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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아주 이른 새벽. 어둠이 걷히기도 전에 은은한 아잔으로 시작하는 훈자. 이번 여정에서 처음 만난 룸메이트는 나보다 5살이 적은 분으로 나랑은 반대로 잠이 많아 저녁 9시만 조금 넘으면 자고 아침에도 7시는 돼야 일어나는 잠이 많은 분이다. 내가 10시 반에서 11시에 자고 새벽 5시면 일어나는 게 거의 50년 된 습관이라 아침, 저녁으로 부스럭거리고 불을 켜도 잘 주무신다. 비록 서로 신체 리듬이 다르긴 하지만 맞춰가며 잘 지내고 있다. 특히 그는 몸은 좀 아픈 데가 있어도 여행을 좋아해 많은 나라를 다닌 열정을 가진 순수 남으로 보인다.
내가 테라스 벤치에 앉아서 여명도 즐기고 아침 산책을 나가려고 나오니 호텔에 불이 안 들어오고 와이파이도 먹통이다. 로비에서 자고 있던 경비원에게 이야기해 살펴보았지만 해결이 안 된다. 어제 도로에 날리는 먼지 때문에 중도에 돌아 왔던 발팃 포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겨 호텔보다 좀 더 높은 곳에서 훈자의 아침 전경을 보러 간다. 발팃 포트 앞 전망대에서 멀리 설산을 바라보니 설산이 잡힐 듯 보이지만 어디가 디란 봉인지. 어디가 라카포시 설산인지 모르겠다. 여명이 비치면서 해가 떠오르자 설산들은 황금빛으로 물들어가고 훈자 골짜기도 어둠이 걷히면서 초록색 싱그러움이 더해 간다. 360도 어느 곳으로 눈을 돌려 봐도 주변이 너무 멋져 훈자에 있는 나를 행복에 젖게 하는 새벽이다.
훈자는 해발 2,438m에 자리잡고 있다. 여러 세기 동안 훈자는 육로로 파키스탄의 Swat 지역과 인도의 Gandhara 지역을 여행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빠른 길이었지만, 높은 산길들은 종종 바위가 꼭대기에 매달려 있는 절벽들 사이의 균열 사이로 폭이 50cm도 안되는 길이 이어지는데다 종종 낙석과 나쁜 일기 때문에 길이 막히기고 해 이곳으로 짐을 실은 동물들이 지날 수 없었고 오직 사람의 힘에 의지해 통과해야만 했다고 한다. 그래서,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방어에 매우 용이했으며, 고대부터 몇몇 중국인 불교 승려들을 포함한 중국 역사가들은 이 고도(高道)의 공포를 기록하였다.
훈자는 봄이면 살구, 복숭아, 자두, 체리 등의 꽃이 만발하여 꽃동네를 이루고 늦은 봄엔 빨갛게 익은 체리가, 여름에는 살구나무의 살구가 노랗게 달려있으며, 가을이면 마을 곳곳에 심겨 있는 포플러(미류나무)가 노랗게 단풍이 드는 풍경 너머로 흰 설산이 둘러싸고 있는 곳이다. 우리가 갔을 때는 5월말로 한창 체리가 빨갛게 익어 있고 훈자마을의 상징 살구는 꽃이 지고 작은 열매가 가지에서 익어가고 있다. 우리 숙소는 카림아바드 쪽 산 중턱에 있는 곳으로 건너편 수마야르 마을과 길깃으로 흐르는 훈자 강의 골짜기, 라카포시와 그 연봉들을 볼 수 있는 곳이다.
훈자의 반은 도시형태, 반은 시골구조라서 가옥과 텃밭이 함께 있기도 해서 정원에는 살구나무가 제일 많고, 체리, 사과, 호두나무가, 밭에는 감자가 제일 많고 채소와 밀(빵용), 보리(미숫가루용)가 재배되며 겨울에 외지사람들이 피한을 떠나고 나면 원주민만 남아서 감자와 빵을 주식으로 하고 미숫가루, 말린 살구 등을 먹으며 한겨울을 보낸단다. 지금은 콘크리트로 지은 건물이 많아졌지만 전통 가옥은 대부분 목조 단층건물에 지붕은 편편하게 흙을 덮었고, 마당은 가축우리로 사용하는데 소, 양, 닭을 몇 마리씩 기르고, 소나 양을 많이 기르는 사람은 아침에 산 위로 가축을 내몰아서 풀을 뜯게 하고 저녁에 데리고 오며 100두 이상 기르는 사람은 산위에서 생활하며 돌본다고 한다.
이곳의 이런 지리적 요건으로 인해서 샹그릴라(이상향)를 그린 제임스 힐튼의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에 영감을 주기도 했으며,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무대가 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오염되지 않은 자연환경과 아름다운 풍경 그리고 세계에서 유명한 장수마을로 알려지게 되면서 여행객들이 가장 가고 싶어 하는 곳 중의 하나가 된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라오스의 방비엥, 이집트의 다합, 그리고 파키스탄의 훈자를 배낭여행자들은 일단 들어가면 빠져 나오기 힘든 "3대 블랙홀"이라 한다. 세 군데의 특징은 조용하고 분위기 있는 풍경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냥 가만히 있어도 명상에 잠길 수 있고, 웃음 지을 수 있는 곳. 특히나 파키스탄의 훈자는 대충 숙소 앞뜰에 나가서 앉아만 있어도 몽롱하니 즐겁다.
훈자마을의 가장 큰 특징은 아마 마을과 마을 사이, 그리고 길과 길 사이에 있는 나무와 밭일 것이다. 길 대부분은 아직도 비포장이다. 여기에 듬성듬성 보이는 초록의 밭이 있고, 골목에는 자동차나 오토바이가 수시로 지나다니고, 그 틈 사이로 아이들이 지나고, 염소가 지나가며, 할 일 없는 사람들이 길거리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을 바라본다. 담 너머로 외양간 안의 동물이 보이고, 널어놓은 빨래가 보이고, 그리고 풀을 베어 덮어 놓은 마당이 보인다. 지나가는 아이들이 바라보며 웃음 짓는다. "Are you Chinese? Are you Japanese?" 아마 한국인보다는 중국인이나 일본인이 많이 훈자를 여행한다는 뜻인 것 같은데 난 그 때마다 “I am Korean, South Korean. Do you know Korea?”라 꼭 답한다.
훈자강 건너 있는 마을들은 훈자라 부르지 않는다는데 훈자강 다리가 훈자마을 위쪽에 하나가 있고, 약100km 아래쪽 길깃 위쪽에 두 번째 교량이 있어 서로 교류가 오랫동안 사실상 없었고, 종파도 다르단다. 훈자주민들은 평화를 사랑하는 온건파인 이스마일리 파이고, 강 건너 NAZAR 지역은 수니파가, 그 위쪽은 시어파가 대다수이지만, 길깃 아래쪽 지방에서는 각 종파가 서로 섞여 살고 있단다. 이슬람은 타종파와 타종교를 믿지 못하고 적대시하기 때문에 자기 종파를 지키기 위하여 무장조직을 유지하고 타 종파를 폭탄 테러로 응징하는 경우도 있으며 일부 강경파들은 탈레반에 가담하기도 한단다. 탈레반은 특별한 정치적 목적이 없는 한 외국인이나 특히 여행자를 공격하는 일은 없으나 공격대상으로 지정된 건물 안이나 인근에 있다가 사상을 당하는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안심해도 된다고 하지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카림 아바드를 헤매다 6시 반경 호텔로 돌아왔는데 아직도 호텔엔 불이 들어오지 않고 잠에서 깬 일행들이 호텔 로비에서 걱정스런 눈으로 불이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일행들과 호텔 테라스로 가 훈자의 아침 공기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길잡이가 테라스로 나온다. 호텔에 불이 안 들어오는 걸 이야기하자 급히 로비로 가고 10여 분 후인 7시 경 불이 들어오고 와이파이도 작동된다. 길잡이는 호텔로 들어오는 변압기가 고장났던 것이라고 사정을 설명한다.
오늘은 이글네스트(Eagle Nest)를 거쳐 호퍼 발토르 빙하(Hopper Bualtar Glacier)를 보러 가는 일정이다. 아침식사를 마친 우리 는 소형 버스를 타고 이글네스트로 향한다. 이글네스트로 향하는 길은 가파르고 고산지대일 뿐만 아니라 차량들이 달릴 때 먼지가 많이 일어 걸어가기 힘들 것 같다. 그래서 여행자들이 처음에는 걸어 올라가다가 경운기나 승용차 등을 얻어 타고 올라간다고 한다.
주차장에서 내린 우리 일행은 길잡이를 따라 Eagle's Nest Hotel 앞까지 가는데 벌써부터 햇볕이 따갑다. 바위산인 이글네스트를 오른다. 독수리처럼 생긴 바위가 여기 저기 몇 군데 보이는데 이곳이 이글네스트란 이름이 붙게 된 것은 이곳에 있는 독수리처럼 생긴 바위가 많아 붙여진 이름으로, 이곳은 훈자마을과 훈자계곡을 둘러싸고 있는 설산(雪山) 전체를 볼 수 있다. 바위산 정상에는 태양광시설이 빙 둘러 설치돼 있는데 이곳에 태양광 시설을 설치한 것은 좀 아닌 것 같다. 이글네스트에서 바라보는 훈자 강과 훈자 마을은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이다. 검푸른 숲을 따라 유유히 흐르는 훈자 강, 멀리 설산 사이로 수시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구름, 이름 모를 새들이 훈자 강과 마을 위 하늘을 날고 있다. 구름은 석탄을 태우는 기차의 연기처럼 무리를 지어 뻗어 있고, 새끼 구름이 그 주위에 장난을 치다가 엄마 품에 들어가는 병아리처럼 큰 구름 아래로 꼬리를 감춘다. 기대만큼 석양이 아름답진 않았지만 주변의 설산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멀리 레이디스 핑거(lady's finger) 산봉우리가 선명하게 보였다. 일행 중 한 분이 레이디스 핑거 봉우리를 여자의 손가락보다 죽순처럼 생기지 않았느냐고 하면서 죽순 봉이 더 어울릴 것 같다고 한다. 듣고 보니 "여자의 손가락"보다는 "죽순봉"이 더 그럴듯하다. 사람이 태어나서 자란 문화 배경이 사람의 생각을 이렇게 바꿔 놓은 게 아닌가 생각되었다. 이글네스트에서 Eagle's Nest Hotel로 내려오니 길잡이가 음료수를 마시며 이 호텔 커피가 맛있다고 한다. 덥기도 하고 목도 말라 커피숍으로가 시원한 냉커피를 주문해 호텔 내 나무그늘에서 마시니 속까지 시원하다.
이글네스트에서 내려와 개니쉬 마을 뒤편에 있는 훈자 강 다리를 건너가니 토사와 자갈로 이루어진 도로 옆 절벽이 금방이라도 도로로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이 아슬아슬하게 서 있다. 훈자 강과 나가르 강의 합류점에 도착하니 안내판이 보인다. 그 안내판에는“훈자 강은 서부 카라코람 산맥을 통해 내려오는 유일한 강이다. 7000m 봉우리들에서 흘러 나오는 빙하가 훈자 강을 이루고 이 지점에서 호퍼빙하에서 흘러나온 물이 이룬 나가르 강과 만난다.”고 적혀 있다. 훈자 강의 물은 옥빛이고 나가르 강은 흙빛이다. 나가르 강이 석회석 지대에서 흘러내려온 물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만난 나가르 강과 훈자 강은 물 농도가 달라 한참동안 경계를 이루다 길깃까지 서로 섞이며 흘러가 길깃 강으로 바뀌어 흐르다가 북쪽 히말라야에서 발원한 인더스 강을 만나고, 인더스 강은 카라코람 하이웨이를 따라 끝없이 흘러 결국 아라비아 해로 흘러간다.
나가르 강을 따라 호퍼 발토르 빙하를 보기 위해 출발한다. 나가르 강에는 사금을 채취하는 장비들이 몇 군데 보인다. 이곳 훈자는 예로부터 금과 루비를 비롯한 각종 보석들이 많이 나오는 곳이라고 한다. 좌측 나가르 강을 따라 가다 다리를 건너자 협곡과 절개지 도로를 구불구불 한없이 올라간다. 비포장 낭떠러지 길이지만 노면은 의외로 양호한 편이다. 산간오지라 민가가 별로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가는 내내 마을이 이곳저곳 산재해 있고, 학교까지 있는 큰 마을도 몇 군데 보인다. 이곳도 선거철인지 마을 곳곳에 후보자의 얼굴이 들어간 프랑카드가 걸려있고 큰 동네에선 주민들을 잔득 모아 놓고 선거유세가 한창이다. 수목들이 섬 같은 마을들과 절벽 길들을 감싸고, 민둥산 및 설산과 어우러져 더 이채로운 풍경을 선사한다. 도로 좌우에 보이는 밭에는 보리(밀?)과 감자, 향초, 사료용 풀등이 재배되고 있고 주변 구릉엔 은사시나무, 호두나무, 살구나무, 체리나무 등이 식재되어 산간 오지임에도 토지를 잘 이용해 비교적 풍족한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다. 나가르 강 건너엔 하상에서 절벽 위로 100m 이상 높은 곳에 가끔 푸른 숲으로 둘러싸인 마을들이 보이는데 마을 뒤편으로는 나무 한그루 보이지 않는 산이 둘러싸고 있어 마치 오아시스를 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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