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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어린양
본문<요1:29~34> 전체 읽고
사람들은 내세에 대한 보장이 되는 구원을 받기 위해 종교를 갖는다. 세상에 수많은 종교가 있지만 그 내용을 보면 두 가지로 압축될 수 있다. 자력구원이냐? 타력구원이냐?
자력구원이란 인간 자신이 신의 요구에 부합한 행위를 통해 구원을 얻으려는 구도이기에 행위구원이라고 하고, 타력구원이란 인간의 행위는 전혀 가미되지 않고 오직 신에 의해 성취된 구원을 선물로 주어지는 구도이기에 은혜구원이라고 한다.
잘 알다시피 기독교만 타력구원이고 나머지 모든 세상종교는 자력구원을 표방한다. 세상에서 추구하는 종교는 자신이 행한 대로 그 보상을 얻는다는 인과응보와 상선필벌의 사상에서 발현된 종교이기 때문에 자력구원은 인간들에게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구원관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정한 교리에 부합한 행함을 자신들의 자랑거리로 삼고 산다. 그게 그들의 공로요 자산이요 보화이기 때문이다.
불교나 힌두교에서는 삼보일배, 오체투지, 벽면수도 등의 자학적 고행으로 자신의 내면을 다스리고 각종 선행과 구제, 베품, 나눔에 대한 실천을 통해 신의 성품을 함양해서 신의 경지에 도달하거나, 신의 마음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으려고 매사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산다.
그런가 하면 정반대적 성향으로 행위의 공로를 쌓는 종교도 있다. 가령 이슬람의 IS단체는 순교를 최고의 공로로 삼기 때문에 내세에서 영광된 자리를 확보한다고 여겨, 목숨을 내건 자살 특공대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한 율법적 가르침으로 어려서부터 세뇌되어 있기 때문에 기꺼이 자원하는 것이다. 알고 보면 종교야말로 가장 무서운 집단이다. 그래서 이단 사이비 역시 이런 기조이기 때문에 역사 속에서 끊이질 않고 기성을 부리는 것이다. 이단들도 다 행위구원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현세의 희생을 자랑과 공로로 삼는다.
이러한 인간 보편적 가치체계 속에서 인간의 공로는 단1도 섞이지 않는 은혜구원을 말하는 것은 씨알도 먹히지 않는 논리일 수밖에 없다. 오늘 본문이 바로 ㅎ님의 구원인 은혜구원의 핵심인 어린양의 피, 십자가 복음에 대한 말씀이다. 복음은 인과응보나 상선필벌의 인간세상의 정신사조와는 정반대이기 때문에 세상은 복음을 거부하고 비토한다. 그러나 인간이 죄로 죽은 존재인 것을 안다면 바울의 말처럼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 아니한다’고 복음 예찬론자가 될 수밖에 없게 된다.
세례요한은 그 복음의 주인공인 IX만을 증거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자이다. 정말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살다가 예수가 ㅎ님의 아들로서 세상죄를 지고 가는 ㅎ님의 어린양이심을 증거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주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났지만 주님보다 더 일찍 세상을 작별하고 천국에 갔다. (전주에 나눈바..) 요한의 가문은 제사장을 아버지로 두고 아론의 후손 계열의 어머니를 둔 금수저였지만 성전에서 종교지도자로서 기득권을 누리는 삶과는 정반대로 광야에서 약대 털옷을 입고 나그네로 살다간 ㅎ님의 사람이었다.
세례요한이라고 세상 윤택한 삶과 누림성을 알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러나 ㅎ님이 그의 삶을 그렇게 정하고 이끄셨기에 세상을 등지고 광야의 삶을 살아간 것이다. 주님 역시 30세까지 간고와 질고를 겪으시고 공생애 3년 동안 복음전파를 하시다가 십자가 부활 후 40일 동안 부활의 몸을 제자들에게 보이시고, 때가 차니까 더 이상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고 하늘로 올라 가셨다. 에녹이 그러했고 믿음의 선진들이 그러했다. 모두가 세상에서 이방인처럼 살다가 그리던 본향인 천국에 간 자들이다.
이러한 세례요한이 29절에서, 예수에 대하여 ‘세상 죄를 지고 가는 ㅎ님의 어린양’이라고 소개한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 청천벽력 같은 충격적인 말이다. 과거 ㅎ님은 유대인들에게 율법과 성막의 제사제도를 주셨다. 율법으로 죄를 깨닫게 되면 성막에 나아와서 자신의 형편에 따라 우양을 대신 죽여서 자신의 죄를 속하라는 목적으로 짐승제사를 제시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점차 세속화로 변질되어서 제사가 ㅎ님께 뇌물을 바치는 우상숭배로 둔갑된 것이다. 오늘날로 치면 ㅎ님께 이런저런 명목으로 재물이나 헌금을 많이 내면 ㅎ님이 기뻐하실 거라는 생각과 일맥상통한다. 사람의 열심과 정성을 신앙으로 여기는 발상에서 행위구원으로 변질된 것이다. 은혜구원은 어디로 팔아먹고 자력구원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신앙은 행위도 아니고 정성이 아니다. 참된 신앙은 ㅎ님을 아는 진리적 앎이다. 그래서 ㅎ님은 ‘나는 제사를 원치 않고 긍휼을 원한다’고 하신다. ㅎ님의 뜻을 알고 받드는 게 참된 신앙인데 이를 모르니까 사람의 의로 은혜구원을 내팽개친 것이다.
은혜구원은 성경을 열면서부터 계시되어온 ㅎ님의 경륜이다. 창2장에서, 아담이 잠든 새 그 갈비뼈를 취하여 하와를 창조 하셨다. 잠들었다는 것은 죽음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다. IX의 십자가를 통해 그의 옆구리가 창으로 찔려 물과 피를 쏟아 교회가 탄생됨을 비유한다. 남자와 여자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비밀이라고 성경은 말씀한다. 마치 산모가 사선을 넘어 아기를 출산하는 것처럼 IX의 물과 피를 쏟아서 교회가 세워진 것이다. 교회는 구원받은 성도를 지칭한다.
이어서 창3장에서는, 범죄한 아담과 하와가 ㅎ님을 피해 숨었지만 그들을 찾아가서 손수 지어 입히신 가죽옷 역시 은혜구원의 비유이다.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는 말에 방점이 있다. 어린양이 희생되었다는 복선이 깔려있다. 또한 아벨은 누구인가? 인간의 행위를 자랑하는 가인에게 미움을 받고 살해당한 자이다. 자기 의가 전혀 없기에 어린양과 그 기름을 의탁해서 자신의 죄를 속하는 제사를 드려서 ㅎ님께 열납된 제사를 드린 자가 아벨이다. 아벨 역시 IX를 상징한다.
그리고 노아의 방주 역시 IX의 십자가 복음의 예표였다. 방주는 사망의 물(사단의 영)을 막아주는 구세주 XI를 상징한다. 또한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시현한 이삭을 제물로 바쳤던 사건 역시 IX의 십자가를 상징한다. 경수가 끊어진 태에서 나온 이삭은 ㅎ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를 비유한다. 이어서 이삭의 축복을 받아내기 위해 야곱에게 입혔던 장자인 에서의 털 옷 역시 사람의 어떠함을 조건으로 삼는 게 아니라, 장자이신 IX를 믿는 여부에 따라 구원의 복이 결정되는 것을 말해 준다. 어디 이뿐이랴 성경은 정말 IX에 대한 비유로 가득 차 있다.
이것이 복음이다. 사람의 행함은 전혀 고려되지 않고 오직 ㅎ님의 긍휼하심에 따라 구원이 주어지기에 복음이다. 그래서 기쁜 소식이요 복된 소식이다. 그런데 이게 아무 때, 아무에게나 열려지는 게 아니다. IX가 오시기 전 구약에서는 감추어진 비밀이었다. 신약의 때가 왔어도 오직 택한 자기백성들에게만 알려주시는 복인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 마13장에서 ‘많은 선지자들과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는데, 이제 너희 눈은 보고, 너희 귀로 들으니 복이 있도다’ 하셨다. 바울도 엡3장에서 ㅎ님의 이러한 은혜의 경륜을 자신에게 계시로 알게 하신 것은 다른 세대에서는 비밀에 붙여졌던 것이었다고 기록한다. 베드로 사도 역시 같은 말을 한다.
<벧전1:9~12> 읽으면서..
9절~믿음의 결국(믿음의 결과로, 믿음의 열매로)=> 영혼의 구원을 받음/ 행위의 결국이 아니다. 이 믿음은 어디서 유래?(벧후1장: 보배로운 믿음을 받은 우리처럼 너희도 받았다고 함)
이들이 누구다?(벧전1:1=> IX의 피뿌림을 얻기 위해 택하심 받은 자, 미리 아신바 된, 예정임)
10,11절~ㅎ님의 구원이 과연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구약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살펴보았지만..감추어진 비밀이었기에 어렴풋이 희미하게만 감 잡고 있었지 잘 몰랐다는 말이다. 그나마도 자기들 실력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의 도움으로 희미하게나마 감지했었다는 말임. 그리스도의 영이 이미 구약에서도 일하시고 계셨음(이것을 선재적 그리스도라고 함).
-> 요8장(유대인들에게, 나는 처음부터 말하여 온 그니라, 하심, 구약의 창조주가 곧IX이심)
(모세, 여호수아, 삼손, 기드온, 사무엘, 보아스..등등 성경의 주요 인물들이 다 IX의 그림자)
13절~그들의 사역의 초점이 자기 세대에 펼쳐질 게 아니라 바로 너희들을 위한 것이었다는 말임(즉 IX의 십자가 복음으로 성취되는 은혜의 구원은 예전에는 비밀이었다가 이제 나타난 것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성령을 받은 자들이 복음으로 구원받고 그들이 다시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는 의미임(다 성령의 역사로 되는 것이지 사람의 능력이나 원함으로 되는 게 아니다)
-얼마나 철저하게 감추어졌으면 천사들까지도 궁금해 했지만 몰랐던 비밀이었다는 말이다.
-히11잘39절(이러한 IX에 의한 구원이 구약에는 증거만 되었고 약속은 받지 못한 것인데 이제 IX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로 그리스도의 성령을 받은 우리는 약속을 받은 복된 자들이라는 의미이다. ㅎ님의 언약의 약속의 실체란? 바로 IX의 십자가 피로 세워진 은혜의 구원을 말함.
<벧전1:18~21> 읽고~
ㅎ님께서 영원전에 설계하신 이 은혜구원이 얼마나 ㅎ님의 자랑이셨으면 창1장 둘째 날에 궁창을 만드시고 궁창을 기준으로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뉘게 하시고 그 궁창을 하늘이라고 칭하셨을까요? 이 비밀한 말의 의미를 아시는가? 궁창(히/라키아~ 철을 얇게 펴서 만든 판/모니터, 광고판), 이게 뭘까요? 고난의 상징인 십자가에 달리신 IX를 상징한다. 물은 영인 정신사조를 상징한다. 세상의 정신사조(물)를 궁창을 기준으로 위 아래로 나눈다는 의미는 십자가 복음을 기준으로 진리(하늘의 영)냐 비진리냐(세상의 영)를 가름한다는 말이다.
이를 통해 세상의 모든 철학과 종교의 영이 궁창 아래의 물(비진리)로 심판되는 것이다. 세상의 역사도 BC와 AD로 구분된다. 이게 신기하지 않은가? 우리만 안다. 첫째 날 빛으로 오신 ㅎ님의 아들 예수가 자기백성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어린양 제물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궁창으로 표현하셨다. 이 궁창이 하늘이란다.
그래서 둘째 날은 ‘ㅎ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가 없다. 우리 성도는 이렇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IX가 우리의 하늘이시다. 우리의 머리이시고 삶의 의미이고 생명 자체이시다. 그러나 궁창 아래의 물 안에서 사는 자들에게 예수는 기껏해야 위인 중의 한 사람으로 정도로만 여긴다. 그들에게는 전혀 관심의 대상이 안되는 게 당연하다. 예수가 자신과는 무관한 남이기 때문이다.
본문 요1장 29절을 다시 읽어보자, 이튿날~ .. 지금 저자 요한은 창 1장의 스토리와 요1장을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요1장 서두에서 IX의 성육신에 대해 (사도)요한은 참빛이 세상에 오셨다고 부연했다(9절). 그게 첫째 날이다. 그리고 여기의 이튿날은 창1장의 2째 날과 대비된다. 그 둘째 날에 궁창(십자가 사건)이 언급되었듯이 이튿날 세례요한의 증거대로 세상죄를 지고 가는 ㅎ님의 어린양으로 소개 된다(같은 내용으로 흘러간다.) 성육신 하신 예수가 자기백성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죽으러 오셨다는 어마어마한 사명을 세례요한이 증거하는 것이다.
레16장을 보면 매년 7.10일을 대속죄일 절기를 지키게끔 되어 있다. 일상생활 속에서 살다가 죄를 짓는 일이 발생하면 그때그때마다 자기 형편에 따라 우양을 끌고 성막에 나아가서 짐승을 대신 피흘려 죽게함으로 자신의 죄를 속함 받아 살아야 하는데, 바뿐 일상에 쫒기거나 잊어버려서 제사를 못 드리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을 아울러서 한 번에 죄를 대속하는 대속죄일을 정해서 절기로 지키게 한 것이다.
이 때 두 마리 염소가 준비되는데, ㅎ님을 위한 염소와 아사셀을 위한 염소라고 지칭한다. 먼저 ㅎ님을 위한 염소 머리 위에 대제사장이 안수해서 백성의 죄를 다 전가시키는 의식을 행한다. 그리고 그 염소를 잡아 고기 덩어리는 번제단에 불사르고 피는 지성소에 갖고 들어가 언약궤 앞과 위에 7번씩 뿌린다. 온전하게 백성의 죄를 속했다는 표식이다. 그리고 이 피가 열납되면 대제사장은 지성소 밖 회막에 나와서 ㅎ님의 긍휼과 용서를 선포하면 온 백성은 회막에 모여 있다가 기쁨의 환호성을 지른다.
번제단의 불은 십자가의 고난을 상징하고 지성소에 가지고 들어간 피는 그리스도의 영을 상징한다, 그리고 나와서 대제사장이 아사셀을 위한 염소 머리에 안수하여 이 염소를 광야로 몰고 나가서 낭떠러지에 떨어뜨려 죽게 한다. 아사셀은 세상신 마귀를 비유한다. 우리 성도의 죄를 전가시킨 예수의 육신을 마귀에게 넘겨주어 허망하게 죽게하는 퍼포먼스를 통해, 예수가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자신의 희생으로 자기백성을 죄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함임을 나타내는 메시지이다. ㅎ님을 위한 염소나 아사셀을 위한 염소가 다 IX에 대한 예표인 이중 계시였다. 염소는 양에다가 죄를 더한 표식으로 죄인을 상징한다.
이같은 대속죄일의 절기 의식이 마3장에서 그대로 성취되었다.
<마3:13~17> 읽고나서,
13절, 왜 예수님이 세례요한한테 세례를 받으시려고 하는가? 세례란 물에 잠김으로 죽음을 상징하는 의식이다. 세례를 주는 자가 세례 받는 자에게 ‘너는 죄인이니까 이처럼 죽어야 된다’는 표식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이다. 그렇기에 요한이 그럴수 없다고 한다. ㅎ님의 아들 예수에게 자신이 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지금 거꾸로 예수님이 자기에게 세례를 주라고 하니까 극구 거절을 하는 것이다.
그러자 15절에서 주님이 요한한테 ‘내 말대로 하라. 이것이 모든 의를 이루는 거야’ 말씀하신다. 여기서 모든 의란 무엇인가? 좀 전에 레16장에서 살펴본 대속죄일의 그 의식을 실현하는 것이다. 구약은 모형이고 그림자였으니까 실제이신 어린양이 예수가 오셨으니 지금이 바로 그 때라는 말씀이다. 세례요한은 신분적으로 대제사장이다. 눅1장을 보면, 아버지 사가랴가 대제사장이었을 때에, ㅎ님의 계시로 요한을 낳게 되었다. 대제사장은 세습제였기에 요한도 대제사장이다. 그러나 그는 예루살렘 성전을 등지고 광야에서 ㅎ님의 사명을 따라 뭇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를 베풀고 있다.
지금 예수님이 세례요한한테 세례를 받는 것은 대속죄일의 ㅎ님을 위한 염소가 되기 위함이다. 온 백성의 죄를 대제사장이 예수께 안수함으로 죄를 전가시켜서 그 죄를 지고 번제단으로 비유된 십자가에 죽으셔야 했기 때문에 ‘모든 의를 이루는 일’이라고 하신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께 세례를 주어야 하는 요한의 신분이 아무나 되어서는 안된다. 반드시 대제사장이어야 했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택하여 졌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이처럼 ㅎ님의 일하심은 일체의 오차나 오류가 없다. 치밀하고 정확하게 ㅎ님 당신의 언약대로 성취해 나가시는 것이다.
16~17절,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온다는 말은 죽고 장사된 후 부활을 상징한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부활생명의 그 씨앗을 얻기 위해서 ㅎ님은 수천 년을 일해 오셨다. 그래서 기쁨에 겨워‘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셨다. 이제 그 부활생명인 아들의 영을 각 사람에게 보내 ㅎ님의 아들들을 만드실 것이다. 이것이 성령 세례이다. 한 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밀이 맺혀지는 농사 원리까지도 ㅎ님의 구속사를 설명하기 위해 이 세상에 펼치신 이치였던 것이다. 만물 속에 감추인 생명의 원리 하나에서도 ㅎ님의 지혜를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구약의 짐승 제사로 자기백성의 죄를 대속하면 되지, 왜 굳이 ㅎ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시는데 까지 ㅎ님의 희생이 필요했고, 게다가 십자가라는 고난의 형틀에서 피 흘리고 죽으셔야 했을까? 생명의 가치 때문이다. 짐승의 생명이 어찌 사람의 생명과 동급일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이미 율법에 이것을 명시했던 동해보복법이 있었던 것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양은 양으로 소는 소로써 같은 동급으로 그 손해를 되갚게 되어있다. 같은 생명으로 보상하라는 취지이다. 그래서 짐승제사는 모형이었지 실제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다시, 예수님 말고 다른 사람을 대신 세워서 죄를 대속케 하면 안될까?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기 때문에 자기 죄로 인해 지옥가야 마땅하다. 그래서 그 어떤 사람도 남의 죄를 대신 할 수 있는 자격 자체가 없다. 따라서 사람의 생명을 대신할 유일한 방법이 죄 없으신 거룩한 사람인 ㅎ님의 성육신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게 우리 성도가 받는 은혜 구원의 실제이다. ㅎ님의 피라는 상상할 수 없는 값을 치루고 사신 구원인 것이다. 이에 대해서 히10장에서 언급되어 있다.
<히10:1~14> 읽으면서 간략히 설명
5절...~나에게 입히실 몸을 (성육신의 계획을) 마련하셨도다(새번역 본)
10절~ 우리의 거룩의 근거는? 행함이 아니라 은혜로 (IX십자가 공로로)
14절~ 성도의 구원의 정체성=> 영원하고도 온전한 거룩이고 구원이다.
=> 롬5:8(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에 대한 ㅎ님의 사랑이 확증되심)..이게 바로 ㅎ님의 사랑임(인간은 할 수 없는 영역, 위대하고 장엄한 사랑, 원수를 사랑한 사랑이다.) 그렇기에 한번 구원은 영원한 것이고 도중에 취소가 불가능(만일 취소된다는 말을 한다면 ㅎ님 사랑을 에누리하거나 깎아 내리는 사단의 꼬드김일 뿐임)
롬8:3절에는 율법의 요구를 이루신 것을 말씀하신다. 육신이 연약해서 ㅎ님의 율법을 손종하지 못해 죽어야 할 우리를 대신해서 ㅎ님께서 아들을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서 그에게 죄를 전가시켜 대신 죽게 하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셨다고 말씀하신다. 율법의 요구는 죄인은 죽어야 한다는 법칙이다. 그런데 예수가 우리 죄를 뒤집어쓰시고 대신 죽으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셨다고 증거하시는 것이다.
<고후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죄로 삼아 대신 죽게 하셨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ㅎ님의 어린양이 되신 것이다.
그러나 죽음으로 끝나면 무순 소용인가? 죽은 신 예수님을 ㅎ님은 다시 살리셨다. 비록 우리 성도의 죄를 대신하여 죽음이라는 고난을 감당하셨지만 이는 ㅎ님 앞에서 죄 값을 치루신 것이지 당신이 죄가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사단이 IX를 사망 가운데 억류할 수가 없다. 그래서 놓임을 받아 다시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사망을 이기시고 승리하셨다. 그래서 사망의 권세가 깨뜨려 진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IX 안에 있으면 정죄함이 없다. 생명의 성령이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이다(아멘!)
고전15장 끝..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데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니라(말씀)..IX께서 우리 죄를 다 청산하시고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으니 죄도 율법도 다 지나갔다. 사망이 달라붙는 것은 죄가 있기 때문이다. 사단은 죄인에게 율법의 조문을 가지고 달려와서 정죄라는 수갑을 채워 사망으로 끌로 가는데, 성도에게는 죄도 율법도 끝난 자이기에 사망이 접근할 수가 없는 자가 되었다. 사망과 무관한 자유자요 영생을 소유한 자이다(할렐루야!)
그렇다면 구원 받은 이후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구원은 취소되지 않는다고 했으니 흥청망청 인생을 즐기다가 천국에 가면 안될까? 내 맘대로 육신의 탐심을 추구하며 쾌락을 즐기다가 죽어서 천국가면 안될까? ㅎ님이 무슨 바보 멍청이인줄 아시나? 미안하지만 절대 그대로 안된다. ㅎ님은 우리 마음을 관장하고 계신다. 마음에 ㅎ님을 소원하는 마음을 계속 불어 넣고 계시기에 이 땅의 것은 점차 싫어지고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고 싶어진다.
행여나 이러한 ㅎ님의 의도를 억지로 외면한 채 세상 욕망에 빠져 살면, 급기야는 ㅎ님의 징계가 득달같이 날아온다. 그 ㅎ님의 손에 맞아본 적 없으세요? 사랑의 매 맛을 경험한자는 세상에 대해 경계하며 조심한다. 그리고 항상 ㅎ님 눈치를 살피면서 행동한다. 이렇게 ㅎ님과 샅바 싸움을 하다가 마침내는 자원해서 ㅎ님 품속에 들어가 안주한다. 그게 제일 편하고 기쁘기 때문이다.(다윗, 밧세바 사건 경을 침/늙으막에 아비삭..손도 안댐,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고후5: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보시라, ㅎ님은 절대 손해 보는 장사를 하지 않으신다. 구원받은 성도에게 요구하시는 게 있다. -네가 정말 ㅎ님의 은혜와 사랑을 안다면 이제부터 ㅎ님을 위하여 살아 보렴-하신다.
그래서 일요일에 남들처럼 행락 철에 산으로 들로 놀러들 안가고 예배모임에 나오고, 십시일반 예배처소 운영비를 내기도 하고, 진리를 모르는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들을 계속 하고들 있는 것이다. 이방인들과는 분명히 다른 L/CYCLE, L/PATTEN을 가지고 산다.
어떤 목사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을 가끔씩 듣는다. 돈을 버는 게 죄가 아니니까 열심히들 버세요. 그래서 헌금도 하고 좋은데도 쓰시라고 한다.
저는 달리 말한다. 물론 돈을 버는 것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돈을 열심내서 버는 것은 죄일 수도 있다. 무엇이든지 열심을 내면 다른 무엇은 소홀하게 마련이다. 돈은 세상의 대표이다. 바울은 갈6장에서 분명히 강조한다. ‘자신은 세상에 대해 못 박혔고, 세상도 자신에 대해 못 박혔노라고...’ 바울은 세상 보기를 소가 닭 보듯이 했다. 상관없는 자로 살았다(행인, 나그네)
세상은 곧 돈이고 명예이고 평판이고 누림성이다. 그런데 돈 버는 일에 열심을 내라고요? 그러면 ㅎ님에 대해서는 단연코 소홀해진다. 손에 두 가지를 쥘 수가 없다. 그래서 ㅎ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고 하시는 것이다. 재물은 세상과 세상의 것이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요, 이생의 자랑거리들이 재물이다. 따라서 주객이 뒤바뀌면 안된다. 주체는 ㅎ님 사랑이다. 객은 호구지책을 하며 살아가는 인생살이이다. 주가 먼저고 객은 나중이다. ㅎ님 나라와 의를 추구하는 게 우선이라는 말이다.
세상의 것을 더 소유하려고 노심초사하려는 마음에 ㅎ님이 끼어들 수 있을까? 세상에 마음의 추가 기울면 필시 ㅎ님은 꿔다 놓은 보리자루 같은 취급을 받을 것이다. 자신을 위해 높고 높은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낮고 낮은 세상에 ㅎ님의 어린양으로 오셔서, 내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피흘려 대속의 피를 흘리신 IX의 망극하신 은혜를 아는 자라면, 어떻게 주님을 문전박대할 수 있을까?
주님을 내 삶에서 투명인간이나 유령처럼 대하고 나는 내 맘대로 이방인처럼 한껏 세상의 것을 소유하려고 동분서주 한다면 그는 아직 예수를 만나지 못한 자일 것이다. 분명하고 자명하다. 그래서 그는 자기 사랑에 매몰되어 예수를 사랑하지 못한다. 그는 아직 자기가 죽어 마땅한 죄인인 줄 모르기에 어린양 예수를 몰라보는 것이다. 그냥 지식적으로 습관이 되어 예수를 찾고 예수를 부르는 것뿐이다.
주님을 사랑하려면 자기사랑, 자기애착을 내려놓아야 한다. 신앙생활에는 분명한 자기 챙기기 면에서 손해가 감수된다. 이런 반대급부가 무서우면 아직 은혜를 모르는 자이다. 그래서 자기사랑을 포기하지 못한다. 주를 위한 일에 - 시간, 물질, 봉사, 등으로 야기되는 손해를 당하는 게 감사하는 게 아니라 아깝기만 하다면, 신앙이 뭔지를 모르는 자라는 말이다.
자신이 지옥가기에 마땅한 자인데 아무 조건 없이 구원을 베푸신 ㅎ님의 사랑을 아는 자라면, 그 사랑을 받은 자라면 본성적으로 올라오는 자기애착 증에 위기의식을 느끼며 주를 위해 옥합을 깨는 기회를 달라고 기도할 것이다. 그리고 자원하여 주 앞에 나아가기를 소원하며 기뻐할 것이다.
고전16:22~만일 누구든지 예수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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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랑과 복음교회(김기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