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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柳公)의 휘는 석(碩), 자는 덕보(德甫), 호는 개산(皆山)이다. 만력(萬曆) 을미년(1595, 선조28)에 태어나서 을미년(1655, 효종6)에 세상을 떠났다. 그 선대의 계보는 진양(晉陽 진주(晋州))에서 나왔다. 조부 휘 격(格)은 정언을 지냈다. 부친 휘 시회(時會)는 사옹원 정을 지냈다. 모친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임진왜란 때 순국한 상주 판관(尙州判官) 길(吉)의 딸이다.
공은 사람됨이 강직하고 방정하였으니 이는 타고난 천성이었다. 확고하고 고상한 절조가 있었으며, 문장도 그의 사람됨을 닮았는데, 남곽(南郭) 박동열(朴東說) 같은 선배는 공의 변려문(騈儷文)이 소장공(蘇長公 소식(蘇軾))의 경지에 이를 만하다고 칭찬하였다. 또 정사에 재능이 있어서 인조대왕(仁祖大王)을 거의 30년 동안 섬겼고 효종대왕(孝宗大王)을 7년 동안 섬겼는데 두 임금에게 입은 지우(知遇)와 은혜가 또한 적지 않았다.
을축년(1625, 인조3)에 왕자 이공(李珙)이 법망에 걸렸다. 공이 말하기를,
“포속(布粟)의 노래를 듣고 한 문제(漢文帝)는 자책하였는데 하물며 이보다 심한 경우는 어떻겠는가.”
하고, 마침내 상소를 올려 극언(極言)하니 사람들의 의론이 분분하였다. 오히려 성상은 “언론이 정직하다.”라는 비답을 내리셨으니, 사람들이 모두 “신하를 알아보는 데는 임금만한 사람이 없다.”라고 하였다.
정축년(1637)에 주상의 치욕이 극에 달하였다. 판서 김상헌(金尙憲)은 평소 명예와 절조로 자부했는데 끝내 임금을 뒷전으로 하고 말았다. 공이 장령이 되자 또 기탄없이 논핵하였다. 공이 일생 동안 예(羿)의 구중(彀中)에 들었다 벗어났다 한 것은 이 두 가지 일 때문이라고 한다.
부인 경주 이씨(慶州李氏)는 승지 정혐(廷馦)의 딸인데 공과 덕이 어울렸고, 1남 1녀를 낳았다. 아들 명천(命千)은 장가들자마자 요절하였다. 딸은 군수 홍주후(洪柱後)에게 출가했는데, 아들 만최(萬最)는 진사이고, 교리 안후열(安後說)은 사위이다. 공은 종제(從弟) 응교 영(潁)의 셋째 아들 명천(命天)을 후사로 삼았는데 명천은 19세에 진사가 되었다.
공이 세상을 떠나자 안산(安山) 부곡리(釜谷里) 간좌(艮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7년 뒤에 진사가 모친 이 부인(李夫人)의 명으로 공의 행적과 치적, 관력(官歷)을 가장(家狀)으로 엮어 나에게 부탁하기를,
“오직 집사께서 우리 남편을 잘 아시니 감히 묘도문(墓道文)을 청합니다.”
하였다. 내 의리상 사양할 수 없으므로 마침내 서문을 쓰고 명(銘)을 짓는다. 명은 다음과 같다.
유씨는 진주에서 나왔는데 / 柳出于晉
휘 정이란 분이 시조라네 / 始自諱挺
추밀원부사 홍림은 / 洪林樞密
둘도 없이 현달했네 / 顯人莫竝
훌륭하다 양화공이여 / 懿哉良和
고려에서 크게 떨쳤도다 / 大鳴麗國
후손들이 끊임없이 이어져서 / 于後蟬聯
다섯 대 뒤에 종식이 있었지 / 五傳宗植
영문은 음덕을 쌓아 / 榮門隱德
후손을 이루어 주었네 / 歸成後人
간관으로 직언했으니 / 薇垣言颺
또한 견줄 이 적었네 / 亦旣尠倫
가문을 계승한 장공은 / 承家長公
성균관에서 시작하여 / 發軔上庠
여러 차례 지방관으로 나갔으니 / 累綰銅章
최고의 치적을 그 누가 견주랴 / 治最誰當
우뚝 당상관에 오르고 / 危得衣緋
사옹원 정이 되었네 / 長周官饔
충렬의 가문에 장가들어 / 室於烈門
가문을 빛낼 공을 낳았네 / 生公亢宗
어려서부터 빼어났으며 / 童而秀發
풍골은 청수했다네 / 風骨戌削
쉽게 과거 급제하니 / 摘髭科第
나이 겨우 서른이요 / 齒才迨立
쉽게 승문원에 들어가니 / 平步槐署
사람들이 모두 다시 보았네 / 人皆改觀
을축년에 올린 상소는 / 乙丑封章
일편단심에서 나왔어라 / 寸心如丹
군주를 바로잡는 것이 무슨 잘못이랴 / 畜君何尤
인성군을 귀양 보낸 법이 관대했네 / 蔡蔡法寬
성상은 훌륭하다 칭찬했지만 / 聖敎褒嘉
사람들은 오히려 떠들썩했네 / 衆口猶讙
벼슬길은 비록 막혔으나 / 進途雖遏
강직하다는 명성이 자자했네 / 直聲則噪
정묘년이 되자 / 維歲丁卯
오랑캐가 서쪽에서 침략했지 / 有寇西虣
공은 당시 한직에 있었으나 / 公時置散
분조로 달려가 문안하였네 / 奔問分朝
난이 끝나자 서용되었는데 / 難已敍復
대궐과 떨어진 걸 어찌하랴 / 奈隔赤霄
공이 누구에 비해 못하다고 / 誰之不如
천리마를 깊은 골짜기에 묶어놓았나 / 馽驥幽谷
성균관을 거치고 어사를 지냈지만 / 歷泮乘驄
응수관은 후배들에게 밀렸다오 / 應宿薪積
개성 경력으로 있을 때는 / 經歷松京
장관이 멋대로 모함하여 / 官長恣齕
죄수가 되었다가 신원되었으니 / 衣赭旋雪
어찌 밝은 해가 없으리오 / 豈無皓日
정축년에 탈상하고 / 制除丁丑
성균관의 직임에 거듭 임명되었네 / 師儒洊席
사람들이 늦었다고 여겼으나 / 人遲其至
사헌부가 공의 적임이었네 / 柏府公職
혀가 부드럽지 않았고 / 有舌不柔
질기다고 뱉지 않았네 / 有剛不吐
윗사람에게 오만한 것을 / 驕蹇慢上
공은 몹시 미워하였지 / 公所深惡
탄핵문을 올려 간언했으니 / 誨也袖彈
아, 지금은 옛날이 아니라네 / 於今非古
어전에서 성상은 감동하여 / 細氈動色
봉명조양이라는 비답을 내렸네 / 批以鳳鳴
작당한 자들이 비록 많았으나 / 頻頻雖盛
공의 명성 그 누가 다투랴 / 公名孰爭
공의 재주와 지혜는 / 顧公才諝
세상이 차마 버리지 못했네 / 世難忍棄
조정에 들어가서는 교서를 지었고 / 入則制敎
외직에 나가서는 반드시 표창을 받았네 / 出必褒壐
영광전처럼 우뚝한 공적이 / 靈光之勣
더욱 특이하게 드러났네 / 彰彰尤異
흉년에 곡식을 풀어서 / 歲荒乃粒
구제한 백성 모두 몇이었나 / 凡幾赤子
호조에서 진언하여 / 大農進言
이 때문에 품계가 올랐다네 / 增秩由此
예조와 승정원을 거치고 / 禮樂龍喉
병조와 공조에서 근무했네 / 騎省水曹
경의 반열은 아니었지만 / 雖居亞旅
지조를 굽히지 않았네 / 不貶所操
강원도 관찰사로 있을 때는 / 觀風嶺東
갑자기 국상을 당했는데 / 奄遭通喪
용의 수염을 붙잡지 못하니 / 龍胡莫攀
간인이 틈을 노려 음해했지 / 蜮夭伺傍
은닉한 것을 적발하니 / 僕區摘伏
국원이 격분하였네 / 國原奮髥
금성에서 선정을 베푸니 / 錦城露冕
모든 세금이 균등하였네 / 稅均洪纖
침묵 지키는 걸 어찌 탓하랴 / 留噤何咎
고향으로 돌아와 두문불출했네 / 歸來閉門
한가로이 지내며 시를 읊는데 / 閑居纔賦
기나긴 밤은 밝아오지 않네 / 長夜無暾
아, 공이 수립한 것은 / 繄公樹立
집안에서의 행실이 근본이 되었네 / 內行爲根
성찬으로 양친을 극진히 봉양했고 / 三牲養至
종형제 조카들은 공에게 귀의했네 / 群從家歸
오직 성품이 강직하여 / 唯其棘棘
아부하는 것을 혐오했네 / 唾棄脂韋
온 세상이 백안시했는데 / 擧世白眼
포저 상공만은 공을 알아주었네 / 知音渚相
추천하는 게 무엇이 어려우랴 / 推轂何有
그저 빈말로만 장려했네 / 空言吹奬
이는 운명이 아니겠는가 / 茲非命歟
어디 탓할 데가 없네 / 歸咎無處
불후한 것이 남아있는데 / 不朽者存
무덤이 봉긋하니 무슨 유감이 있으랴 / 睪如奚憾
내가 비명(碑銘)을 쓰노니 / 我銘玄石
과장된 말이 아니라오 / 辭非瀏濫
[주-D001] 강원 …… 신도비명 : 이 글은 유석(柳碩, 1595~1655)에 대한 신도비명이다. 유석의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덕보(德甫), 호는 개산(皆山)이다. 영문(榮門)의 증손이다.[주-D002] 왕자 이공(李珙) : 1588~1628. 선조의 일곱째아들이며 정빈(靜嬪) 민씨(閔氏)의 소생이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왕은 숙부의 예로써 대우하였으나,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고 그때 잡혀 들어온 자들이 모두 인성군에게 혐의를 뒤집어 씌웠으므로 왕도 할 수 없이 강원도 간성(杆城)으로 귀양 보내었다. 《仁祖實錄 3年 2月 25日》[주-D003] 포속(布粟)의 …… 자책하였는데 : 한(漢)나라 문제(文帝)가 역모를 꾀한 아우 회남왕(淮南王) 유장(劉長)을 촉(蜀)에 귀양 보내 죽게 하였다. 백성이 천하를 소유하고도 아우 하나를 용납하지 못한 문제를 비난하며 “한 자의 베도 바느질하여 함께 옷을 해 입을 수 있고, 한 말의 곡식도 절구질하여 함께 밥을 지어 먹을 수 있건만, 형제 두 사람이 서로 용납하지 못하는구나.〔一尺布尙可縫, 一斗粟尙可春, 兄弟二人不能相容.〕”라고 노래를 불렀다. 《史記 卷118 淮南衡山列傳》[주-D004] 상소 : 《인조실록》 3년 10월 18일 기사에 실려 있다.[주-D005] 정축년에 …… 논핵하였다 : 《인조실록》 16년 7월 29일 기사에 자세한 내용이 실려 있다.[주-D006] 예(羿)의 …… 벗어났다 : 적의 표적이 되었다는 뜻인데, 여기서는 유석이 상대 당의 배척과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는 말이다. 후예는 활을 잘 쏘므로 사정거리 안에 들어가면 반드시 맞혔다. 《莊子 德充符》[주-D007] 양화공(良和公) : 양화는 유욱(柳栯)의 시호이다. 《星湖集 卷58 晉安尉柳公神道碑銘》[주-D008] 간관으로 직언했으니 : 유영문(柳榮門)의 아들인 사간원 정언 유격(柳格)이 간언한 일을 가리킨다.[주-D009] 장공(長公) : 유격의 장남 유시회(柳時會)를 가리킨다. 《西坰集 卷7 伯氏贈領議政碑銘》[주-D010] 인성군(仁城君)을 …… 관대했네 : 1625년(인조3)에 유석이 상소를 올려 역모로 몰린 인성군 이공을 귀양 보내는데 그치도록 한 일을 가리킨다.[주-D011] 응수관(應宿官)은 후배들에게 밀렸다오 : 먼저 출사한 유석이 낭관(郞官) 벼슬에서 후배들에게 밀렸다는 말이다. 응수관은 낭관을 가리킨다. 《후한서(後漢書)》에, 관도공주(館陶公主)가 아들을 위하여 낭관의 자리를 요구하자, 명제가 윤허하지 않고 신하들에게, “낭관은 위로는 하늘의 별에 응하고 나가서는 백 리 고을의 장관이 된다. 적임자가 아니면 백성들이 화를 입게 된다. 이 때문에 그것을 어렵게 여기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後漢書 卷2 顯宗孝明帝紀》[주-D012] 질기다고 뱉지 않았네 : 약한 이에게 관대하고 강한 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시경》 〈증민(烝民)〉의 “사람들이 말하되 부드러우면 삼키고 강하면 뱉는다 하나니, 중산보는 부드러워도 삼키지 아니하며 강해도 뱉지 아니하여 홀아비와 과부를 업신여기지 아니하며 강포한 자를 두려워하지 않도다.〔人亦有言, 柔則茹之, 剛則吐之. 維仲山甫, 柔亦不茹, 剛亦不吐, 不侮矜寡, 不畏彊禦.〕”라는 구절을 인용한 말이다.[주-D013] 아 …… 아니라네 : 지금은 옛날이 아닌데 고인(古人)처럼 직언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다.[주-D014] 어전에서 …… 내렸네 : 1638년(인조16) 8월 19일에 숭문당(崇文堂)에서 주강(晝講)이 있었다. 김상헌을 논죄한 유석의 말을 인조가 봉명조양(鳳鳴朝陽)이라고 하였다. 《承政院日記 仁祖 16年 8月 19日》 《仁祖實錄 16年 8月 19日》 봉명조양은 덕이 출중하고 정직하여 과감하게 직언하는 사람을 비유하는 말로 《시경》 〈권아(卷阿)〉에 나온다.[주-D015] 영광전(靈光殿) : 유현(儒賢)이나 석학(碩學) 등의 훌륭한 인물이 홀로 남아 있음을 비유하는 말인데, 여기서는 유석의 뛰어난 공적을 빗대어 말한 것이다. 영광(靈光)은 영광전으로 한 경제(漢景帝)의 아들 노 공왕(魯恭王)이 세운 궁전이다. 한나라가 쇠약해지자 다른 궁전은 모두 허물어졌으나 영광전은 홀로 우뚝하게 남았다. 《文選 卷11 魯靈光殿賦》[주-D016] 용의 …… 못하니 : 황제를 따르지 못하거나 임금이 승하했는데도 애도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史記 卷28 封禪書》[주-D017] 간인이 …… 음해했지 : 효종 즉위년(1649) 8월 23일에, 헌납 홍처량(洪處亮)이 유석을 탄핵하며 국상 중에 조금도 거리낌 없이 고기를 공석에 내놓았으니 몹시 놀라운 일이라고 하였다. 《承政院日記 孝宗 卽位年 8月 23日》[주-D018] 금성(錦城)에서 선정을 베푸니 : 금성은 나주(羅州)의 옛 이름이다. 유석은 1654년 나주 목사에 임명되었다. 《承政院日記 孝宗5年 1月 12日》[주-D019] 포저(浦渚) 상공(相公) : 조익(趙翼, 1579~1655)으로, 본관은 풍양(豐壤), 자는 비경(飛卿), 호는 포저(浦渚)ㆍ존재(存齋)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