동요된 군심을 이용하십시오.” 했다. 연칭이 말하기를, “좋소.” 하고, 사람을 시켜 참외를 제양공에게 바치게 하고 임무를 교대해 주도록 청했다.
襄公怒曰:「代出孤意,奈何請耶?再候瓜一熟可也。」使人回報,連稱恨恨不已。謂管至父曰:「今欲行大事,計將安出?」至父曰:「凡舉事必先有所奉,然後成。公孫無知,乃公子夷仲年之子。先君僖公以同母之故,寵愛仲年,並愛無知。從幼畜養宮中,衣服禮數,與世子無別。自主公即位,因無知向在宮中,與主公角力,無知足勾主公仆地,主公不悅。一日,無知又與大夫雍廩爭道,主公怒其不遜,遂疏黜之,品秩裁減大半。無知銜恨於心久矣!每思作亂,恨無幫手。我等不若密通無知,內應外合,事可必濟。」
제양공이 화를 내면서 말하기를, “교대해 주는 것은 내 마음대로인데 어찌하여 청한단 말인가? 참외가 다시 익으면 교대해 주겠으니 그때까지 기다려라.” 했다. 사자가 돌아와서 보고하니, 연칭이 분을 삭이지 못하고 관지보에게 말하기를, “지금 대사를 행하려면 어떤 계책을 써야 하겠소?” 했다. 관지보가 말하기를, “모든 거사는 반드시 먼저 군주로 모실 분을 정한 후에 행하여야만 성공할 수 있습니다. 공손무지(公孫無知)는 곧 공자 이중년(夷仲年)의 아들입니다. 선군 희공께서는 동모제인 이중년을 매우 사랑하였고 아울러 공손무지도 사랑해서 어려서부터 궁중에서 길렀습니다. 의복이나 예의 절차까지 세자와 차별이 없었습니다. (지금의) 주공이 즉위한 후에 공손무지는 계속 궁중에 생활하다가 주공과 씨름을 하게 되었는데, 공손무지가 발을 걸어 주공을 땅에다 넘어뜨리자 주공이 불쾌하게 여겼습니다. 하루는 공손무지가 대부 옹름(雍廩)과 사람의 도리에 대해 언쟁을 하는데, 주공이 공손무지를 불손하다고 꾸짖고 곧바로 궁중 밖으로 쫓아냈습니다. 그의 벼슬과 품계도 크게 깎아 버렸습니다. 무지가 가슴에 한을 품은 지 이미 오래되어, 매사에 난을 일으킬 생각을 품고 있었으나, 자기를 도와주는 사람이 없음을 한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지와 몰래 통하여 내외에서 힘을 합하면 반드시 일을 성공시킬 수 있습니다.” 했다.
連稱曰:「當於何時?」管至父曰:「主上性喜用兵,又好遊獵,如猛虎離穴,易為制耳。但得預聞出外之期,方不失機會也。」連稱曰:「吾妹在宮中,失寵於主公,亦懷怨望。今囑無知陰與吾妹合計,伺主公之間隙,星夜相聞,可無誤事。」於是再遣心腹,致書於公孫無知。書曰:「賢公孫受先公如嫡之寵,一旦削奪,行路之人,皆為不平。況君淫昏日甚,政令無常。葵邱久戍,及瓜不代,三軍之士,憤憤思亂。如有間可圖,稱等願效犬馬,竭力推戴。稱之從妹,在宮失寵銜怨,天助公孫以內應之資,機不可失!」
연칭이 말하기를, “언제 거사를 해야 하겠소?” 하니, 관지보가 말하기를, “주군은 용병을 좋아하고 또한 사냥을 즐기니, 맹호를 굴에서 나오게 하면 제압하기가 쉬운 것과 같습니다. 단지 미리 주군이 도성 밖으로 나갈 때를 기다리고 있다가 그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했다. 연칭이 말하기를, “내 누이가 궁중에 있는데 주군의 총애를 잃어 역시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있소. 지금 무지에게 몰래 부탁하여 내 누이와 함께 계획하라고 하고, 주군이 성 밖으로 나갈 때를 기다렸다가, 밤에 우리에게 전하면 일을 그르치지는 않을 것이오.” 했다. 이에 다시 심복을 시켜 공손무지에게 편지를 전하게 했다. 편지에 이르기를, “현명하신 공손께서 선군으로부터 마치 적자처럼 총애를 받으시다가 하루아침에 직위와 품계를 삭탈 당하신 일을, 길가는 사람도 모두 불평합니다. 하물며 군주가 날이 갈수록 마음이 흐리고 사리에 어두워지고 정령은 수시로 바뀌고 있습니다. 규구(葵邱)를 오랫동안 지켜왔으나, 참외가 익어도 교대를 해주지 않으니 삼군의 병사들이 원망한 나머지 난을 일으키려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만약 공손께서 기회를 보아 대사를 도모하신다면 이 연칭 등은 견마지로를 다하여 공손을 제나라의 군주로 추대하고자 합니다. 이 칭의 사촌 누이는 궁실에 들어가 총애를 잃어 원한을 품고 있으니, 하늘이 공손을 도와 내응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기회를 잃지 마십시오.” 했다.
公孫無知得書大喜,即復書曰:「天厭淫人,以啟將軍之衷,敬佩裏言,遲疾奉報。」無知陰使女侍通信於連妃,且以連稱之書示之:「若事成之日,當立為夫人。」連妃許之。周莊王十一年冬十月,齊襄公知姑棼之野有山名貝邱,禽獸所聚,可以遊獵。乃預戒徒人費等,整頓車徒,將以次月往彼田狩。連妃遣宮人送信於公孫無知。無知星夜傳信葵邱,通知連管二將軍,約定十一月初旬,一齊舉事。連稱曰:「主上出獵,國中空虛,吾等率兵直入都門,擁立公孫何如?」管至父曰:「主上睦於鄰國,若乞師來討,何以禦之?不若伏兵於姑棼,先殺昏君,然後奉公孫即位。事可萬全也。」
공손무지가 편지를 받아 보고 크게 기뻐하며 곧 다시 답서를 써서 말하기를, “하늘이 음란한 자를 싫어하여 장군의 충심을 열게 하였소. 편지 속의 말을 가슴에 새겨 두겠으며 조만간 나를 추대한 보답을 하겠소.” 하고, 무지가 몰래 시녀를 연비(연칭의 누이)에게 보내 연칭의 편지를 보여주며 말하기를, “만약 일이 이루어지면 마땅히 연비를 나의 부인으로 세우겠소.” 했다. 연비가 허락했다. 주장왕 11년(기원전 686년) 겨울 시월의 일이었다. 제양공은 고분(姑棼)의 들판에 솟아 있는 패구산(貝邱山)이 새와 짐승들이 많이 있는 곳이라 사냥하기에 좋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에 미리 도인비(徒人費) 등에게 전차와 보병을 정돈하고, 다음 달에 패구산으로 사냥을 나가기로 했다. 연비가 궁인을 보내 편지를 공손무지에게 전했다. 무지는 급히 편지를 써서 규구에 있는 연칭과 관지보에게 통지하고, 11월 초순에 일제히 거사하기로 약정하였다. 연칭이 말하기를, “주상이 사냥을 나가면 도성 안은 비게 될 텐데, 우리가 군사를 거느리고 도성으로 바로 쳐들어가서 공손을 옹립하면 어떻겠소?” 하니, 관지보가 말하기를, “주상은 이웃 나라와 사이가 좋습니다. 만약에 군사를 빌려서 우리를 토벌하러 오면 어찌 막겠습니까? 고분(姑棼)에 복병을 배치하여 먼저 혼군을 죽이고 다음에 공손을 추대하면 일이 모두 안전할 것입니다.” 했다.
那時葵邱戍卒,因久役在外,無不思家。連稱密傳號令,各備乾糧,往貝邱行事,軍士人人樂從。不在話下。再說齊襄公於十一月朔日,駕車出遊。止帶力士石之紛如,及幸臣孟陽一班,架鷹牽犬,準備射獵,不用一大臣相隨。先至姑棼,(原建有離宮。)遊玩竟日。居民餽獻酒肉,襄公歡飲至夜,遂留宿焉。次日起駕,往貝邱來。見一路樹木蒙茸,藤蘿翳鬱,襄公駐車高阜,傳令舉火焚林,然後合圍校射,縱放鷹犬。火烈風猛,狐兔之類,東奔西逸。忽有大豕一隻,如牛無角,似虎無斑,從火中奔出,竟上高阜,蹲踞於車駕之前。
그때 규구를 지키는 군사들은 오랫동안 변경에서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집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연칭이 비밀리에 명령을 내려 각자 비상식량을 준비시키고, 패구산으로 간다고 하자 군사들은 모두가 기뻐하였다. 한편, 제양공은 11월 초하룻날 수레를 타고 사냥을 나갔다. 오직 장사 석지분여(石之紛如)와 총신 맹양(孟陽) 등의 무리가 매를 앉히고 사냥개를 끌고 사냥을 준비했고 대신들은 한 사람도 따라오지 않았다. 먼저 고분에 도착한 양공은 (원래부터 그곳에 있었던 이궁에서) 온종일 놀았다. 백성들이 술과 고기를 바치자, 양공은 밤이 깊도록 즐겁게 마시다가 거기에 머물러 잤다. 다음날 수레를 타고 패구산으로 향했다. 길옆의 숲에는 수목이 무성하고 덩굴들이 엉키었다. 양공이 높은 언덕에 수레를 멈추고 불을 놓아 숲을 태우라고 명령하고, 그런 후에 군사들에게 산을 에워싸서 활을 쏘고, 매와 사냥개를 풀어놓았다. 불길이 치솟고 바람이 세차게 불어서 여우와 토끼 같은 짐승이 이리저리 달아났다. 갑자기 큰 돼지 한 마리가, 소만 한데 뿔은 없고, 호랑이 비슷한데 얼룩무늬가 없는 것이 불길 속에서 뛰어나와 언덕 위로 올라오더니 수레 앞에 웅크리고 앉았다.
時眾人俱往馳射,惟孟陽立於襄公之側。襄公顧孟陽曰:「汝為我射此豕。」孟陽瞪目視之,大驚曰:「非豕也,乃公子彭生也!」襄公大怒曰:「彭生何敢見我?」奪孟陽之弓,親自射之,連發三矢不中。那大豕直立起來,雙拱前蹄,效人行步,放聲而啼,哀慘難聞。嚇得襄公毛骨俱竦,從車中倒撞下來,跌損左足,脫落了絲文屨一隻,被大豕銜之而去,忽然不見。髯翁有詩曰:「魯桓昔日死車中,今日車中遇鬼雄。枉殺彭生應化厲,諸兒空自引雕弓。」
그때 여러 사람이 모두 사냥감을 쫓고 활을 쏘느라 떠나 있어서 오직 맹양만이 제양공 옆에 서 있었다. 제양공이 맹양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너는 나를 위해 저 돼지를 쏘아라.” 하니, 맹양이 눈을 부릅뜨고 보더니 크게 놀라 말하기를, “저것은 돼지가 아니라 공자 팽생(彭生)입니다!” 했다. 제양공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죽은) 팽생이 어찌 감히 나를 볼 수 있단 말이냐?” 하고, 맹양의 활을 빼앗아 친히 연달아 세 발을 쐈지만 한발도 맞지 않았다. 그러자 그 커다란 돼지가 두 발로 서더니 앞발을 들어 마치 사람처럼 걸어 다니면서 소리 높여 통곡을 하는데, 애처로워 차마 들을 수가 없었다. 제양공이 악하고 놀라 모골이 송연해져서 수레 위에서 굴러떨어져 왼쪽 발을 다치고 사문구(絲文屨;실로 짠 무늬 있는 신발) 한 짝이 벗겨지자 그 큰 돼지가 달려와서는 입에 물고 가버려서, 문득 볼 수가 없었다. 염옹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노환공은 옛날에 수레 안에서 죽었는데, 제양공은 오늘 수레 안에서 귀신을 만났다. 억울하게 죽은 팽생이 원한에 맺혀 악귀가 되었는데, 제아는 헛되이 조각한 활만 쏘았다.”라고 했다.
徒人費與從人等,扶起襄公臥於車中,傳令罷獵,復回姑棼離宮住宿。襄公自覺精神恍惚,心下煩躁。時軍中已打二更,襄公因左足疼痛,展轉不寐,謂孟陽曰:「汝可扶我緩行幾步。」先前墜車,匆忙之際,不知失屨,到此方覺。問徒人費取討。費曰:「屨為大豕銜去矣。」襄公心惡其言,乃大怒曰:「汝既跟隨寡人,豈不看屨之有無?若果銜去,當時何不早言?」自執皮鞭,鞭費之背,血流滿地方止。徒人費被鞭,含淚出門,正遇連稱引著數人打探動靜,將徒人費一索綑住,
도인비(徒人費)와 시종들이 제양공을 부축하여 일으켜 수레 안에다 눕히고, 전령을 보내어 사냥을 파한다고 전하고, 고분에 있는 이궁으로 돌아가 유숙하도록 했다. 양공은 정신이 멍한 상태에게 깨어나긴 했으나 마음은 초조했다. 그때 군중에서 이미 이경(밤 열 시쯤)을 알렸다. 양공은 왼쪽 발이 아파서, 몸을 뒤척이며 잠을 이룰 수가 없어, 맹양에게 말하기를, “네가 부축하면 내가 천천히 몇 발자국을 걸어 보겠다.” 했다. 아까 수레 위에서 떨어질 때 너무도 황망하여 신발 한 짝을 잃어버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가 이제야 신발 한 짝이 없어진 줄 알게 되었다. 맹양이 도인비를 불러 신발 한 짝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니, 도인비가 말하기를, “신발 한 짝은 큰 돼지가 물고 가버렸습니다.” 했다. 양공이 그 말을 미워하여 크게 화를 내며 말하기를, “너는 이미 나를 따라왔으면서 어찌하여 나의 신발이 다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단 말이냐? 만약 돼지가 물고 갔다면 그때 어찌하여 일찍 아뢰지 않았느냐?” 하고, 가죽 채찍을 잡고 도인비의 등을 후려쳤다. 피가 땅을 흥건히 적시자 비로소 멈췄다. 도인비는 채찍을 맞고 눈물을 머금으며 궁문을 나와, 마침 몇 사람의 군사를 이끌고 양공의 동정을 살피고 있던 연칭과 마주치게 되었다. 연칭은 도인비를 잡아 밧줄로 묶었다.
問曰:「無道昏君何在?」費曰:「在寢室。」又問:「已臥乎?」曰:「尚未臥也。」連稱舉刀欲砍,費曰:「勿殺我,我當先入,為汝耳目。」連稱不信。費曰:「我適被鞭傷,亦欲殺此賊耳。」乃袒衣以背示之。連稱見其血肉淋漓,遂信其言,解費之縛,囑以內應。隨即招管至父引著眾軍士,殺入離宮。且說徒人費翻身入門,正遇石之紛如,告以連稱作亂之事。遂造寢室,告於襄公。襄公驚惶無措。費曰:「事已急矣!若使一人偽作主公,臥於牀上,主公潛伏戶後,幸而倉卒不辨,或可脫也。」
연칭이 묻기를, “무도한 혼군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하니, 도인비가 말하기를, “침실에 있습니다.” 했다. 연칭이 또 묻기를, “이미 잠자리에 들었는가?” 하니, 도인비가 말하기를, “아직 들지 않았습니다.” 했다. 연칭이 칼을 들어 도인비를 찍으려고 하자 도인비가 말하기를, “나를 죽이지 마시오. 내가 마땅히 먼저 들어가 장군을 위해 귀와 눈이 되겠소.” 했다. 연칭이 믿지 않자 도인비가 말하기를, “내가 마침 채찍을 맞고 다쳐서 나도 역시 그놈을 죽이려던 참이오.” 하며, 즉시 웃옷을 벗어 등을 보여주었다. 연칭은 피와 살이 뒤엉켜 흥건한 그의 등짝을 보고 그의 말을 믿게 되었다. 도인비의 결박을 풀어 주고 내응하라고 당부했다. 이어 즉시 관지보를 불러 많은 군사를 이끌고 이궁으로 돌입하게 했다. 한편 도인비는 몸을 돌이켜 문 안으로 들어와서 바로 석지분여와 만나자 연칭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고했다. 곧 제양공의 침실로 달려가서 제양공에게 고했다. 제양공이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도인비가 말하기를, “일이 이미 급합니다. 만일 다른 사람을 주군으로 분장시켜 침상에 눕게 하고, 주군께서는 지게문 뒤에 숨어 계시다가 다행히 창졸간에 발각되지 않는다면 혹시 탈출할 수도 있습니다.” 했다.
孟陽曰:「臣受恩踰分,願以身代,不敢恤死。」孟陽即臥於牀,以面向內,襄公親解錦袍覆之。伏身戶後,問徒人費曰:「汝將何如?」費曰:「臣當與紛如協力拒賊。」襄公曰:「不苦背創乎?」費曰:「臣死且不避,何有於創?」襄公嘆曰:「忠臣也!」徒人費令石之紛如引眾拒守中門,自己單身挾著利刃,詐為迎賊,欲刺連稱。其時眾賊已攻進大門,連稱挺劍當先開路。管至父列兵門外,以防他變。徒人費見連稱來勢兇猛,不暇致詳,上前一步便刺。誰知連稱身被重鎧,刃刺不入。
맹양이 말하기를, “신은 항상 분수에 넘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제가 주공을 대신하기를 바랍니다. 어찌 감히 죽음을 두려워하겠습니까?” 했다. 맹양이 즉시 침상에 눕고는 얼굴을 안쪽으로 향하자, 제양공이 친히 비단 전포를 벗어 덮어 주었다. 제양공은 몸을 지게문 뒤에 숨기고 도인비에게 묻기를, “너는 장차 어찌하겠느냐?” 하니, 도인비가 말하기를, “신은 마땅히 석지분여와 힘을 합하여 적도들을 막겠습니다.” 했다. 제양공이 말하기를, “등의 상처가 아프지 않느냐?” 하니, 도인비가 말하기를, “신이 죽음도 피하지 않는데 어찌 상처가 문제겠습니까?” 했다. 제양공이 감탄하며 말하기를, “충신이다.” 했다. 도인비는 석지분여로 하여금 여러 시종을 이끌고 중문에서 적도들을 막게 하고, 자기는 단신으로 예리한 단도를 소매 속에 숨기고, 거짓으로 적을 맞이하는 것처럼 하다가 연칭을 찔러 죽이려고 하였다. 그때는 수많은 적도가 이미 성문을 깨뜨리고 이궁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연칭은 장검을 치켜들고 앞에서 길을 열었다. 관지보는 궁문 밖에서 군사들을 벌여 세우고 혹시 다른 변이 일어났을 때를 대비하였다. 도인비가 흉맹한 기세로 다가오는 연칭을 보고 더 기다릴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고 앞으로 한 발자국 내디디며 연칭을 찔렀다. 그러나 연칭이 몸속에 두꺼운 갑옷을 껴입고 있는 줄 누가 알았겠는가. 칼은 갑옷을 꿰뚫지 못했다.
卻被連稱一劍劈去,斷其二指,還復一劍,劈下半個頭顱,死於門中。石之紛如便挺矛來鬥,約戰十餘合,連稱轉鬥轉進。紛如漸漸退步,誤絆石階腳跘,亦被連稱一劍砍倒。遂入寢室。侍衛先已驚散。團花帳中,臥著一人,錦袍遮蓋。連稱手起劍落,頭離枕畔,舉火燭之,年少無鬚。連稱曰:「此非君也。」使人遍搜房中,並無蹤影。連稱自引燭照之,忽見戶檻之下,露出絲文屨一隻,知戶後藏躲有人,不是諸兒是誰?打開戶後看時,那昏君因足疼,做一堆兒蹲著。
연칭이 한번 칼을 휘두르자 단도를 잡고 있던 도인비의 손가락 두 개가 잘려 나갔다. 다시 한번 휘두르자 도인비는 골통이 반으로 쪼개져서 문 안에서 죽었다. 석지분여가 창을 들고 연칭을 막아서며 십여 합을 싸웠으나, 연칭이 점점 앞으로 나아가고 석지분여는 점점 뒤로 물러나다가 돌계단에 발이 걸려 비틀거리자 연칭이 한칼로 베어 쓰러뜨렸다. 마침내 연칭이 침실로 들어가자, 시위들이 먼저 놀라서 이미 흩어져 달아났다. 둥그런 꽃무늬 방장 안에서 한 사람이 누워 있는데 비단 전포를 덮고 있었다. 연칭이 손을 들어 칼을 내리치자 그 머리가 침상 밑으로 떨어졌다. 촛불을 들어 비춰보니 나이는 어리고 수염이 없었다. 연칭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혼군이 아니다.” 하고, 연칭이 사람들을 시켜 방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종적을 찾을 수 없었다. 연칭이 촛불을 들고 비춰보는데 문득 지게문 난간 아래에 사문구 한 짝이 드러나 있었다. 지게문 뒤에 사람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그 사람이 제아(제양공)가 아니면 누구겠는가? 지게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그 혼군이 발이 아파서 사문구와 함께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那一隻絲文屨,仍在足上。連稱所見之屨,乃是先前大豕銜去的,不知如何在檻下。分明是冤鬼所為,可不畏哉!連稱認得諸兒,似雞雛一般,一把提出戶外,擲於地下。大罵:「無道昏君!汝連年用兵,黷武殃民,是不仁也;背父之命,疏遠公孫,是不孝也;兄妹宣淫,公行不忌,是無禮也;不念遠戍,瓜期不代,是無信也。仁孝禮信,四德皆失,何以為人?吾今日為魯桓公報仇!」遂砍襄公為數段,以床褥裹其尸,與孟陽同埋於戶下。計襄公在位只五年。
그 사문구 한 짝은 발에 신고 있었고, 연칭이 본 다른 한 짝은 낮에 사냥터에서 커다란 돼지가 입에 물고 가 버렸는데, 어떻게 하여 지게문 난간 아래에 있게 되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것은 원귀의 소행이 분명하니 어찌 두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연칭은 제아를 알아보고 마치 병아리 새끼를 다루듯이 제양공을 잡아서 지게문 밖으로 끌어내어 땅에다 던지고는 크게 꾸짖기를, “무도한 혼군아! 너는 해마다 군사를 일으켜 무력을 남용하여 백성들에게 재앙을 안겨주었으니 이것은 불인(不仁)이며, 부친의 유명을 듣지 않고 공손무지를 멀리하였으니 이것은 불효이며, 오라비와 누이가 공공연히 간음하면서 이를 전혀 거리끼지 않았으니 이것은 무례(無禮)이고, 멀리서 변방을 지키는 병사를 참외가 익은 계절이 되었는데도 교대하여 주지 않았으니 이것은 무신(無信)이다. 인(仁), 효(孝), 예(禮), 신(信) 네 가지의 덕을 모두 잃었으니 어떻게 사람이라고 하겠느냐? 내가 오늘 노환공을 위하여 원수를 갚아 주리라.” 하고, 마침내 제양공을 베어 몇 토막을 내고, 침상 위의 요로 시신을 싸서 맹양과 함께 지게문 밑에다 묻었다. 계산해 보니 제양공은 군주 자리에 단지 5년 동안 있었다.
史官評論此事,謂襄公疏遠大臣,親暱群小,石之紛如,孟陽,徒人費等,平日受其私恩,從於昏亂,雖視死如歸,不得為忠臣之大節。連稱,管至父徒以久戍不代,遂行篡弒,當是襄公惡貫已滿,假手二人耳。彭生臨刑大呼:「死為妖孽,以取爾命!」大豕見形,非偶然也。髯翁有詩詠費石等死難之事。詩云:「捐生殉主是忠貞,費石千秋無令名!假使從昏稱死節,飛廉崇虎亦堪旌。」又詩嘆齊襄公云:「方張惡焰君侯死,將熄兇威大豕狂。惡貫滿盈無不斃,勸人作善莫商量。」
사관이 이 일을 논평하기를, 제양공은 대신들은 소원하게 대하고, 석지분여, 맹양, 도인비 등과 같은 소인들과 가깝게 지냈다. 그들이 평소에 사사로운 은혜를 입어 혼란 중에 죽음을 두려워 않고 쾌히 목숨을 버렸으나 어찌 충신의 큰 절개라고 할 수 있으리오. 연칭, 관지보 무리가 오래 변방을 지키다가 교대를 해주지 않는다고 반란을 일으켜 그 군주를 죽였다고 하겠으나, 그것은 제양공의 악행이 이미 가득 찼기 때문에 두 사람의 손을 빌렸을 뿐이다. 팽생이 처형당하면서 ‘내가 죽어 귀신이 되어 너의 목숨을 가져가겠다.’라고 크게 소리쳤는데, 커다란 멧돼지가 나타난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했다. 염옹이 시를 지어 도인비와 석지분여 등이 죽은 일에 대하여 시를 지어 이르기를, “주군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은 충정(忠貞)이지만, 도인비와 석지분여는 천추에 좋은 이름을 남기지 못했다. 만일 혼군을 따라 목숨을 버리는 일을 충절이라고 한다면, 비렴과 숭호(둘 다 은나라 주왕의 신하)같은 악인도 표창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했다. 또 시를 지어 제양공을 한탄하기를, “불을 질러 사냥을 하다가 임금이 죽었고, 불길이 멎자 커다란 멧돼지가 미친 듯 날뛰었다. 악행이 차서 가득하니 어찌 죽지 않겠는가? 사람들이여, 착한 일을 하는데 이익을 따지지 말아라.” 했다.
連稱管至父重整軍容,長驅齊國。公孫無知預集私甲,一聞襄公凶信,引兵開門,接應連管二將入城。二將託言:「曾受先君僖公遺命,奉公孫無知即位。」立連妃為夫人。連稱為正卿,號為國舅。管至父為亞卿。諸大夫雖勉強排班,心中不服。惟雍廩再三稽首,謝往日爭道之罪,極其卑順。無知赦之,仍為大夫。高國稱病不朝,無知亦不敢黜之。至父勸無知懸榜招賢,以收人望。因薦其族子管夷吾之才,無知使人召之。
연칭과 관지보가 군용을 재정비하여 제나라 도성으로 파죽지세로 진격했다. 공손무지가 미리 사병을 무장시켜 기다리고 있다가 양공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사병을 끌고 나아가 성문을 열고 연칭과 관지보 두 장군을 도와서 성안으로 맞아 드렸다. 두 장군이 선언하기를, “선군 제희공의 유명을 따라 공손무지를 우리 제나라의 군주로 모신다.” 했다. 공손무지가 연비를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연칭은 정경(正卿)이 되어 국구(國舅)라 불리었고, 관지보는 아경(亞卿)이 되었다. 여러 대부는 비록 강권에 못 이겨 신하의 반열에 서기는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복종하지 않았다. 오로지 옹름(雍廩)만이 재삼 머리를 조아려 옛날에 도리에 대해 다투었던 죄를 사과하고, 아주 비굴하게 순종하였다. 공손무지가 죄를 용서하고 예전 대부의 직을 그대로 갖게 하였다. 고호(高虎)와 국의중(國懿仲)은 병이 났다고 핑계를 대고 조정에 나오지 않았다. 무지는 또한 감히 쫓아내지 못했다. 관지보가 공손무지에게 권하여 방을 붙여 이진이를 초빙하면 백성들의 신망을 얻을 수 있다고 하고, 그 종족의 아들인 관이오(管夷吾)의 재주를 천거했다. 공손무지는 사람을 보내 관이오를 불렀다.
未知夷吾肯應召否,且聽下回分解。
관이오가 부름에 응할 것인지 알 수 없구나. 다음 회를 들으면 풀릴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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