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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산리(羅山里)2008년 경주신문 소개 글
나아(羅兒) 산기슭에 있어 ‘나산(羅山)’
나아(羅兒) 산기슭에 있어 ‘나산(羅山)’경순왕이 피신했던 바위굴 있는 ‘보덕암’나산은 신라 석탈해왕의 탄생설화가 얽힌 ‘아진포(지금의 나아리)’의 서편에 자리한 마을이다. 마을의 상당부분이 월성원자력발전소 부지에 들어갔으며 마을의 당나무와 당집은 지금도 월성원전 담장 안에 있다. 양남일대에서 가장 높은 버텅골산과 동쪽기슭에 월성원전이 들어선 미낭골산이 만들어낸 깊은 골짜기에 자리 잡은 이 마을은 해안은 나아리에 안쪽의 깊은 골짜기는 상라리에 각각 내어 주고 골짜기 어귀에 해당하는 산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문무대왕수중릉을 지나 월성원전을 우회하여 산등성이로 나 있는 31번 국도를 따라 가파른 언덕길을 내려서면 오른쪽 아래에 내려다보이는 마을이다. 월성원전 남문 밖 공원에 있는 석탈해왕 유허비 서쪽에 있다. 신라 6부촌의 금산가리촌에 속했던 이 마을은 나아와 함께 ‘아진포(阿珍浦)’, ‘아서(阿瑞, 兒瑞)’라고 불렀으며 ‘나아(羅兒)’의 산기슭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나산(羅山)’이라고 했다고 한다. 나산은 140세대에 380명의 주민들이 생활하고 있다. 이 가운데 본토박이는 90세대정도이다. 김녕김씨 집성촌으로 지금도 70가구가 살고 있다. 주로 쌀농사와 소(한우 300두), 감(1만여평)을 재배하고 있다.이 마을 최고령자는 김필안(97 신국댁)할머니로 귀가 좀 어둡지만 혼자서 생활하실 정도로 건강하고 출입도 자유롭다. 평소 술, 담배는 물론 음료수도 안 먹고 채식위주로 소식한다고 했다. 묘터 옆에 있는 마을 ‘터얍’ 큰말 옛날 이 일대의 새말(新里), 지곡(池谷), 웃라(上羅), 자부(自富), 수아(收兒), 장아(長阿), 모포(牟浦), 송하(松下), 죽전(竹田), 읍천포(邑川浦) 중에서 가장 크고 중심 마을이라 ‘큰말’이라 불렀다고 한다. (50가구) 수달 큰말의 일부로 큰말 북편에 있다. 터얍 큰말 동쪽 산기슭 김녕김씨 입향조의 묘터 옆에 자리 잡은 마을이라 하여 ‘터얍’ 혹은 ‘기액(基腋)’이라 한다. 지금은 월성원자력발전소 부지에 대부분 들어가고 조금 남아 있다. (15가구) 새말 김녕김씨(金寧金氏)가 약 450년(429) 전 이 마을에 정착하면서 새로 이룬 마을이라 하여 ‘새마을’, ‘새말’, 혹은 ‘신리(新里)’라고 한다. 큰말 북쪽에 있다. (13가구)빌라촌 원전으로 인해 15년 전에 들어선 빌라촌이 새말북편에 있다. 42세대로 모두 외지인들이다. (42가구) 짓골 옛날 이 마을에 신선들이 먹는 약초인 지초(芝草 주치, 자초)가 많이 났다고 하여 ‘지곡(芝谷)’ 혹은 ‘짓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는 마을 뒤 골짜기에 못이 있었다고 하여 ‘지곡(池谷)’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큰말 동남쪽 골짜기에 있다. (3가구)독수골 큰말 동쪽에 있던 마을로 30여 가구가 살았는데 지금은 원전부지로 편입되고 없다.당나무와 당집은 월성원전 담장 안에동제 이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6월 초에 동제를 지낸다.당나무 월성원전 남문 안쪽 서편에 있는 470여년 된 느티나무로 현재 5그루가 숲을 이루고 있고,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그 옆에 당집도 있다. 월성원전 부지 내에 있으며 이 일대에 담장을 설치하고 분리보호하고 있다. 단종복위에 가담했던 백촌나산서원(羅山書院) 김녕(金寧)인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를 제향하는 곳으로 조선 정조 4년(1780)에 지었으나, 고종 5년(1868) 금령에 의해 헐리고, 1936년에 다시 지었다. 공의 자는 여태(汝泰)로 단종 때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냈다. 단종 복위에 가담했다가 세조 1년(1456)에 순절했다. 정조 2년 시호를 내리고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됐으며 장릉(莊陵)의 충신단(忠臣壇)에 배향되었다. 동학사(東鶴寺) 숙모전(肅慕殿)에도 배향한다. 큰말에 있다. 밀양박씨 정렬각(密陽朴氏 旌烈閣) 열부 밀양박씨(密陽朴氏)의 열행을 기리기 위해 조선 순조 2년(1802) 정려하고 2년 후 여각을 세웠다. 밀양박씨는 이 마을 최원태(崔元泰)의 아내로 시부모를 지성으로 공경하고 남편을 섬겼는데, 남편이 죽자 시부모를 생각하여 곡성을 내지 않았으며, 훗날 3년상을 치른 후 몰래 남편 따라 목숨을 끊었다. 어사 박문수가 이 사실을 조정에 품신해 정려가 내렸다. 현재의 비석은 1983년 문중에서 세웠다. 짓골 어귀에 있다. 보덕암(普德庵) 신라 선덕왕 때 지었다고 알려지는 암자로 경순왕(敬順王)이 난을 피해 피신했다고 전해온다. ‘국구암(國求庵)’, ‘구국암(求國庵)’, ‘굴굴암’이라고 불렀으나 일제시대에 보덕암으로 고쳤다고 한다. 관음보살을 주불로 하고 있는 이 암자는 가파른 산 중턱에 있어 사역이 좁아 작은 건물만 겨우 서 있는 상황이다. 관음전 왼쪽 처마 밑에 중수기에 따르면 을축년(1925년으로 추정)과 불기 2524년(1980)에 각각 중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 주지(68 법종)스님에 따르면 3년 전에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중수했다고 한다 새말 서북쪽 산 중턱에 있다. 해일 때 미나리꽝 한 자리만큼 남아버텅골산 큰말 뒷산으로 해일 때 보탕(도끼로 장작 깰 때 놓는 밑 바탕)만큼만 남았었다고 한다. 미낭골산 큰말 앞산으로 그 동쪽기슭에 원전이 들어서 있다. 해일 때 미나리꽝 한 자리정도만 남았다고 한다. 강당산 이 산 산꼭대기에서 무제(기우제)를 지냈다고 ‘천지땅’이라고도 한다. 큰말 뒤쪽에 있다. 갈미기 짓골 서남쪽에서 환서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덕골재 큰말 서남쪽에서 환서리의 덕골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재매기 보덕암 서남쪽에서 환서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북박재 큰골에서 보덕암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굴골 옛날 경순왕이 피난을 했다고 하는 바위굴이 있는 골짜기로, 보덕암이 있다. ‘꾸꿀’이라고도 한다. 아릿골 굴골 아래쪽 즉 새말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지금은 빌라가 들어서 있다. 잠방골 새말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아릿골 위쪽에 있다. 지금은 빌라가 들어서 있다. 도랑물 떠먹을 수 있어샘이골 새말 뒤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부터 떠먹을 수 있는 좋은 물이 있어 ‘샘이골’이라고 한다. 지금도 맑아 도랑물을 먹을 수 있다고 한다. 짓골 수달뒤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버튼굴 큰말 뒤쪽에 버튼굴산에서 동쪽 큰 골짜기이다. 오용굴 큰말 남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용이 등천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지골 지골 뒷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손대밭골 새말 앞 미낭굴산 밑에 있다. 골짜기가 솔(좁은)면서 대밭이 있었다고 한다. 뒷골 큰말 가장 뒤쪽에 있는 골짜기로 잠방골 맞은편이다. 시옹굴 큰말의 동북쪽 첫 번째 골짜기로 손대밭골 아래에 있다. 아랫들 큰말 남쪽에 있던 들로 지금은 한수원에 편입되었다. 마을 아래쪽에 있다. 중물들 큰말 동남쪽 있던 들로 지금은 한수원에 편입되었다. 옛날에 농사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물이 너무 많았다고 한다. 지논들 큰말 남쪽에 있는 들로 한수원에 일부 편입되었다. 큰물로 퇴적물이 많아 논이 질어서 ‘지논들’이다. 달구물들 큰말 동남쪽 즉 마을 앞에 있는 들이다. 서만들 큰 물 지면 떠내려가고 섬처럼 들이 남았다고 한다. 큰말 동쪽에 있다. 밤은 안 내려오고 밤 껍질만밤융굴들 옛날에 오용굴의 부근에 밤나무를 많이 심었는데 밤은 안 내려오고 밤 껍질만 떠내려 와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큰말 남서쪽에 있다. 몰람들 퇴적물이 떠내려 와서 이루어진 들이다. 본래 밭이었는데 못을 막고부터 논이 되었다. 큰말 동북쪽에 있다. 가지밭골 산의 형국이 가지 잎처럼 생겼다고 한다. 큰말 북쪽에 있다. 잠방굴들 잠방굴 앞에 있는 들이다. 큰말 북쪽에 있다. 너름지들 본래 밭이었는데 못을 막고부터 논이 되었다. 제방이 없을 때 큰물이 지면 상습적으로 터지는 곳이다. 큰말 북쪽에 있다.부엉바위 짓골 안 대밭골에 있는 바위로 부엉이가 살았다고 한다. 두꺼비바위 보덕암 들어가는 중간 지점 왼쪽에 있던 두꺼비처럼 생긴 돌로 30여년전에 하천공사로 묻어버렸다고 한다. 불선골바위 물이 새어나오는 크지 않은 바위로 짓골 안 대밭골에 있다. 이곳에 정성을 들이면 아들을 낳는다고 하여 정성을 들였다고 한다. 화제 이 마을에는 옛날부터 화재가 자주 일어나 이를 막기 위한 제를 올렸다고 한다. 미낭굴산 중턱에 단지를 묻어 놓고 해마다 두루미(식초 단지)에 물을 담아가서 단지에 물을 갈아 붓고 정성을 드렸다. 화재와 각종 마을 의 재앙을 막기 위해서 재를 올리고 마을 사람들이 모여 풍물을 치고 놀았는데 부정한 사람은 올라가지도 못했다고 한다. 정구지단지 성공했으면...동해안에 인접한 마을이지만 깊은 산과 계곡, 넓은 들판을 끼고 있는 농촌마을로 공기 맑고, 물 좋고, 살기 좋은 마을로 잘 알려졌다. 또한 예로부터 인물이 많이 난다고 한다.이 마을은 현재 원전 발전자지원사업으로 몰람들에 1만5천여평의 정구지단지 조성을 준비하고 있다. 마을 공동사업으로 추진하는 정구지단지를 통해 마을 소득증대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주민들은 지골로 들어가는 안길이 좁아서 차량이 교행이 안 되어 주민생활이 매우 불편하다고 한다. 이를 확장했으면 하고 바랐다. 이 마을 출신으로는 김진희(83 전 양남면장), 김인달(82 전 양남면 부면장), 김진목(74 전 경북도의원), 김응수(62 예비역 해병중령), 김형기(62 영화인), 김진형(48 전 울산북구청장), 김주희(35 외무고시 외교통상부), 김 비호(32 박사 삼성경제연구소) 등이 있다. 소개 못 한분 김 판용 나산 초등교 창설 초대기성회장, 양남중하교 초대기성회장역임 김 말용 제14대 국회의원 우리나라의 근로 기준법 연구자
바쁘신 가운데 마을취재에 협조해주신 김정관 이장과 도움 말씀해주신 김수규 노인회장을 비롯한 마을 주민들에게 감사드린다. 사진 최병구 기자/ 정리 이채근 기자자문 허계수(족보도서관장) 담아 온 글 (나산아들 카페 김 영대올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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