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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순례의 향기(3)
(2015. 8. 9. 안동교구)
◉ 순례 장소 : 홍유한 고택지 ➟ 우곡성지 ➟ 여우목 ➟ 진안리 ➟ 마원 ➟ 신앙고백비 (6곳)
호흡기 질환인 메르스 병 때문에 순례를 중지하는 바람에 두 달 정도 지나서 순례를 시작하니 순례의 쉼 시간을 망각하게 되어 의미가 희미해지는 생각이 든다.
출발하는 날 더위가 조금은 누그러져 시원하다는 생각들을 자매님들 이구동성으로 말씀 하신다.
순례를 바쁘게 하여 축복 장을 9월 24일 33명 받는 날.
순례를 마치신 자매님들은 2차 순례를 시작하면 좋겠다고 말씀하신다.
자기소개와 더불어 거제도에서 자매님 두 분이 성령의 인도로 참여하고
25개 성당에서 성지순례를 하며 다음 주에 ‘새로운 차’ 로 운행 할 것이며 성령과 함께하시며 운전을 잘 할 수 있도록 박수 33번 쳐주기와 옆 사람들과 ‘사랑합니다.’ 인사를 나누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처럼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사도바오로 에페소 말씀, 4.30-5.2⌉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속량의 날을 위하여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온갖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첫 번째 간 곳
홍유한 고택지
한국 교회 창립 이전 신앙생활을 실천한 선각자 홍유한의 유택지
한국 교회 창립 이전 신앙생활을 실천한 선각자 홍유한(洪儒漢, 1726~1785, 호 隴隱)의 유택지다. 경북 영주시 단산면 구구 리는 한국 천주교회 창립 이전에 이미 천주 신앙을 받아들여 심신을 연마하고 스스로 신앙생활을 시작한 첫 인물인 농은 홍유한이 1775년부터 10년간 수덕 생활을 한 곳이다.한국 천주교회가 창립된 것이 1784년, 이보다 30여 년 전에 이미 천주 신앙을 받아들여 심신을 연마한 선각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홍유한이다.
비록 물로 세례를 받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그가 천주교를 대하는 입장은 단순히 신학문으로서가 아니라 천지 만물의 이치를 밝히는 종교적 요소를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벽, 권철신 등 기호남인과 직접적 학맥과 교유관계에 있던 사람 중에서 스스로 신앙생활을 시작한 첫 인물로 꼽힌다.
홍유한은 명문가에서 태어나 9세 때에 이미 《사서삼경》과 《백가제서》에 통달하여 신동이라는 평을 들었다. 1742년 16세 때 성호 이익의 문하생이 되었으며 1751년 이익이 《천주실의》와 《칠극》 등 서학을 연구할 때, 그는 누구보다도 예리한 관찰력으로 천주교 진리를 받아들였다. 그는 오묘한 진리를 깨달아 솔선 실천하고자 1757년부터 고향인 예산으로 내려가 살았다.이곳에서 그는 스스로 터득한 신앙생활을 영위했으나, 이곳도 여러 가지 번거로움이 많아 1775년에 더 조용한 곳을 찾아 경상도 소백산 밑 구들미(현재 구구리)로 옮겨 《칠극》에서 터득한 덕행을 쌓기 위해 7일마다 하루를 축일(주일)로 정하여 속세 일을 전폐하고 기도와 묵상으로 하루를 거룩히 지내는 동시에, 육욕을 금하여 30세 이후는 정절의 덕을 실천하였다. 그는 자비심과 정의감이 투철하면서도 희비애락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는 위엄이 있었다. 본시 기질이나 신체가 강건한 편이었던 그는 지나친 고행과 절식으로 점차 몸이 쇠약해졌으나 오로지 기도와 묵상으로 만년을 보내다가 1785년 1월 30일 60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해 4월 19일에 순흥부 동쪽 문수산 우곡 골짜기에 안치되었다. 그는 천주의 존재를 굳게 믿고 계명을 지키며 덕행을 닦다가 일생을 마쳤다.현재 구구리의 하이 목에는 그 당시 그가 사용하던 대문이 아직도 보존돼 있고 경종 4년(1724년) 갑진년에 홍유한의 조부인 홍중명이 하사받은 효자문이 잘 보존돼 있다. 또한 그 밖에 권철신(權哲身, 1736~1801, 암브로시오)과 서신을 왕래하던 친필 서찰들이 후손에 의해 보존돼 있다가 현재는 천진 암의 전시관에 보관되어 있다.
▣ 천주실의(天主實義)
이 책은 이마두(利馬竇 : Matteo Ricci, 1552∼1610)가 천주의 존재를 문답식으로 서술한 책이다. 처음 이름은 천학실의(天學實義)였으나, 1601년 천주실의로 이름을 바꾸어 간행하였다. 천주실의는 모두 8편으로 엮어졌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 1편은 천지만물의 창조와 그 다스림을 말하고 여러 가지 논증을 통하여 천주의 존재를 밝히고 있다.
제 2편은 불교의 공(空)과 도교의 무(無)라고 하는 것은 절대로 진원(眞原)일 수가 없고, 유가에서 말하고 있는 태극(太極)과 이(理)도 모두 만물의 진원이 못된다. 왜냐하면 태극과 이는 다른 것에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물을 창조할 수 없다고 했다. 또 여기에서는 상제(上帝)와 하느님이 동일하다는 것을 고전(古典)을 인용해서 증거하고 있는 것이 중요한 점이다.
제 3편은 사람과 동물의 구별이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동물의 생혼(生魂)과 각혼(覺魂)은 그들 본체에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육신은 죽어도 영혼은 불멸한다. 그는 여러 가지 논리에 입각하여 영혼은 하느님의 몸이고 동물과 다른 점을 증명하고 있다. 이렇게 영혼의 불사불멸을 증명하고 있다.
제 4편은 귀신과 사람의 영혼(信體)의 성질을 상세하게 판별하여 설명하고 있다.
제 5편은 불교의 윤회설(輪廻說), 살생금지에 대한 오류를 지적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대소재(大小齋)를 지키는 것에 대한 정의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제 6편은 틀림없이 천당과 지옥이 있고, 사람이 죽은 다음에 천당과 지옥의 상벌로써 세상 사람들의 선악의 행위에 대해 보답한다고 하는 영혼의 불사불멸 론을 재강조하고 있다.
제 7편은 인성선(人性善)을 논하고 있다.
제 8편은 신부 독신(神父獨身)의 의의와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또 뒷자손이 없음이 불효가 된다는 것에 대하여 통박을 하고 정당하지 않음을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천주실의는 다른 서학서(西學書)들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도입되었는데, 특히 남인계 유학자들 사이에 널리 보급되어 많이 읽혀졌다. 천주실의가 우리나라에 도입된 것은 17세기 초가 확실하다. 왜냐하면 유몽인(1559-1623)과 이수광(1563-1628)의 저서에 천주실의가 소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 칠극(七克)
칠극(七克)은 칠극대전(七克大全)의 약칭으로 스페인 출신의 예수회 신부 판토하(Pantoja, 1571∼1618)가 지은 책이다. 이 책은 죄악의 근원이 되는 일곱 가지 뿌리와 이를 극복하는 일곱 가지 덕행을 다룬 일종의 수덕서(修德書)이다. 1614년에 중국 북경에서 7권으로 간행된 이래, 여러 번 판을 거듭하였고, 「천학초함(天學初函)」 총서에도 수록 되었으며, 이를 상·하 2권으로 요약하여 「칠극진훈(七克眞訓)」이라는 책명으로 간행되었다. 이 책은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馬竇)의 「천주실의(天主實義)」와 함께 일찍부터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연구되었고, 남인 학자들을 천주교에 귀의케 하는 데 기여한 중요한 책 중의 하나이다. 특히 성호는 그의 저서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이 책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는 곧 유학의 극기설(克己說)과 한가지라고 전제한 다음, 죄악의 뿌리가 되는 탐욕, 오만, 음탕, 나태, 질투, 분노, 색과 더불어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덕행으로 은혜, 겸손, 절제, 정절, 근면, 관용, 인내의 일곱 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또한 「칠극」중에는 절목(節目)이 많고 처리의 순서가 정연하여 비유가 적절하여 간혹 유학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점도 있지만, 이는 극기복례(克己復禮)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는 것이 있다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으며, 천주교와 유교 사이에 윤리면 에서 어느 정도 일치할 뿐 아니라, 때로는 천주교가 우월함을 은연중에 시인하였다. 그러나 그의 제자인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은 「칠극」이 공자의 이른바 사물(四勿)의 각주에 불과하며, 비록 심각한 말이 있다 하더라도 취할 바가 못 된다고 논평하였다. 한편 「칠극」은 1779년 소위 천진암, 주어사 강학에서 남인학자들에 의해 연구 검토되었음이 일찍부터 한글로 번역되어 많은 사람에게 읽혀져, 감화시켰음을 짐작할 수 있다.
♔ 한국 최초의 수덕자로서 모범을 보인 농은 홍유한의 묘가 있는 곳
한국 최초의 수덕자로서 모범을 보인 농은 홍유한의 묘가 있는 곳이다. 한국 천주교가 창립되기 이전인 1750년경부터 성호 이익 선생의 제자들과 함께 《천주실의》, 《칠극》 등 서학 문을 연구할 때 깨달은 바가 남달리 커서 《칠극》에 의한 천주교 수계 생활을 약 30여 년 동안 혼자서 수행하였다. 우곡 성지는 농은 홍유한(洪儒漢, 1726~1785, 호 隴隱) 선생이 모셔져 있는 곳이다. 농은 선생은 《칠극》에 의한 천주교 수계 생활을 28년 동안 하다가 1785년 1월 30일 60세로 세상을 떠나 그해 4월 이곳 봉화군 봉성면 문수산 산록에 있는 우곡에 안장되었다.
두 번째 간 곳
우곡성지
농은 선생은 풍산 홍 씨 양반 가문으로 정조 임금의 외가 혜경궁 홍씨의 친정 집안이다. 농은 선생은 당시 학문과 문벌이 높은 집안에 태어났으나, 과거를 보아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16세 때부터 유명한 실학자 성호 이익 선생의 문하에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러다가 1750년경부터 성호 이익(李瀷, 1681~1763, 호 星湖)의 제자들과 함께 《천주실의(天主實義)》, 《칠극(七克)》 등 서학 문을 연구할 때 그는 다른 제자들보다 깨달은 바가 남달리 커서 1757년경에는 서울의 살림을 정리하고서 충청도 예산으로 내려가서 《칠극》에 의한 천주교 수계 생활을 18년 동안 혼자 하였다. 1775년에는 옛날부터 학문의 고장인 소백산 아래에 있는 경상도 땅 순흥 고을 구고리 (영주시 단산면 구구리)로 와서 10년 동안 수계 생활을 더욱 철저히 하다가 60세인 1785년 1월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축일표도 없고 기도 책도 없이 7일마다 축일(주일)이 온다는 것만 알고 매달 7일, 14일, 21일, 28일에는 경건하게 쉬고 이런 날에는 속세의 모든 일을 물리치고 기도에 전념하였다. 또 금육일(대재, 소재)을 몰랐으므로 언제나 가장 좋은 음식은 먹지 않는 것으로 규칙을 삼았다. 이렇게 열심히 수덕 생활(修德生活)을 하는 동안에 정조 임금께서 두 번이나 스승으로 궁중에 모시려고 했으나 사양하였다. 그러다가 1785년 1월 30일(음) 60세 나이로 세상을 떠나서 그해 4월에 이곳 봉화군 봉성면 문수산 산록에 있는 우곡에 안장했다.
한편 그의 집안 후손 중에는 교회 창립의 주역인 순교자 권철신(權哲身, 1736~1801, 암브로시오) 집안과 칠촌 조카인 순교자 홍낙민(洪樂敏, 루카, 1751~1801), 홍재영(洪梓榮, 1780~1840, 프로타시오, 홍낙민의 아들), 이조이(李召史, 홍낙민의 며느리), 103위 성인 홍병주(洪秉周, 1798~1840, 베드로)와 홍영주(洪永周, 1801~1840, 바오로) 등의 순교자가 있다.홍유한 선생 가계 가운데 그 분의 뜻을 이어 피를 흘리며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은 13명이나 된다. 후손들이 선조 순교자들을 현양하기를 원했으나 각지에 흩어져 있는 선조 순교자들의 유해를 찾을 길 없어 고심하던 중, 선조(先祖)인 홍유한 선생의 묘소가 있는 이곳에 13위(位) 순교자들의 가묘(假墓)라도 함께 모실 것을 안동교구에 청하였고, 교구는 이들의 신앙적 열성을 받아들여 후손과 함께 교구 설정 40주년이 되는 2009년 5월 29일 13위(位) 순교 선조들이 순교한 각 순교 터의 흙을 담아 가묘를 조성하고 비를 세워 현양하고 있다.
▣ 《칠극(七克)》
《칠극대전(七克大全)》의 약칭. 저자는 스페인 출신의 예수회 신부 판토하(D. Pantoja, 龐迪我, 1571∼1618). 죄악의 근원이 되는 일곱 가지 뿌리와 이를 극복하는 일곱 가지 덕행을 다룬 일종의 수덕서(修德書)이다. 1614년에 중국 북경에서 7권으로 간행된 이래, 여러 권 거듭하였고, 《천학초함(天學初函)》 총서에도 수록 되었으며, 이를 상·하 2권으로 요약하여 《칠극진훈(七克眞訓)》이라는 책명으로도 간행되었다. 이 책은 마테오리치의 《천주실의(天主實義)》와 함께 일찍부터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연구되었고, 남인 학자들을 천주교에 귀의케 하는 데 기여한 책 중의 하나이다. 죄악의 뿌리가 되는 오만, 질투, 분노, 음란, 인색, 식탐, 나태 등 칠죄종(七罪宗)과 더불어,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덕행으로 겸손, 인자(사랑), 인내, 정결, 시사(베품), 담박, 근면 등 일곱 가지를 다음과 같이 차례로 소개하고 있다.
① 겸극오(謙克傲 - 겸손으로 오만함을 이겨 냄)
② 인극투(仁克妬 - 사랑으로 시기와 질투를 이겨 냄)
③ 인극로(忍克怒 - 인내심으로 분노를 이겨 냄)
④ 정극음(貞克淫 - 정결로 음욕을 이겨 냄)
⑤ 사극린(捨克吝 -베푸는 마음으로 인색함을 이겨 냄)
⑥ 담극도(淡克도<號+食> - 담박한 생활로 탐욕을 이겨 냄)
⑦ 근극태(勤克怠 - 부지런함으로 게으름을 이겨 냄)
세 번째 간 곳
여우목성지
병인박해 때 여우목 성지 교우들이 신앙을 증거하던 곳
문경 관아는 병인년 11월 여우목 마을의 교우 30여 명을 체포하여 3일간 혹형과 고문을 가한 곳이다. 동헌은 이제 주춧돌만 남아 운동장에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객사 건물 관산지관(冠山之館)은 박해 당시 너무 많은 신자들을 체포하여 옥이 넘쳐 이곳에도 가두어 놓았던 곳이다.1866년 11월 18일(음 10월 12일)에 문경 관아의 포졸들은 여우목에 들이닥쳐 당시 회장인 이윤일(속명 제헌, 1823~1867, 요한)성인을 비롯하여 그의 부인, 큰 며느리(공주에서 순교한 이 시몬의 처)와 아들 하나, 그 외 30여 명의 신자들을 체포하여 문경 관아로 압송하여 갔다. 문경은 그 주변에 많은 교우 촌들이 있어 박해 때 마다 많은 신자들이 문경 관아에서 신앙을 증거하였다.
여우목 성지는 이윤일 요한과 서치보 요셉 가정에 의하여 이루어진 교우 촌이다.
부근의 교우촌인 ‘건학’과 ‘부럭이’는 산길로 불과 20~30리 내에 있다.
그러므로 이들 세 교우촌은 처음부터 서로 빈번한 접촉을 하면서 서로 도와가며 열심한 교우 촌을 이루어 살고 있었던 곳이다. 이윤일 성인은 문경 관아에 잡혀 온 후 교회의 두목이라 해서 한실 공소 김 회장과 함께 경상감영이 있는 대구로 이송되어 1867년 1월 21일에 대구 관덕정 형장에서 참수 치명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45세였다. 문경 지방에 천주교가 전래하게 된 것은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충청도 지방의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고향과 가산을 버리고 찾아들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문경, 한실, 여우목, 건학, 부럭 등 여러 곳에서 화전을 이루어 교우 촌을 형성하고 살았던 유서 깊은 곳이기 때문에 박해 때마다 많은 신자들이 문경 관아에서 신앙을 증거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문경 관아는 종6품의 현감을 그 관장으로 하는 문경현의 관아로서, 군사적으로 경상우도(慶尙右道) 상주진관(尙州鎭管, 종3품의 첨절제사 진영)에 속하는 종6품의 절제도위(節蹄尉)가 파견되어 있었다. 천주교 신자들은 대체로 현감에게 끌려가 심문을 받았던 것으로 보이며, 배교를 거부하는 주요 신자들은 상주 진영으로 이송되어 진영장(鎭營將, 정3품직)을 겸임하던 첨절제사에게 신문을 당했던 것으로 여겨진다.관산지관은 문경서중학교 운동장 우측 모서리 약간 높은 곳에 남향하고 있다. 원래 주관과 부속관인 좌·우익사가 있었으나 지금은 주관과 좌익사만 남아있다. 언제 처음 지었는지는 알 수 없고, 다만 인조 26년(1648년)과 영조 11년(1735년)에 고쳐지었음을 알 수 있다. 일제 시대에는 군 청사와 문경서중학교 건물로 이용하였다.
▒ 관산지관(冠山之館)
좌·우익사우익사의 철거 연대와 그 연유는 알 수 없다. 주관(정청)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고, 좌익 사는 정면 2칸, 측면 2칸인데 두 건물이반 칸 정도 거리를 두고 서로 떨어져 있다. 좌익 사는 왼쪽에 1칸 마루를 두고 그 오른쪽에 반 칸 규모의 툇마루를 들인 1칸 온돌방을 앉혔다. 마루는 개방되어 있고 온돌방은 정면과 좌측면에 쌍여닫이 굽널띠 살문이 나 있다. 이는 우리나라 객사의 전형적인모습이기도 하다.
▒ 경상우도(慶尙右道)
조선 중종(中宗) 때 경상도를 양분하여 서울의 임금이 보았을 때 그 오른쪽 지역(실제 지도상에서는 서쪽)에 속하는 여러 군(郡)을 통칭한 행정 구역이다. 성주·선산·금산·개령·지례·고령·문경·함창 등(이상은 尙州鎭에 속함)과 합천·초계·함양·곤양·남해·거창·사천·삼가·의령·하동·산음·안음·단성 등(이상은 晉州鎭에 속함), 그리고 창원·함안·거제·고성·칠원·진해·웅천 등(이상은 金海鎭에 속함)의 28군을 우도라고 하였다.
■ 순교자◆ 성 이윤일 요한 (1823∼1867)
‘제헌’으로도 불렸던 이윤일은 충청도 홍주(洪州) 출신의 태중 교우로, 경상도 문경의 여우목골에 살며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의 여파가 경상도에 이르자 그 해 11월 가족, 마을 교우 30여 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문경 관아에서 사흘 동안 혹형과 고문을 받은 뒤 배교하지 않은 교우들과 함께 상주로 이송되었고, 상주에서 한 달에 세 번씩 석 달 동안 혹형과 고문을 받고 나서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그는 대구 감영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여유롭고 기쁜 마음으로 기도하며 지내다가, 1867년 1월 21일 대구 남문 밖 관덕정에서 참수형을 받아 45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 성 이윤일 요한과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이윤일 요한과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교우들이 어떠한 어려움도 잘 이겨내도록 빌어 주소서.
넷 번째 간 곳
진안리 성지
증거자 ‘하느님의 종’ 최양업 신부가 선종한 곳
진안리는 영남의 관문인 새재와 이화령 고개 갈림 길에 위치해 있으며 사목 보고차 서울로 올라가다가 갑자기 병을 얻어 선종한 최양업 신부를 기리기 위해 조성된 성지다.12년 동안 온갖 고통을 겪으면서도 포교 활동을 한 위대한 사목자의 선종지다.‘새재’라고 하는 조령(鳥嶺)은 옛날 영남 지방에서 서울로 가는 통로며 군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요새다. 그러므로 조선조 숙종 34년(1708년)에 영남의 현관인 이곳에 관문과 성벽을 축조하였다. 제1 관문인 주흘관, 제2 관문인 조곡관, 제3 관문인 조령관이 서 있는데 각각 약 3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이렇게 이 지방이 충북과 경계를 이루는 영남의 관문이기에 과거 보는 과객(科客)은 물론, 최양업(崔良業, 1821~1861, 토마스) 신부와 칼레(Calais, 姜, 1833~1884, 아돌프) 신부 등 선교사들과 교우들이 몰래 관문 옆 수구문을 통해서 충청도와 경상도를 넘나들며 선교 활동과 피난길로 이용했던 유서 깊은 곳이다.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증조부 때부터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구교우 집안에 태어났으며 그는 1836년 모방 신부에 의해서 최방제(崔方濟, 일명 과출이, 1820?~1837,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김대건(金大建, 보명 芝植, 1821~1846, 안드레아)과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중국 마카오로 가서 신학 공부를 한 뒤 한국 교회에서는 김대건 신부에 이어 두 번째로 1849년 4월 15일에 사제품을 받았다. 그해(1849년) 12월 변문을 떠나 입국에 성공하였다. 실로 마카오 신학교를 떠나 조선 귀국을 시도한 1842년 6월부터 계산해 볼 때, 그 다섯 번째 시도로 7년 6개월 만에 입국에 성공한 것이다.
그 후 12년 동안 매년 5,000~7,000리를 걸어 다니거나 또는 말을 타고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등의 교우촌과 외교인들이 살고 있는 반촌과 빈촌을 사도 바오로처럼 온갖 고통을 겪으면서도 찾아 다녔고 그렇게 열심히 포교 활동을 하다가 1859년 말부터 1860년 경신박해를 맞아 경남 언양의 간월산 동굴에서 3개월간 피신을 하였다.마침내 1860년 8월 박해가 끝난 후에 매일 80~100리를 걸으면서 밀린 교구 방문과 사목 활동을 하고서 그 이듬해인 1861년 6월에 서울의 베르뇌 주교에게 사목 보고를 하러 가다가 문경 새재와 이화령 고개의 넓은 갈림길인 문경시 진안리의 오리티 주막에 들렀다가 식중독에 과로와 장티푸스의 합병증으로 문경읍내 교우 약국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6월 15일 40세의 나이로 선종하였다. 선종하기 전 배론 신학교의 푸르티에(Pourthi´e, 申妖案, 1830~1866, 가롤로) 신부가 병자성사를 주었다. 최 신부의 시신을 푸르티에 신부의 지도로 상여를 꾸며 배론 으로 운구하여 베르뇌 주교의 집전으로 뒷산에 안장하였다.
- 십자가의 길 하는 모습 -
▒ 최양업 신부의 선종 장소
같은 시기의 선교사들의 서한에도 구체적인 장소는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후대의 증언 자료를 가지고 선종 지역을 추정하는데, 현재까지 문경이었다는 주장이 대세였지만 청주교구 진천군 지역이라는 주장도 있다. 문경 지역 내에서도 문경 새재의 주막이 있던 진안리와 문경 읍내 약국 이 씨 집에서 선종했다는 주장이 있다. 일설에는 최 신부가 문경에서 발병하였으나 말을 타고 베티 또는 진천군의 어느 교우 촌까지 버티며 가서 결국 그곳에서 선종하였다고 한다. 최양업 신부의 선 종지와 관련된 논란은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에서 2007년 12월에 펴낸 《최양업 신부의 사목 지역과 선종지 연구》에 상세하게 잘 정리되어 있다.
◆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1821∼1861) <하느님의 종>
우리나라 제 2대 방인 사제, 1821년 3월 1일 충청도 다락골 출생, 1836년 모방 신부에 의해 신학생으로 발탁되어 마카오 에서 유학 생활을 하였다. 1844년 김대건 신학생과 신학 과정을 끝낸 뒤 페레올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고 1845년부터 입국을 시도하였다. 1849년 4월 15일 강남교구장 마레스카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고 김대건 신부에 이어 한국의 두 번째 신부가 되었다. 7년 6개월 동안 5번의 입국을 시도하여 성공하였으며 사목활동 12년 만에 과로로 쓰러져 장티푸스로 선종 하였다. 19통의 라틴어 서한 <한국 순교자전> 을 번역 교황청에 올려 가경자가 되게 했고, <성교요리 문답>, <천주성교공과> 등 교리 문답서나 기도서를 간행하였으며 그밖에 다수의 천주가사를 저술했다. 초대 성 김대건 신부에게는 피의 순교 정신, 2대 최 신부에게서는 땀의 순교 정신을 배울 수 있다.
다섯 번째 간 곳
마원 성지
신부님과 신자의 우정을 기리며 조성된 순교자 박상근의 유해를 모신 성지
마원 성지는 1801년 신유박해 이후 문경 지방으로 숨어든 충청도 교우들에 의해 형성된 교우 촌으로 병인박해 당시경상도 북부 지역 사목을 담당하고 있던 칼레 신부를 모시며 신앙생활을 했던 순교자 박상근 마티아의 유해가 모셔져있는 곳이다. 죽음을 무릅쓰고 신부님을 모신 일화가 남아 있다.문경 지방에 천주교가 전래하게 된 것은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충청도 지방의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고향과 가산을 버리고 찾아들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영남 북부의 험준한 산악 지대는 눈을 피해 은신하기에 적합했다. 문경, 한실, 여우목[狐項里], 건학, 부럭 등 이러한 곳들은 신앙의 선조들이 화전을 이루어 교우 촌을 형성하고 살았던 유서 깊은 장소들이다.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이곳에 숨어 살던 교우들 가운데 40여 명이 붙잡혀 상주, 대구 등지로 압송되어 갖은 고문과 혹형을 당한 끝에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특히 30세의 젊은 나이로 장렬하게 순교한 박상근(1837~1866, 마티아)은 문경 토박이로 아전이었다고 전해지며 그는 아마도 신유박해 이후 이 지방으로 숨어든 충청도의 신자들과 접촉을 하게 되면서 지방인으로서는 비교적 빠른 시기에 입교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칼레(Calais, 姜, 1833~1884, 아돌프) 신부의 전교 기록에 보면 문경에서 가까운 백화산 중허리에 자리 잡은 한실에 신자 집이 서너 집씩 무리 지어 산재해 있었다고 하는데 이곳 신자들의 영향으로 그의 집안이 천주교를 믿게 된 것으로 보인다. 또 칼레 신부는 그의 출중한 신앙심과 죽음을 무릅쓰고 신부를 자신의 집에 은신시킨 용기에 대해 치하하고 있다. 결국 병인년 12월에 체포된 그는 평소 친분이 있었던 문경 현감의 간곡한 배교 권유를 단호하게 물리치고 교수형을 받고 치명하였다.박상근 마티아의 묘가 발굴된 것은 1985년 9월의 일이다. 마원리 박 씨 문중 산에 대대로 내려오는 묘가 있었는데 여러 정황과 증인들의 증언을 종합해 볼 때 이 묘가 《치명일기》에서 말하던 순교자 박 마티아의 묘인 것으로 확인됐다. 안동교구는 마원에 순교 성지를 조성키로 결의하고 유해를 모신 데 이어 다각적인 성지 개발 계획을 활발하게 추진하는 한편 순교자의 뜻을 기리기 위한 현양 대회를 꾸준히 실시하고 있다. 125위 시복시성 추진 대상자 중의 한 분으로 ‘하느님의 종’으로 불린다.
◆ 박상근과 깔레 신부의 일화
경북의 사도 깔레(Calais) 강 신부(1833∼1884)는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 선교사로서 1860년 7월 5일 사제 서품을 받고 이듬해 4월 7일 한국에 입국, 1866년까지 5년 동안 경상도의 서부 지역에서 전교 활동을 벌였다. 1866년 병인박해로 여러 차례 위험을 넘기고 산속에 피신해 있다가 이해 10월 페롱 신부와 함께 한국을 탈출, 중국으로 피신하였고, 이듬해부터 여러 번 한국 입국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병인박해 때 얻은 병이 악화되어 부득이 프랑스로 귀국하였다. 1869년 4월 시토회 수도자가 되어 모벡(Maubec) 수도원에서 한국 교회를 위해 기도하며 일생을 마쳤는데, 그 당시 전교 하면서 쓴 선교 체험기가 귀중한 자료로써 남아있다. 그의 선교 체험기 중에서 순교자 박상근 마티아와의 우정을 기록한 글이다.“한실 윗산까지 가려면 이제 20리 정도 남은 것 같소. 나 혼자서도 거기까지 갈 수 있을 것이오. 마티아는 너무 지쳤으니 이 근처 마을로 내려가 먹을 것을 얻도록 하시오.” “아니, 신부님! 어떻게 신부님도 잘 모르시는 이 산속에 신부님만 혼자 가시도록 둘 수 있겠습니까? 안됩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만일 한실도 포졸들의 습격을 받아 폐허가 되었다면 신부님은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신부님이 가시는 곳이면 저도 가겠습니다. 신부님이 이 깊은 산속에서 돌아가신다면 저도 같이 죽겠습니다.”라고 마티아는 대답하였다. 이처럼 서로 조금도 양보하지 않게 되자, 지쳐 쓰러질 지경에 이른 마티아를 더 이상 고생하도록 내 버려 둘 수 없었던 깔레 신부는 본마음과는 달리 준엄한 명령조로 마티아에게 말했다. “마티아, 나는 당신에게 명령합니다. 당신이 가져온 마른 과일의 반은 당신이 가져가고 나머지 반은 내게 넘겨주시오. 그리고 내 말에 복종하시오!” 이 말을 듣자 마티아는 통곡하면서 강 신부님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강 신부님도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서로 굳은 악수를 나눈 뒤 두 사람은 서로 헤어졌다. 강 신부는 산길을 계속 갔지만, 마티아는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서 사라지는 강 신부를 울며 바라보고 있었다.”
▒ 끝까지 하늘 바라보던 (마원에서) <김영수> ▒
하늘 포근히 안고 있는 산자락들
사방에서 내려와 닿은 곳엔
칼끝 이슬 한 방울로
영원 밝히는 젊음 하나 있습니다.
끝까지 하늘 바라보던 눈빛
칼 받으면서도 간직했던 노래
뜨거운 꿈 품고 산다는 게
그토록 황홀한 죄일까요.
내게 허락된 죄는 무엇일까요
늦가을 시린 바람에
이마 대고서야 알아보는 삶
그것은 너무나도 남루한 나의 땅
너무나도 아린 나의 하늘
나는 언제 제단에 올려진 꽃들에
작은 잎 하나 물들이며
꿈 밝힐까요?
◆ 복자 박상근 마티아(1837∼1867)
박상근 마티아는 경상도 문경에서 아전(하급 관리)을 지낸 사람으로, 중년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교리의 가르침을 착실하게 지키면서 생활하였다. 또 관청에 있었으므로 신자들이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많은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그는 깔레(Calais, 姜) 신부로부터 성사를 받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난 뒤, 마티아는 좁쌀을 사기 위해 깔레 신부가 숨어 있던 한실(현 경북 문경군 마성면 성내리)로 갔다가 깔레 신부와 함께 문경읍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와서 신부를 숨겨 주었다. 3일 후 마티아는 깔레 신부와 둘이서 새로운 은신처를 찾기 위해 다시 한실로 가야만 하였다. 이때 깔레 신부는 한실 교우 촌이 보이는 산에 오른 뒤 그에게 집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그가 위험에 빠지는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는 울면서 따라가서 도와드리기로 애걸했으나 결국 깔레 신부의 명에 순종하여 그와 이별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얼마 후 숙모 마리아와 친척 박 막달레나와 함께 체포되어 상주로 끌려갔다. 상주 옥에는 문경 인근에서 끌려온 교우들이 많이 있어 권면하였고, 많은 교우들이 여기에 용기를 얻어 순교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옥중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67년 1월(음력 1866년 12월)로, 당시 그의 나이는 30세였다.
여섯 번째 간 곳
신앙고백비
자기 신앙의 증거를 위해서 돌에 새긴 신앙 고백
한불 조약 이후에 국가 차원의 공식적인 박해가 끝나고 제한적인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기 시작할 무렵 경상도 상주의 김삼록 도미니코는 석단산 아래 현재 청리면 삼괴2리 안 골짝의 쌍바위 중 오른쪽 큰 바위 위에 자기의 믿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신앙고백비를 건립하였다.
경북 상주시는 1785년 을사추조적발사건 때 문중 박해로 서울서 낙향한 서광수(徐光修, 1715~1786) 가정에 의해서 복음이 전파된 이후 일찍부터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를 믿게 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를 비롯해서 1827년 정해박해 등 역대 박해 때마다 많은 신자들이 순교를 당했다.청리면 삼괴 2리 부락에는 1866년 병인박해 전부터 김해 김 씨 집안의 김복운의 아들 4형제 중에 장남인 삼륙과 차남인 삼록 등 형제들이 열심히 천주교를 믿었다. 그러나 병인박해가 일어남으로써 다른 형제들은 믿음을 중단해 버렸고 둘째인 삼록(1843∼1935) 만이 끝까지 천주교를 믿었다. 그는 박해 중에는 여러 곳으로 피신을 다니다가 1894~1900년 초에 그와 그 집안의 문중들이 살고 있던 석단산 아래 큰 바위 위에 자기의 믿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신앙고백비를 건립하였다.
신앙고백비의 크기는 높이 127㎝, 폭 39㎝, 두께 22㎝다.
이 신앙고백비 건립 때 비용은 쌀 5가마와 상당한 금액이 들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비석에 비문과 글씨는 자기가 손수 써서 새겼다. 그런데 이 비석 건립 비용들은 거의 다 김삼록 본인이 부담했으며 그때 청리면 삼괴 1리에 살던 이갈 방 노인(본명 미상) 등 몇몇 신자들도 합심해서 보태었다고 한다.한편 이 신앙고백비의 건립 시기는 그의 손자인 김순경 노인의 증언과 신앙고백비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1894~1900년 초로 추정된다. 김삼록이 이 신앙고백비를 세운 뒤에도 아직 지방에 사사로운 박해가 있었으므로 이 신앙고백비를 가리기 위해서 비석 앞에 포플러나무, 미루나무 외 잡나무들을 많이 심어서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잘 보지 못하도록 가려 두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그의 손자인 김순경이 모든 잡목들을 베어 버려서 어느 정도 앞이 트였다.
♝ 신앙고백비 비문
전면(前面)
第一 天主恐衛咸 첫째는 천주님을 두려운(마음)으로 모신다.
第二 敎化皇衛咸 둘째는 교황님을 받들어 모신다.
第三 主敎衛咸 셋째는 주교님을 받들어 모신다.
第四 神夫衛咸 넷째는 신부님을 받들어 모신다.
(*神夫는 神父의 誤字임)第五 敎于衛咸
다섯째는 신자들(교우)을 받들어 모신다.
(*敎于는 敎友의 誤字임)
奉敎人 金道明告 (천주)교인 김 도명고(도미니코) 제작癸卯年 本 盆成 金(金海) 계묘년(1843)에 출생,
본관은 분성(김해)김이다.
◆ 김삼록 도미니코
김삼록의 가정이 언제부터 천주교를 믿었는지 확실히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1866년 병인박해 전 이미 형제들이 신앙을 받아들여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박해가 일어나자 맏형 삼륙(三陸) 등은 박해가 무서워서 믿음을 버렸고 오직 둘째 김삼록만은 계속 천주교를 열심히 믿으며 박해를 피해 다녔다. 1866년 한불 조약 후 공식적인 박해가 끝난 후인 1894∼1900년 초에 자기 집뒤인 석단산 아래 큰 바위 위에 이 신앙 고백비를 세웠다. 그는 농촌에서 농사를 짓는 순박한 신자이지만 아마 구한말부터 의병운동과 독립운동에 가담을 했던 것 같다. 즉 그의 손자인 김순경의 증언에 의하면 1910년 국권 피탈 그 무렵부터 내내 일본 순사들이 그의 뒤를 미행했으며 또한 그를 체포하기 위하여 몇 번이나 집에 찾아왔지만 미리 주위에서 알려 주어서 피신했기 때문에 체포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 독립운동은 당시 김문옥 신부를 도와서 문경의 공평 성당과 상주 서문동 성당 전교 회장을 하면서도 민족 사상을 가졌던 최동선 회장과 어떤 연관이 있지 않은가 싶다.
우곡성지에서 미사를 보았다.
신부님 말씀,
우리들은 하느님 은총 속에서 살며 예수그리스도님 그 분 안에서 살아가는 삶이되어야하며
삶이란,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라
이 세상 사람들을 다 평등하게 은총을 주시지만 주님을 믿느냐 안 믿느냐 그것은 개인의 자유다.
여기에 홍유한 성인은 최초의 수덕자로서,
첫째 : 세례를 받지 않고 책으로만 기도생활 하신 분.
둘째 : 교리책대로 삶의 생활 함.
셋째 : 순교자 가족 (4대 순교자 집안, 순교자 13명).
순례란,
선조신앙인들이 하느님을 믿고 따르고
예수님의 가신 길을 깨닫고 세상 살아가면서 우리들이 실천하는 것은
서로사랑 하여라. 서로 용서하여라.
우리들이 성체를 모시면서 하느님을 잘 알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얻을 수 있도록 은총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순례라고 생각한다. 삶의 자리로 돌아가서 주님의 일군으로 전도하면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고 말씀하신다.
오늘은 연중 제 19일 주일입니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생장을 위하여 농작물과 나무에 물이 필요하듯이,
이 세상에서 신앙의 여정을 걸어가는 우리에게도 원동력이 되는 양식이 필요합니다.
생명의 빵을 주시고자 오늘도 우리를 당신 순례의집에 초대하시는 주님께 감사드리며, 정성된 마음으로 우곡성지에서 미사를 봉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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