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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은과 금은 없고 하나님과 성령만 있다>의 줄거리:
사실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던 장애인을 마주 대하였을 때 베드로와 요한에게는 은과 금만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마음 안에는 아예 이 세상 모든 것이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만 있었고 하나님이 보내 주신 성령님만 있었지요. 바로 이 상태가 예수 이름이 가리키는 그리스도 연쇄 과정 안에 있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은과 금은 없고 하나님과 성령만 있다
(사도행전 3장 1절~10절)
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10.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은과 금은 없고 하나님과 성령만 있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은과 금은 없고 하나님과 성령만 있다’
본문에는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아있던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고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성전에는 여러 문이 있었는데 그 중에는 특별히 아름답게 치장된 문이 있었고 사람들은 그 문을 미문(美門)이라 불렀습니다. 바로 이 미문 앞에서 구걸을 하던 장애인이 있었는데 나이는 사십여 세가 되었습니다. 이 장애인의 나이에 대한 언급은 4장 2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장애인으로 태어났는데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이 구걸을 하도록 성전 미문 앞에 데려다 놓았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과 베드로와 요한도 아마 이 사람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성인 남자는 최소한 일 년에 세 번은 성전의 절기행사에 참여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한편 이 미문이 감람산으로 연결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제자들과 예수님은 이 미문을 통과하지 않았을 확률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생애 때부터 보시고 공생애 때에도 보셨을 이 장애인을 고쳐주지 않으셨고 베드로와 요한 또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 기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몰라도 고쳐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으리라 여겨집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은 새삼스럽게 이 장애인을 주목하게 됩니다. 이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에게 구걸을 하였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구걸은 이 사람에게 날마다 반복되는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한편 베드로와 요한이 주목한 이유는 자신들에게 권능이 주어졌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12절에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라고 언급한 것과 같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따로 능력이 주어진 상태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가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지금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를 성령께서 결정하시고 역사하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을 대할 때에 “베드로와 요한은 능력을 받은 자로서 왜 진작 이 사람을 고쳐주지 않았는가?”라고 질문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베드로와 요한 안에 머물고 계시던 성령께서는 마치 드론의 조종사와 같은 입장이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종사가 영상을 보면서 드론을 조종하듯이 성령께서 베드로와 요한의 눈을 통해서 상황을 보시며 이들의 육체를 움직여 가셨던 것입니다. 왜 이 시점에 성령이 역사하셨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필요하다고 여기셔서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미문에 앉아있던 장애인에게 주목하게 되었고 그를 고치게 됩니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현역 때에 했던 말 중에 “정치는 생물이다.”라는 말이 유명합니다. 오늘 본문의 상황을 이 말에 빗대어 해보자면 “성령의 역사는 생물이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언제나 지금 여기서 무엇을 어떻게 하실지 스스로 결정하셔서 행해 가십니다. 마치 보고 듣고 만지는 감각들을 드론의 카메라처럼 활용하시며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사해 나가십니다.
이러한 이해를 가지고 본문을 살펴볼 때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이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6절을 보면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언급한 예수 이름의 실제 대상은 그리스도 연쇄과정 속에 계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는 말을 풀어보면 “내가 그리스도 연쇄과정 안에 있는 상태에서 너에게 명하노니 일어나 걸으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지난 설교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그리스도의 연쇄과정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겪은 제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6장 55~5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신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먹는 것으로서 예수님의 죽음이 곧 나의 죽음임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연쇄과정 안에 있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연쇄과정 안에 있으면 곧 성령으로 살아가는 삶이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이고, 또한 내가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연쇄과정 안에 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상태로 살아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6절을 보면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단지 베드로와 요한의 주머니에 돈이 없었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이 “없다”라는 말에 주의하면서 의미를 확장해보면 베드로와 요한의 마음 안에 이 세상의 어떠한 가치도 담겨져 있지 않았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있고 없고의 문제가 또 다시 중요하게 다루어집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가리키는 그리스도 연쇄과정 안에 마음이 들어가 있으면 은과 금만 없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없게 됩니다. 마음은 있음을 느끼는 장소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세상을 탈출해서 예수님과 하나 되어 그리스도 연쇄과정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하늘을 느끼게 됩니다. 육체는 세상과 대면하고 있지만 마음에서는 세상과의 접촉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연쇄과정이란 곧 마음이 세상을 빠져나가 하늘로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예수님 안에 있으면 세상의 대상들에 대해 있음의 느낌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있음의 느낌은 오직 하나님께만 적용될 뿐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상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마음에서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며 세상의 대상들에 대해서는 어떤 것도 있음을 느끼지 않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인정하고 고백함을 통하여 예수님 안으로 들어갈 때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이를 태초의 상황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태초에 세상이 창조되지 않았을 때는 하나님만 계셨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면 하나님만 계시던 태초의 상황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본문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의 장애인을 고친 사건은 성령이 바깥으로 역사하신 첫 번째 장면을 기록한 것입니다. 앞서 2장 43절을 보면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라고 개괄적으로 표현하였는데 본문에서는 구체적으로 성령이 드러나게 역사하신 첫 장면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서도 나타나야 할 일입니다. 꼭 이러한 기적이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삶은 진행되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도에서 이 사건의 의미를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의 이름이 가리키는 그리스도 연쇄과정 안으로 마음을 들여보내고 있었고 이들의 마음 안에서는 하나님만 있음으로 느끼는 태초의 상태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몸은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대는 성전 미문에 있었지만 마음이 세상의 대상들로부터 있음의 느낌을 갖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마음에서 없었던 것은 은과 금뿐만이 아닙니다. 아내도 없고 자녀도 없고 부모도 없고 나라도 없고 민족도 없으며 심지어 자신의 몸조차 없었습니다. 이들이 마음을 들여보낸 그리스도 연쇄과정이란 바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을 통해 이루어진 세상 탈출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탈출하셨듯이 이들의 마음 또한 세상을 탈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 있음의 느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서 목표로 삼아야 하는 일이 있다면 바로 이러한 상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모일지라도 예수를 믿는다면 마음에 자녀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마음에는 오직 하나님이 계셔야만 합니다. 그리스도 연쇄과정에 마음을 들여보내서 예수님과 하나가 되면 마음은 세상을 빠져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오직 하나님만 계셨던 태초의 상황으로 마음이 진입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마음 상태도 바로 이와 같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마음을 그리스도 연쇄과정 안으로 들여보낸 사람에게는 성령이 임하시게 됩니다. 이를 통해 더욱더 완벽하게 태초의 상황이 재현됩니다. 창세기 1장 1절을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아직 천지가 없고 하나님만 계신 상태가 태초였습니다. 2절을 보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라고 태초의 상태가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2절의 나머지 부분을 보면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 즉 성령께서 운행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3절을 보면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라고 하였습니다. 빛이 있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께 받아들여지면서 성령께서 빛을 만드시는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없음의 상태 위에 성령이 운행하시고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활동하시는 모습입니다.
“운행하시다”라는 말은 암탉이나 비둘기가 알을 품고 있는 상태와도 같습니다. 알을 품고 있다는 것은 부화시키기 위함입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뜻이 들어있는 말씀이라는 알을 품으셔서 세상에 부화시키십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사자를 창조하시려는 뜻을 가지셨다면 성령께서는 그 뜻을 알처럼 품으시고 부화시키셔서 사자가 창조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 일은 창조 때로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이어져 오고 있고 우리에게서도 일어나야 하는 일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마음을 그리스도 연쇄과정 안으로 보내자 성령이 역사하시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40년 동안 걸을 수 없었던 사람을 고치시는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성전 미문에 앉아있던 장애인은 성령께서 무려 40년 동안 품고 계셨던 알이었던 셈입니다. 이 사람이 하필이면 이때 고침을 받는 것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이 갖고 계셨던 계획입니다. 이 계획이 40년 동안 알로 있다가 이 순간에 성령을 통하여 부화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모든 계획들은 마치 알처럼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 알을 성령이 품고 계시는 중에 때가 되면 삶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예를 들어 가정에서 배우자를 마주할 때도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뜻은 존재합니다. 그 뜻은 알이 되어서 성령께서 품고 계십니다. 그리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연쇄과정 안에 있으면 아버지께서 정하신 때와 기준에 합당한 상태에서 그 알은 부화되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합당한 말과 행동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정리해봅니다. 마음이 그리스도 연쇄과정에 들어가서 예수님과 연합할 때에 태초의 상태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마음에 은과 금만 없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없어지고 하나님만 있음으로 느껴지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성령께서는 내 마음에서 운행하시게 됩니다. 이 상태가 바로 태초의 상태입니다. 이제 태초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 성령께서 운행하시는데 다른 점이 있다면 태초 때에는 아무것도 없는 무의 상태에서 하나님의 뜻을 받아 창조라는 역사를 행하셨다면 지금은 이미 주어져 있는 대상들에 대해 하나님의 뜻을 받아서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마음의 태초를 이루기 위하여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여서 동일시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럴 때 약속된 성령이 오셔서 태초의 상태는 이루어집니다. 태초의 상태는 하나님만 계시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 아버지의 뜻을 받아 알처럼 품으시며 성령께서 운행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예수를 믿을 때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고 예수님과 하나 되었을 때 반드시 나타나야 하는 상태입니다.
앞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살펴보았습니다. 2장 21절을 보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고 하였는데 그에 앞서 재림에 관한 언급이 이루어집니다. 예수 이름을 부르면 마음에서 재림 때처럼 세상이 없어지는 상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태초 때와 재림 때에는 세상이 없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태초 때에는 세상이 창조되지 않았기에 없는 상태이며, 재림 때에는 만들어진 세상이 사라짐으로 없는 상태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예수님과 하나 됨으로써 마음에서 있음을 느끼게 하는 세상이 없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성령께서는 마치 나의 육체를 드론으로 삼으시고 오감을 카메라로 삼으시듯 운행하시며 포착되는 대상들에게 역사해나가실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본문에서처럼 꼭 기적으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일상적인 말이나 행동으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든 중요한 것은 마음이 예수님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태초의 상황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 움직이는 모든 순간에 마음은 태초의 상태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만을 있음으로 느끼고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암탉이 알을 품듯이 품으시고 운행하시는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상태에서 회사에 나가면 상사를 대할 때든 일을 할 때든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또 이 상태에서 배우자를 대할 때에도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마음에 배우자가 없는 상태에서 성령께서 배우자를 향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말하고 행동하도록 역사하십니다. 단지 십자가 예수님의 죽음을 내 죽음으로 받아들여서 세상에 대해 죽음으로써 내 마음에서 세상은 없어져야만 합니다. 은과 금만 없는 것이 아니라 배우자도 없고 자녀도 없고 나라도 없고 민족도 없고 세상과 관계된 것이라면 해와 달도 없는 상태가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하고 고백함을 통하여 태초에 세상이 만들어지기 이전의 상태를 마음에서 구현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있음으로 유지되는 상태를 주님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성전의 지성소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상징하는 법궤만 존재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이와 같은 상태가 될 때 아버지의 이름은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게 됩니다. 주기도는 있음을 느끼는 마음에서 세상이 다 잘려져 나가고 오직 아버지의 이름만 남아서 아버지만을 있음으로 느끼기를 바라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가시는 과정에서 이러한 기도를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기도가 온전히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십자가 사건이 전제되어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는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이 세상의 있음을 느끼는 것에 대해 죽은 자입니다. 세상에 대해 온전히 죽음으로써 저의 마음에서 오직 아버지의 이름만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원합니다. 아버지만을 있음으로 느끼는 유일한 대상이 되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죽음이 전제될 수 없다면 나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이름만이 유일하게 남아계신 상태는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움직이실 수 있기 위하여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태초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태초에 성령님이 운행하시던 상태를 연상하면 하나님 아버지만 계시고 세상은 없는 상태가 되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연쇄과정에 마음을 보낼 때 이 상태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베드로가 설교에서 재림 때에 세상이 없어지는 상황을 예수 이름과 연관시킨 이유이기도 합니다. 태초 때는 성령이 운행하시면서 앞으로 삶을 진행시켜 나가야 되지만, 재림 때는 삶이 더 이상 진행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에서는 태초 때가 더 가깝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사라져야 한다는 근본적인 의미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재림 때에는 있던 세상이 없어지는 것이고, 태초 때에는 세상이 아직 없는 상태였습니다. 있음의 느낌이 오직 하나님께만 적용되는 상태에서만 성령에 의한 삶은 진행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으려 하거나 붙잡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본문과 같은 기적과 이사가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성령의 역사는 반드시 기적과 이사가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께서 어떤 역사를 일으키실지는 성령께서 정하실 일입니다. 이 시대에는 그럴 필요가 없으시기에 그러한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과연 성령의 역사가 삶에서 나타나느냐는 것입니다. 말 한마디를 해도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내향적 역사와 외향적 역사의 두 가지 방향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비록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24시간 온전하게 붙들지 못할지라도 시시때때로 십자가를 붙들며 세상에 대해 죽었음을 인정할 때에 성령께서는 오십니다. 성령께서 약속대로 오셔서 보실 때에 마음의 상태가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는 대신에 여전히 세상에 대해 있음을 느끼고자 하는 체질이 남아있다면 성령의 역사는 내향적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나의 내면을 변화시키는 일에 성령의 역사가 집중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었음을 의식으로 인정하는 단계를 넘어서 실제로 주님과 함께 죽었음을 실감하며 마음에서 하나님의 있음만을 느끼는 단계가 되도록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만 누리다가 죽어도 은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과 같이 성령의 역사는 외향적으로도 나타나게 됩니다. 말 한마디 하는 것도 오직 성령의 역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성령의 내향적 역사의 과정이 끝나서 마음에서 있음을 느끼는 일이 오직 하나님 아버지에게만 해당될 때 이제 외향적 역사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가정에 있든 직장에 있든 시장에 있든 마음에 세상을 담지 않고 있음의 느낌의 대상으로 삼지 않을 때 그 현장에서 나의 말과 행동은 외향적인 성령의 역사로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붙잡고 나의 죽음으로 인정하려는 마음은 같으리라 믿습니다. 이러한 마음이 없다면 십자가복음방송을 듣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이미 성령께서는 와 계십니다. 바라기는 이제 성령의 내향적 역사의 과정이 끝나서 외향적 역사까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진정으로 태초의 상태가 이루어질 때 은과 금만 없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어떤 대상도 없는 상태가 됩니다. 마음에서 나라도 민족도 나의 몸도 배우자도 자녀도 없고 오직 하나님만 계십니다. 그럴 때 성령께서는 알처럼 품고 계시던 아버지의 뜻을 보시기에 좋도록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하나님이 계획하신 창조적인 일들이 성령에 의해 부화되는 역사가 진행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를 의식으로 기억함으로써 언제 어디서든 주님의 십자가가 뜨거운 이슈로 남아서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내 마음이 태초의 상황으로 진입해 들어가게 하시고, 아버지의 뜻을 알처럼 품고 계시는 성령께서 보시기에 좋은 역사를 외향적으로 창조해 가시는 삶이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