比斯伐 또는 比斯伐加耶는 잘못이다. 창녕지명은 그 연혁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변한시대는 비지국(比只國), 불사국(不斯國)이고 가야시대는 비화가야(非火加耶:삼국유사 본조사략 오가야조의 2참조)인데 관산성 전투에서 승리한 신라의 이사부장군이 이지역을 쳐서 AD555년 비화가야(非火加耶)가 망하고 신라화 하면서 하주(하주)또는 완산주(완산주)(AD555-565)로 했다가 AD565년부터 비사벌군(비사벌군)이 되었는데 신라 경덕왕 757년에 지명개편으로 화왕군(화왕군)이 되었다. 그 뒤 고려 태조23년(AD940)에 창녕군이 되었다. 이 시기에 火王山이 火旺山으로 개칭 되었으며 8.15해방이 되고나서도 별지명변경이 없었는데 창녕현지(서기 187년)에 일운 比斯伐등과 1970년 중반 故 노대석씨가 창녕의 향토사 “빛벌문화”라는 책자를 내고나서 요원의 불길같이 비사벌(빛벌의 준말)이란 이름으로 확산, 마치 昌寧의 古代地名인양 정설화되어 지금까지 애칭하여왔다. 이후 고대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고 부강국 이었던 비화가야의 오백년 역사는 실종된 상태이다. 역설적으로 창녕의 古代는 전부 신라문화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또 가락국기의 강역에서도 황산강 이서(黃山江 以西)지방으로 되었고 파사왕 26년 (108)에 比只(창녕), 多伐(합천), 草八(초계)을 정복되었다고하여 非火加耶는 불과 50여년으로 멸망되었다고 하여 뚜렷한 문화와 역사도 형성되지 못하고 바르게 신라화 하였다는 잘못된 견해가 있어 이를 바로 잡기 위하여 1980년도 지방향토사 학자들과 문헌을 정리한 결과 이때까지 예사로 보았던 교동고분군(校洞)과 계성고분군(桂城) 및 화왕산성(火旺山城), 목마산성(牧馬山城), 구진산성(九陳山城), 우천산성(牛川山城), 성산산성(城山山城)등 보배와 같은 가야 유적들이 많은 창녕인 것을 새롭게 인식하고 연구하여 의엿한 “창녕의 고대사”를 논문 또는 책으로 사학계에 발표하였습니다.
논문 1. 관룡사는 가야불교의 사찰이다. 2. 고대창녕은 신라문화권이 아니다. 3. 교동고분군과 계성고분군의 출토 유물 기타
책자
1. 교동 고분군(95년도)
2. 비화가야사 연구(97년도)
3. 가야사(2001년)
이상의 발표 및 발간된 책자의 내용을 간단히하면
1. 관룡사 창건을 진평왕5년(583)에 신하 대종찰로 창건 하였다는데 실제는 고대 찬란한 가야불교문화를 말살하여 신라문화로 편성한 것이며 관룡사는 “관룡사 사적기” 대로 약사전이 349년에 건립 되었다고 하니 대웅전은 그전50-100년 전에 창건되었을 것이며 동국여지승람에 관룡사, 승지사, 자련사, 俱在화왕산, 고봉사. 죽림사, 적조사. 법화사, 俱在영취산 이와같이 고대 사찰이 있었고 영산, 영취산, 자련사, 연화사 등 불명으로 이름 지어진 것으로 볼 때 관룡사를 비롯한 영취산 일대가 고대 가야불교의 성지(聖地)가 아닌가 합니다. 관룡사 주위의 지명은 부처님께 향을 공양한 火王山(古地名), 꽃을 공양한 芍藥山, 음악을 공양한琵瑟山으로 더욱 불색이 짙다고 할 것이다.
2.고대 창녕은 신라문화권이 아니다에 대해서 삼국사기에 파사왕26년(108년)에 병을 보내서 比只와 多伐, 草八을 쳐서 신라화 하였는 구정이 있으나 필자는 당시 파사왕의 가로국은 박상한 수로왕의 부용적인 소국(小國)으로서 감히 비화가야(즉比只國)등 삼국을 칠만한 힘이 없는 상황이었으면 더욱 연구한 결과 경북도사에서 “그러한 설이 있으나 당시 比只는 安康, 多伐은 興海 義昌, 草八은 杞溪라고 밝히고 사로국은 주위 동해쪽에 있는 약소한 지역을 평정하였으며 당시 고대 창녕(非火加耶)을 신라화 하지 못했음을 밝혔습니다.
3. 교동고분군, 계성고분군과 화왕산성, 목마산성. 구진산성 등의 가야유적이 엄연히 현존하고 있으며 교동고분군은 5-6세기 중반까지 구축되었다는 것이며 이것은 非火加耶 왕국이 500여년동안 고대사에 존재하는 것이며 일본 고고학자 아나자와 아코오, 마노메순이찌 공저의 “교동고분군”에서는 非火加耶(非自火)는 동북아시아의 고대문화를 가늠할만치 찬란하였고 부강한 국가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교동 고분군에서 출토한 유물이 증명합니다. 현재 내고장에서는 비화가야시대 이전 불사국 2천년, 3천년대의 신석기, 청동기 시대화 변한시대의 유적 유물과 2백여기의 고인돌등이 발굴되고 있으면 그 결과로 창녕은 문화와 역사, 생태계 보전의 고장이 되어 조상의 찬란한 위업을 관광자원화하여 연구전진 하여야 할것이며 지방화 시대에는 우리들 스스로 알아야할 고대로부터 현재까지 찬란한 문화적 가치를 정립하고 긍지로 삼아야할 것이다. 90년도부터 향토인 몇몇이 모여 非火加耶 硏究會(창녕군 등록)를 조직하여 회원 약 20여명이 미력하나마 향토사에 일조하였음을 기쁘게 생각하며 사학에 조예깊은 박사도 두분이며 최성규선생, 국사편찬위원 4명, 기자 2명 특히 김세호 선생은 상기 3권의 책을 집필하여 전국 사학계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본 연구회원은 사명감을 갖고 연구활동에 더욱 박차를 가할것이며 사료조사, 수집, 답사, 유적의 보존등에 찬동하는 군민이나 동지가 있으면 연락주시면 배움을 같이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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