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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다른 신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는 기술>의 줄거리:
인간의 근원적인 마음속 목마름이 중심 주제인, 예수님과 수가성 여인 사이에서 일어난 대화에서 갑자기 예배가 화제로 떠오릅니다. 수가성 여인이 먼저 시작한 예배 이야기에 대해 예수님은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를 말씀해 주십니다. 그리고 이천 년 동안 교회는 기독교 종교로 타락한 채 이 예배의 정의를 오해하며 악용하여 왔습니다.
다른 신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는 기술
(요한복음 4:19~26)
19.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25.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다른 신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는 기술>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다른 신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는 기술”
다른 신에 대한 정의를 분명하게 기억하는 것은 복음으로 사는 신앙생활에 매우 유익합니다. 다른 신은 단순히 종교의 신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슬람교의 마호메트가 알려준 알라도 아니고 힌두교의 많은 신들도 아니고 일본에 신이 오백만이나 있다고 하지만 그것도 아닙니다. 성경이 문제시하는 다른 신은 우리의 마음과 연관되어서 정의됩니다.
사람의 마음은 영이신 하나님께서 들어오실 수 있도록 만들어진 공백입니다. 이 공백을 통해 영이신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마음이 곧 영입니다. 한편 마음의 공백은 채워지기 위한 목마름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채워질 수 있다고 믿어지는 대상의 이름을 붙잡게 됩니다. 이러한 이해에서 보자면 인생이란 마음에서 붙잡은 이름이 가리키는 실체를 얻고자 수고하고 노력하며 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 크기로 비어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만 온전히 채워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이외에 붙잡는 대상들이 바로 다른 신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돈은 신이 아닙니다. 돈 자체는 신이 아니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아야 될 마음에서 돈을 붙잡게 되면 다른 신이 됩니다. 돈을 하나님 자리에 세우면서 신격화하는 것입니다. 마음 채움을 자녀의 형통으로 기대하게 되었다면 자녀를 신격화함으로써 다른 신이 되는 것입니다. 승진에 목말라하고 있다면 승진이 다른 신이 됩니다. 이처럼 마음을 채우기 위하여 목말라 하는 대상이 무엇인지를 보면 섬기고 있는 신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크기로 비어있는 마음의 공백에서 발생하는 목마름은 본래 하나님에 대한 갈망으로 나타나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 목마름으로 하나님의 자리에 다른 대상을 집어넣음으로써 하나님으로 여기고 신격화하게 되면서 다른 신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소원하는 것을 보면 다른 신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소원은 마음의 공백으로부터 발생하는 목마름입니다. 그 소원의 대상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면 모두가 다른 신이 됩니다.
그런데 다른 신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는 기술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재물에 대한 목마름이 있다면 재물이 다른 신이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다른 신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있다는 독특하고도 창의적인 기술을 발견해냈습니다. 다른 신과 참 신이신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있는 기술이 바로 예배입니다. 오늘도 주일을 맞이해서 지구 위에 있는 개신교와 천주교를 포함해서 기독교 종교에 속한 사람들이 예배당과 성당을 찾아가서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배당과 성당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의식적이고 형식적인 예배야말로 다른 신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있는 기술입니다.
본문에는 예수님과 수가성 여인과의 대화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화 속에서 갑자기 예배에 대한 이야기가 불거져 나옵니다. 앞선 18절까지는 목마름이 주제였습니다. 예수님은 육체가 지치셨고 목마르셨던 것과 같이 수가성 여인은 마음이 지치고 목말라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내적인 목마름을 보시고 13~14절에서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이 여섯 번째 남편과 살고 있다는 것도 알고 계셨으므로 이에 여인은 예수님이 선지자라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여인이 예수님께서 선지자임을 확신하자마자 곧바로 나온 단어가 바로 예배입니다.
이 대목으로부터 수가성 여인이 평소에 갖고 있던 우선적 관심이 예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믿게 되자마자 자신이 갖고 있던 가장 궁극적 관심과 의문점을 질문했는데 그것이 바로 예배였다는 것이 참 신기합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이 예배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이 여인의 질문에 대해 24절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 여인이 왜 예배에 관심을 갖고 있었고 예배란 무엇인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여인은 여섯 번째 남편과 살고 있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2000년 전 중동 땅에서 여성은 남성에게 의존하는 형태였습니다. 한 여자로 태어난 사람이 자기 속에서 발생하는 마음의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오직 남편뿐이라는 것이 통념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그 당시 남편의 정의란 여성의 목마름을 해결해줄 수 있는 유일한 열쇠였습니다. 그러나 물이라고 다 같은 목마름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물은 아닙니다. 홍수가 나면 물이 넘치지만 정작 마실 물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수가성 여인은 남편의 홍수 속에서 진짜 마음의 갈증을 해결해줄 수 있는 남편은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여섯 번째 남편과 살고 있던 이 여인에게 있어서 남편이 잘나고 못 나고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 여인은 인생의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다는 통념으로써 남편의 자격 자체를 박탈해버렸습니다. 남편이라는 존재는 마음의 궁극적인 목마름을 해결해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며, 목마름과 연관해서 애초에 자격이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17절을 보면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고백에는 “나의 목마름을 해결해줄 수 있는 존재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대답을 옳다고 여기십니다. 예수님께서 유대 땅에서 바리새인을 등지고 유대인 남자도 등지고 유대인 여자도 등지고 사마리아 땅에서 사마리아 남자도 등지고 사마리아 여자도 등지고 이 여자를 찾아오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가장 변두리에 있던 이 여인이야말로 세상에서는 마음에서 발생하는 궁극적인 목마름을 해결해줄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서 목마름을 해결할 수 없다고 느끼는 사람을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만이 정확하게 예수님과의 만남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이 예배를 언급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당시의 여성은 남편으로부터 마음의 목마름을 채워야 한다는 것이 사회의 통념이었지만, 이 여인은 남편으로는 마음을 채울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이 여인의 마음은 세상 바깥에 계신 하나님을 향하게 됩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 하나님께 도달하기 위한 방법입니다. 남편이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는 존재라고 믿을 때는 결혼이 방법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심지어 여섯 번이나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요? 이 여인이 생각 끝에 스스로 얻은 답이 바로 예배였습니다. 이처럼 예배는 이 여인에게 중대한 우선적 관심사였습니다.
이 여인은 마음의 목마름으로 인해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습니다. 마지못해 죽지 못해 살고 있었습니다. 어떤 일에도 희망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통해 마음의 갈증이 해결되리라는 희망을 갖고 살아갑니다. 아가씨들은 결혼을 통해서, 돈이 없는 사람은 돈을 벌어서, 몸이 아픈 사람은 건강하게 되어서, 자녀가 형통하면 마음의 갈증이 해결되리라 믿습니다. 이러한 희망이 사람을 살아가게 합니다. 사람은 희망을 마시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여성들의 유일한 마음 채움의 희망은 남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에게서 남편이라는 희망은 끝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제 더는 마음의 목마름을 해결할 길은 없었습니다. 이렇게 철저하게 막힌 상태에서 드디어 여인의 목마름은 세상 밖에 계신 하나님을 향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도달할 수 있는 길이 바로 예배라고 생각했는데 여인의 출신이 문제가 됩니다.
이 여인은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던 장소는 그리심산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와서 예배를 드려야만 한다고 했지만 사마리아인들은 조상 때부터 그리심산에 있는 성전에서 예배를 드려왔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이 여인 또한 그리심산에 있는 성전에 가서 예배를 드려보았지만 하나님을 만날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선지자라고 확신하게 된 예수님께 그리심산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없으니 예루살렘으로 가야만 하는지를 물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21절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고 하십니다. 예루살렘에 갈지라도 예배라는 형식의 틀이 갖추어진 의식을 통해서는 세상 밖에 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24절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배는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심산이나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려지던 의식으로써의 예배가 아닙니다. 예전 번역에서는 이 부분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령과 진정으로”라는 표현의 의미가 분명치 않기에 “영과 진리로”라고 다시 번역되었지만 이 또한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영은 목마름이 발생하고 있는 마음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미 삶에서 영과 진리로 살아갑니다. 예를 들어 돈을 통해서 마음이 채워지리라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고 돈을 얻기 위하여 노력하고 수고합니다. 이 사람은 이미 목마름이 발생하는 영이 작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 채움을 위하여 돈이라는 이름을 붙잡으면 돈이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돈을 버는 과정이 바로 마음을 채우기 위한 길입니다. 돈을 벌기 위한 길을 진리로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영과 진리라는 것은 목마름의 대상이 무엇이냐를 결정하고 그렇게 결정된 목마름의 대상을 실제로 얻기 위하여 길을 찾게 되는데 이것이 진리입니다.
즉, 영이란 마음에서 발생하는 목마름이고, 진리란 그 목마름을 해결해줄 수 있는 대상을 향하는 길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은 이미 이러한 영과 진리의 예배 과정을 밟으며 살아갑니다. 그 대상이 하나님이 아닐 뿐입니다. 그 대상은 돈이나 건강이 될 수 있으며 가족의 형통이나 승진일 수 있고 명예나 권력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대상들을 삶의 현장에서 다른 신으로 섬기며 영과 진리로 예배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에는 어떤 의미가 있었던 것일까요? 모든 사람들이 삶의 현장에서 영과 진리로 마음의 목마름과 그 목마름을 해결해 줄 수 있다고 믿어지는 다른 신을 섬기며 살아가는 중에 선민들에게는 참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보태집니다. 다른 신을 영과 진리로 섬기며 살던 삶을 유지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자 합니다. 그렇게 생각해낸 방법과 기술이 성전에서의 예배입니다. 성전을 짓고 그 성전에 모여서 정한 시간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제물을 드리고 헌금을 드리고 예배하는 형식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형식을 따름으로써 삶의 현장에서는 영과 진리로 다른 신을 섬기고 성전에서는 하나님을 섬기고자 했습니다. 하나님과 다른 신을 겸하여 섬길 수 있는 기술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예를 들어 로미오가 줄리엣과 잘 사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3년 정도 사귀다보니 로미오는 줄리엣에게 싫증이 나게 되었고 권태기에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정든 줄리엣을 내팽개칠 수는 없어서 스텔라라는 여자와 몰래 사귀게 되었습니다. 소위 젊은이들이 말하는 양다리 걸치기를 하게 된 것입니다. 양다리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줄리엣을 만날 때와 스텔라를 만날 때의 장소가 달라야만 합니다. 장소만 끝까지 다르게 유지하고 들키지만 않으면 양다리를 얼마든지 걸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친구는 둘이 될 수 있지만 애인은 둘이 될 수 없습니다. 애인을 둘로 가질 수 있는 기술은 장소를 따로 만들어 유지해 나가는 것입니다.
선민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했던 일이 이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의 목마름을 위하여 돈과 건강과 형통과 승진을 좋아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좋아할 수는 없습니다. 좋아한다는 것이 곧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의미입니다. 선민들이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성전을 만들었듯이 우리는 예배당을 만들고 그곳에 가는 것만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식이라고 정했습니다. 그리고 정작 삶의 현장에서는 영과 진리로 다른 신을 열심히 섬기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만나는 장소를 다르게 함으로써 양다리를 걸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자면 예배야말로 인류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기술을 발견해 낸 것입니다.
하나님과 다른 신을 겸하여 섬기기 위하여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성전과 예배당과 성당에 가두게 됩니다. 섬기는 장소를 다르게 함으로써 얼마든지 겸하여 섬길 수 있다고 여기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의 의미가 이와 상통합니다. 영과 진리로 재물을 섬기는 사람은 마음의 목마름이 재물을 향합니다. 그리고 그 재물을 실제로 얻는 길을 진리로 여깁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에서는 양다리를 걸치듯 하나님을 섬길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자 한다면 삶의 현장에서 영과 진리로 재물을 예배하고 섬겼듯이 하나님을 그렇게 영과 진리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라면 로미오가 줄리엣과 스텔라를 한 장소에서 동시에 만나는 상황입니다.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줄리엣은 로미오를 가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과 동일하게 영과 진리로 재물을 섬기는 사람을 하나님은 가만두지 않으십니다. 그렇기에 선민들은 성전을 만들고 하나님을 가두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또한 예배당과 성당을 만들어서 하나님을 가두었습니다. 그리고는 마치 교도소에서 옥살이하는 사람을 면회하듯이 예배당 안에 갇혀계신 하나님을 면회하고자 합니다. 영치금을 내듯이 헌금을 냅니다. 이것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드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작 세상에 나와서는 영과 진리로 다른 신을 섬깁니다. 탁월하고 놀라운 기술입니다. 이 기술을 바탕으로 종교는 먹고 삽니다. 종교는 삶의 현장과 구분된 장소를 만들어놓고 입장료로 봉사, 충성, 헌신, 헌금, 시간 등을 받습니다.
이 여인은 드디어 하나님을 목말라하게 되었지만 그동안 배운 대로 하나님을 찾아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종교인들이 만들어낸 계명과 율법을 따라서 그리심산에 있는 성전에서 예배를 드렸지만 하나님을 만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선지자로 확신하게 되자 예배에 대해 묻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형식에 매여있는 의식적 예배에 참여하는 것이 예배가 아님을 가르쳐주십니다. 다시 24절을 보면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까지는 의식으로 예배를 드렸지만 이제는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인은 세상에서는 목마름 해결의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알았고 세상 밖에 계시는 하나님을 향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향하고자 하였으나 예배의식으로는 하나님을 만날 수는 없었습니다. 마치 돈을 벌고자 했지만 방법을 잘못 선택해서 돈을 못 번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성전에서 드려지는 예배의식으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은 해결될 수 없었습니다. 성전과 성전에서 드려지는 예배의식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제까지 사람들이 다른 신을 영과 진리로 섬겼던 것처럼 삶의 현장에서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섬길 때가 왔음을 가르쳐주십니다.
여인은 이제까지 남편에 대해서 영과 진리로 예배해왔습니다. 그러나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꾸고 여섯 번째 남편과 살면서 남편으로는 마음의 목마름이 해결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남편을 영과 진리로 예배했던 것처럼 이제는 동일한 삶의 현장에서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시는 길이 바로 “네게 말하는 내가 그 길이라”고 하십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린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전혀 낯설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삶의 현장에서 얼마든지 다른 신을 영과 진리로 예배하며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목마름이 향하는 대상이 영이 예배하는 대상입니다. 돈에 대해 목마르다면 돈을 예배하고 있는 것이고, 건강에 대해 목마르다면 건강을 예배하는 것이며, 승진에 대해 목마르다면 승진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목마름이 명품이나 자동차라면 명품이나 자동차를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다른 신으로 명품도 예배하고 건강도 예배하고 승진도 예배하고 합격도 예배했습니다. 그러나 소원하며 목말라하는 모든 것을 예배하는 중에 하나님만 예배하지 않았습니다. 삶의 현장에서는 목마름이 발생하는 갖가지 다른 신을 예배하면서 정작 예배당에 가서는 다른 신들을 얻기 위한 한 방편으로 하나님을 부르고 찾았을 뿐입니다. 하나님을 목말라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므로 하나님께 영으로 예배드린 자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예배는 의식과 형식으로 드려지는 동안에 하나님은 다른 신들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 취급되셨습니다.
진짜 예배는 삶의 현장에서 다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돈에 목말라 하는 동안에 이미 영의 예배는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돈을 벌기 위한 길을 찾게 되면 진리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심지어 예배당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드리는 형식적 예배조차도 다른 신을 섬기는 하나의 길로 삼아 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상황을 바꾸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제까지 영과 진리로 다른 신을 섬기며 살았던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드릴 장소는 삶의 현장입니다. 하나님과 다른 신을 겸하여 섬기는 기술은 삶에서 퇴치해야만 합니다. 다른 신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기는 중단되어야 할 악랄한 악행이기 때문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마음의 목마름인 영은 세상 밖에 계신 하나님을 향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수가성 여인과 같이 “어떻게 하나님을 얻을 수 있겠는가?”라는 진리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것을 해결해주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써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로 진리가 되어주십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메시아이시며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예배를 완성하는 자이십니다. 우리의 목마름이 세상 어느 것을 향해서도 나가지 않고, 세상 안에서 신격화되는 어떤 대상을 향하여도 가지 않고, 세상 밖에 계신 하나님을 향할 때 예수님은 하나님께 도달하는 길이 되어주십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할 때에 하나님께 도달할 수 있고 하나님을 가질 수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생수로 마음의 갈증은 해결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예수님처럼 완벽하게 하나님과 하나 될 수는 없을지라도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갈증은 해결되기 시작합니다. 돈이 없어서 답답한 사람이 언젠가는 돈을 벌겠다는 희망을 가짐으로써 당장의 답답함을 극복하고 넘어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께 적용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완벽한 일체를 이룰 수는 없더라도 하나님을 소망하고 열망할 수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길이 되어주셨기 때문에 언젠가는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완벽하게 가질 날이 반드시 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 보좌 우편까지 가신 길은 올바른 길이며 진리입니다. 그렇기에 십자가에 달리신 독생자 예수님을 붙잡으면 언젠가는 하나님과 완벽한 하나가 되는 때는 옵니다. 우리는 이 희망을 갖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 밖에 계신 하나님에 대한 희망은 목마름의 해결에 대한 소망과 열망입니다. 이 희망과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만으로도 세상에 대한 모든 목마름으로부터 해방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에서 발생하는 목마름과 그 목마름을 채울 수 있는 올바른 길로써 하나님을 예배하라는 말씀은 이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해방의 선언입니다. 하나님을 목말라하기만 해도 세상에 대한 목마름으로 인한 답답함과 장애와 방해는 다 뚫려 나갑니다.
이와 관련하여 베드로는 사도행전 3장 19절에서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새롭게 된다는 말을 직역하면 유쾌하고 상쾌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당장 예수님처럼 하나님과 완벽하게 하나가 될 수는 없을지라도 하늘을 향한 호흡이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돈을 벌기 원하는 사람이 돈 버는 날을 희망하지만 그것은 세상에 속한 일이기에 세상으로부터 해방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열망은 하늘을 호흡하는 것이기에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이 세상에서 다른 신을 영과 진리로 예배하고 섬기며 수고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진리의 길을 삶의 현장에서 예배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과 다른 신을 겸하여 섬기는 기술은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일이 이루어지는 예배당과 성전과 성당과 신전은 나의 삶에서 폐지해야 합니다. 삶의 현장에서 영과 진리가 발동되는 대상은 다른 신에서 하나님으로 바뀌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유일한 길로 채택할 때에 마음은 세상으로부터 해방됩니다. 이것이 영과 진리로 드리는 진정한 예배의 힘입니다. 이 예배의 힘을 통해서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운 자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삶의 현장에서 끊임없이 예배로 살아가는 것은 예배당과 성당과 성전과 신전이 없어도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아니 없어야만 합니다. 다른 신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는 기술이 이루어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영과 진리로 예배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영과 진리의 예배를 삶의 현장에서 드림으로써 다른 신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는 악행을 중단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에 대한 열망만으로도 이 세상으로부터 해방되는 통쾌함과 하늘을 향해 호흡하는 유쾌함을 느낄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