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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예수님 안쪽은 참 신비하다>의 줄거리:
죄악과 저주받음의 특징이 하늘과 땅이 닫히는 것입니다. 예수님 믿으면 하늘은 열리는 하늘이 되고, 땅은 열리는 땅이 됩니다. 예수님 믿으면 삶이 진행되는 판이 완전히 바뀌는 것이지요. 하늘이 열리고 땅도 열린 인생 판 위에서 일상을 살아본 체험이 있으십니까? 예수님 안에 마음이 들어가 머물면 됩니다. 예수 안쪽은 참 신비한 세계입니다.
예수님 안쪽은 참 신비하다
(누가복음 4:1~4)
1.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2.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3. 마귀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예수님 안쪽은 참 신비하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예수님 안쪽은 참 신비하다’
1절을 보면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라고 하였습니다. 누가는 이러한 언급을 통하여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사건과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금식을 하시면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사건이 연결되어 있음을 우리에게 똑똑히 인지하게 해주십니다. 이러한 의도는 앞서 언급된 족보에 관한 내용으로부터도 드러납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은 누가는 예수님의 세례 사건 뒤에 족보를 언급함으로써 예수님은 하나님과 연결되어 계심을 명백히 하였습니다.
이러한 연관성 하에서 시험을 받으신 사건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통하여 믿음의 주로써 당신 스스로를 드러내셨습니다. 믿음이란 주님께 나의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을 뜻하는 라틴어 크레도(Credo)는 “나는 믿는다.”라는 뜻입니다. 이 크레도는 심장과 준다는 말의 합성어로써 “나의 심장을 꺼내어 드린다.”라는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믿음이자 신앙의 의미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일회적인 것이 아닙니다. 공생애의 예수님께 마음을 드릴 때에 나의 마음은 예수님 안에 머물게 되고 이것은 유지되어야만 합니다. 회사에 있다고 해서 예수님을 잊어버릴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 마음을 드리지 않는 것이고 믿음이 중지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유지될 때에는 예수님의 세례 때와 같은 모습이 나타나게 됩니다. 3장 21~23절을 보면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과 예수님이 사랑과 기쁨의 관계임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 안에 마음을 들여보낼 때에 하늘 방면에서 이루어질 일입니다.
한편 광야시험은 우리가 예수님 안에 마음을 들여보냈을 때에 땅 방면에서 이루어질 일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십 일을 금식하신 후에 마귀에게 세 가지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이 시험들은 인간의 삶에 있어서 본질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본질적이라는 말을 달리하면 일상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삶을 살아갈 때에 항상 세 가지 시험에 해당되는 순간을 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날은 고사하고 매시간 매분마다 이 시험에서 벗어나는 순간이 없기에 우리는 세 가지 시험과 연관된 행동을 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광야시험은 오래전에 일어난 우리와 무관한 사건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공생애의 예수님 안에 마음을 머물게 하는 믿음을 유지할 때에 하늘이 열리고 땅이 열리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열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를 염두에 두자면 세 가지 시험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 죄악이며 저주에 빠진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인간의 힘으로는 세 가지 시험을 이길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나에게 어떤 힘이 생겨나서 시험을 이기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나는 예수님 안에 들어가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 안에 들어가 있으면 예수님께서 시험을 이기심이 나의 이김이 됩니다. 결코 내가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무조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시험에 질 수밖에 없는 상태를 자연인이라고 합니다. 인간이라면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기에 시험을 이기지 못했다는 의식조차 할 수 없습니다. 시험을 이기지 못하여 패배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고 당연한 결과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 마음을 머물게 함으로써 하늘이 열리고 땅에서 시험을 이기는 두 가지 일을 모두 체험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 중에 가장 신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이 열린다는 것은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는 사랑과 기쁨이라는 단어를 통해 묘사되었습니다. 사랑은 일체 됨이고 서로가 서로를 채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체 됨과 채움을 통해서 기쁨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 기쁨은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있었기에 세상의 역사보다 더 깁니다. 그리고 아담 이전에 삼위일체 안에서 발생한 기쁨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이 기쁨과 삼위일체 되심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늘이 열렸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하늘에 떠있는 달은 하나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하나의 달을 각자의 마음속에 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 채워짐도 이와 같습니다. 모든 사람이 각자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이와 연관하여 지혜에 대해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지혜란 곧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결된 상태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삼위일체 하나님께로 가는 외통수 길의 입구라는 말씀도 드렸습니다. 십자가를 붙들게 되었다는 것은 이제 누구도 만날 수 없이 삼위일체 하나님께로 갈 수밖에 없는 외통수 길의 입구에 들어섰음을 의미합니다. 잠시라도 하나님을 외면한다면 그 순간에는 십자가를 놓친 것이고 그 입구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직통계시라는 말을 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드는 것이 하나님께로 가는 외통수 길이기에 하나님께 직접 계시를 받는다는 표현도 일리가 있어 보일 수 있습니다. 지혜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생각이라고도 말씀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남들에게는 주시지 않는 계시를 내게 주신다는 생각에 빠져들게 된다면 스스로를 신성시하게 됩니다.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르지 않는 것으로 주장하게 되고 이것이 이단으로 빠져나가는 첩경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항상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하늘이 열리고 땅이 열리는 본문의 내용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들 때에만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에 참여하는 사위일체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사랑과 기쁨으로 표현되는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가 우리에게도 이식될 수 있습니다. 나의 의식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들 때에만 예수님 안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잊는다면 믿음은 성립할 수가 없습니다.
주일 저녁에 십자가 온라인 교회의 모임을 가졌습니다. 모임을 갖는 취지는 십자가 생활화에 도움을 주고받기 위함입니다. 집사님 한 분께서 십자가에서 죽기가 어렵다는 고민을 털어놓으셨습니다. 또 한 목사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는 타이밍에 대해 질문을 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돈 문제가 생겼다면 그것을 받아들이기 전에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해야 하는가, 돈 문제를 받아들인 다음에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해야 하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당연히 돈 문제가 마음에 들어오기 전에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돈 문제를 받아들였다면 그때라도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또 다른 목사님께서는 로마서나 갈라디아서 말씀을 인용하시며 지금 죽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이미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기억하고 인정하면 되는 것이 아니냐는 말씀을 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저 또한 이것을 염두에 두고 십자가 생활화를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는 날마다 죽어야 함을 강조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서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하였고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16장 24절에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에 따라서는 십자가에서의 죽는 문제가 완결되었다고 이해할 수도 있고, 계속 진행 중인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으며, 지금 이 자리에서 해나가야 할 과제로써 제시하는 표현도 있습니다. 실제로 죽었음을 인정하면서도 세상 문제가 마음에 들어오는 경우가 존재합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이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 안쪽에서 일어나는 신비한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이미 죽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십자가에서 죽음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 십자가에서 이제 죽어야 된다는 표현들에는 공통적으로 겹쳐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자아의식에 관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저는 결혼을 해서 한 여자의 남편입니다. 그리고 아이를 낳음으로써 한 아이의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신분의식이 곧 자아의식이 됩니다. 이러한 자아의식들 중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보편적인 것은 남자나 여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보다도 우선되어야만 하는 자아의식이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가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앞서 십자가에서 죽는 타이밍을 물으신 분이 계셨습니다. 다만 자아의식을 염두에 두자면 여기에는 타이밍이 없습니다. 내가 엄마라는 자아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잠자는 동안에도 엄마이고 깨어있는 동안에도 엄마입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세상에 대해서는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라는 의식을 갖는 것이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들어갔더니 하늘이 열리는 신비함이 체험됩니다.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유지함을 통하여 예수님 안쪽으로 들어갔을 뿐인데 이 땅의 상황과는 상관없이 기쁨과 평강은 유지되게 됩니다. 하늘이 열리고 땅이 열리는 신비함을 체험하게 됩니다.
어떤 집사님의 아들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에는 수학이 최하등급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군대를 갔다 와서 1년간 공부를 하고 수능을 다시 보았다는데 1등급이 나왔다고 합니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인터뷰까지 했다고 합니다. 초등학교 5~6학년 수준도 안 되었던 실력이 어떻게 1등급으로 변할 수 있었을지 대견스러울 뿐입니다. 예수님이 이기신 시험들은 수학으로 치자면 미분과 적분, 어려운 통계의 집합, 고차원의 방정식처럼 어렵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유지하고 있으면 어느덧 어렵게만 느껴지던 삶의 문제들이 술술 풀려가게 됩니다. 그렇기에 신비하고 놀라운 일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그 첫 번째로 떡에 관한 시험이 제시되었습니다. 사십 일을 금식하신 예수님께 가장 시급한 것은 떡 문제였습니다. 그렇기에 마귀는 떡으로 예수님을 시험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사람의 몸을 입고 계셨기에 사람과 똑같은 배고픔도 가지고 계셨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아들로써의 능력으로 돌을 떡으로 바꾸실 수도 있으셨습니다. 마귀는 일단 죽게 생긴 몸부터 살리고 보자는 유혹을 합니다.
마귀가 비합리적인 유혹을 했던 것이 아닙니다. 인간으로써 가질 수 있는 당연한 욕구를 충족시키라고 말했을 뿐입니다. 마귀는 우리에게도 이렇게 합리적이고 그럴듯한 유혹을 합니다. 우리에게는 돌을 떡으로 만들 능력이 없으니 예수님과 같은 유혹을 하지 않을 뿐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능력으로 당연히 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일들을 유혹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당연하게 여겨지는 상태야말로 무시무시한 죄악과 저주에 사로잡힌 상태임을 깨달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 시험의 의미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모세가 신명기 8장 3절에서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모세는 광야생활을 하던 선민들에게 하나님께서 이들을 낮추신 이유에 대해 설명하고자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한편 마태복음의 기록과 비교를 해보면 약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4장 4절에서는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에 비하여 누가복음에서는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고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것이라’는 말씀을 생략했습니다. 누가가 이를 몰랐기에 생략한 것은 아닙니다. 누가는 마귀시험의 핵심을 드러내 강조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뒷부분을 생략했습니다. 사십 일 금식한 상황에서 떡이라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인간으로써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렇게 당연하게 여겨지는 문제가 실은 크게 잘못된 것임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 시험의 근본 취지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엇인가를 추구해야만 합니다. 사람은 살기 위해서 두 가지가 채워져야만 합니다. 육체의 배를 음식으로 채워야 되고, 마음의 배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야만 합니다. 간단히 말해 육체의 배가 채워져야 되고 마음의 배가 채워져야 합니다. 육체의 배가 채워져도 마음의 배가 채워지지 않는다면 끊임없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인간은 누구나 살기 위해 육체의 배를 채우려는 동시에 마음의 배를 채우려고 합니다.
즉 사람은 살기 위해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7장 7절에서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만 이것은 생소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갓난아기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사람이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삶을 살아갑니다. 문제는 무엇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느냐는 것입니다.
마귀가 시험한 내용을 다시 풀어서 생각해봅니다. 마귀는 예수님께 “당신이 사십 일을 금식하였으니 배가 고픈 것은 당연합니다. 다만 이곳은 광야입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당신은 사람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니 이 돌덩이들을 떡으로 만들어서 배를 채우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마귀의 시험은 예수님께 무엇을 추구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던진 것입니다.
육체의 굶주림이 극단적인 단계에 이른 상태에서 떡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으로써 자연스럽고 시급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고 대답하십니다. 이 말씀은 사십 일을 굶고도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이 떡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사십 일을 굶은 상황에서도 배를 채우기 위해 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세상에는 떡 외에도 사람들이 구하는 대상이 많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돈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결코 돈을 구하고 찾고 두드려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됩니다. 돈뿐만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이루어질 일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절대로 구하고 찾고 두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목회를 하는 목사님들에게는 예배당이 그러한 대상일 수 있습니다. 사십 일 금식한 사람이 배를 채우기 위해 떡을 갈망하는 것처럼 목사님들은 예배당이 교인들로 채워지기를 갈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자면 설령 목회 현장이라 할지라도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인 한 그것을 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일들에 관한 것은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구하고 찾고 두드릴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이 구절을 통해 세상 것을 구하면 그것이야말로 죽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험에 수시로 넘어갑니다. 문제 출제자의 의도 자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몸으로 세상을 살기에 돈이 급하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설령 사십 일을 굶은 사람처럼 돈이 없어서 죽고 망할 지경이 되어도 돈을 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누가는 구하지 말아야 될 것을 강조하기 위해 하나님을 추구함에 대한 것조차 뒤로 미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구해야 할 것과 구해서는 안 될 것에 대해 얼마나 생각해보셨습니까? 이에 대해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신앙생활을 해온지가 너무나도 오래되었습니다. 이 세상의 것을 구하는 것은 절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있는 것을 노골적이든 은연중이든 구하게 됩니다. 세상의 것들을 구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겨집니다. 떡은 이 세상에서 필요한 것들 전체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유지한다면 불가능하게 여겨지는 일이 가능해집니다. 지금 몸에 병이 들어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도 건강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말씀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하나님을 만나고 가지고 친해지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이시기에 무한히 구할 수 있습니다. 영생은 단지 육체를 벗어버리고 하늘나라에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을 영원토록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육체를 가지고 사는 인간으로써 세상의 것들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집니다. 상식적으로 인간으로써 마땅한 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누가는 이것을 강조하며 추구해야 할 하나님에 대해서는 생략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자아의식이 유지되는 동안에는 병에 걸려 죽어가는 중에도 건강을 구하지 않습니다. 건강을 구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돈이 없어도 돈을 구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자녀가 공부를 못하고 말썽일지라도 공부를 잘하게 해달라는 간구가 나오지를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구하지 않는 세상일들이 버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진행되게 됩니다. 이것이 너무나 신비한 일입니다.
수학이 최하등급이었던 학생이 1년 만에 1등급을 받았을 때에 스스로 놀랐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에게 놀랄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내가 세상에 대해서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데도 여기를 봐도 저기를 봐도 다 되어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진행되어 갑니다. 하늘에서 신비한 일이 열리고 땅에서 신비한 일이 열리게 됩니다.
남자나 여자라는 자아의식보다도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유지할 때에 하늘이 열리는 신비함과 땅이 열리는 신비함이 경험될 수 있습니다. 몸이 안 좋은데도 건강을 구하지 않는 이유는 건강이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설령 아프다가 죽을지라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졌으니 감사할 일입니다.
저는 그러한 모습을 실제로 보았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42살에 뇌종양 때문에 그 많은 재산과 그 아름다운 아내와 사랑스러운 쌍둥이 딸과 아들을 놔두고 죽어가던 분이 계십니다. 이분께서는 죽어가는 중에도 뇌종양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은혜에 벅차서 감사하셨습니다.
아직도 세상 것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고 계십니까? 이러한 삶은 누구나 다 그렇게 살아가는 신비할 것이 하나도 없는 삶입니다. 고진감래를 믿으며 언젠가 편할 날이 오리라 기대하는 것은 삶이 아닌 지옥의 예행연습입니다. 삶에 달콤함이 주어지지도 않으며 행여 주어졌더라도 오래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가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남자나 여자라는 가장 기본적인 자아의식보다도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더 우선시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하늘이 열리는 신비, 땅이 열리는 신비를 일상적으로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의 자아의식은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닙니다. 또한 남편이나 아내도 아니고 아빠나 엄마도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자아의식이 유지될 수 있도록 은총을 내려 주심으로써 약속해주신 하늘의 신비와 땅의 신비를 경험하는 주인공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