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원사*초행初行
절집 모롱이 은행나무 발가벗은 채
물동이 이고 겨울비를 긋고 있다
목천 이씨 우리 증조할머니, 손 시렸겠다
안동 김씨 우리 할머니, 손 시렸겠다
―― 밖에 누구요?
덕德자字 해海자字는 우리 할아버지 함자,
제가 용득龍得이 아들입니다
난리통에 화들짝 굴 밖으로 튕겨나간 멧토끼
강림도령 거풋대던 이 길이 눈에 밟혀
밤마다 하얗게 헛기침으로 밝혔답니다
저만치 비껴선 삼층석탑이 합장을 한다
고즈넉한 인연 켜켜이 받쳐 든
밀양 박씨 우리 어머니처럼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양화리에 있는 사찰. 사사로이는 나의 원적지임
먼
노간주나무 망두석이 우두머니 서있는 빨간장고개 날망에 젖은 무덤 하나 늘어
휙휙, 불여우 불모래 끼얹는
저녁노을
그날부터 레그혼이라는 하얀 중닭이 우리 집 닭장에 방사되었고, 분투골로 원앞*으로 자박자박 광주리 들쳐 이고 보릿고개 에워 넘는 엄니, 눅진한 장배기에는 보리쌀 두어 되와 두통약 뇌신과 뇌명이 달강달강 흔들리고 있었지 그러니 어쩌랴 마른 북어대가리 몇 쾌 눈 부릅뜨고 흠흠 마른기침으로 주름진 치맛단을 추썩거렸을 것임에 눈꼴시어터진 아부지, 느닷없는 종주먹에 광주리가 뒹굴고 뇌신도 뇌명도 머리 아픔도 죄다 패대기 처진 서쪽 하늘에서 내가 찾아낸 터키 국기, 아카시 울타리에 울며불며 매달린 눈썹달이 개밥바라기랑 어울린 먼 나라
땅거미는 늘 종종걸음으로 뒤꼍 노나무 밑동을 둘러오고 마당 끝에는 마중물 붓고 한참을 푸작거려야 왈칵 토악질하는 뽐뿌가 웅크리고 있는 외딴집
사랑채
*충청북도 청원군 강외면에 있는 지명
고수강회
고수高手, 고수鼓手, 고수孤愁, 고수固守하다, 미나리과에 딸린 한해살이풀 고수 ……
‘고수’라는 말을 만나면 나는 무조건
내 선친先親의 밥상을 떠올린다
고수강회─ 끼니때마다 절집 초록 빈대 냄새가
확
요즘으로 치면 초특급 허브다
호밀짚 멍석이나 새그물, 콩새 따위에도
아부지 얼굴이 어룽거리고
2:0 스코어도 유별나다
생전에 가장 가깝게 지낸 분이 이대영李大永씨였기에
‘레그혼’이란 하얀 닭, 고무줄 새총, 유리구슬, 알배기 참게, 소줏고리, 비과 종이, 꺽꺽한 수염, 나이롱 뽕……
모두 한통속
낚시 역시 그렇고 견지, 밀기울, 구더기
치리도 매한가지다
훗날
내 아이들은 어떤 말꼬리에
제 애비를 떠올릴 수 있을까?
망두석
그 해 눈 속 장고개 외딴 터에 든
밤손님
순경 출신 아부지가 지게꼬리로 오라 질러
오송 지서 쪽으로 끌어냈다지
철둑께에 이르러
오랏줄 느슨하게 풀어주며 담배 한 대 권하고는
괘리 풀고 봇도랑을 건넌 까닭
눈밭에 쭈구려 앉아 큼큼, 헛기침 해댄 까닭
짐짓 똥 한 파내기 퍼지르고 괴춤 추스르며 둑길로 올라서니 여전히
둥구나무에 걸린 열아흐레 달처럼 둥두렷한 눈망울
―― 에그, 이 위인아
담배 한 개비 다시 불붙여 물려주고
지게꼬리 풀어 논바닥 멀리 내던지고
한참을 되돌아와도 우두머니 서 있는
어여 가라고 손짓해도 마냥 서 있는
냅다 되쫓아가는 시늉에
휘익, 철둑 넘어 돛 달더라는
엄니
심봤다!
복령茯笭도 서너 덩이
팔뚝만 한 송이는 소쿠리로 땄다
엄니를 따라가서였다
엄니는 말없이 잰걸음으로
산을 넘곤 하시었다
나는 뒤처지지 않으려고
종종걸음 쳤지만
길을 잃었다
엄니―
울먹울먹 소리쳐 부르니
온 천지에 있는 어머니들이 모두 손사래 친다
깜박이는 뭇 별들 오리무중에
울 엄니는?
엄니
젖내가 방안 그득 찰람찰람
예나지나 허기진
꿈밖
입동立冬
공원묘지 석축 밑 양지쪽에
오보록한
제비꽃
엄니 살아생전
꼭꼭 쟁여둔 기다림 배어나와
입술
달싹달싹
먼 길 되가져온 쌀알
씻어 안치고
뜸 들이며
쌀밥
보리밥
겨울모롱이에 쪼그려 앉아
역마살 낀 떠돌이별을 마중하는
새들한 꽃잎마다
새들새들 유도등 밝힌
활주로
아우
아우는 수원시 권선동 수산물시장에서 꽃게를 다듬어 팔고
나는 물끄러미 포항에 산다
장형이랍시고 직장 핑계로 나돌고
위로 애잔한 이빨 둘씩이나 빠져
부모를 모신 가난밖에는 죄가 없어 마흔이 넘도록 총각인
아우
아우나 나나 타관은 매한가지인데
대목에 손이 바빠 꼭꼭 막힌 귀성길
설밑에 안부 전하려니
부재중임을 알리는 핸드폰의 발신음이 반갑다
그런데 새벽같이 나타난 건 순전히
중국산 납꽃게 덕이란다
고맙게 차례를 모시며 기왕이면 꽃게야
색시 하나 물어다 주렴
참한
한식寒食
소주 한 병에 북어포 챙기고
삼색실과에 곁들인 노란 한라봉
아부지, 이거 아부지 둘째 손주녀석이 보낸 한라봉이라는 겁니다 저희 어릴 적 사 오셨던 나쓰미깡* 비스름한 거지요
나쓰미깡 발라먹고
나쓰미깡 씨 뜰팡 밑에 묻고
나쓰미깡 열리기를 다닥다닥 고대하던 아우
지지난달에 아부지 찾아 길 나섰습니다
아부지 가신 뒤 쉰이 다되도록
장가는커녕 고생만 지지리 했는데
오거들랑 혼꾸멍내서 돌려보내세요,
예?
한라봉 까다보니 뜨막한
한라봉 씨가 한 톨
아우야, 요거 얼른
옛집 뜰팡 밑에 함께 숨구자
*夏蜜柑, ‘여름귤’을 일컫는 일본말
고추장 담그는 날
아내가
노를 젓는다
진종일
가랑비처럼 저었으니
그
거룻배
어디쯤 가고 있을까
젓는다는 것은
서로에게 서로를 적신다는 것
자기야, 우리는
얼마나 촘촘하게 젖은
장맛일까
입 대
어제같이 현관을 나서는 너의 등을 두드리며 동충하초冬蟲夏草 생각을 한다 아들아, 이것은 넉자로 된 고사성어가 아니다 그렇다고 외딴 섬나라의 대단한 짐승 이름도 못된다 그저 우리 밥상에 오르는 건건이려니, 고추장이나 된장보다는 조금 색다른 것이라면 어떻겠니? 사내로서 어깨를 다지기 위하여 벌거벗고 건너야 하는 삼 년, 너를 위하여 잘 준비된 연회는 아닐지라도 덤덤하게 조석으로 대하는 밥상머리라 치자 빡빡 터럭을 밀어 서먹서먹한 너를 식전부터 살차게 낯선 방축 너머로 등 떼미는 것은 내가 주정뱅이여서가 아니다 아니, 주정뱅이라서 그렇다 아무튼 밥 잘 먹고 몸조심하거라
애기앉은부채
―― 차근우
애기앉은부채라는 꽃이 있어요
이름을 대면
누구라도
쉽사리 몽타주를 그려낼 수 있는
아니, 도통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애기앉은부채가 흘린 눈물도 있지요
이름으로 미루어
누구라도
훤히 속내를 들여다볼 수 있는
아니, 전혀 오리무중인
행여
숲 속에서건 꿈길에서건
애기앉은부채를 만나거든
옆에 바짝 다가앉아 다독거려주세요
너였구나
밤마다 산모롱이에서 포롱포롱 떠오르는 별
네 눈물 곱게 흩뿌려져 은하가 되었구나
남농 기념관에서
월요일은 정기 휴관
까맣게 모르고
멀리서 왔다니까 문을 열어 준다
남농과 그 일가의
유작을 만난다
아득한 명계의 문을 기웃거리며
멀리서 왔다고 하면
길호 이나시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진작부터 별이 된 오쟁이, 올 여름 은하를 건넌 청주 이모……
그들을
수소문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