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트런드 러셀의 100년 전 연설을 읽고…
100년 전 자유사상가 몽큐어 콘웨이를 기념하는 연설에서 버트런드 러셀은 자기 시대의 사상의 자유에 대하여 차분하게 짚어 나갔다. 그가 말하는 사상의 자유란, 가장 먼저 종교 전통이 강압적으로 규정하는 교리로부터 의젓하게 벗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참이라고 증명될 수 없는 것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게 하는 강요를 거부하는 것이며, 자신의 신념이나 종교적 성향으로 인해 부당한 차별을 받지 않을 권리를 의미한다.
그가 살던 1920년대의 세상은 국가가 사람들의 사상을 통제하는 교육을 당연하게 여기던 시절이었다. 또한 거대 자본의 영향 속에서 학자들과 교사들은 자신의 신념대로 가르치는 것에 대해 스스로를 검열해야만 했다. 자칫 소신을 드러냈다가는 생계를 위협받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러셀은 종교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곤 했는데, 그가 살던 시기에는 이미 세계 종교의 영향력이 예전만 못했고, 오히려 사람들의 자유를 옥죄는 거대한 손은 국가주의와 자본주의 체제였다. 그 속에서 교육은 참된 진리를 탐구하고 지성을 기르기보다, 국가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수동적 기능인을 길러내는 도구로 변질되어 갔다. 특히 역사 교육의 현장은 권력을 쥔 이들이 입맛에 맞게 과거를 재단하고 자신들의 주장을 사회 전체에 주입하는 장으로 활용되었다. 그 속에서 수많은 지성인들이 고통을 겪었고, 러셀은 그러한 자유의 억압을 깊이 우려했다.
러셀의 이 100년 전 연설을 묵상하며, 오늘 내가 살아가는 세상은 과연 그 우려를 얼마나 극복해 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다행히도 러셀이 그토록 염려했던 신념이나 종교적 배경에 따른 직업적 차별은, 20세기 중반 이후 노동운동과 인권법의 제정을 통해 인류가 이뤄낸 소중한 성취 덕분에 상당 부분 해소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교육의 영역으로 시선을 돌리면 여전히 아쉬움과 우려가 남는다. 흔히 우리 사회의 교육을 주입식 입시 교육이라 부르곤 하는데, 나 역시 그 틀 안에서 성장하며 비판적 의식을 깊이 품지 못한 채 스스로 지성인이라 착각하며 살아오지 않았나 조용히 자성해 보게 된다. 인생의 중반을 지나 비로소 ‘다른 생각’과 마주하는 독서와 깊은 연구를 시작하게 된 것은, 차가운 제도 교육의 결과라기보다는 삶이 가르쳐준 다양성과 아픔 속에서 비로소 터득한 과정이었다고 생각한다.
목회자의 길을 걷는 이로서, 나는 문득 교회야말로 자유로운 비판적 성찰이 움트기 가장 조심스러운 공간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자문해 보게 된다. 목회자를 길러내는 신학교의 교육 또한 이미 오랜 세월 다듬어진 교리의 테두리 안에서 움직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정해진 틀 속에서만 학문을 다루다 보면, 진리를 탐구해야 할 교육의 장이 오히려 고유의 사유를 제한하는 좁은 울타리가 되기 쉽다. 러셀이 경고했던 ‘증거를 검증하기보다 맹신을 요구하는 태도’가 오늘날 신앙의 이름으로 조용히 재현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신학교 강단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마음을 품게 된다.
그렇다면 실제 목회 현장은 어떠한가. 오랜 세월 쌓인 전통과 굳어진 외피를 조금이라도 유연하게 바라보려 애쓰는 설교자에게는 종종 보이지 않는 의심의 시선이 머물고, 공동체 안에서는 작은 수근거림이 이어지곤 한다. 결국 목회자는 현실과 타협하거나, 혹은 고요한 갈등 속에서 발걸음을 옮겨야 하는 기로에 서게 된다. 이는 교회의 크고 작음을 떠나 우리가 마주하는 아픈 현실이기도 하다.
이러한 제한과 규제는 인터넷이 일상이 된 오늘날에도 형태를 바꾸어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설교의 내용이 더 넓은 세상으로 열린 것 같지만, 대개의 설교는 여전히 내부의 결속을 다지는 데 머물며, 급변하는 시대의 아픔이나 보편적 삶의 고민을 깊이 품어내기에는 다소 아쉬움을 남긴다.
오히려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것은 자극적이거나 극단적인 해석을 담은 콘텐츠들이다. 특정 성향을 가진 이들에 의해 소비되는 그런 메시지들은 종종 인터넷 공간을 다시금 좁은 진영 논리의 바다로 가두어 버리곤 한다.
그렇다면, 이 막힌 공간 속에서 우리의 신앙은 이대로 길을 잃어야 하는 것일까. 다행히도 그 닫힌 울타리를 넘어 새로운 소통의 숨결이 불어오고 있다. 성경을 보다 보편적이고 철학적인 언어로 풀어내는 다양한 시도들은 기존의 굳어진 설교 문법에 지친 이들에게 신선한 울림을 준다. 아득한 옛날, 기독교 신앙이 헬라 철학과의 깊은 만남을 통해 지중해 세계와 다채롭게 소통했듯이, 오늘날의 성경 이야기는 보편적 지성을 품은 세상과의 진솔한 만남 속에서 새롭게 해석되고 있다.
바야흐로 신학과 철학이 따뜻하게 손을 잡는 새로운 마당이 열리고 있는 셈이다. 과거에는 전문가들의 전유물이었던 깊은 사유의 영역들이, 이제는 인공지능과 디지털 매체의 발달을 통해 만인이 접하고 소통하며 함께 다듬어갈 수 있는 광장으로 열려 있다. 예언자 요엘이 바라보았던 소망처럼, 자녀들이 이야기하고 청년들이 환상을 품으며 어른들이 깊은 꿈을 꾸는 시대가 바로 지금 우리 곁에 다가와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고개를 들어 세상을 바라보면 여전히 날 선 비방과 독선적인 외침이 메마른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 혼란 속에서도 따뜻한 생수처럼 잔잔한 울림을 전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 길목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구도의 발걸음을 내디뎌야 할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당부하셨던 그 온유한 마음처럼, 이제 우리는 물리적인 강을 건너는 것을 넘어 이 광활한 디지털의 바다 속에서 진리와 사랑의 소임을 다해야 하지 않을까.
예수님이 꿈꾸셨던 하나님의 나라는 멀리 있는 미래가 아니라, 이미 우리 삶의 자리에서 시작된 새로운 질서였다. 사도 바울 역시 모든 인류가 한 가족처럼 어우러져 평화롭게 공존하는 그 나라를 소망하며 묵묵히 걸었다. 나 역시 그 아름다운 소망에 마음을 포개며 오늘 이 구도의 길을 걸어가고자 한다. 이것이 100년 전 버트런드 러셀의 연설문을 펼쳐들고 조용히 사유하며 얻은 나의 작은 고백이다.
연설문 전문:
https://cafe.daum.net/Wellspring/WLSX/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