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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세번째 설교
제목: 천국에 대한 양과 염소의 비유
마태복음 25:31~46
설교 목적:
주님이 오시는 날에 양과 염소를 나누는 목자처럼 의인과 악인을 나누실 것이다. 그 기준은 ‘결핍으로 고통을 겪는 사람(사회적 약자)에 대하여 어떻게 대했는가’가 될 것이다. 이것은 구제와 행위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이것은 천국에 대한 비유다. 천국은 하나님이 세상에 새롭게 열어 주시는 더 나은 미래다. 배제와 오만과 독선에 사로잡힌 사람은 그런 세상을 물려받을 수 없다는 의미다.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이 들려주신 이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설교 개요:
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
2. 인자가 영광의 보좌에 앉으심
3.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4. 지극히 작은 자는 누구인가?
5.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가?
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
우리는 지금 대림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는 이 4주간은 일년의 마지막 달에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한 해를 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절기를 제정한 신앙의 선배들이 이런 것도 고려한 것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약속은 성경에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에는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들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우리가 열심을 품고 주님을 섬겨야 하는 이유도 주님이 오시는 날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속의 헛된 꿈과 욕심에 빠지지 말고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도 주님이 다시 오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그 날이 매우 가까이 왔다고 주님은 알려주시려고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인내와 충성을 북돋아 주시려고 속히 오겠다고 격려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다시 오신다고 말씀하실 때, 그 표현은 매우 독특합니다. 그것은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온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을 보면, 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향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16절) 라고 고백합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칭찬하시면서 하나님의 그 아들이 장차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기가 차서 결코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항변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제자가 되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엄중하게 말씀하셨습니다(24절).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은 자기 목숨을 잃는 것이지만 사실 주님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결국 자기 영혼을 건지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리어 자기 목숨을 건지자고 십자가를 외면하는 사람은 결국 자기 목숨을 잃게 된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그러면 주님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언제 그 목숨을 찾겠습니까?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2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마태복음 16:27~28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그 믿음의 길을 굳게 지키고 진실을 위해 살 때 자기 목숨을 잃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예수님처럼 남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는 것도 자기 목숨을 잃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좇아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할 때 사람은 십자가를 지는 것 같은 고통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주님은 그 행한 대로 갚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은 그 외롭고 고단한 길을 가는 제자들에게 포기하지 말라는 격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시 오실 때 왜 하나님의 영광으로 천사들과 함께 오시는 걸까요? 이것은 이 세상을 심판하러 오시는 분은 마땅히 하나님으로부터 이 세상을 심판하는 권세를 받아서 오셔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암행어사도 왕이 준 권세를 상징하는 마패를 들고 군졸들과 함께 지방 관아로 들어가서 심판을 합니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온다는 말은 곧 이 세상을 심판하러 온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예수님을 충실하게 따르는 제자들에게 다시 와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아 주실 것이라고 격려하셨습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들에게는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고 그 주인의 즐거운 잔치에 참여하게 하실 것입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들은 바깥 어두운 곳으로 쫓겨날 것입니다. 그들은 왕이 베풀어 주시는 잔치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그 날이 언제입니까?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그 날을 볼 자들도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셔서 그들의 행한 일에 대하여 심판하시고 상을 주시는 것을 목격할 제자들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26장에서 이와 유사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때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후에 체포되시고 산헤드린이라는 유대인의 법정에서 심문을 받으실 때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후에 대제사장이 보낸 병사들에게 체포되셨습니다. 이미 재판을 위하여 증언을 할 사람들도 매수되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기 위한 재판이 진행되었습니다. 이런 저런 거짓 증인들이 나와서 예수님에게 불리한 증언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사형선고를 내릴 만한 결정적인 한방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때 재판을 주관하는 대제사장이 일어나서 이렇게 심문합니다:
63 예수께서 침묵하시거늘 대제사장이 이르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6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마태복음 26:63~64
대제사장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그리스도라고 사칭하는 사람이라는 죄목을 씌워 신성모독죄로 죽이려는 의도를 가지고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스스로 그 질문에 대하여 네가 말한 대로 내가 그리스도라고 인정하셨습니다. 그들이 자신을 어떻게 죽이려는지를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한마디를 더하셨습니다. 불의하고 부당한 재판을 열어 예수님을 죽이는 악행을 저지르는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일당은 예수님이 심판하러 다시 오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예수께서는 경고하셨습니다. 그때도 역시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는 악인들에게 그들이 행한 대로 갚아 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에게 언제 그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들의 생전에 그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장차 예수께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하늘 구름을 타고 그 천사들과 함께 오는 것을 보려면 그들이 살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께서는 진실한 제자들에게도 그들의 생전에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셨으며, 불의한 대제사장 일당에게도 그들의 생전에 다시 와서 심판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도 다 주님이 자신들의 생전에 다시 오실 것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 말미에 이렇게 격려했습니다:
20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로마서 16:20
사도 베드로도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깨어 기도하라(벧전 4:7)고 권면하지 않았습니까? 특별히 요한계시록에서는 주님이 속히 오셔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아 주겠다고 여러 차례 말씀하셨습니다(계 3:11, 22:7, 12, 20). 성경에 따르면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약속은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생전에 일어날 일임이 분명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약속은 언제나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생전에 경험할 일이라는 점을 기억합시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충성되게 주님을 따르고 그 말씀을 지킨다면 그들은 자기 생전에 주님이 그들의 행위와 수고에 대하여 어떻게 복을 주시는지 결과를 볼 것입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도 그들의 악행이 어떤 비극을 만들어 내는지를 똑똑히 보게 될 것입니다. 대림절에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는 이 사실을 가장 먼저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1. 인자가 영광의 보좌에 앉으심
우리는 매 주일 예배 시간에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합니다. 그 고백 중에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당하시고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우리는 매 주일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고백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는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예수께서는 산헤드린 법정에서도 장차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을 그들이 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복음을 전할 때 이 사실을 중요하게 언급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베드로도 설교할 때 시편을 인용하여 ‘내가 네 원수로 네 발판을 만들 때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시 110:1, 행 2:35)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의 서신에서 여러 번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분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 중에 몇 구절만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로마서 8:34)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골로새서 3:1)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브리서 12:2)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베드로전서 3:22)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다는 말은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다 그에게 복종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신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을 심판하는 권세를 가진다는 말입니다. 그런 권세를 가진 분을 가리켜 성경은 하나님의 오른쪽 보좌에 앉으신 분이라고 소개합니다.
이 말은 모든 일의 결정권은 하나님께 있는데 하나님이 그 결정권을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 맡기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만왕의 왕, 만주의 주라고 고백하고 소리 높여 찬양과 경배를 드리지 않습니까? 예수께서 지금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으셔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속히 갚아 주실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실천하려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최선을 다할 때 그 결실을 우리 생전에 보게 하려고 주님이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물론 주님이 행악자들을 심판하실 날도 속히 올 것입니다. 그 날에 비로소 그 행악자들은 이 세상의 권세가 누구에게 있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께서는 대적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곧 예수께서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에 앉아 있는 것을 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심판은 먼 훗날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생전에 속히 이루어질 것이라고 성경은 강조하여 소개합니다. 그러면, 주님의 심판은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2.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세 개의 이야기는 심판에 대하여 다룹니다. 열 처녀 이야기는 신랑이 오는 것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준비를 잘 하고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신랑이 오는 데도 그것을 가볍게 여기고 제대로 준비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어리석은 처녀들처럼 신랑이 오는 날에 그 혼인잔치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달란트를 맡은 종들의 이야기도 심판에 대한 것입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들은 주인의 즐거운 잔치에 참여하게 되지만 악하고 게으른 종들은 바깥 어두운 곳으로 쫓겨납니다. 달란트를 맡은 종들은 각자가 해야 할 본분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본분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25장의 시작 부분을 주목하여 보면, 주님이 이 세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목적은 천국이 바로 이와 같다고 설명하시려는 것입니다. 천국은 등불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의 이야기와 같습니다. 천국은 먼 나라로 출타하는 주인에게서 달란트를 맡은 종들의 이야기와 같습니다.
어떤 점에서 열 처녀의 이야기는 천국을 비유할까요? 달란트를 맡은 종들의 이야기는 천국에 대하여 어떤 점을 들려주는 것일까요? 그리고 양과 염소의 이야기는 어떤 점에서 천국에 대하여 들려줄까요? 그 세 이야기의 공통점은 하나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잔치에 들어가고 어떤 사람들은 그 잔치에 들어가지 못하고 바깥 어두운 곳으로 쫓겨납니다. 양과 염소의 이야기에서 결론은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고 악인들은 영벌에 들어가리라는 것입니다(마 25:46).
이 이야기에서 잔치에 들어가는 것은 영생에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천국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천국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이 이야기의 해석은 달라집니다. 천국을 천상의 세계로서 사후에 들어갈 세상이라고 이해한다면 바깥 어두운 곳은 지옥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사후에 영혼들이 겪게 될 이야기로 이해될 것입니다.
그런데 천국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열어 주시는 새로운 미래로 이해한다면, 바깥 어두운 곳은 그 풍요로운 미래를 물려받지 못하고 괴롭고 슬프고 쓰라린 세상을 물려받게 된다는 의미가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미래를 잘 준비하고 자신의 본분에 충실하여 풍요와 번영의 미래를 열어갑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미래를 준비하지 않으며 진실과 자비를 행하는 일에 소홀하다가 빈곤과 갈등으로 황폐화된 세상을 물려받습니다.
양과 염소의 이야기에서 예수께서는 의인들과 악인들이 구분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의인들과 악인들을 가르는 기준은 하나, 지극히 작은 자를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예로 들어 설명하신 지극히 작은 자는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고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힌 자입니다. 그 사람들을 돌보는 사람들은 의인이며 그들을 외면한 사람은 악인입니다.
이 이야기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제와 선행에 열심을 내게 하는 동기를 제공합니다. 주님이 결국 상을 주시고 영생에 들어가게 하실 사람은 구제하고 선을 행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 담긴 의미를 생각해 보면, 천국은 결국 약자를 포용하고 배려하는 사람들이 맞이하는 새로운 세상이라고 이해될 수 있습니다.
주 중에 읽은 시편에는 우리가 찬양을 드리는 하나님이 바로 그런 분이심을 보여주는 구절이 있습니다.
5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이가 누구리요 높은 곳에 앉으셨으나
6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7 가난한 자를 먼지 더미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더미에서 들어 세워
8 지도자들 곧 그의 백성의 지도자들과 함께 세우시며
9 또 임신하지 못하던 여자를 집에 살게 하사 자녀들을 즐겁게 하는 어머니가 되게 하시는도다 할렐루야
시편 113:5~9
주 중에 성동구청장과 목회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송년의 점심을 먹었습니다. 그 후에 차를 마시면서 대화의 시간을 가졌는데 제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성동구의 표어는 ‘스마트 포용 도시’인데 스마트는 이해가 되는데 포용은 어떤 의미인가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성동구청장은 성동구의 표어에서 ‘포용 도시’는 미래에도 지속가능한 도시를 만들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개념 중에 하나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는 2016년 남미의 에콰도르에서 발표된 ‘키토선언’에서 본격적으로 드러났는데, 성동구가 만들고자 애쓰는 ‘포용도시’는 사회적으로 약한 처지에 있는 분들을 돕는 것입니다. 그것은 돌봄의 손길이 필요한 노인들과 취업으로 힘들어하는 청년들, 그리고 출산과 육아로 지친 여성들을 위한 정책들입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는 것입니다.
사회적 약자를 돌보고 격려하여 건강하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포용하는 사회는 지속가능한 도시가 될 것입니다. 이런 정신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의 정신과 맞닿아 있습니다. 어떤 점에서 그렇습니까? 성경이 말하는 천국은 하나님 나라이며,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이 펼쳐지는 세상입니다. 그리고 그 세상은 약자를 포용하고 배려하는 사람들이 맞이하는 새로운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3. 지극히 작은 자는 누구인가?
예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그 지극히 작은 자에 대하여 소개하시기를, 그들은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고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힌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모두 무엇인가 결핍된 사람들입니다. 주린 사람은 먹을 양식이 결핍되고, 목마른 사람은 마실 물이 결핍되고, 나그네 된 사람은 안정적으로 거할 집이나 나라가 없이 떠도는 사람이고, 헐벗은 사람은 입을 옷이 결핍되고, 병든 사람은 건강이 결핍되고 옥에 갇힌 사람은 자유가 결핍된 사람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는 이처럼 무엇인가 결핍된 사람입니다. 그들은 결핍으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고통에 대하여 공감하고 함께 아파하는 사람들은 사실 주님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영생에 들어갈 것입니다. 천국은 그들의 것입니다. 즉, 그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번영의 세상이 열립니다.
그러나 결핍된 사람을 공감하기는커녕 그들에게 실패자나 범죄자라는 낙인을 찍고 배제하는 사회는 암울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런 사회는 약자들의 한숨과 신음소리가 하늘에 닿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그런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그런 세상에 사는 사람들의 미래는 갈등이 심화되어 자신을 지키기 위하여 비싼 돈을 들여 집의 울타리를 세우고 경비원을 고용하고도 불안해합니다. 언제 도적이 들어올지 모르니 철저히 감시하고 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세상은 결코 천국이 아닙니다. 행복할 수도 없습니다
여성은 불결하고 부정하며 열등하다고 낙인찍는 세상은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아이들과 외국인들에게 차별을 주는 나라도 결코 번영할 수 없습니다. 노동자들을 존중하지 않는 사회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열어 주시는 번영의 사회는 지극히 작은 자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서로 포용하는 세상입니다.
우리 가정과 교회는 천국입니까? 우리나라 대한민국은 천국입니까? 우리들은 주님의 잔치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나라와 우리들은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는 고통을 겪겠습니까? 어느 것이 우리나라의 미래입니까? 그 선택은 지금 우리가 지극히 작은 자에게 어떻게 대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미래는 영생입니까, 아니면 영벌입니까? 그것은 무엇인가 결핍된 사람에게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모든 사람에게는 결핍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재물이 결핍되고, 어떤 사람은 건강이 부족하며, 어떤 사람에게는 상식이나 지식이 결핍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회성이 결핍되고 어떤 사람은 말을 조리 있게 하는 능력이 결핍합니다. 어떤 사람은 말을 적당하게 하는 조절능력이 결핍합니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인가 결핍된 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를 향하여 누군가가 모자란 사람이라고 낙인찍거나 비방한다면 우리는 어떤 기분이 들겠습니까? 그런 세상은 결코 천국이 아닙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나의 결핍을 채워주면서 함께 가자고 손을 내밀 때 우리는 어떤 느낌이겠습니까? 주눅들어 움츠리고 있는 우리에게 누군가가 자리를 내어주면서 기지개를 켜고 나의 재능과 뜻을 펼칠 수 있게 해 준다면 우리는 얼마가 기쁘겠습니까?
우리가 하는 모든 선한 일들은 먼 훗날 천국에서 상급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먼 훗날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이 우리가 지극히 작은 자에게 그의 결핍을 채워주고 나의 결핍을 누군가로부터 채움을 받을 때 그런 사람들에게는 생전에 기쁨과 보람 가득한 세상이 열리고 그런 인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천국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이유로 사도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서로 친절하게 대하고 서로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라고 권면했습니다(엡 4:32, 벧전 3:8). 그런 사회가 바로 지속가능한 사회입니다. 오늘날 세계 어느 나라는 지속가능한 세상을 물려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나라는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는 비참한 미래를 물려받고 큰 고통 가운데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4.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가?
끝으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천주교를 비판하기를 그들은 행위로 구원을 받으려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와 오직 믿음으로 받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선행으로 구원을 받으려는 사람들을 가리켜 ‘행위구원론자’라고 비난합니다. 이것은 종교개혁 이후에 개신교회의 전통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천국에 대한 예수님의 이야기를 보십시요. 그 날에 목자가 양과 염소를 좌우편으로 나누듯이 의인과 악인을 가르시는 날에 무엇이 기준입니까? 그때 예수님을 믿었는가, 또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가를 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때 보는 것은 지극히 작은 자를 보고 그의 결핍을 외면하지 않으며 자신이 가진 것으로 채워주는 사람이냐 아니면 그들을 배척하고 외면하는 사람이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노래하면서 동시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오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는 예수님의 말씀을 함께 읽고 있습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까, 아니면 행위로 받는 것입니까?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가는 자는 상을 받습니다. 그런데 행한 대로 갚으시는 주님은 각 사람이 어떻게 행했는지를 살피십니다.
우리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성경을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은 사도 바울이 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중점적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사도 바울이 누구에게 이 말을 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을 배척하면서 선민임을 내세우는 유대인들에게 이 말을 합니다. 즉,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으로 되는 것이지 사람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는다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은 우리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경건하지 않은 자를 사랑하시고 용납해 주시는 은혜를 믿음으로 받을 때만 가능합니다. 그러니 유대인이 율법을 가졌다고 할례를 행했다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이방인을 배척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을 통하여 이방인에게 은혜를 베푸시려는 의도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모두 하나님 앞에서 설 수 있는 것은 은혜로 된 것이니 서로 배제하고 소외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은 사람들은 자기 몸을 하나님께 산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그들은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에게 구원이 임합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여 행함을 강조하는 사람을 행위구원론자라고 비난하는 것은 성경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면서 사람을 편가르는 것도 하나님의 의도를 오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직 예수를 말해야 하는 때는 누군가 자기 힘으로 능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고 떳떳하다고 우기면서 다른 사람을 차별할 때 그런 사람에게 말해야 합니다.
대신에 우리는 결핍이 있는 사람에게 그의 결핍을 불쌍히 여기고 채워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의인들과 함께 영생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렇게 살아야 기독교인들이 이 세상을 풍요와 번영으로 안내하는 길잡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매우 편협하고 가장 배타적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입니까?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을 교만한 사람들에게 전하지 않고 모든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분입니다. 온 세상 사람들을 위한 복음은 오직 예수가 아니라 지극히 작은 자도 포용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입니다.
시편에 기록하기를, 여호와는 모든 나라보다 높으시며 그의 영광은 하늘보다 높지만 스스로 자신을 낮추어 천지를 살피시며 가난한 자를 먼지 더미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들어 세워 지도자들과 함께 세우시는 분입니다(시 113:4~7). 예수 그리스도도 이런 분입니다. 하나님처럼 높은 분이지만 자기를 낮추어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들의 결핍을 채우라는 하나님의 뜻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영생에 들어갈 의인들도 지극히 작은 자의 결핍을 불쌍히 여기며 그의 부족함을 채울 것이 자신에게 있음을 깨달을 때 자기의 위신이나 손해를 먼저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는 사람들입니다. 천국은 바로 그런 사람들의 것입니다. 그런 의인들이 영생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생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열어 주시는 자유롭고 공정하며 함께 번영하는 세상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대한민국이 과연 공정한 사회인가 물어보아야 합니다. 우리나라가 말하는 공정이 무엇인지도 살펴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 교회는 염소가 아니라 양으로 사는지, 악인처럼 차별하고 배제하는지 아니면 의인처럼 지극히 작은 자를 긍휼히 여기는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이 대림절에 우리가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면서 점검해야 할 행실이 바로 이것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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