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4
로마서 11장 36절 [2장 2항]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성경에 이어 하나님에 대하여 설명하는데, 1항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고백입니다. 살아계신 참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라는 사실, 이 하나님은 존재와 완전에 있어 무한하시며, 가장 순수한 영이심을 고백 합니다. 볼 수 없는 분이시며, 인간의 몸이나 지체들이나 성정들이 없으시며, 불변하시며, 광대하시며, 영원하시며, 측량할 수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가장 지혜로우시며, 가장 거룩하시며, 가장 자유로우시며, 가장 절대적이시며, 그 자신의 영광을 위해 그 자신의 불변하며 가장 의로우신 뜻의 의논을 따라 모든 것들을 역사하십니다.
이런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어떤 대상에 대하여는 가장 큰 사랑을 베푸시며, 가장 은혜로우시며, 가장 자비로우시며, 가장 오래 참으시며, 선하심과 진실하심에 있어 풍성하시며, 악행과 범죄와 죄악을 용서하시며, 그를 부지런히 찾는 자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동시에 어떤 대상에 대하여는 그의 심판에 있어서 가장 공정하시고, 가장 두려우며, 모든 죄를 미워하시며, 그는 결코 죄책을 사하지 않으실 분으로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이때 어떤 대상이라고 말했지만, 가장 큰 사랑을 베푸시는 대상은 후반부에 말한 그의 심판에 있어서 가장 공정하시고, 가장 두려우며, 모든 죄를 미워하시며, 결코 죄책을 사하지 않으실 분으로 자신을 나타내지 않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에, 자비를 나타내시기 때문에 자신의 공정함, 자신의 두려워할만한 모든 것들을 나타내지 않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죄를 미워하시기 때문에, 또한 죄책을 사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정함을, 자신이 두려워할만하다는 것을 가장 큰 사랑을 베푸시는 자들에게도 나타내시는데, 이때 중요한 것은 사랑하시는 대상에게가 아니라 그들을 위해 세우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것을 나타내심으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십니다. 즉 택자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공의 없는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타남으로 있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은혜로우시다, 그래서 자비로우시다, 그래서 오래 참으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2항의 내용을 살피겠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자신 안에서 자신으로부터(=스스로) 모든 생명(요5:26), 영광(행7:2), 선함(시119:68), 복됨(딤전6:15, 롬9:5)을 지니시며, 자신 안에서 자신에게 홀로 모든 것에 대해 충족하사 그가 만드신 어떤 피조물들을 필요로 하지 않으시며(행17:24-25), 그것들로부터 어떤 영광이 나오지 않고(욥22:2-3) 오직 그것들 안에서, 그것들로 말미암아, 그것들에게, 그것들 위에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그는 홀로 모든 존재의 샘이시며, 그로부터, 그를 통해서, 그에게 모든 것들이 있습니다(롬11:36). 그 자신이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것들로 말미암아, 그것들을 위해, 그것들 위에 행하시기 위해 그것들을 다스리시는 가장 주권적인 통치권을 지니십니다(계4:11, 딤전6:15, 단4:25,35). 그의 시각 안에 모든 것들이 드러나서 나타나집니다(히4:13). 그의 지식은 무한하며, 무오하며, 피조물을 의존하지 않으며(롬11:33-34, 시147:5), 따라서 그에겐 우연이나 불확실한 것이 전혀 없으십니다(행15:18, 겔11:5). 그는 그의 모든 의논들, 그의 모든 사역들, 그의 모든 명령들에 있어서 가장 거룩하십니다(시145:17, 롬7:12). 천사들과 사람들, 그리고 다른 모든 피조물로부터 경배나 예배나 순종이나 그가 그들에게 요구하길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에게 [드려지는 것이] 마땅합니다(계5:12-14).
일단 “하나님은 자신 안에서 자신으로부터(=스스로) 모든 생명, 영광, 선함, 복됨을 지니신다.”고 고백합니다. 야고보서 1장 17절에 의하면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고 말씀하시는데,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고 할 때 하나님은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을 가지고 계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그러한 속성으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자신 안에서 자신으로부터 모든 생명을 지니고 계십니다. 그래서 시편 36편 9절은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요한복음 1장 4절에서는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사람에게 있는 생명은 누구로부터 왔는가? 생명의 원천이시요, 그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이 분명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행17:28)고 말하기도 합니다.
문제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생명이기에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사람들은 생명을 받아 살아갈 때 자신이 생명의 주인인 줄 착각하며 삽니다. 그러나 인생에 대하여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는 사실을 새겨야 합니다. 시편 90편 6절입니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 이 구절과 관련해 사도 베드로는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벧전1:24)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시편 144편 4절에는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 즉 생명을 지니고 계신 하나님이 그 생명을 사람들에게 주셨지만 사람에게 있는 생명은 풀과 같고 헛것과 같고 지나가는 그림자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반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1항에서 살핀 것처럼 하나님은 무한하십니다. 특별히 시간과 관련해 영원하십니다. 그 말은 하나님 안에 가지고 있는 생명 또한 무한하고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102편 26절에서는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라고 말합니다. 27절에서는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시편 90편 2절에서는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잠시 ‘살았으나 죽은 자와 방불한 상태’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데, 분명 모든 사람의 생명은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그러나 죄는 죽음을 선포합니다. 창세기 2장 17절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금하신 열매를 먹었을 때 곧바로 죽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신 것처럼 죽을 것이지만, 육신적인 차원에서는 곧바로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육신적인 차원이 아닌 영적인 죽음도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데, 에베소서 2장 1절에 보면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2:1)라고 말씀합니다. 죄는 가장 먼저 영적 죽음을 일으키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중생되지 못하는 이상 육체의 죽음과 영원한 죽음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생명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자신 안에서 자신으로부터 모든 영광을 지니고 계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영광의 하나님’이라고 표현합니다. 에베소서 1장 17절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으로, 히브리서 1장 3절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런데 성경은 피조물 가운데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일컫습니다(창1:27).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사람을 통해서 나타나기도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인간이 타락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다는 데 있습니다. 물론 완전히 잃어버린 것은 아닙니다. 칼빈의 표현을 빌리자면 “비록 하나님의 형상이 아담 안에서 전적으로 소멸되고 지워지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너무나 오염되어서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이든 무서우리만큼 흉측한 것이 되었다.”는 것입니다(1559, 1권 15장 4). 하나님은 바로 이런 자들 가운데 일부를 구원하셔서 자신의 형상을 회복하도록 하시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피조물에 따라 더해지거나 감소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욥기 35장에 보면 다음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대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그대의 악행이 가득한들 하나님께 무슨 상관이 있겠으며 그대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그대의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욥35:6-7) 이어지는 신앙고백의 내용이 그것입니다. “자신 안에서 자신에게 홀로 모든 것에 대해 충족하사 그가 만드신 어떤 피조물들을 필요로 하지 않으시며, 그것들로부터 어떤 영광이 나오지 않고 오직 그것들 안에서, 그것들로 말미암아, 그것들에게, 그것들 위에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충족적인 분이십니다. 생명의 부족함이 있어서 생명 있는 사람을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영광에 있어 부족함이 있어서 영광스러운 사람을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생명 있는 사람, 영광스러운 사람을 만들지 않아도 하나님은 자신 안에서 자신에게 홀로 모든 것에 대하여 충족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가 만드신 어떤 피조물들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것들로부터 어떤 영광이 나오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피조물 안에서, 피조물로 말미암아, 피조물들에게, 피조물들 위에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즉 왜 피조물을 만드셨는가?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때문에 피조물인 우리의 마땅한 바는 하나님의 영광을 알아야 하고, 그 영광에 대하여 감탄하면서 그에게 모든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정확하게 이와 관련된 것입니다. 로마서 11장 36절입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하나님 없는 만물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모든 만물은 근원은 어디인가? 하나님이십니다. 그럼 모든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만 나왔을 뿐, 그 이후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독립된 존재로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근원이실 뿐만 아니라 그분 없이는 존재 자체가 유지될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창조만이 아니라 하나님은 창조하신 모든 만물에 대하여 섭리하십니다. 그리고 그 섭리 안에는 하나님의 창조가 아닌 인간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나타난 죄까지도 섭리의 대상으로 있습니다. 이런 만물은 결국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됩니다. 즉 만물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지되고, 또한 하나님께로 가서 끝나게 됩니다. 하나님 없이 모든 만물에 대하여 설명하는 것은 지극히 단편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하나님 없이 모든 것을 풀려고 합니다. 광활한 우주를 연구해서 발표를 합니다. 그래서 옛날에 비해 오늘날 우주에 대해서 아는 것이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 없이 연구하고 발표해서 상을 받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 지식을 가지고 있는 신자에 비하면 무식한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상적인 측면에서 그들의 연구를 통해 배우는 바가 없지는 않지만, 모든 만물의 근원이시요 모든 만물의 섭리자이신 하나님이 없는 지식이란 핵심을 놓치고 있는 지식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없는 일반 지식이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습니다. 성경은 무엇을 말합니까? 오늘 본문만 하더라도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11:36)이라고 말씀합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또한 만물이 주로 말미암기 때문에, 또한 만물이 주에게로 돌아가기 때문에 그에게만 영광이 세세에 있기를 소망해야 하는데, 일반 학문을 통해서는 그런 쪽으로 나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누구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느냐? 신자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때가 되어 참된 믿음으로 부르신 자입니다.
어쨌든 오늘 본문에 근거해서 신앙고백서는 이어지는 내용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그는 홀로 모든 존재의 샘이시며, 그로부터, 그를 통해서, 그에게 모든 것들이 있다.” 그러므로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을 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헛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빠진 생명, 하나님이 빠진 영광, 계속해서 언급하게 될 하나님이 빠진 선, 하나님이 빠진 복,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입니다. 생명과 영광과 선과 복만 그러하겠습니까?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온다고 할 때(약1:17) 그분으로부터 오는 모든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전도서가 표현하는 것처럼 다 헛될 수밖에 없습니다.
간혹 우리는 이런 착각을 합니다. 생물이 빛을 이용하여 양분을 만드는 과정을 광합성이라고 하는데, 이런 광합성 작용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빛이 있어야 합니다. 이때 광합성 작용의 원인을 빛에 둡니다. 물론 이것 자체가 틀렸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빛이 원인이라고 할 때 그 원인에서 멈춘다는, 그래서 하나님으로까지 나아가지 않는다면 그 자리는 틀린 자리가 됩니다.
실제로 창조의 역사를 보십시오. 원인과 결과라는 입장에서 생각하면 빛이 있어야지만 생물이 빛을 이용해서 양분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빛을 비추는 해가 먼저 만들어져야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먼저 만들어졌습니까? 셋째 날 물을 한 곳에 모으시고 뭍을 드러내셨는데, 그곳이 땅입니다. 그 땅에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이어 넷째 날에 해와 달과 별들을 만드셨습니다. 즉 순서는 반대라는 것입니다. 하루 차이이기 때문에 그 순서는 상관없다고 말하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을 통해 알리시고자 하시는 바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토마스 카트라이트라는 개혁자는 그의 기독교 교리 강론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묻고 답합니다. “[문] 이러한 피조물들의 성장이 하늘의 물체들의 영향으로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은 하늘의 물체인 태양, 달과 별들을 만드시기 이전에 먼저 풀, 곡물과 나무를 만드실 수 있는가? [답]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을 정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이러한 식물들이 자라는 것과 하늘의 물체들의 작용을 함께 묶어서 생각한다. 심지어 우리는 그것들을 숭배하고, 그 가운데서 주님을 잊는다. 주님은 여기에서 모든 것들이 그 분을 의지하고 있으며, 하늘의 것들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주님이 그것들을 만드셨지, 하늘의 물체들이 만든 것이 아니다.”(제6장)
이러한 이해는 실제 성경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3:5-7) 바울이 심지 않았는가? 심었습니다. 아볼로가 물을 주지 않았는가? 물을 주었습니다. 이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일 뿐입니다. 그들은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었지만, 물을 주었지만,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용하여 일하시는 것이지, 그들 스스로가 내놓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고린도전서 4장에서는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전4:7) 사람들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를 주목할 때가 많습니다. 광합성 작용을 위해서는 해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해를 주목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위해 목사를 세우십니다. 그래서 목사가 주의 몸 된 교회를 섬깁니다. 그런데 사람은 목사를 주목합니다. 하나님을 주목해야 하는데 목사를 주목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닌 사람이 영광을 받습니다. 해가 영광을 받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꾼 것일 뿐입니다(롬1:23 참고). 여러분, 도구로 사용된다는 것은 도구된 그도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광야에서 만나로 먹이시는 것은 하나님이 먹이시는 것이고, 가나안에 들어가 땀 흘리면서 먹는 것은 하나님이 먹이시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습니다. 만나도, 가나안에 들어가 땀 흘려서 먹는 것도 다 하나님이 먹이시는 것입니다. 도구를 사용하든, 사용하지 않든 언제나 하나님이 주체입니다. 모든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에게 돌아갈 영광을 다른 것에 돌린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도둑질하는 것입니다.
물론 도둑질하는 것이라고 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감소되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가증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불변하신 분으로 그분의 영광 역시 불변합니다. 다만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 알고 그분에게 있는 영광에 대하여 감사와 찬송하도록 할 목적으로 하나님은 피조물들 안에서, 피조물들로 말미암아, 피조물들에게, 피조물들 위에 하나님의 자신을 영광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생명과 영광과 더불어 하나님은 자신 안에서 자신으로부터 모든 선과 모든 복을 지니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한 분에 외에 선한 이가 없다고 말씀합니다(막10:18, 눅18:19). 또한 하나님은 복되시다고 말씀합니다(딤전6:15).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서는 지난 시간 1항 마지막 부분에서 살핀 바 있지만 작정의 실행으로서의 창조, 작정의 실행으로서의 섭리에 있어 하나님은 언제나 선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의 선과 반대되는 악이 인간으로부터 나올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조차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인생의 모든 일들 가운데 하나님의 선하심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내가 처하고 있는 현실적인 어떤 문제나 어려움으로 인해 하나님의 선을 생각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복되시다고 할 때 하나님보다 더 큰 복의 내용이 없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광야 이스라엘 백성이 항상 원망과 불평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현실적인 문제 때문입니다. 먹을 것이 없다, 마실 것이 없다, 힘들다, 어렵다는 등 현실적인 문제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들을 뜻하셔서 섭리하시는 이유는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선하심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모든 일을 통해 하나님보다 더 큰 복이 없다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를 통해 가르치기를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3:17-18)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일찍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말씀하셨는데(창15:1), 하나님보다 더 큰 상급, 하나님보다 더 큰 복은 없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다양한 복을 말합니다. 지상에 속하면서도 한시적인 복에 대해 말하기도 합니다. 세상 물질이 그러합니다. 지상이 아닌 천상에 속하면서도 시작은 있지만 영원한 복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천국이 그러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피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창조에 속한 선물에 불과합니다. 성경은 창조에 속하지 않는 선물, 절대적인 복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데, 그것이 하나님 자신입니다. 이 복을 모든 믿는 자가 받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신 안에서 자신으로부터 모든 생명, 영광, 선함, 복됨을 지니십니다. 자신 안에서 자신에게 홀로 모든 것에 대해 충족하십니다. 충족하시기 때문에 그가 만드신 어떤 피조물들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그것들로부터 어떤 영광이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직 그것들 안에서, 그것들로 말미암아, 그것들에게, 그것들 위에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말씀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홀로 모든 존재의 샘이시며, 그로부터, 그를 통해서, 그에게 모든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신앙고백서는 “그 자신이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것들로 말미암아, 그것들을 위해, 그것들 위에 행하시기 위해 그것들을 다스리시는 가장 주권적인 통치권을 지니신다.”고 고백합니다. 1항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가장 자유로우시고 가장 절대적이심을 고백했는데, 하나님은 어떤 피조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으십니다. 피조 세계가 없을 때도, 다시 말해 무의 상태에서도 하나님은 하나님으로서 계셨습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피조 세계를 만들기로 하셨을 때 철저히 그분으로부터 출발한 것이지, 다른 무엇의 영향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피조세계가 만들어지고 난 이후에도 동일합니다.
물론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대해 응답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에 틀렸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아셔야 할 것은 우리 기도가 원인으로 있는 게 아닙니다. 기도가 원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앞에서 언급했지만 주신 자를 생략하는 것과 같습니다. 기도에 대한 응답은 응답을 위해 기도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출발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신이 기뻐하시는 바를 행하십니다. 행하시되 반드시 행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가장 절대적인 통치권을 지니고 계십니다. 그 통치권으로 피조물들로 말미암아, 피조물들을 위해, 피조물들 위에서 행하십니다.
신앙고백서는 계속해서 “그의 시각 안에 모든 것들이 드러나서 나타나진다.”고 고백하는데, 히브리서 4장 13절입니다.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하나님은 절대적인 주권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숨길 수 있는 게 없습니다. 1항에서 하나님의 무한하심에 대하여 설명했지만, 무한하신 하나님은 공간과 관련해서 광대하십니다. 또한 편재하십니다. 시간과 관련해서 영원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에게서 숨길 수 있는 게 있는가?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의 경우 어떠합니까? 사람에게는 숨길 수 있을지라도, 하나님에게 숨길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마음까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 33편 15절에서 “그는 그들 모두의 마음을 지으시며 그들이 하는 일을 굽어살피시는 이로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들이 하는 일, 단순히 외적인 일만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까지도 살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시각 안에 모든 것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모든 것들이 드러나서 나타나집니다.
이어 “그의 지식은 무한하며, 무오하며, 피조물을 의존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에겐 우연이나 불확실한 것이 전혀 없으시다.”고 고백합니다. 무한한 지식의 소유자, 그러면서도 무오한 지식의 소유자가 하나님이십니다. 모르시는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안다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오류가 전혀 없으십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의존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무한하며 무오한 지식을 따라 모든 것을 작정하시고 그대로 실행하십니다. 따라서 그에게는 우연이란 없습니다. 불확실한 것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일하심에 있어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고백하는 것처럼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롬11:33).
심지어 하나님은 “그의 모든 의논들, 그의 모든 사역들, 그의 모든 명령들에 있어서 가장 거룩하십니다.” 여기서 그의 모든 의논들은 하나님의 뜻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원 전부터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세워 일하시는데, 하나님의 모든 뜻, 그리고 그 뜻이 그의 모든 사역과 모든 명령으로 드러난다고 할 때 거기에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 있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의 모든 사역들 역시 거룩하며, 그의 모든 명령들 역시 거룩합니다. 그런 거룩한 명령에 불순종한 것이 인간이고, 그래서 하나님의 일하심이 있는 이 땅에서의 모습 가운데도 불의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불순종과 불의함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잃어버리시는가? 잃어버리시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룩하심을 따라 지금도 역사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신앙고백서는 “천사들과 사람들, 그리고 다른 모든 피조물로부터 경배나 예배나 순종이나 그가 그들에게 요구하길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에게 드려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를 가지고 다스린다고 할 때 그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이 가장 거룩하시다면 어떻게 그에게 모든 영광을 올려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의 모든 피조물은, 특히 인격적 피조물인 천사들과 사람들은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고 계신, 가장 거룩하신 하나님께만 경배하고 예배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다만 그가 그들에게 요구하길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에게 드려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 안에서만 그렇게 해야 합니다. 내 뜻, 내 방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역대상 29장 14절입니다.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다는 사실, 그래서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리는 것, 이것이 경배와 예배와 순종의 참된 본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