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서구 대저동과 강동동 사이를 흐르는 평강천은 내(川) 보다 규모가 조금 크면서 낙동강 물이 항상 흐르는 곳이다. 손에 잡힐 듯이 가까운 이 내를 건너기 위해서 강기슭 양쪽에 굵은 밧줄을 묶어 두고 배를 띄워 줄을 잡아당겨 건너기도 하고 폭이 좁고 강이 얕으면 삿대로 강바닥을 짚어 가며 건너기도 했었다. 그러나 하류로 내려오면 내도 넓고 깊어 노 젓는 배를 띄워야 했다.
강서 대저와 강동 사이 평강천
손에 잡힐 듯한 강기슭에 뱃길
마을 주민의 발 신노전 나룻배
나루터 주막 항상 왁자지껄
개발사업이 삶의 흔적 지울 것
갈대밭과 함께한 역사 남기길이 평강천의 하류 대저2동의 신노전마을과 강동동의 제도 전양마을, 그리고 명지동 순아1구 등 세 마을을 오가던 삼각나루가 신노전나룻길이다. 갈밭(노전·蘆田) 천지였던 이곳에 마을이 들어선 것은 1934년 낙동강제방이 건설되고 난 후이고 갈밭을 개간하여 신노전이란 이름도 얻었다.
순아1구 물가엔 진목교회가 오뚝하니 서 있고 물 건너 신노전에는 신노전경로당과 신노전나루터 식당이 있다. 순아1구와 전양마을 사이에도 평강에서 순아2구의 서낙동강으로 흐르는 샛강이 있기에 세 마을을 잇는 나루는 절대 필요했었다. 신노전나루터식당 주인 심도식(56·여) 씨는 24살 때 이 뱃길을 건너 시집왔었고, 이 집 단골 김경동(52) 씨는 이 나루 마지막 뱃사공 김규윤 씨의 아들이어서 아버지를 도와 겨울이면 강바닥의 얼음을 깨어 뱃길을 트기도 했던 일을 생생히 기억한다.
신노전 나룻배는 마을공동자금으로 마련한 배였기에 2, 3년마다 뱃사공을 공모하여 고용하고 마을에서 공동 운영해 왔다. 동네사람에겐 1년 뱃삯으로 쌀과 보리를 셈하여 받았고 마을 바깥 사람들에게는 현금을 받았다. 평강은 강폭이 좁은 데다 겨울에는 얼음이 얼어서 이른 아침 얇게 언 얼음을 깨뜨려서 배를 띄워야 부산으로, 김해로 통학하는 학생들이 강을 건널 수 있었다. 그러나 날이 너무 추워 얼음이 두텁게 얼면 그마저 배를 띄울 수 없었다. 신노전과 전양을 잇던 나룻길은 후에 밧줄로 서로 이어 바람이라도 불면 줄을 당겨 건너다니기도 했다.
김경동 씨도 그렇게 강을 건너 전양마을로 가서 버스종점(전양정미소)에서 첫차를 타고 대사리로 나가 부산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학교엘 다녔다. 통학시간이 두 시간이나 걸렸다. 새벽차 타고 학교길 올라 막차 타고 집으로 왔다.
해방 전 평강과 순아1구 샛강 두 강이 만나는 삼각지대에 있는 신노전 등 세 마을의 물가에는 고만고만한 주막이 빙 둘러가며 모여 있었다. 순아1구의 진목교회는 과거 일본인이 운영하던 큰 정미소가 있던 자리여서 각 곳에서 모여드는 사람들과 직공들이 밤이면 술추렴하면서 내지르는 소리가 마을길을 메웠고, 싸움꾼들의 욕지거리와 노랫소리로 시끄러운 나루였다.
신노전 쪽 나루는 신노전경로당 앞에 있었는데, 강기슭을 매립하면서 나루터는 없어지고 경로당도 길가로 밀려난 꼴이 되었다. 지금이야 순아1구와 제도를 잇는 다리도 놓이고 명지동과 신노전을 잇는 신노전교가 1986년 나루터 남쪽에 놓이면서 나루터의 기능은 사라졌지만, 나루터 이름을 차용한 가게들이 있어서 그 옛날 낙동강 하중도의 어느 곳보다 화려했던 신노전나루라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곧 명지동과 대저2동 일대에는 거대한 이른바 '에코델타시티'가 건설된다고 한다. 우리는 이 거대한 사업으로 인해 낙동강 하중도(河中島)가 생성되어 오던 역사가 뒤안길에 묻힐까 봐 걱정한다. 마침 이곳 신노전나루를 중심으로 한 권역에 하중도의 생활사를 재현한다 하니 지켜볼 일이지만, 크고 작은 하중도를 오가던 나루들 이야기도, 당시 나룻배 사공과 통학생들의 재잘거리는 소리도 놓치지 않아야겠고, 갈대밭과 함께한 사람들의 일상도 고증을 통해 재현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낙동강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의 바람이다.
주경업 부산민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