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충주 청룡사지로 향했다
허한, 허적의 묘를 찾기 위해서이다
네비를 찍었는데 전혀 나오지 않아 인터넷을 뒤져 청룡사지 근처에 있다 해서 일단 무작정 청룡사지로 향했다
역시 남인의 정승으로 역적으로 몰렸으니 그 자취를 찾기가 이렇게 힘들다
가는 도중 숙종 때 허적의 건의로 신원된 상락부원군 동원 김귀영의 신도비가 있어 잠깐 들렀다
상락부원군 김귀영의 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현경(顯卿), 호는 동원(東園). 김숙춘(金叔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목사 김사원(金士元)이고, 아버지는 김응무(金應武)이며, 어머니는 성주이씨(星州李氏)로 이수관(李守寬)의 딸이다.
1540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547년(명종 2)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 2년 뒤 예문관대교(藝文館待敎)로서 춘추관기사관을 겸해 『중종실록(中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곧 홍문관으로 옮겨 정자 · 저작 등을 역임하고 홍문관박사가 되었다.
이어 부수찬 · 정언 · 수찬 등을 거쳐 1555년 김홍도(金弘度) · 유순선(柳順善) 등과 사가독서하였다. 그 해 을묘왜변이 일어나자 이조좌랑으로 도순찰사 이준경(李浚慶)의 종사관이 되어 광주(光州)에 파견되었다가 돌아와 이조정랑이 되었다.
선조 즉위 후 도승지 · 예조판서를 역임하고, 병조판서로서 지춘추관사를 겸하였다. 1581년 우의정에 올랐고, 2년 뒤 좌의정이 되었다가 곧 물러나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다. 정여립의 모반사건 처리에 공이 있어 1589년에 평난공신(平難功臣) 2등에 책록되고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해진 뒤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나, 조헌(趙憲)의 탄핵으로 사직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천도 논의가 있자, 이에 반대하면서 서울을 지켜 명나라의 원조를 기다리자고 주장하였다. 결국 천도가 결정되자 윤탁연(尹卓然)과 함께 임해군(臨海君)을 모시고 함경도로 피난했다가, 회령에서 국경인(鞠景仁)의 반란으로 임해군 · 순화군(順和君)과 함께 왜장 가토[加藤淸正]의 포로가 되었다.
이에 임해군을 보호하지 못한 책임으로 관직을 삭탈당했다. 이어 다시 가토의 강요에 의해 강화를 요구하는 글을 받기 위해 풀려나 행재소(行在所)에 갔다가, 사헌부 · 사간원의 탄핵으로 추국(推鞫)당해 회천으로 유배가던 중 중도에서 죽었다.
신도비 위로 가면 묘역이 있을 법한데 처가 기다려 묘지로 오르진 못했다
청룡사지 거의 못미쳐 밭 모퉁이에 허한 허적의 묘가 있다는 이정표가 나무판자로 조그맣게 보인다 그곳엔 주차할 곳이 없어 일단 먼저 주차장 등이 잘 갖춰 있는 청룡사지로 들어갔다
청룡사지만 있는줄 알았더니 청룡사 이정표가 있었다 그래서 그쪽으로 먼저 올랐다
어렵게 오르막길을 힘들게 올랐는데 왠걸 고풍스런 청룡사는 없고 조그만 민간암자 요사채 하나만 눈에 띈다
어쩐지 이 암자는 일제시대 정도에 만들어진 것이란다
다시 내려와 청룡사지로 향했다
청룡사지는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 청계산에 있던 조선초기 절터로 대한불교천태종에 속한다. 창건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다음과 같은 창건설화가 전한다.
어느 봄날 이 근처를 도승이 지날 때 갑자기 소나기를 만나 비를 피했는데, 이때 하늘에서 2마리 용이 여의주를 다투다가 사라지자 날이 다시 개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되어 지세를 살펴보니 비룡상천형의 명당이므로 이 절을 창건했다는 것이다.
1392년(태조 1) 보각국사가 이곳에서 입적하자 그의 죽음을 애도한 태조가 가람을 대규모로 중창하도록 했다. 그뒤 화재로 소실되자 1665년(현종 6) 청룡사의 암자 자리로 옮겨 건물을 중수했으므로 이곳이 청룡사가 되었다.
1921년 혜종이 옛 당우들을 중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현존 당우로는 대웅전과 요사채만 있다. 옛 절터에는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국보 제197호)·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 앞 사자 석등(보물 제656호)·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보물 제658호)가 있다. 그밖에 적운당사리탑과 청룡사위전비(1692) 등이 있다.
보각국사탑은 국보(1979.05.22 지정)으로 높이 263cm이다. 이 승탑은 1968년 복원한 것으로 8각원당형을 따르고 있으며 앞에는 사자석등이, 뒤에는 탑비가 있다. 8각의 지대석 위에 놓여 있는 하대석의 윗면에는 16엽의 복련이 돌려져 있는데, 복련 안에는 삼산형의 화판(花瓣)이 장식되어 있다.
중대석도 8각이지만 배부분이 부풀어 있으며 각 면에는 안상 안에 사자와 운룡이 교대로 조각되어 있다. 상대석은 그 형태나 조각장식이 하대석과 상대적으로 되어 있다. 상대석의 윗면에는 8각으로 홈을 파서 탑신을 끼워넣도록 한 점이 주목된다. 탑신의 각 모서리에는 원주에 반룡이 양각되어 있고, 그 사이로 사각형의 구획 안에 무기를 든 신장상이 1구씩 양각되어 있다. 원주 위에는 목조 가구의 각 부분이 모각되어 있어 주목된다
옥개석과 탑신의 연결부분은 보머리형으로 되어 있고, 옥개석의 밑면에는 추녀와 사래가 양각되어 있다. 낙수면은 경사가 급한 편이며 기왓골 합각마루에는 용두가 장식되어 있어 매우 특이하다. 옥개석의 윗면에는 8엽의 복련이 돌려진 보주 굄이 있고 그 위에 앙화·복발·화염보주(火焰寶珠)가 얹혀 있다. 이 승탑은 조선시대의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이나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과 양식상 유사하며, 탑비에 의해 1394년(태조 3)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예이다.
탑 뒤로 보각국사 탑비가 있는데 보물 제658호로 높이 250cm, 너비 115.5cm이다. 직사각형의 비좌 윗면에는 2단 굄이 있으며 중앙에 있는 직사각형의 홈 안에 비신이 꽂혀 있다. 개석은 없고 비신의 상단 좌우 모서리가 접혀진 평두규상이며, 아랫부분과 여러 부분이 마멸되어 전문을 판독할 수 없다.
비문의 앞면에 새겨진 명문에 의해 보각국사의 이름은 혼수이며 속성은 조씨이고, 자는 무작, 호는 환암이고 풍양현 사람으로, 1383년(우왕 9)에 국사가 되었고, 73세에 입적하자 왕명으로 이 탑을 세웠다고 한다. 뒷면에는 200여 명의 문도 이름이 새겨져 있으며 끝부분에 있는 "甲戌三月日門人禪師希進立石鐫字門人禪室□□"에 의해 이 탑비가 1394년에 세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외 국사탑 앞에 사자석등이 있다
보물 제656호로 높이 196cm이다. 고려시대에 유행했던 사각형 석등이 변형된 것으로 상륜부는 결실되어 있다. 지대석 위에 놓여 있는 하대석이 사자가 엎드린 형태를 하고 있어 특이하다. 사자 등에는 초화무늬[草花紋]가 조각되어 있는 안장 모양이 좌우 양쪽으로 길게 양각되어 있고, 정상에는 직사각형의 굄이 각출되어 중대석을 받치고 있다.
이 사자석등은 상대석에 조각된 연꽃과 화사석의 화창이 2개인 것 등이 조선시대의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앞 쌍사자 석등과 유사하며, 탑비와 함께 조선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