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군 진(洪君璡)이 그 선친의 행록을 엮어서 상복을 입은 채 나에게 와서 말하기를,
“선친께 의행(懿行)과 은덕(隱德)이 있으나 세상에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만약 인몰하여 전함이 없게 되면 무엇으로써 후손에게 가르치겠습니까. 원컨대, 한 말씀 얻어서 불후하게 되기를 도모하려 합니다.”
하였다. 내가 홍군에게는 서로 나이를 잊고 사귀는 교분이 있는데다 공의 일을 익히 들어온 터라, 감히 연로하고 문장에 능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사양하지 못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공의 휘는 복전(福全), 자는 두 글자 원문 빠짐, 포서(苞西)는 그의 호다. 관향은 남양(南陽)으로 증 우의정 문장공(文莊公) 영원군(寧原君) 만전(晩全) 선생 휘 가신(可臣)의 6대손이고, 증 영의정 행 이조 판서 남파(南坡) 선생 휘 우원(宇遠)의 현손이다. 증조는 직장 휘 면(冕)이고, 조부의 휘는 일지(日知)로 장사랑이고, 부친의 휘는 건(健)이다. 모친은 배천조씨(白川趙氏)로 북평사 상주(相周)의 따님이다.
공은 숙종 병술년(1706) 12월 25일에 태어나고 81년 후인 병오년(1786, 정조 10) 5월 17일에 돌아가시고, 윤7월 무인에 본군 보산(寶山) 용석문(龍石門) 을좌(乙坐) 언덕에 안장하였다.
공은 어려서 지극한 성품이 있어 놀 때에 부모 곁을 떠나지 않았고, 자라서는 좌우로 부지런히 받들어 한결같이 예법을 따랐다. 경오년(1750, 영조 26)에 부친상을 당하여 상례대로 남보다 더욱 근엄하게 행하였으며 모친을 봉양함에 두루 극진하였다. 갑술년(1754, 영조 30)에 모친께서 병이 위독해지자 손가락에 피를 내어 마시게 하고 하늘에 빌었는데, 상을 당하여는 슬픔으로 몸을 해칠 정도로 예제에 지나치게 했다. 새벽이면 사당에 참배하기를 늙어서까지 폐하지 않았다.
제사에 더욱 정성을 다하여 재계를 근엄하게 하고 제수를 정결하게 갖추어 그대로 앉아서 새벽을 기다렸다. 혹 마을이 불안하더라도 일찍이 시속을 따라 제사를 폐한 적이 없었다. 어버이 묘소의 잔디는 반드시 손수 베어 정돈하고, 선대의 분묘에도 1년에 2회로 정하여 손질하였다. 셋째 숙부가 만년에 빈궁했는데 섬기기를 부친과 같이 하여 시식(時食)과 절복(節服)을 갖추어 받들기에 마음을 다하여 20년을 하루같이 하였다. 두 사람의 자매가 있었는데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틈이 없었다. 누님이 돌아가시고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겨우 세 살이었다. 공은 생질을 안고 돌아와 젖을 먹여 길러서 성립시키고, 또 여동생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어 편하게 살도록 하였다. 당질 가운데 일찍 실명을 하고 의지할 곳이 없는 이가 있었는데 공이 데리고 있으면서 가르치고 길렀고, 자라서는 살림을 내주고 혼인을 시켜 그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가정에 지내면서 자녀를 가르침에는 의로운 방도가 아님이 없었다. 종족과는 돈목하게 지내고 친지와는 정답게 만나며 각기 친소(親疏)를 따라 그 은의(恩義)를 다하였다.
곤궁하고 다급한 사람을 도와 줄 때는 마치 미치지 못할까 두려운 듯이 했는데, 이웃에 자주 끼니를 거르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매 끼니마다 반드시 반을 덜어내고 다른 밥을 더하여 보내며 말하기를, “이웃에 굶는 이가 있는데 차마 혼자 배불리 먹을 수 있겠는가.” 하였으니, 그 어진 마음이 이와 같았다. 내가 《주례》를 읽다보니, 대사도(大司徒)가 고을에서 삼물(三物)로써 만민을 가르치는데 그 가운데 둘째가 육행(六行) 즉 ‘효(孝)ㆍ우(友)ㆍ목(睦)ㆍ인(婣)ㆍ임(任)ㆍ휼(恤)’이라고 하였다. 공과 같은 이는 육행을 구비한 군자라고 할 수 있겠다.
공은 그 효사(孝思)를 미루어 선대에까지 미쳤다. 과천에 있는 8대조의 묘소가 세월이 오래되어 향화(香火)가 끊어졌는데 제전(祭田)을 마련하여 10월 정일(丁日)에 제사를 드리도록 하였다. 남파공의 제사를 받드는 대수가 다하여 조매(祧埋)할 때가 되었는데 큰집이 몹시 가난하여, 이에 공이 사당을 세우고 제전 마련하는 일을 의논하고 또 종계(宗契)를 맺어 향사를 빠뜨리지 않았다. 경자년(1780, 정조 4)에 사위(四位)의 석물을 세우고, 간행하지 못하고 있던 만전과 남파의 유집을 공이 창도하여 활자를 사다가 수백 질을 인쇄하였다. 이러한 일들이 어찌 사력(私力)으로 할 수 있는 바이겠는가.
공은 중후하고 기국과 도량이 있어 망녕되게 말하거나 웃지 않고 빠른 말과 급한 안색이 없었으며 남의 과실을 말하지 않고 남과 더불어 계교(計校)하지 않았다. 성품이 검소하여 음식에 반찬을 겸하지 않고 의복은 몸을 가리는 것으로 족하여 베옷을 입고 짚신을 신고서 혹 수레나 말을 타지 않고 걸어서 다녔다. 아랫사람을 관대하고 간이하게 부려서 노복들이 혹 속이는 일이 있으면 대충 회초리를 치고 훔친 물건을 다시 돌려주며 말하기를, “네가 쓸 곳이 있어서 훔쳤으니 이후로는 다시 훔치지 말라.” 하고, 집안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러한 습속은 노복들에게 으레 있는 일이니 너무 지나치게 방비하면 그들이 어디에 수족을 두겠는가.”라고 하였다. 사람을 대하고 일을 접할 때는 성의로써 서로 미덥게 했는데, 석물을 세우는 일과 유집을 인쇄하는 즈음에 공역이 번잡했으나 성색(聲色)을 움직이지 않아도 사람들이 모두 기꺼이 나아가니 보는 이들이 탄복하였다.
소시에 과거 공부를 익혀 과문의 각체를 구비하여 일찍이 향시에는 합격했으나 대과에는 떨어졌고, 부친상을 당한 뒤에는 내처 과거도 폐하였다. 글씨를 쓸 때는 해정(楷正)하게 하여 급하더라도 어지럽게 흘려쓰는 법이 없었다. 만년에 종제 성전(性全)에게 시를 지어주었는데,
노년에 마땅히 두려운 마음을 두니 / 耄歲當存兢惕心
내 나이 올해 일흔 넷일세 / 吾方七十四年今
밤낮 조상을 더럽히지 않길 간절히 기약했으니 / 夙宵耿耿期無忝
두루 인사와 천리를 살펴봄에 경외가 깊구나 / 俯仰人天敬畏深
하였으니, 이 시를 보면 공의 마음을 알 수가 있다.
아, 공의 행의(行義)와 간국(幹局)은 누구 못지 않았으나 마침내 초야에서 곤궁하게 마쳐 한 고을의 선사(善士)에 그치고 말았으니, 어찌 애석하지 않은가. 공은 평소에 강녕하고 질병이 없어 작은 글씨를 보고 딱딱한 음식을 씹음이 소장과 진배없었고, 임인년(1782, 정조 6)에는 회혼연(回婚宴)을 행하였는데, 사람들이 오복(五福)을 온전히 갖추었다고 칭송하였다.
부인은 한양조씨(漢陽趙氏)로 휘 모(某)의 따님이다. 아들 진(璡) 하나를 낳았는데 문행(文行)이 있었다. 진의 두 아들은 시준(始濬)과 시연(始淵)이다. 다음에 명을 붙인다.
《주례》의 육행을 / 周禮六行
공이 실로 겸하고 / 公實兼之
기자 구주의 오복에 / 箕疇五福
공이 거의 가까웠네 / 公庶幾而
마땅히 드날릴 것인데 막히니 / 宜揚而窒
덧없는 영화가 어찌 귀하랴 / 浮榮何貴
훌륭한 자제가 능히 본받으니 / 賢胤克肖
가문의 명성이 실추하지 않았네 / 家聲不墜
선을 쌓아 경사가 남으니 / 積善餘慶
《주역》의 가르침을 살피겠네 / 易訓可徵
명을 지어 꾸며서 / 銘以爲文
삼가 후손에게 고하노라 / 敬告雲仍
[주-D001] 삼물(三物) : 《주례(周禮)》에 대사도(大司徒)가 만민(萬民)을 가르치는 세 가지 조목, 즉 육덕(六德), 육행(六行), 육예(六藝)를 말함. 이 가운데 본문에서 이른바 ‘육행’의 효(孝)는 부모를 잘 섬기는 것, 우(友)는 형제간에 우애 있는 것, 목(睦)은 친족과 친한 것, 인(婣)은 외척과 친한 것, 임(任)은 붕우에게 신의가 있는 것, 휼(恤)은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임. 《순암집》 원문의 임(妊)은 임(任)의 오자로 생각됨.[주-D002] 오복(五福) : 기자(箕子)의 홍범구주(洪範九疇) 가운데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의 다섯 조목을 말함. 《書經 洪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