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는 언제나 만족이나 완벽에 도달하지 못한다. 한 설교자의 최선이 있을 뿐 결코 만족한 결과나 반응은 기대하기 힘든 항목이다. 그래서 설교자는 설교의 발전을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설교사역을 끝낼 때까지 진행하여야 한다. 이것이 설교자의 바른 길이다. 일리온 죤스의 말대로 설교자가 자신의 설교에서 만족을 느낀다면 그 설교자는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그 만족은 바로 교만과 이어지고 그 교만은 바로 패망과 직결된다. 이 패망은 한 개인을 실패의 종장이 아니라 교회를 암흑의 세계로 몰고 가는 주원인이 된다. 그래서 죄 중에 가장 무서운 죄가 설교의 교만이라는 말이 성립된다. 솔직히 우리의 설교현장에서 보여 준 설교자의 자세는 대단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다. 거기에는 조금의 흠집이 없는 것처럼 보여 진다. 마치 하늘에서 보내진 사신(使臣)처럼 그 음성과 자세와 어감이 이어진다. 거기에 더하여 회중들은 아멘의 함성을 자의반 타의반으로 터뜨린다. 그러나 그 현장에서 냉정한 머리로 설교를 듣고 있노라면 설교자마다 많은 결점을 보이고 있다. 그 때마다 저 설교자에게 자신이 행한 설교의 문제점을 들려주고 조언을 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사실 외국에서는 목사의 설교가 끝난 다음에 그 주일의 설교를 가지고 토론을 하는 소그룹이 있다. 어떤 모임에서는 목사 없이 토론이 진행되어 토론의 결과만을 목사에게 들려주는가 하면 어떤 모임은 설교자가 합석을 하여 기탄없는 평가를 듣는다. 그리하여 설교의 발전을 가져온다. 그러나 한국의 문화권에서는 그러한 설교평가의 모임이나 시간은 찾아보기 힘들다. 사실 수직문화권에서 사고와 행동이 성장해온 우리 한국인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감히 윗사람의 위치에서 내려준 말씀을 평가하고 거북스러운 부분들에 대한 솔직한 의견을 진술한다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사항이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발생하고 있다. 고작 설교자의 배우자(配偶者)가 지적해 주는 것으로 설교평가의 전부로 삼고 살아가야 하는 우리의 설교자들로 굳어가고 있다. 설교에 대한 넓은 가슴은 갈수록 좁아져 간다. 거의가 큰 소리로 ‘아멘’으로 응답해주기를 바랄 뿐 조용히 찾아와 설교에 대한 쓴말을 들려주기를 원하지 않는다. 용감한 교인이 찾아와 진솔한 평가를 줄때 밝은 미소를 짓고 환영하는 설교자가 드물다는데 오늘 우리 한국교회 강단의 문제가 있다. “나의 설교가 싫으면 다른 교회로 옮겨가라”는 말만이 들릴 뿐 ‘나의 설교를 솔직하게 평가하고 기도해주시오’의 말 따위는 들리지 아니한다.
필자는 지난 24년 동안 미래의 설교자가 될 선지생도들에게 설교의 이론과 실제를 강의하면서 느끼는 것은 선지생도들이 모두가 설교의 새로운 세계를 추구하는 열심히 가득하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들이 교수 앞에서 개인별로 설교의 실제를 행할 때마다 보여준 설교의 실태는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의 모습을 그대로 재연하고 있다. 설교의 내용은 새롭게 배운 설교형태와 표현을 따르고 있으나 전달은 각양각색이다. 지금껏 한국교회 강단에서 보아온 것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설교자마다 최선을 기울이고 있으나 설교전달에서 개인이 가지고 있는 보기 흉한 습관이나 우선적으로 버리거나 수정해야 할 부분들이 너무 많음을 발견한다. 우선적인 문제는 자신들이 습관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점과 보기 흉한 부분들이 어떤 것이었는지조차 모르고 준비한 메시지만 전달하면 다 되는 것으로 설교를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설교가 끝난 다음에 교수의 지적과 함께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녹화한 테이프를 보면서 거의가 다 놀라게 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인다.
“내 자신이 그 정도 수준인줄 몰랐습니다.” “저에게 그러한 부분의 습관이 있는 줄 이제야 알았습니다.” “제가 왜 그러한 인상과 제스처를 사용했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저의 언어와 음정이 그렇게도 리듬이 없는 줄 몰랐습니다.”
이상과 같은 반응들은 신학교의 설교학 교실에서만 아니라 설교자라면 누구나 설교를 진단받게 되면 실토하게 되는 항목들이다. 그러한 까닭에 설교자는 최소한 1년에 한번 정도는 설교 클리닉 센터를 찾아 섬세한 진단을 받을 필요가 있다. 자신도 모르게 스며든 무가치한 습관들과 모습들을 발견하여 보다 향상된 설교 사역을 감당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우리 한국교회 설교자들은 설교의 내용을 위한 준비에만 동분서주했을 뿐 설교의 전달에는 거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는 형편이다. 설교학에서는 설교의 완성은 설교의 내용과 전달이라는 두 축이 건실해야 함을 강조한다. 내용이 없는 화려한 전달은 거짓 선지자의 모습이며 내용만 가득하고 전달이 빈약한 설교는 허공을 향한 독백에 불과하다. 그래서 가장 이상적인 설교의 성공은 내용 60!!!%, 전달40!!!%의 비율을 가지고 100!!!%을 이룩해야 한다. 앞으로 이어질 본 연재에서는 이러한 중요한 설교의 전달문제만을 집중적으로 다루어 보려한다. 그 전개의 형태는 서술의 형태를 벗어나 그동안 수집된 질문들에 대한 답변의 형식으로 필요한 주제들을 풀어가고자 한다. 여기서 등장하는 수많은 질문들 가운데 독자들 개인이 안고 있는 문제들이 포함되리라 확신한다. 그때마다 정리된 대답들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자신의 전달에 적용하여 치유의 효과를 가져 올수 있다면 본 연재가 누릴 수 있는 최상의 영광이라고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