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부에서 장학사가 오는 날이면 학교 전체가 어수선했다. 교실 청소하랴 운동장 청소하랴 바쁜 것은 학생들뿐이다. 하지만 그때 나는 청소에서 면제될 수 있었다. 붓글씨를 제법 쓸 수 있는 기예가 있었기 때문이다. 청소보다 글을 써 붙이는 일이 내게 맡겨진 임무였다. 사실 나는 학교에서 습자(習字)를 가장 잘하는 학생이었다. 선생님들도 내 붓글씨를 칭찬하셨다. 그 까닭에 나는 수업이 끝난 다음에도 학교에 남아서 붓글씨를 쓸 때가 많았다.
일제시대 말기의 기독교정책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교회에 다니는 아이들은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집 아이”라는 지목을 받으면 여러 가지 제약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교회 다니는 아이들이 여러 명 있었지만, 그 가운데 두 명이 유독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하나는 전도부인의 아들이었고, 또 하나는 교회 주동자의 자식이라고 지목되었던 나였다. 하지만 나는 내가 교회 다니는 아이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 때는 경제가 어려워서 도무지 물건다운 물건을 구경하기도 어려운 시절이었다. 보통은 부녀들이 손수 길쌈을 해서 옷을 지어 입었다.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학생들은 와라지(짚으로 만든 슬리퍼), 짚신, 나무로 만든 일본 신발 게다를 신고 다녔다. 책가방은 구경도 못하고 헝겊보로 책과 필통을 싸서 메고 다녔다. 몽당연필을 대나무에 꽂아 썼다. 가끔 운동화와 양복 배급을 받았는데, 그 때마다 학급에서는 추첨을 했다. 80명의 학생 앞에 운동화 열 켤레와 양복 한 벌이 나오기 때문이다.
가정을 이끌어 갈 책임은 부모에게 있었지만, 소학교 고학년이 되면서부터 나는 경제성이 있는 돈벌이를 하나 착안하였다. 이발하는 일이었다. 원당리는 백 수십 호 정도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이었는데, 이발소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발기계를 하나 구입하여 학교에서 방과 후에 학생들과 동네 사람들에게 이발을 해 주고 용돈을 마련할 수 있었다.
즐거운 시간들도 있었다. 가을체육대회는 대다수의 면민(面民)들이 학교로 와서 관람을 하고 즐겼다. 학생들은 한 번씩 달리고 나면 상으로 공책이나 연필을 받았다. 그 중에도 각 마을대항 청년계주는 대단히 흥겨운 것이었다. 겨울에는 토끼사냥을 하고 봄에는 학예회를 했다.
소학교 시절 가장 인상 깊었던 일은 우리를 담임하셨던 홍두표(洪斗杓) 선생님과 만난 일이었다. 그분은 1, 2학년을 연속 나의 담임을 하셨고, 학생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셨다. 그분은 인자하고 인격적이셨기에 많은 아이들이 잘 따르고 좋아했다. 그분이 공주군 정안소학교로 전근 발령을 받고 금강입포 부두에서 목선(木船)을 타고 떠나던 날, 온 동네 사람들은 눈물로 그분을 환송했다. 나 역시 양볼을 뜨겁게 적셨다. 우리들은 그 배가 가물가물 사라질 때까지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그 후 많은 학생들은 오랫동안 홍선생님을 그리워했다.
하지만 일순간에 가정경제가 파탄에 이른 우리 집 사정 때문에, 상급학교에 진학하려던 나의 꿈은 산산조각 나지 않을 수 없었다. 크게 낙심하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시던 어머니는 내가 계속해서 공부할 수 있는 길을 일러주셨다. “갑수야, 너는 소학교를 졸업한 뒤 평양에 있는 외숙들에게로 가도록 해라. 그곳에 가면 공부를 할 수 있을 게다.” 외숙 형제분은 평양에서 일본인이 경영하는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나는 다시 소망을 되찾았다. 그때를 상상하며 부픈 마음으로 소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양화공립초등학교 제11회 졸업생(194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