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괄호 안의 ㉠에 공통으로 해당하는 결사의 명칭과 괄호 안의 ㉡에 공통으로 해당하는 인명을 순서대로 쓰시오. [2점]
(가) ( ㉠ )의 탄생은 1831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그 목적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이탈리아 영토 전체를 아우르는 독립적이고, 분할될 수 없는 하나의 공화국을 건설하는 것이다. …(중략)… 다섯째, 모든 형태의 군주제나 입헌군주제 혹은 다른 정치 체제는 필요한 경우 과도기적 체제로서만 받아들인다. …(중략)… 모든 당원은 “나는 이탈리아 시민으로서 자유의 아버지 주님 앞에서, 자유를 누리기 위해 태어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연법을 비추는 거울인 나 자신 그리고 나의 양심 앞에서 …(중략)… 내가 가진 모든 도덕적, 신체적 역량을 조국과 조국의 재건을 위해 바치고,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이탈리아의 독립, 통일 그리고 자유의 쟁취를 위해 바칠 것”을 맹세해야 한다. - 마치니, 「( ㉠ )」 -
(나) 갑자기 왕국 군대의 행진 소리가 들려왔고 다음과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국왕이다! 국왕께서 오고 계시다!” ( ㉡ )은/는 부관과 함께 말에 올라탄 후 길가로 자리를 옮겼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중략)… ( ㉡ )의 군대는 왼쪽으로 방향을 돌려 칼비(Calvi)로 돌아갔고 피에몬테의 군대는 계속해서 테아노(Teano)로 진군했다. - 트리벨리언, ( ㉡ )와/과 이탈리아 건설 - |
해설 :
∙ ㉠청년이탈리아당 ㉡가리발디
[세상의 모든 역사 서양사 p.233]
5) 2월 혁명의 영향
① 이탈리아
㉮ 마치니 중심의 자유주의세력, 민주적 공화국 통일 국가 주장
㉯ 청년이탈리아당 창건
㉰ 나폴리의 혁명에 이어 오스트리아 지배 하의 밀라노에서 혁명이 발생하고, 베네치아에서 공화국 수립 → 이탈리아 민족해방 운동으로 확대
㉱ 사르데냐군 오스트리아군에게 패배(쿠스토차 전투)
㉲ 로마공화국 수립(1848년 11월)
㉳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에 의해 베네치아 공화국, 로마 공화국 붕괴
[사료로 읽는 서양사 4권 p.232]
이탈리아는 마키아벨리 시대(1469-1567) 이래로 유럽의 전쟁터가 되어 독립과 통일이 모든 이탈리아 애국자들의 목표였다. 19세기 초 이탈리아는 여러 지역으로 나뉘어 각기 다른 유럽 국가의 지배를 받았다. 이탈리아 북부의 롬바르디아와 베네치아는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았으며,중부는 대부분 교황령(로마교황이 통치하는 세속의 영역)에 속했고, 남부 일대에는 나폴리 왕국과 스페인의 지배를 받는 시칠리아왕국이 있었다. 또 토스카나와 모데나지역의 지배자들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향하에 있었다. 이탈리아인이 다스리는 곳은 사보이아(Savoia)왕가가 다스리는 북서부의 작은 왕국인 사르데냐뿐이었다.
군소국의 집합체였던 이탈리아 반도에서 통일의 움직임은 오스트리아를 몰아내려는 운동과 함께 시작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말기의 혼란한 시대에 이탈리아 전체를 아우르는 조직들이 만들어졌는데, 특히 외세에 맞서 조직된 비밀 결사인 카르보나리당黨(Carboneria)이 가장 강력했다. 이 단체는 1820년에 공화정 수립을 도모했던 나폴리 혁명, 1821년 사르데냐 중심의 통일을 꾀했던 피에몬테 혁명, 1831년 모데나를 비롯한 공국연합을 결성한 중부 이탈리아 혁명 등을 이끌었으나, 메테르니히의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카르보나리당의 일원이었던 주세페 마치니(Giuseppe Mazzini)(1805-1872)는 이탈리아 민족해방운동의 지도자로서 1831년에 이탈리아 반도 통일을 목표로 청년이탈리아당(Giovine Italia)을 결성했으나, 공화정이 아니라 입헌군주정으로 통합하기를 희망하는 자유주의자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사르데냐왕국을 중심으로 전개된 민족해방전쟁은 사르데냐의 위상이 격상될 것을 우려한 교황과 나폴리왕국이 지원군을 보내지 않아 결국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의 무력에 의해 좌절되었다.
이탈리아의 내셔널리즘은 1848년 이후에 크게 성장했다. 밀라노와 베네치아의 시민들은 오스트리아에 반대하는 혁명을 일으켜 공화국을 수립했다. 사르데냐의 국왕 얄베르토는 국내에서 개혁의 기운이 높아지자 자유주의 헌법을 허용하고 1848년에 오스트리아에 대항하여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하지만 오스트리아가 바로 반격을 가해 베네치아를 점령했고 사르데냐 왕국은 전쟁에서 패했다. 이후 사르데냐왕위에 오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재위 1851~1878)는 카보우르(Cavour)(1810-186 1)를 재상으로 기용하여 내정 개혁과 이탈리아 통일에 힘쓰게 했다.
카보우르는 외교를 통한 오스트리아 압박에 치중하는 한편, 크림 전쟁이 벌어졌을 때 영국과 프랑스 진영에 가담해 평화 회담에서 나폴레옹 3세와 플롱비에르(Plombieres) 밀약을 체결했다. 오스트리아가 이탈리아를 공격하면 프랑스가 군사 원조를 해주고 사르데냐가 롬바르디아와 베네치아를 합병하는 것을 양해해주면, 그 대가로 프랑스에 니스와 사보이아를 양도하겠다는 약속이었다. 사르데냐는 1859년에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벌였는데, 나폴레옹 3세가 파견한 군대가 도중에 돌아가 버렸다. 하지만 사르데냐는 롬바르디아를 병합하고 토스카나공국, 모데나공국, 교황령의 북부 지역을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결국 사르데냐는 오스트리아를 반도에서 축출하고 중부와 북부 이탈리아를 통합하는 데 성공해 그 영토가 두 배 이상 커졌으며 이탈리아에서 최강국이 되었다.
이탈리아 남부에서는, 청년이탈리아당 혁명운동에 가담했다가 사르데냐 중심의 이탈리아 통일주의로 전향한 주세페 가리발디(Giuseppe Garibaldi)(1907-1882)가 1860년에 1000여 명의 ‘붉은셔츠단’을 이끌고 시칠리아를 정복했다. 그리고 이어서 부르봉 가문의 지배에 저항하여 봉기를 일으킨 나폴리왕국도 점령했다. 가리발디는 오랫동안 스페인의 영토였던 이 두 지역에서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북부와의 합병을 결정한 후, 나폴리왕국을 사르데냐에 바쳤다. 이로써 1861년에 오스트리아령 베네치아와 교황령을 제외한 이탈리아 반도가 하나의 왕국으로 통합되었고,사르데냐의 왕 에마누엘레 2세가 초대 국왕으로 추대되었다.
그 이후 사르데냐는 프로이센과 공수동맹(攻守同盟)을 맺고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에 군대를 파병했는데, 1866년에 오스트리아가 패배하면서 베네치아가 이탈리아에 양도되었다. 그리고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발발로 나폴레옹 3세가 교황령에서 군대를 철수하자, 로마는 이탈리아 군인들에게 점령되었고 통일된 입헌군주제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이로써 1000여 년을 존속했던 교황령이 역사에서 사라졌고, 마지막 통치자였던 교황 비오 9세는 유물론과 이신론 등 이성 중심의 근대 사상을 오류로 단죄하는 교서를 공포하여 교황의 수위권을 지키려 노력했다.
그런데 가리발디가 아니라 카보우르가 이탈리아 통일 과정을 최종적으로 완수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실용적인 정책과 현실적인 정치 감각 덕분이었다. 반(反)가톨릭적이며 이상주의적인 전망을 지녔던 가리발디와 달리, 카보우르는 당시의 국제 정세를 최대한 이용하여, 필요하다면 프랑스나 그 적대국인 프로이센과도 연합하는 외교 정책을 발휘했다. 또한 그는 통일 달성이라는 목표를 위해 지역의 차이를 완전히 무시했는데, 그럼으로써 나중에 남부 지역의 소외와 지역 격차를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서양사개론 p.469]
2월혁명에서 가톨릭의 자유주의나 마치니의 이상주의적이고 공화주의적인 민족주의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이탈리아통일의 과업은 사르데냐의 현실정치가인 카부르(1810~1861)의 손으로 넘어갔다.
…
2월혁명 때 오스트리아에 패한 사르데냐에 새로이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1849∼1861)가 왕위에 오르자, 그는 오스트리아의 압력을 물리치고 자유주의적인 헌법을 고수하여 이탈리아의 전 애국자의 희망의 등불이 되었다. 귀족출신인 카부르는 1850년 재상으로 임명되자 그는 첫째로 사르데냐의 국력배양이 시급하다고 판단하고, 산업을 장려하고 군대를 개편하는 등 개혁을 단행하고, 둘째로 인구 500만 정도의 과히 크지 않은 사르데냐가 통일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는 그 국제적 지위를 향상시키고, 통일을 도와줄 우방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크림 전쟁에서 영국과 프랑스에 가담하여 양국의 호의를 얻는 데 성공하였다.
1859년 나폴레옹 3세와 밀약(플롱비에르 밀약)을 맺은 카부르는 이탈리아통일전쟁을 일으켜, 마젠타와 솔페리노에서 오스트리아군에게 승리하였으나, 사르데냐의 세력이 지나치게 강대해지는 것을 꺼린 나폴레옹 3세는 중도에 약속을 어기고 빌라프란카에서 오스트리아와 단독으로 휴전하였다. 나폴레옹 3세의 이러한 배신은 오히려 이탈리아의 애국자들을 사르데냐편으로 규합시키게 되었다. 즉, 북부 및 중부의 작은 나라들은 민중운동의 뒷받침을 받아 사르데냐와의 합병을 요청하고, 카부르는 이를 받아들여 북부 및 중부이탈리아를 통합하고(1860), 프랑스에게 사보이와 니스를 양도하였다.
때마침 남부에서도 통일에 매우 유리한 사태가 일어나고 있었다. 마치니와 같이 공화주의적 민족주의자이며, 낭만적인 풍운아(風雲兒)인 가리발디(1807~1882)가 적색셔츠당으로 불리는 1,000명의 의용군을 거느리고 부르봉왕실 출신의 왕이 지배하던 시칠리아에 상륙하여 이를 점령하고, 이어 나폴리를 장악하였던 것이다. 카부르는 공화파인 가리발디가 로마로 진출함으로써 교황과 분쟁을 야기시키는 경우, 가톨릭교도와 국제여론이 이탈리아통일에 불리하게 될 것을 염려하여 서둘러 사르데냐군을 남하시켰다. 가리발디 또한 이탈리아의 통일이라는 대의(大義) 앞에 그의 공화주의를 포기하고, 시칠리아와 나폴리는 국민투표로 북부와의 통합을 가결하였다. 이리하여 로마와 베네치아를 제외한 전 이탈리아가 통합되고, 사르데냐왕을 국왕으로 추대한 이탈리아왕국이 1861년 3월에 탄생하였다.
카부르는 그해 6월 사망하였으나, 사르데냐는 그의 교묘한 외교정책을 계승하여 베네치아와 로마를 차례로 흡수하였다. 즉, 1866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전쟁에서 프로이센을 지원한 보수로 베네치아를 회수하고, 1870년에는 프로이센과의 대립으로 로마에 주둔하던 프랑스군이 철수하자 이를 점령하여, 수도를 피렌체로부터 로마로 옮겼다. 이로써 이탈리아의 통일은 실질적으로 완성되었다. 그러나 교황의 동의 없이 교황령을 합병하였다는 이른바 ‘로마문제’가 남고, 북쪽의 작은 땅이지만 트리에스트와 트렌티노 등이 아직 오스트리아의 수중에 있어 ‘미회복의 이탈리아’로 남게 되었다.
통일왕국은 입헌군주제로서 그 헌법은 프랑스의 제3공화정의 것과 유사한 것이었다. 국왕은 장식적인 존재이고, 내각이 하원에 책임을 지고, 하원 선출 자격은 처음 재산 자격으로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었으나 1881년 이후 이 자격은 19리라의 직접세 납입으로 크게 완화되었다.
통일 후 북부에서는 급속한 산업화가 진행되고, 국가가 관리하는 철도는 급속하게 남부지방에서까지 뻗어갔으나 남부는 후진적인 농업지대로 남게 되었다. ‘두 개의 이탈리아’라고 할 정도로 경제와 산업상의 격차를 보인 공업적인 북부와 농업적이고 빈곤한 남부의 차이는 사회적 긴장을 증진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이탈리아경제는 전반적으로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이탈리아상선대(商船隊)가 해외로 진출하게 되었으며, 육해군의 강화는 이탈리아에 강대국의 지위를 가져다주었다. 그리하여 이탈리아는 20세기에 들어서면 제국주의적인 식민지획득 경쟁에도 끼어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