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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엽 목사님 말씀책의 내용과 100% 동일하게 옮겨 적었습니다. 마음을 다해 정독하신다면
말씀의 주인이신 성영님께서 반드시 영의 귀와 눈을 열어 듣고 보게 하실 것입니다.
제 14 장 비판(하나님께 심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1.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
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6.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
까 염려하라 (마7:1-6)
성경을 많이 아는 것만이 능력은 아니라는 것, 다 잘 아시지요? 성경을 많이 안다고 해서 그것만이
능력 아닙니다. 성경을 알고자 하는 것이 그래도 자기가 남보다는, 내가 너보다는 성경을 더 많이
안다는 것을 내세우고 자기 자랑이 되기 위해서 성경을 알려고 하는 것은 겸손이 아닌 교만입니다.
그 같은 생각으로 성경을 아는 것이 되어서도 안 되고 알려는 것이 돼서도 안 됩니다. 성경 많이
아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에요. 이 같은 모습들은 다 자기 마음에서 나는 욕심입니다. 죄의 소욕인
인본에서 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남보다 성경을 더 잘 아는 것으로 자기 만족이 되고 우쭐하는
것이면 그것은 자기에게 속는 지식에 불과한 것이요, 교만에 속합니다. 성경은, 믿음이 되려 하면
지식으로 알아야 하는 부분은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 삶이 되어야 함을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알려는 것은 곧 삼위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고 관계를 이루기 위한 뜻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말씀하신 바대로 적용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성경을 알려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인격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말씀을 가르치는 것
도 성경 잘 알라고, 아는 것에 머물라고 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듣고 깨달아서 자기 믿음을 살
피고 적용함으로써 바른 믿음의 능력을 갖추자는 데 있다는 것, 여러분이 다 아는 것이지만 다시
당부하며 이 말씀을 시작합니다.
오늘 우리가 마7:1-5까지 말씀을 읽었습니다만, 여러분이 반드시 아실 것은 지금 이 말씀을 누가
하셨습니까? 예수님이지요? 그러면 예수님은 우리의 구주시지만 그분은 또 누구십니까? 천지 만물
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누구의 말씀이 됩니까? 창조주 하나
님의 말씀입니다. 우리 믿음은 육의 것을 말합니까? 영의 것을 말합니까? 영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반드시 믿음의 원칙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에
대한 원칙을 무시하면, 믿음이 될 수도 없고 믿음이라 할 수도 없습니다. 인정되지 않는다는 말입
니다. 믿음의 원칙이 되어야 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는 믿는다 할 수 없습니다. 가르침의
말씀들을 받아 영혼으로 행하는 말씀이 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영의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산으로 올라가 가르쳐 이르신 것,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의 말씀, 그 마지막이 누구든
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
고 바람이 불고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 라고 하
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6장 7장의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바로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리라는
말씀을 하셨다는 것 여러분이 심각히 들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 귀에 못이 박힐 만큼
머리에 새겨질 만큼 들은 것이지만 들은 것으로 끝나지 말고 자신의 믿음을 비추어 상고해보자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산에 올라 말씀하신 이 산상의 말씀을 영,혼,육, 전인으로 받아 그 삶이 되고
자 하는 인격적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저는 누구든지 믿음의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를 참으로 원하기에 예수님의 이
모든 말씀을 깨달아 나의 말씀으로 받고 또 전하는 데 힘써 왔습니다. 물론 산상의 말씀과 그 외에
모든 말씀도 사실은 2009년까지 일차 다 선포한 것입니다. 처음부터 저와 함께하신 성도님들은 다
들은 것이지만 다시 또 재차 다루는 내용이 있게 되는 것은 되새김 차원에서입니다.
오늘 본문 1에서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하셨는데 그러면 여러분! 예수님께서
당부하신 말씀의 초점이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이겠습니까? '비판하지 말라'이겠습니까? 여러
분의 답변은 '비판하지 말라'에 있다고 했지만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비판하지 말라'는 것이 초점
이 아니라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비판하지 말라는 것에다 초점을 두고 답했듯이 모든 사람들도 똑같이 비판하지 말
라는 것에다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시는 표적에 맞히지 못하는 무지함으로 인해 믿음에 대
한 질서도 없고 분별이 없는 요상한 그리스도인들이 돼 있는 겁니다. 그러면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아닙니까? 다 하나같이 비판하지 말라는 것에다 초점을 두고 있다는 것은 같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어떤 의도로 비판을 말씀하셨는지 볼 눈도, 들을 귀도 없으니 다 자기 머리가 알고 있는 인간상식
의 말로 바꿔서 비판하지 말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비판을 받지 않으려면 너희가 비판하
지 말라'하신 이 비판을 예수님의 의도, 예수님의 생각과는 맞지 않는 사람의 계명으로 삼아 열심
히 말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바리새인이요 서기관입니다.
그러니까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하신 이 말씀을 인간이 인간을 비판하면 안
된다고 하는 것으로 맞추어서 사람의 계명으로 만들어 놓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인간 윤리적인 도덕률로 끌어내려서 가르쳐주고 있어요. 그러니 그 말을 듣고 배운 사람
들이 나도 성경 안다는 머리 내세우면서 그걸 어디다 갖다 써먹어요? '주님이 비판하지 말라 했는
데 왜 비판합니까?'하는 겁니다.
제가 전한 말씀 앞에도 성영님께서 보내신 경고라고 분명히 출처를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비판하지 말라 했는데 왜 비판하느냐고 아는 척하고 나오는 사람 많습니다. 나는 이런 사람 보면
우리 속담 있지요?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그 속담 말입니다. 그 생각이 절로 납니
다. 물론 나 외에 다른 사람을 내 기준과 맞지 않는다고 해서 함부로 비판은 하지 않아야지요. 어
떤 확증도 없이 분별됨이 없이 비판하는 것은 죄의 속성이기 때문에 절대 삼가야 하는 것은 맞습
니다. 이것은 인간 기본 양심의 일이에요. 그래서 이런 인간 양심에서 난 도덕은 공자도 말했어요.
부처도 말했어요. 교육계에서도 층층이 가르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관계에서 있는 이런 도
덕률을 교훈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신약에서 비판을 두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판입니다. 이것은
원어로 '크리노'라 하는데 '정죄하다''심판하다''원수 갚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늘 마7:1의 "비
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하는 것은 "정죄되어 심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그 말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롬14:1에서 비판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여기서는 헬라어로 '디아크리시스'라 합
니다. 이것은 '분별'의 뜻을 가졌습니다. 내용을 보면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
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믿음이 연약해서 의심하는 것인지를 분별하라
그런 경우면 비판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 로마서가 기록될 그때 상황적인 배경을 예로 들어 여러
분이 이해를 돕습니다. 율법을 지키던 사람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교회로 나옵니다. 와서 보니
어떤 사람이 율법에는 부정하니 먹지 말라 한 돼지고기를 먹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율법에는 먹
지 말라 했는데 왜 그 부정한 고기를 먹느냐?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 아니냐고 의심한다는 말입
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부정을 벗기셨으니 이제 먹어도 되지만 그것을 알지 못하여 의심하는
그에게, 믿음으로 먹는 사람이, 그것도 모르는 자가 어떻게 예수님을 믿겠느냐고 판단하고 비판하
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직 그 지식을 갖지 못한 연약한 자니 의심하는 그를 받으시는데 만일에 믿음 있
다 하는 자가 분별없이 판단하고 비난하면 모두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니 비판하지 말
라는 말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복음을 듣고 나와 아직 성경을 알지 못하여 의심하는 것이 있을
때 아직 연약한 자인지 분별하여 비판하지 말고 받으라, 믿음을 도우라는 그 뜻입니다.
그리고 '디아크리시스'는 분별의 비판입니다. '그 말이 아니지 않느냐? 저 말이 성경의 말씀과 예수
님의 말씀과 맞는 것인가?''저 말은 말씀의 의도와는 다르다'하는 분별의 비판입니다. 말씀의 뜻에
조명하여 그와 그 말이 맞는 것이냐를 분별하기 위한 비판은 있지만 정죄하는 것은 하지 말라는 말
이에요. 정죄는 절대로 우리에게 주신 권한이 아니니 정죄의 판단은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렇기
에 제가 늘 말하는 것은 듣는 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아닙니까? 말씀 분별 못하면 자기
가 죽는 겁니다. 분별의 능력 갖추지 못하면 구원 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말씀에 대해 분별해야
할 책임은 자신에게 있습니다. 그렇기에 너무나 중요하니 성영님을 의지하여 분별하라고 늘 권면하
는 겁니다. 분별을 위해서 하는 비판은 있다는 것, 분별하는 비판에 대해서 이해됐습니까?
그러면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신 '크리노'의 뜻이 뭐라고 했습니까? 정죄하다 심판하다 또는 보복하
다. 이것은 법정 용어입니다. 법정 용어! 다시 말해 이것은 '하나님께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하나님께로 보냄을 받은 자를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이에요.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즉 너
희의 정죄하는 그 정죄로 너희가 정죄를 받고 너희가 심판자처럼 판단한 것으로 너희가 판단을 받
고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이에요. 누구를 비판하지 말라고요?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자를 자기
머리로 헤아려 비판하여 정죄하면 하나님께서도 헤아리시고 정죄하여 심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5에서 "외식하는 자여"하셨으니 예수님께서 외식하는 자라고 하신 대상이 구체적으로 누구
일까요? 바리새인, 서기관, 사두개인, 대제사장 등 유대교의 지도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비판에
대해 말씀하신 대상은 바로 유대교의 지도자들과 바리새 서기관 사두개입니다. 바리새인이 누구며,
사두개인이 누구며, 서기관이 누구인지 이들의 특성에 대해서 그동안 낱낱이 말했기 때문에 여러
분이 다 아는 것이니 더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늘날의 바리새 서기관 사두개 같은 지도자들도 다
해당합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신들만이 여호와 하나님이 번영의 복을 주셔서
풍요를 누리고 백성들을 지도하는 위치에서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게 하셨다고, 그리고 율법을
지키는 그 의로 인하여 영생에 들어가는 복을 얻게 되었다고 자부한 자들입니다. 자신들은 죄인과
는 상관없는 의인이요,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키므로 영생에 들어가게 된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들
임을 자랑하고 과시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거리를 다니면서 가난한 자들에게 돈 몇 푼씩 주는 것으
로 구제하며 백성들의 환심을 사 존경을 얻기 원하였고, 회당이나 거리에서 큰 소리로 기도하고 경
문을 읽으며 백성들로 하여금 율법에 박식하고 기도 많이 하는 선생이라는 존경과 칭찬과 자랑을
얻고자 했습니다. 이것이 다 거짓이요 외식입니다.
율법을 지키려 하나 지킬 수 없어서 무거운 율법의 짐에 눌려 지키지 못한 죄 때문에 고통하며 감
히 하나님께 얼굴을 들지 못한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비난하고 정죄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비천
하게 여기고 하나님께 저주받아서 가난을 면치 못하는 죄인들이요 민족의 골칫덩이요 천박한 자들
이라고 여겼습니다. 한 형제인 사마리아인들을 이방인의 더러운 개라 여기며 죄인으로 취급하여 상
종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들 앞에 오셔서 복음을 전파하시고 하늘로부터 오신 표적을 행하시는
메시아 예수님을 보면서 사마리아인으로 취급하며 이단의 괴수로 정죄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이들을 향해 오늘 본문 3-5까지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실 땐 죄인이라
정죄하며 비난받는 그들은 오히려 율법을 범한 죄인임을 스스로 알고 고통 하니 곧 용서받을 수 있
게 되어 그들의 죄는 티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그러나 자기는 죄 없다는 듯 죄를 보고 정죄하는 그
들은 오히려 들보가 되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면할 길이 없게 되었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자의 눈에 티는 뺄 수 있지만(용서받게 되었다는 뜻) 자신들의 죄는 보지 못
하고 스스로 죄 없다고 하는 이들의 죄는 들보라, 너희 눈 속에 들보가 있다, 그러니 들보를 빼라
고 하셨습니다.(자신의 들보를 스스로 빼지 않으면 용서받을 길은 없다는 뜻) 그러므로 백성의 지
도자로 자부하던 이들이 율법의 뜻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섬긴다 했다는 것 여러분이 심사숙고해보
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거짓 신앙이 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눅11장에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이 율법사들
이 스스로 선생 자리에 앉아서 모세 오경을 풀어 백성에게 가르쳤다는 말입니다. 그렇기에 선생
노릇하는 이 율법사들이 하나님보다 더 높은 위치가 돼 있었다는 거예요. 이들이 스스로 선생이 돼
있으니 성경을 잘못 풀어 가르치는 것이야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의도를 거짓으로 말할 수밖
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들도 들어가지 못하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어도...., 오늘날 이런 자기 계산, 자기심사들 다 갖고 있잖아요? '몰
라서 그랬으니 이후에 깨달을 날이 있겠지'하지 않습니까? '그래도 하나님을 믿고 섬긴다 하는 것
이니 몰라서 그랬으니 언제든지 믿음을 바로 할 기회는 있겠지'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런 여지를
가진 것 아닙니다. 스스로 나와 선생이 되어 말씀의 의도에서 벗어난 것들을 가르친 자들에게 내린
여지없는 선고예요. 그러니 오늘날 스스로 나와 선생 된 자들이 너무나 많은 것을 볼 때에 참으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스스로 나온 선생들이 하나님이 자기를 종으로 불렀다고만 생각하
지 자신을 알고 회개하여 돌이키는 자가 없었다는 것, 예수님의 때에 보이신 것을 볼 때 오늘날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바리새인 서기관 사두개인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절대로 받지 않았다는 것 분명히 아십시오. 마찬가지로 이 부류들은 저의 전한 말
씀들을 듣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분명히 아십시오. 왜냐? 종자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분
별의 책임이 여러분 자신에게 있음을 알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눈 속에 티는 마음에 고통은 좀 있지만 빼면 됩니다. 티야 빼 버리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네 눈 속에 들보를 빼라 하셨는데 들보가 뭐에요? 집에 균형을 잡고 지붕이 올라갈 수 있
도록 양쪽 기둥과 기둥 사이를 걸쳐 놓아주는 버팀목과 같은 역할이지 않습니까? 벽과 지붕의 중심
부분이 되는 것, 지붕이 올라갈 수 있도록 하는 중심이잖아요? 그러니 들보를 빼면 집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가장 기대를 가지고 있는 자식에게 너는 우리 집안의 무엇이라? 우리 집 대
들보다 그러잖아요, 너 무너지면 우리 집 다 무너진다 하잖습니까?
예수님이 이들에게 "들보 빼라"한 것은 집의 균형을 잘 잡고 있는 그 들보 같은 인본주의를 말합
니다. 자기중심, 그 인본을 빼라는 말입니다. 봐야 할 것이 보이지 않고 만나지 못하게 하는 인본
주의, 하늘의 일을 보지 못하게 덮고 있는 그 인본을 빼라는 것입니다. 네 보는 것 네 생각, 너
중심인 너를 허물어라. 너희가 지도자라 하니 먼저 그 들보부터 빼라. 그러면 네 형제의 눈 속에
티를 볼 것이다. 그들과 다른 것이 아니라 똑같은 죄인이라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죄 용서가 아니면 죄인으로 하나님께 심판받는 것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집에 거
하는 한 형제임을 알게 되고 그 형제들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고 빼리라 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나를 보는 눈과 또 누구 보는 눈이 있을까요? 남 보는 눈, 나 보는 눈, 두 눈입니다. 믿음
은 나를 보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은 자기 보는 눈은 없고 두 눈으로 남만 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서 율법의 잣대 가지고 남의 죄 보지 말고 남을 보는 눈은 닫고 너를 봐라, 네가 누구인지 율법으
로 너를 보라고 하신 겁니다. 또한 예수님의 말씀으로 영의 눈을 뜨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그 죄를 용서받은 자라는 것이요, 용서받았다는 것은 진리로 산다는 것을 말합니다. 진
리로 산다는 것은 남 정죄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남의 죄를 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
을 헤아리지 않고 받아 따르는 것입니다. 남을 비난하고 정죄하고 조롱하고 비웃고 말로 심판하는
것들은 사단이요, 그 사단의 것이 입으로 나오는 것은 그 마음에 있기 때문이요, 구원 얻지 못했음
의 증거입니다. 사단의 것들이 입으로 나오지 않는 것이 구원의 증거요, 예수님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자기 보는 눈은 없고 남을 보는 눈은 밝습니다. 남의 눈의 티는 잘 보는데 자신의 눈 속에
들보는 보지 못합니다. 인본 중심이 들보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속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비난
하고 비웃고 정죄하게 되면 그것은 이미 자기가 심판자나 되는 것처럼 행세한 것이 되었으므로 그
정죄의 심판이 자기에게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하신 것은 '하나님께 심판을 받지 아니하려
거든 하나님께로 보냄을 받은 자를 비판하지 말라'라는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5에 "외식하
는 자여"하신 이 바리새인, 서기관, 사두개인, 유대교의 지도자들이 비판한 대상이 누구라는 것입
니까?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나오신 예수님을 눈 속에 있는 들보로 인하여 보지 못하고 죄인
으로 취급하며 정죄하고 심판했습니다. 예수님의 행하시는 모든 이적과 표적을 보면서도 헤아리고
비판했습니다. 예수님이 전하시는 말씀을 헤아리고 책잡았습니다. 자신들의 사상과 맞지 않는다고
이단으로 몰았습니다.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죽은 자를 살리심으로 표적을 나타내 죄사하는 권세를 가진 분
이요, 생명의 주인이시요, 영생을 얻게 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보면서도 저것은 안식일을 범한
죄다, 돌로 쳐 죽여야 한다. 일개 목수의 아들이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과 동등이라고 하
니 그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참람한 행위다 죽여야 한다. 사람들을 선동하고 다니는 이단의 괴수
다 죽여야 한다는 이 같은 죄목들을 만들어 십자가에 달아 못 박아 죽임으로써 심판자 행세를
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보냄을 받은 제자들을 향해서도 크리노의 비판을 계속적으로 행하며 핍박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택한 사람들의 받는 핍박도 비판도 예수님 자신이 받는 것으로 여기십니다. 예수
님의 말씀을 비판하는 것도 예수님을 비판하는 것으로 여기십니다. 그렇기에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
거든 비판하지 말라 하신 것입니다.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
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수천 년에 걸쳐 언약하신
메시아가 백성 앞에 오셨는데 영접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고 정죄하니 하나님의 심판이 너희에게 그
대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인간들이 예수님의 말씀하신 이 비판에 대해서 참으로 무안(無顔)하게도 예수님의
의도와 관계없는 인간 자기들의 말로 바꾸어서, 인간을 그 인간의 말을 비판하지 말라는 뜻의 인간
윤리와 도덕이 되게 하여 아주 그것으로 굳어버리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있는 인간의
어리석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오만을 부르는지 참으로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입
장에서가 아닌 인간 자기 입장에 서서 '주님이 비판하지 말라 했는데 왜 비판하느냐?'고 무지한
말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인간들이 나에게도 말입니다. '주님이 비판하지 말라 했는데 왜 다른 목사들의 말씀을 비판
하고 나오느냐'하며 나를 비난하고 나오는 자들이 있다고 했지 않습니까? 예수님 말씀하신 비판의
의미도 모르면서, 그렇게 덤비는 것입니다. 당신이 알면 얼마나 안다고 그 잘나가는 유명한 목사
들을 비판하느냐는 것이겠지요. 다른 목사들은 다 바보고 자기만 혼자 다 깨달은 것처럼 하느냐
하는 것이겠지요. 하나님이 당신만 불러 세운 것이냐? 하는 것이겠지요.
그러면 그들이 말한 대로라면 나에게 왜 비판하느냐고 비난하는 것 그것도 비판입니까, 아닙니까?
비판입니다. 그 말을 하는 그 자신도 자기 말대로라면 그 비판에 걸렸습니다. 나야 성영님이 보내
셨다고 분명히 밝혀 말하였으니 내 말에 내가 책임을 지는 것이지만 그런 그들은 보냄을 받은 것에
스스로의 확증도 없으면서 나를 비판한다고 하면 그것부터 옳지 않음을 나타내는 것이지 않습니까?
인본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 자신들 말대로라면 판단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인 것이지
자기들이 비판하고 비난할 수 없다는 것까지 알아야 하는 것이겠지요.
또한 성영님께서 영혼들을 거짓으로부터 건져내려고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볼 줄 모르고 거
짓의 말과 행위들을 드러내 주는 것을 비판한다는 것으로 듣는 것이면, 그 자신이 거짓에 속했다는
말일 것이고, 성영님을 거역하는 것에 걸리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하셨으
니 삼가 자신을 잘 살펴서 성영님을 훼방하는 죄에 걸리지는 말아야지요. 오늘 비판받지 아니하려
거든 하신 이 비판에는 절대로 걸리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비판한 바리새인 서기관
사두개인의 받을 심판에 참여하지 않으려면 아무라도 할 수 있지 않은 이 일을 하면서 이것이 하나
님께서 보내신 경고라고 한다면, 삼가 스스로 입 벌리는 것들 조심해야 하는 것이겠지요.
제가 예수님께서 비판받지 아니하려거든 하신 말씀, 여기 이 두려운 말씀을 깨닫지 못해 의미도
모르면서 그같이 비판을 하고 있는 것인지, 그것도 생각을 좀 해봐야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참으
로 자기가 하나님의 의도에 맞게 성경을 깨달은, 확증이 있음으로써, 성경을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나의 전한 말씀과 경고의 말씀을 거짓이라고 비판한다면 모를까, 성경에는 없지만 모든 사람들이
가진 공통된 생각이라고, 객관적인 것이라고 비난하고 나오는 그것이 어찌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
되겠느냐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비판한 유대교의 지도자들 바리새인 서기관 사두개인들에게 엄중한 심판의
선고를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1장에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들아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사여
마23에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소경된 인도자여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
결을 피하겠느냐 창세 이후로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 돌아가리라 말씀하심으로써, 유대교의 성전 역사와 예루살렘 역사가 필하리라고, 그때 그
환란이 얼마나 클지 이 유대인들에게 가장 큰 재난이 되리라고 예언하셨습니다.
눅21장에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했습
니다.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며 성 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지며 촌에 있는 자
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 했습니다. 이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형벌의 날이라 그날
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니 이는 땅에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겠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저희가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하셨습니다.
제가 이것을 읽는 것은 오늘날 이 말씀을 가지고 7년 환란 때에 있을 일처럼 결부하고 있어서 여러
분이 참고로 알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그때 당시 유대인들의 예루살렘과 성전의 멸망당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유대교의 역사를 필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말씀하셨잖아요? 이날들은 기
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형벌의 날이니라고 말입니다. 유대 백성들에게 진노가 있겠음이라, 창세 때
부터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형벌의 날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를 말세라 합니다. 그런데 말세라 하던 그 세월이 그동안 2천여 년이 흘
렀습니다. 말세가 2천여 년이 넘어오게 된 것은 이것은 확실한 것은 아니고 저의 생각인데, 아마도
하나님께서 채우기 원하시는 이방인의 수가 차기까지, 기다리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
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신 그때를 성경은 말세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구약의 모든 뜻을 다
이루셨습니다. 창세 때부터 기록된 하나님의 뜻을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다 이루셨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이 멸망을 예언하신 그때가 바로 형벌의 날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루살
렘이 성전과 함께 멸망할 그때가 바로 유대교를 끝내시는 형벌의 날입니다. 그것을 말씀한 거예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칼날에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고 피신하여 살아남은 자는 이방으로 흩어졌습니
다. 말씀대로 예루살렘은 오늘날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눅21:20-24까지의 말씀을 가지고 7년 환난 때와 연관 지어 주거들랑 속지 말라
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일이 언제 이루어졌어요? A D, 70년에 로마가 순식간에 예루
살렘을 포위하고 성을 장악하여 기를 꽂고 성전의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게 다 허물었어요. 그
리고 보이는 대로 칼날로 죽였고, 그때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이 화 있다고....,왜 화가
있겠습니까? 임신 상태고 아이가 있으면 행동이 부자유스럽잖아요? 순식간에 벌어질 일이니 더딜
수밖에는 없지 않겠어요? 밭에서 일하다가 그 일을 보거든 즉시 산으로 도망하라. 유대에 있는 자
들, 밖에 있는 자들은 성 내로 들어가지 말고 집으로 돌아오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라. 그리고 지
붕 위에 있는 자들은 집 안으로 내려가지 마라. 제자들의 기도처를 마가의 다락방이라고 했듯이
유대인들은 집 옥상에 다락방 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너희가 지붕에 있거든 내려오지 마
라. 내려오면 죽임을 당한다는 말입니다.
그때에 많은 유대인들이 죽임을 당했고 또 피해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디아스포라'라고 그러지요?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고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면서 살아야 했던 유대인의 2천 년 역사입니다. 1948
년에 유대인들이 땅을 극적으로 찾기는 했습니다. 그것이 지금 성경에 예언된 종말의 징조라고 말
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지도자라 자칭한 바리새인 서기관 사두개인 유대교의 지도자들이 예수님과 예수님의 사람
들을 비판하고 심판자처럼 행한 교만은 곧 자신들도 영생으로 들어가지 못하면서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은 것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의 이런 엄청난 살육을 당하는 처참한 2천 년
역사가 되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이라고 다르지 않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가르치는 자들이 자기도 들어가지 못하면서 또 들어갈 자도 막는 일이 있다는 것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참으로 두렵고 두려운 일이라는 것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하신 것은 이같이 성영
님께서 보내시는 말씀을 삼가 조심하여 살펴보지 않고 성경에 말씀하고 있지 않음에도 자기의 행한
것과 같지 않다고 자기의 생각과 자기의 아는 것과 맞지 않는다고 하여 판단하고 비판한다면, 뜨지
못한 눈 가지고 여자라고 무시하는 것이면 하나님을 비판하는 것에 걸리게 된다는 점을 잊지 말아
야 할 것입니다.
또한 마 5장에서 7장까지 가르쳐 이르신 말씀과 그 외 모든 말씀을 머리로 듣고 판단하고 헤아리지
말라고 하시는 겁니다. 너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삶이요 길이요 복이요 생명이 되는 하나님
나라의 원칙을 말씀하신 것이니 믿고 받아들이고 따르는 것이지, 거기에 이 말씀은 너무 어렵고 저
말씀은 나와 상관없고 저 말씀대로 살다간 내가 망할 것 같고 못살 것 같고 이런저런 핑계들로 판
단하고 잘라내면 이미 그것은 사단의 자식이라 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헤아리면 그 헤아림 그대로
헤아림을 받는 것이니 말씀을 헤아림으로 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헤아리는 것은 바리새인이요 서
기관이요 사두개인이요 유대교 지도자들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왜 믿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목적을 어디에 두었습니까? 하늘의 것입니
까? 땅의 것입니까? 만일에 땅의 것이면 믿음이 잘못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것을 주시
기 위해서 하늘에서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 믿는 것
을 땅의 것에다 둔다면 하늘의 것은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것에 둔 믿음이면 하늘의
것을 얻고 땅의 것도 따라오는 것입니다.
사람이 믿는다 할 때 땅의 것 때문이면 예수님의 말씀을 스스로 잘라 내는 자가 되고 예수님의 말
씀을 판단하고 헤아리게 돼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것
예수님께 믿음을 두었으면 예수님의 말씀을 사랑하여 따르게 돼 있습니다. 어려움 중에서라도 사
모하여 사랑하고 기어코 따라가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복 중의 복은 오늘 말씀 하나님께 비판받지
않는 성영님으로 믿는 믿음입니다. 아멘입니까?
오늘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하신 말씀의 뜻을 아셨습니까? '비판하지 말라'가
핵심이 아니라 '비판을 받지 않아야'하는 것이 핵심이라는 것도 이해됐습니까? 인간 간의 관계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아셨습니다. 사람이 이 크리노의 비판을 하게 되면 하나님께
이 크리노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만일에 하나님께 이 크리노의 비판을 받게 되면 그건 길이 없습
니다. 오늘날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크리노의 비판에 걸리는 것은 뭐겠습니까? 믿음을 바로 하
라고 성영님이 보내신 말씀을 거부하고 판단하여 비판하는 것이면 걸려드는 것입니다.
비판에는 하나님께 받는 크리노의 비판이 있지만, 또 한편은 우리의 믿음은 반드시 분별을 해야 할
책임이 있으니, 그에 대한 분별의 비판은 있어야 하는 것임은 충분히 이해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사람에게 비판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비판받지 않아야 하는 것이 오늘 말씀이 말하는 핵심이라
는 것을 끝으로 하고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아멘!!
제 14 장 비판(하나님께 심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P287-P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