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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산 허위 선생기념관에 이어 장택상생가를 찾기 전 박정희대통령 생가를 찾았다
모두 한마을 인물들로 거기 거기에 위치한 공간이다
그렇기에 그 인물들의 관계는 서로 얽혀있다
1917년 11월 10일 밤 경북 관찰사를 지낸 장승원의 경북 구미 집에서 권총탄 소리가 터졌다. 7만 5000석을 수확하는 당시 최고의 부자이면서 악명이 높았던 장승원을 처단하는 총소리였다. 그는 왕산 허위의 추천으로 경상도관찰사가 됐는데 관찰사가 되기 전 고종복위를 위한 자금을 대겠다는 약속을 어겼을뿐더러 독립운동가들을 밀고까지 해 광복회원 채기중과 강순필이 사살한 것이다.
“조국 광복을 하자는 것은 하늘과 사람의 같은 뜻이니 이 큰 죄를 성토하노라.”
거사 후 두 사람은 담벼락에 이런 격문을 붙여 놓았다.
장승원은 광복 후 미군정 수도경찰청장과 3대 국무총리를 지낸 장택상의 아버지다.
여헌 장현광의 후손으로 이지역에서 선망의 대상이던 장승원 가문 그러나 그의 친일 행적으로 조상의 300년 업적은 물거품처럼 허망해진다
아버지 장승원이 처단되는 것을 직접 목격한 장택상은 주변 지도자급 인맥들과의 교류로 독립운동가의 자격을 받게 되나 이때 아버지 일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고 수도경찰청장 때 노덕술 등 친일 경찰을 군정 경찰로 받아들이게 된다.
사실 이 거사의 가장 큰 실행인이자 배후는 박상진의사이다
박상진의사는 1902년부터 의병장 출신인 허위(許蔿)에게 배웠다. 허위는 형대문형무소 1호 사형수이다
1904년(광무 8) 양정의숙 전문부에서 법률과 경제학을 공부했다. 1910년 판사시험에 합격하여 평양법원에 발령받았으나 사퇴했다. 1912년부터 대구에 상덕태상회를 세워 독립운동의 군자금 조달 및 연락 거점으로 삼았다. 1915년 1월 대구에서 조선국권회복단을 결성했고, 같은 해 7월 15일에는 1913년 경상북도 풍기에서 채기중을 중심으로 결성된 풍기광복단을 통합하여 대한광복회를 조직하고 총사령에 취임했다.
박상진은 대한광복회의 이념을 근대 국민국가의 공화주의로 하고, 그 방략은 무장혁명노선을 표방했다. 즉 국내에 100여 개의 거점을 두고 군자금을 모아 무기 및 장비를 갖추고 독립군을 양성하여 일제히 혁명을 일으켜 공화주의 독립국가를 건설하려고 했다. 그러나 군자금 모금에 부호들이 협조하지 않자 이후로 강제모금을 추진하고 친일적인 부호를 처단하기로 계획했다.
1917년말과 1918년초에 걸쳐 경상북도 칠곡군 부호 장승원(張承遠), 충청남도 아산군 도고면 면장 박용하(朴容夏), 전라남도 보성군의 양재학, 낙안군의 서도현을 처단했다. 그러나 이종국(李鍾國)이 천안경찰서에 밀고함으로써 1918년초 전국의 조직망이 발각되어 채기중·김한종(金漢鍾) 등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아 순국했다.
이런 장승원 전장의 소작농으로 근근하게 박정희대통령 아버지 박성빈은 박정희를 키워낸다
박정희의 본관은 고령(高靈)으로 창씨개명한 이름은 다카키마사오[高木正雄], 호는 중수(中樹). 경상북도 구미 출생이다. 빈농인 아버지 박성빈(朴成彬)과 어머니 백남의(白南義) 사이에서 5남2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근근한 가정살림으로 입 하나도 아쉬운 때 박정희가 생겨 40줄이 넘은 어머니 백남의는 상당히 난처해했고 심지어 딸도 자식이 생겨 같이 더불어 산후조리를 하는 신세가 되었다고 일설로 전한다
박정희의 선조는 무과 출신 지주였으나 아버지 박성빈이 한때 동학농민군에 가담해 활동하는 등 할아버지의 눈 밖에 나는 행동으로 재산을 거의 물려받지 못하고 떠돌다가 처가가 있는 이곳에 정착해 처가인 수원 백씨의 위토(선조 제사를 위해 마련한 농토)를 겨우 얻어 입에 풀칠하며 지내는 사이 식구가 많아지니 근처 거대 지주인 장승원의 전장 중 다섯마지기 정도의 소작을 얻어 근근히 생활한 것으로 보인다. 덕분에 박정희는 넉넉지 못한 환경에서 자랐고 어려서 장승원의 마름에게 소작료와 뇌물따위의 것들을 아버지가 가져다줘야하는 지주갑부와 소작농 사이의 애처롭고 비굴한 면면을 보고 자라게 된다.
당연히 지주 집안 둘째 도련님 장택상의 눈에 박정희는 한낫 지렁이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박정희는 아홉 살에 구미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성적은 매우 좋아 줄곧 우등상을 받았고 당시 전국의 수재들이 모이는 대구사범학교에 합격했다. 졸업 후에는 교사 생활을 했으나 3년 만에 그만두고 1942년 만주에 있는 신경군관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에서 그는 매일 아침 일본 천황에게 요배(遙拜)를 하고 만주국 황제에게 궁성요배를 했다. 말수가 적었던 그는 ‘독종’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성실하게 수업에 임했고, 우등상까지 받을 정도였다. 덕분에 성적 우수자에게 주는 특전인 일본 육군사관학교의 입학 자격을 받을 수 있었다.
만주의 신경군관학교(新京軍官學校) 제2기생으로 입학, 군문에 들어갈때 군관학교에 지원하기 위하여 혈서를 썼으며, 일본인으로서 개와 말의 충성[犬馬の忠]을 다하겠다고 지원서에 썼다. 이 일은 크게 회자되어 『만주신문(滿洲新聞)』(1939. 3. 31. 7면)에 실렸다. 이 군관학교를 최우등생으로 수료한 뒤 일본육군사관학교로 전학, 1944년 졸업과 함께 만주군 소위로 임관되어 관동군(關東軍)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그가 중위로 승진한 직후, 일본은 연합군에게 항복했고 한국은 해방되었다. 그는 한 달쯤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한국광복군에 합류했지만 패잔병의 입장으로 1946년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미군정에서 장교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한 조선경비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는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이다.
이즈음 남로당 구미 지역 책임자로 일하던 형 박상희가 경찰토벌대에 피살되는 일이 발생했다.
박상희는 당시 대구지역 노동운동을 주도적으로 벌이는 지도인이었고 그래서 박정희는 형 박상희를 잘 따랐다 이 박상희가 후에 김종필의 장인이 되니 박상희 처는 이때 젊은 과부로서 나락에 빠졌다가 후에 효창동 사모가 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산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는 박정희 역시 남로당에 가입해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1949년 순천에서 일어난 10·19 사건을 계기로 공산주의자 관련 혐의를 받고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동료 선임 장교이자 만주군 선배로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들이던 백선엽과 김창룡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 일설에는 숙군에서 살아남기 위해 남로당에 가입한 같은 동료들을 고해 바치고 본인은 살아남았다고 전한다 이후 박정희는 극단적인 반공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한국전쟁 중에는 부하인 송재천의 소개로 육영수와 결혼식을 올렸다. 박정희는 이미 대구사범학교를 다닐 때 김호남과 결혼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강요에 못 이겨 한 결혼이라 거의 별거 상태로 지냈고, 딸이 태어났지만 가까이하지 않았다. 결국 두 사람은 이혼했고 김호남은 비구니가 되었다.
그리고 내연녀로 또 한 여인과 관계를 가졌지만 호적상 결혼관계 되기 전 육영수 여사와 결혼하게 된다
육영수는 옥천 대지주의 딸로 당시로는 드물게 서울에 올라와 고등학교를 졸업한 여자였다. 육영수의 내조로 그는 이후 출세가도를 달렸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는 “누란(累卵)의 위기에서 조국을 구하고 도탄에 빠진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겠다.”라는 공약을 내걸고 청년장교들과 함께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7월에는 입법권, 사법권, 행정권을 장악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 취임해 군정(軍政)을 실시했으며, 1962년 3월 윤보선 대통령이 사임하자 대통령 권한 대행도 함께 맡았다.
쿠테타로 정권을 잡았다고 하지만 사실 일설에는 이미 미국에서 박정희를 대통령감으로 낙점했다는 설도 있다
해방이후 미국의 영향력을 키우는 과정에서 제주 4.3 사건과 이로 인한 여수 순천 사건 두 사건을 진두지휘한 미군 주요 장교가 있는데 이가 바로 제임스 하우스만 당시 대위였다 그 대위 옆에서 제주사건과 여수 순천사건을 보좌하며 주요업무를 맡고 추진한 인물이 바로 박정희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잠깐 박정희와 장택상 관계도 살펴보자 5.16 군사쿠데타로 두 사람의 처지는 완전 역전되고 만다.
장택상은 5.16으로 박정희가 권력을 잡은 후에도 '박정희 의장' '박정희 대통령'이라는 공식 호칭 대신 '박정희 군''박정희 씨'라고 낮춰 부르며 과거를 회상해 박정희를 인정하지 않는다
심지어 특유의 독설을 늘어놓으며 박정희의 앞길을 훼방놓기도 한다
그러다가 장택상은 1963년 6대 국회의원 선거 때 박정희가 총재로 있었던 민주공화당의 30대 정치 신인에게 참패를 당한다. 바로 박정희의 입김에 의해 장택상 유세장 등에서 장택상을 보호한다는 미명아래 경찰관들이나 군인들이 시민들을 위력으로 대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 언론으로 장택상이 독립운동가가 아닌 악질 친일파 일원으로 분위기를 만들어놓은 것도 한몫 했다
그러다가 장택상은 그만 병이 들었다.
마침 미국에 있는 딸의 초청으로 신병을 치료하고자 수속을 밟는데,외무부에서 여권이 나오지 않았다.
그제야 장택상은 냉엄한 현실을 깨닫고 마침내 '박정희 대통령 각하 전상서'라는 사실상 항복 편지를 청와대로 보낸다.
그 이후에도 경부고속도로 건설시 장택상 생가로 길이 이어져 생가가 헐리는 지경에 이르자 또 한번 읍소하며 박정희에게 비굴해져야 했다 결국 그 이유로 경부고속도로는 이 지점에서 굴곡된 모양으로 길이 나게 된다
1963년에 창당된 민주공화당에 입당해 총재에 추대된 후, 그해 치러진 제5대 대통령선거에서 야당 후보 윤보선을 15만여 표의 근소한 차이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여론의 반대에도 경제발전에 필요한 외자를 유치하기 위해 한일협정에 정식 조인하고 한·일 국교를 정상화?시켰다 이로인해 일제강점기 때 벌어진 일제의 폭거에 대한 우리 민간인들의 피해를 일본은 다 정리했다고 주장해 현재까지 말썽이 많게 한 단초를 제공한다
아울러 화폐 개혁을 단행하고, 독일에서도 차관을 얻어내고자 독일로 탄광인부 및 간호사 등 인력 수출을 했으며, 역시 베트남 전쟁 파병을 단행했다. 이렇게 확보된 자금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쓰였다.
또 농어촌 근대화를 목표로 새마을운동을 실시해 이른바 ‘잘살기 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사업이 한편으론 국가 발전에 기여했지만 국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보다는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에 의한 강제성을 띠었기 때문에 부작용도 많았다.
그는 개발도상국이었던 한국의 낙후된 경제를 재건하여 경제 성장을 일으켰으나 대통령의 임기를 2선으로 제한한 헌법을 고치는 등 장기 집권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는 ‘경제 개발이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라는 명분으로 반대파를 설득했고 급기야 1972년, 국회와 정당 해산을 발표하고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한 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유신헌법(維新憲法)을 제정해 제8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헌법의 주된 내용은 박정희의 종신 대통령직을 보장하고 모든 권력을 그에게 집중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유신 시대’라고 불리는 제4공화국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가 이룩한 경제 발전과 별개로 장기 집권에 따른 정치적 부작용과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는 점점 거세졌다. 긴급조치 발동으로 정권을 유지해 나가기는 했으나 장기 집권과 반민주적인 통치를 반대하는 국민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여기에서 장준하와의 관계도 살펴보자
장준하는 일본 도요대학[東洋大學] 예과를 거쳐 도쿄의 니혼신학교[日本神學校]에서 수학하던 중 1944년 일본군 학도병에 강제 징집되었다. 이후 중국 쓰저우 지구에 배속되었으나, 6개월 만에 탈출에 성공하여 김준엽(金俊燁)의 도움으로 중국의 중국중앙군관학교(中國中央軍官學校) 린취안(臨泉) 분교 한국광복군간부훈련반(약칭 한광반)에 입대했다.
일본 항복 소식을 듣고 광복이 되자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김구의 비서로, 1945년 12월 김구와 함께 조국에 돌아왔다.
그러나 김구의 암살로 그의 대한민국 생활은 레지스탕스의 세계로 들어간다
1951년 1 · 4후퇴 때 부산에 피난한 뒤 1952년 9월 문교부 산하의 국민사상연구원에서 잡지 『사상』을 창간했다. 이어 1953년 피난지에서 『사상계(思想界)』를 창간했다.
1966년 대통령명예훼손 혐의로 검거되어 복역하였다. 이듬해 1967년 서울 동대문 을구에서 신민당 공천으로 옥중 출마해 제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71년 신민당을 탈당하고 사상계 사장에 복귀했으며, 1973년 통일당 최고위원이 되었다.
1974년 긴급조치 제1호 위반으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형집행정지로 가석방되었다. 연이은 민주화운동 참가로 10여 차례 투옥되었다. 1975년 개헌청원백만인서명운동본부의 이름으로「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발표했다.
그러나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군에 있는 약사봉에서 등산하다가 의문의 사고로 사망했다. 이후 사망 경위에 대해 논란이 분분했다. 박정희 정권의 음모로 귀결되는 모습이다
다시 박정희 집권기로 돌아오면
1968년 1월 21일에 북한 특수부대 소속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해 정부 요인을 암살할 목적으로 서울 세검정 고개까지 침투했던 1.21사건 등이 생긴다 이들에 대한 소탕전이 1월 31일까지 이어진 끝에 북한군 29명이 사살되고, 1명은 도주하였으며, 나머지 1명인 김신조가 생포되었다.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장이었던 서울 중구 장충동 소재 국립극장에서 문세광(文世光)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저격을 시도하는 가운데 단상에 있던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피격되어 사망한 사건이 생긴다. 문세광은 사형을 선고받았고 그해 12월 20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리고 김형욱 납치 암살 사건 등이 생긴다
김형욱은 육사 8기로 군생활중이던 1961년, 5.16군사쿠데타에 가담한후 중앙정보부 부장이 되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권력의 실세가 되었다. 영원할것 같았던 권세는 3선개헌의 진통속에 이만섭 의원이 제시한 '3선개헌의 선제조건'에 '김형욱 해임'이 포함되어 경질되면서 6년만에 끝나고 말았다. 경질후 박정희와 사이가 벌어지더니 1972년 유신 출범후 완전히 권력의 중심에서 배제되어 몰락의 길을 걸었다. 박정희와의 갈등은 김형욱이 미국망명후 1977년 프레이저 청문회에 출석하여 정권의 비리를 거침없이 폭로하면서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1979년 10월 7일, 파리에 간후 실종되어 연락이 두절되었으며 이후 정확한 행방이 알려지지 않은채 여러설들이 난무했는데 박정희가 보낸 중앙정보부원에 의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김대중 납치 암살 사건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박정희에 맞서 선전했던 김대중은 1972년 신병 치료를 위해 일본에 체류하였다. 그러나 유신체제가 선포되자 국내로 들어오는 것을 포기하고 1973년 7월 재미교포 반체제단체인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약칭 한민통)를 결성하는 등 해외에서 반유신 활동을 전개하였다.
사건 발생 석 달 후인 11월 2일, 김종필 총리는 김대중 납치사건에 대한 유감의 뜻을 담은 박정희 대통령의 친서를 일본 다나카 일본수상에게 전달하였고, 다나카 수상 역시 납치사건에 대해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겠다는 답신을 전달하였다. 양국 정부 모두 김대중 납치사건을 둘러싼 진상을 은폐하기로 결정함으로써 한일관계의 갈등 역시 봉합되었다. 그 이후 사건의 배후와 과정은 명확히 밝혀지지 못하다가, 2007년국정원 과거사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의 조사 보고를 통해 당시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의 지시 아래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납치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복합적인 상황으로 남북 관계는 다시 어두워졌고, 유신 체제에 반대하는 시민들의 목소리는 더욱 거세졌고 박정희는 긴급조치 9호를 발령했다. 이는 유신헌법을 부정, 반대, 비방하는 일절의 행위를 모두 금지한다는 내용이었다. 정부의 이렇게 극단적인 조치에 따라 구속되는 양심수는 늘어 갔고, 인권 유린의 정도는 심화되었다.
전국에서는 시위가 계속되었고, 특히 부산과 마산 지역의 시위가 극렬했다.
결국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는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경호실장 차지철 등과 함께 부마 사태의 수습책을 논의하기 위해 궁정동에 모였다. 이곳에서 박정희는 차지철과 함께 김재규에게 피격당하고 만다.
17년에 걸친 독재로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추진 등 조국근대화에 기여했다는 공과 민주주의 발전과 개인의 욕망에 국민을 고통에 빠뜨렸다는 과를 함께 짊어진 박정희 대통령, 현재에도 그 공과 과를 심판하며 한쪽에선 찬사와 숭상을 한쪽에서 깍아내리는 지탄을 하는 이 시점 전자에 방점을 둔 보수정권 윤석열 정권에선 경상도 국민의 마음을 잡겠다고 전 국민이 낸 세금 1000억을 또 투입해 그 성역화에 나서려고 하다 현재의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