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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태 사 상 스크랩 불교교의의 천태해석과 원융사상의 구현
곽내혁흐름 추천 0 조회 78 16.07.12 05:2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21세기, 불국정토 실현을 위한 천태종단의 역할

불교교의의 천태해석과 원융사상의 구현

 

지 창 규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교수

 

 

1. 한국 불교와 천태종

 

한국 불교의 역사는 불교 전래 이래로 찬란하게 빛을 발했으나 조선시대의 억불정책으로 말미암아 불교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말살되었다. 불교계로서는 참으로 큰 시련이었다. 근근이 맥을 이어오던 불교는 근대기에 다시 점화되어 지금까지 타오르고 있다. 요즈음 우리나라 불교가 비록 그 교세는 괄목할 만한 신장은 했다고 하더라도 여러 면에서 이웃 일본에 비하면 아직도 낙후되어 있는 실정이다.

근대기에 동국대학의 개교와 함께 시작된 불교학은 일본 불교학을 아직도 아무런 비판없이 그대로 따르고 있는 수준일 뿐이고,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禪불교도 천년 이상의 찬란한 전통을 갖는다고는 결코 볼 수 없을 정도로 미숙할 따름이다. 불교의 다양한 종파는 온데 간데 없이 오직 중국 선종만이 한국불교를 대표할 뿐이다. 그것도 한 종파의 선종만이 들어와 성행함에도 아직도 그것을 불교의 전체라고 믿고 있을 따름이다. 너무도 아쉬운 것은 불교에 대한 반성적 고찰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선종에 대해 반성적 고찰 없이 수용하였다가 이제는 이마져도 등지고 있으며, 禪이 지닌 참된 가치를 모르는 대다수의 수행자들이 남방에서 헤매고 있다. 위빠사나가 전래되면서 전통적인 禪은 큰 위기를 맞은 것이다. 천 년 이상을 불교문화를 찬란하게 꽃피웠다고 하는 선종의 자부심은 여지없이 구겨지고 말았다.

천태종은 조선 초기에 선교양종으로 되면서 그 失宗을 면치 못하였다. 그러던 것이 근래에 들어 상월원각대조사에 의해 소백산 구인사에 천태종이 다시 복종된 이후에 불과 오십년도 채 안 된 사이에 보인 가시적인 교세는 분명 괄목하다고 하겠다. 하지만 이론과 실천의 내용면에서는 향후 정립해 나가야 할 것이 많다. 무엇보다도 천태지관에 관해서 보다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적어도 천태라고 한다면 천태대사의 저술인 三大部를 위시하여 천태 저작들이 읽혀지고 연구되며 수행되어야할 것이다.

한국 천태종에는 중국이나 일본의 천태종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점이 있다. 이것을 한국적 특수성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본래 천태대사의 정신이 살려져야 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천태종이라는 종명을 썼기에 필연적인 것이다. 그러면 한국적 천태종의 특수성을 감안하면서도 천태종의 보편적인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서 필요한 작업을 구상해 보기로 한다.

 

 

2. 중국불교를 확립한 천태대사

 

천태대사의 가장 큰 업적은, 중국에 전래된 인도의 불교를 중국화 시켰다는 점이다. 중국불교가 확립하게 된 이유에는, 원전의 번역이라는 역사적인 과업과 그에 따른 전문적인 연구가 그 토대를 마련한 것이지만, 양대문화권의 사회적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고 중국불교의 독자적인 체계를 능동적으로 이끌어 간 것에 있다. 그것을 이루어낸 것은 천태라고 단언할 수 있다. 즉 천태의 업적은, 그때까지 정착되지 못한 중국의 불교를 완전히 중국적으로 변모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중국적 토대 확립은 훗날 화엄?선?정토와 같은 종파가 중국의 종파로 굳히는데 이바지한 것이다. 따라서 인도불교에서 중국불교로 이어지는 불교사 가운데 불교 정통의 맥을 그대로 간직하면서도 그 형식과 내용을 중국적으로 전개시킨 천태에 불교사적 의의를 부여할 수 있다. 불교의 중국화라는 점에서 천태의 업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교관일치를 완성함으로써 불교의 기틀을 마련하였다는 점이다. 敎觀雙修라 하여 교관일치로 표현되는 불교의 기치를 마련하여 남북불교를 통합하였다. 남쪽에는 이론에 치중하고 북쪽에서는 실천만을 강조하는 당시의 편협된 불교를 통합함으로써, 불교의 종합적 완성을 가져 왔다.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로, 이론은 이론만으로 실천은 실천만으로 편향적으로 전개된 중국불교는 정통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매우 기형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지 어언 수백 년 만에 이러한 불교의 문제점을 직시하고 이것을 해결하려는 노력이 천태대사에 의해 시도되었다. 천태대사는 교리를 대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것에 입각하여 실천불교를 창시하였다. 당시에 강남에서는 의해불교라 하여 이론불교만이 성행하여 경전의 해석에만 몰두하였으므로 이해한 것을 실천하고자 하는 경향은 없었다. 그런데 천태대사는 경전을 해석하는 것에 그치는 것은 진실한 불교가 아니라고 하면서, 진실한 불교는 주체적으로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이로써 천태대사가 강남불교를 이론불교에서 실천불교로 방향을 전환시킨 공적은 매우 크다고 할 것이다. 불교는 단순히 앎의 학문도 아니고 반대로 단순히 맹목적인 닦음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다. 천태대사가 자주 강조한 것과 같이, 선정과 지혜는 상의상관의 관계에 있는 것인데, 지혜가 없는 선정은 맹목이고 선정없는 지혜는 공허하다고 한다. 천태대사는 文字法師闇證禪師를 배척하여 교관상관의 원칙에 따라 불교를 敎相과 觀心으로 나누고 이것을 수레의 두 바퀴와 같다고 하였다. 敎觀雙美는 바로 천태불교만이 독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一乘의 이론과 실천을 확립함으로써 중국불교의 토대를 이루었다. 다시 말하면 三大部를 통하여 불교의 교리와 수행을 圓頓化로 정착시킴으로써 중국불교 확립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그리하여 그 이후 다른 종파들이 일승법의 토대 위에서 종지를 세울 수 있도록 하였다. 즉 화엄종에게는 일승교학의 전개방식을, 선종에게는 구체적인 원돈의 수행방식을, 그리고 정토종에게는 실상신앙의 이론적 근거와 절차를 마련해 주었다. 또한 진언종에게 원돈의 다라니법을, 심지어는 계율종에게도 원돈계를 제시함으로써 중국의 거의 모든 종파가 일승원돈으로 종지를 세울 수 있게 된 것이다.

셋째, 불교가 世間法으로도 활용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하였다. 수(隋)라는 통일국가에 이념을 제공하여 불교가 出世間法만이 아니라 世間法으로도 활용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하였다. 더구나 승속을 불문하고 모든 이에게 법을 펴고 또 放生池를 설정하는 등 불교교화의 전형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이후 불교인의 귀감을 샀다. 남북조 梁?陳으로부터 隋代에 이르는 중국 역사상 가장 난세에 중국적인 불교를 이루어 羅什三藏 이후에 촉발된 중국불교의 토착화에 결실을 맺었다는 점에서 천태대사를 중국불교의 확립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천태는 중국적 특색이 짙은 불교를 만들었지만 그럼에도 정통 불교를 철저히 계승하였다고 할 수 있다. 龍樹보살 이후 이론과 실천이 어우러진, 다시 말하면 戒定慧로 이루어진 가장 정통적인 불교를 건립한 것이다. 천태산 수행과 금릉의 포교활동으로 알 수 있는 것처럼, 천태대사는 불교 이념인 自利利他, 智慧慈悲를 중국불교사상 그 어느 누구보다도 충실히 실행한 분이다. 上求菩提 下化衆生이라고 하는 사홍서원의 제창이 천태대사의 보살정신을 분명히 확인케 하는 것이다. 격동하는 정세를 확고한 불교관으로 대처하면서 수행과 교화로 일관한 그의 생애는, 청정한 계행과 선정과 지혜가 어우러져 중국의 작은 석가라고 불리우고 있다.

이와 같이 불교의 중국적 변용을 최초로 이루었으면서도 정통 불교를 계승하고 발전시킨 천태대사의 불교 수용방법을 우리는 반드시 습득하여 활용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은, 1400년 전의 천태를 그대로 고수하자는 것은 아니다. 인도와는 다른 토양에서 중국불교를 만들어간 천태의 방법론을 활용하여 우리만의 독창적인 천태종을 건립코자 하는 것이다.

 

 

3. 불교 교의의 천태적 분류와 해석

 

天台敎觀은 ?法華經?을 중심으로 한 圓融적 해석에 바탕을 두고 교리와 수행을 총망라한 조직이다. 당시까지 전래된 경전을 분석하고 정리하여 敎相判釋의 모범을 보이면서도 아울러 실천수행적 觀心과 觀行을 병행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경전에 바탕을 두고 止觀修行을 해야 한다는 敎觀一致를 제창하였던 것이다. 지나친 이론적인 연구나 무조건적인 실천수행에만 매달린 당시의 교계 풍토에 일대 경종을 울린 것이다.

먼저 천태교판의 대표적인 化法四敎는, 五時?化儀四敎와 더불어 五時八敎교판조직을 형성하면서 교리와 수행을 체계화하고 있다. 그 가운데 특히 진실법문이라고 하는 圓頓敎相 즉 圓敎를 부처님의 경계라고 하며 그 경계를 수행하는 것을 수행의 골자로 하고 있다. 圓敎는 바로 부처님의 경계로서 모든 대승경전에 다 들어 있을 뿐만 아니라 비밀교와 부정교로 본다면 소승경전까지도 圓敎가 담겨 있고 또 圓敎의 이익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天台敎判은 법화우월을 입증시키기 위한 宗派적 敎判이 아니라 불타의 內心을 이끌어내기 위한 敎相적 敎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化法敎判은 불타 교설 전체를 내면적으로 분류한 후에 종국적으로는 모든 경전과 교설에 절대의 가치를 부여하는 圓敎開顯의 敎判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진정한 불교라면 교리가 있게 되면 수행이 따라야 하는 만큼, 교리에는 반드시 수행체계가 구비되어야 한다. 따라서 불교의 敎觀적 구성은 天台의 化法敎判에 의해 조직적으로 체계화되는 것이다. 이 때, 化法敎判은 불교체계로 그 역할을 완전히 전환하게 된다. 이와 같은 점으로 미루어 볼 때, 天台敎判은 경전이나 종파의 우열을 논하는 우열판단론이 아니라 佛陀의 開顯思想에 따라 분류한 교리수행론이라고 할 수 있다. 종파적 테두리를 벗어나 이론과 실천을 겸하는 보편적인 불교 체계라는 점이다. 이러한 점에서 天台敎判은 바로 天台敎觀이고 天台佛敎라는 점을 동의하지 않을 이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임무를 다할 수 있도록 한 요인은, 불타 교설의 내면적 분류인 化法四敎임을 다시 한 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이것은 단순히 敎法의 우월을 외형에 따라 가리는 것이 아니라 불타 교설 전체를 내면적으로 분류한 化法四敎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천태를 논하고자 함에 있어서 化法四敎는 반드시 이해되어야 하고 또 숙지되어야 할 명목임을 천명하고자 한다. 이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어떤 경우라도 활용해 쓸 수 있으며, 이 방법이야말로 오늘날에도 뒤떨어지지 않는 방법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면 이런 토대를 가지고 이루어지는 천태의 해석은 무엇인가. 천태대사의 삼대부에 나타난 해석이다. 법화문구, 법화현의, 마하지관은, 경전 문구의 해석, 경교 현의의 해석, 심수행의 해석이다. 즉 경문은 四種釋으로 해석하고, 현의는 五重玄義로 해석하며, 지관은 十境十乘觀法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四種釋, 五重玄義, 十境十乘 등으로 구성된 천태대사의 중국적 해석틀은 기본적으로 불교의 기본을 깨뜨리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형태의 불교를 창출하였다. 사종석 가운데 約敎釋과 觀心釋은 바로 교관해석의 핵심이라는 점에서 四敎와 三觀으로 해석하는 방식이 중요하다. 이것은 일체법을 四敎三觀으로 분류하여 해석한다. 즉 사제, 십이인연, 육바라밀, 삼십칠도품 등도 사교로 분류하여 삼관으로 관찰한다. 나아가 모든 경전 뿐만 아니라 일체법을 삼관사교로 해석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음을 관찰하는 방법이 정립되고, 일체의 해석법이 마련되어 불교적 체계가 이루어지고 세상을 향한 준비 태세를 갖출 수 있게 될 것이다.

전통 경문의 해석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먼저 인연석을 통해서는 四悉檀을 가지고 경문을 해석함으로써 일상으로부터 진리에로의 진입을 가능케 하고 있다. 다음 약교석을 통해서는 四敎를 가지고 근기에 따라 이해가 가능하도록 열고 있다. 초기불교부터 대승불교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의 불교를 망라하면서 모든 불교의 이해를 가능케 한다. 이어서 본적석을 통해서는 本地와 垂迹을 가지고 모든 것들의 진정한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관심석을 통해서는 공가중을 가지고 내 마음의 세계가 진정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바로 세상이고, 그것은 바로 경문이며, 그것은 바로 일체경이고, 그것은 바로 ?법화경?이며, 그것은 바로 나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四種釋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경전을 어떻게 보는 것인가. 일단 경전의 문구를 모두 인정하고 들어간다. 어떤 구절이라 할지라도 의심없이 일단 믿고 있다. 즉 일례로 龍이 나왔다고 한다면 그 龍을 인정하고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단지 인정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는 가운데 전혀 다른 식으로 전개시키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약교석을 통하여 龍의 다양한 단면을 보이고, 본적석을 통하여 불타로서의 龍으로보며, 관심석을 통해서는 그것이 바로 내 마음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연석을 통해서는 세계, 위인, 대치, 제일의실단을 통하여 세간적 관심거리에서부터 점차로 진리 즉 제일의로 나아가게끔 하는 것이다. 약교석은 경전의 교리 수준 즉 중생의 근기를 넷으로 나누어 경교의 내용도 사교로 나누어 해석하는 가운데 경문을 네 가지로 해석하고 있다. 따라서 원교인 ?법화경?마저도 四敎로 해석하고 있다. 그럼에도 경문을 근기에 따라 네 종류로 읽어가는 것이다. 넷째, 본적석을 통해서는 무엇이든지 본지로는 부처요, 이 땅에 와서는 현실적 모습으로 보여지는 것이다. 다섯째, 관심석으로 통해서는 경문의 해석을 내 마음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종석을 통한 경문해석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깨달음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사종석은 일반적인 경문 해석과는 큰 차이가 있다. 이것을 가지고 무엇을 의도한 것인가. 경문 해석만 가지고서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四種釋 즉 인연석, 약교석, 본적석, 관심석으로 나아가는 가운데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하나의 문구만 가지고서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신념이 담겨져 있다. 이것이 후대 선종에서의 話頭로 이어지는 것인지 뒷날 연구의 과제이다. 한 구절만을 가지고서도 證悟할 수 있다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음은 公案과 너무 흡사하다. 즉 如是我聞이란 경문만을 가지고서 충분히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천태대사에게는, 경문해석이 단순한 경문해석이 아니다. 경문해석을 통하여 바로 깨달음을 얻는 것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다. 단순한 해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해석을 통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깨달음을 주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것을 가지고 본다면, 천태대사의 경전관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첫째, 경전 자체를 비롯하여 경전에 나오는 모든 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경전 성립의 연원을 가지고 접근하는 것이 아니다. 경전의 모든 것을 그대로 불설로 믿고 그것을 해석하고 있다.

둘째, 사종석을 살펴보면, 인연석을 통해서는 중생에게 흥미를 주고, 선심을 주며, 번뇌를 끊어주며, 마지막으로 제일의의 진리의 세계로 귀의시킨다. 또 이어서 약교석을 통해서는 도의 세계에 들어온 중생을 점차 교화하여 장교에서 통교로, 통교에서 별교로, 별교에서 원교에 도달케 하여, 원교의 실상의 세계로 올려두는 것이다. 그리고 본적석을 통해서는 근본의 모습을 보임으로써 모든 것에 대해 눈을 뜨도록 하고, 마지막 관심석을 통해서는 그 불타가 내 마음임을 보이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불타의 일대사인연이 마쳐지는 것이다.

이렇게 사종석을 통하여 ?법화경?을 해석한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종래에 인연석 정도에 불과한 주석을 벗어나 경전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태도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경전은 바로 깨달음의 열쇠라고 할 수 있으며 또 깨달음의 척도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경전과 證悟가 바로 연결이 된다는 점에서 법화문구라는 책은 매우 의미심장한 저작이라고 할 수 있고 그 문구의 해석법인 사종석은 바로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사종석에 대한 연구는 불교의 깨달음을 살리기 위한 방법으로서 불교의 본분을 찾는 데에 적지 않은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사종석 가운데 약교석은 법화현의에서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자를 개별적으로 해석하는데 적문?본문?관심의 세 가지 10묘를 설하고 있다. 가장 많은 설명을 하고 있는 적문의 10묘는, 自行과 他行을 境?智?行?位?三法?感應?神通?說法?眷屬?利益의 열 가지로 나누어 통찰하고 있다. 첫째, 관찰하는 대상을 10여?12인연?4제?2제?3제?1실제?무제의 일곱 가지로 나눈 境妙, 둘째, 앞의 대상을 관찰하는 能觀의 지혜로서 세속지에서 묘각지에 이르는 20智로 하고 있는 智妙, 셋째, 지혜로서 대상을 관찰하면서 차제로 나아가는 自利利他의 모든 행을 차제와 불차제의 聖?梵?天??兒?病의 五行으로 나눈 行妙, 넷째, 수행 계위로 이것을 ?법화경? 약초유품에 설해진 작음?중간?큼의 세 약초와 작고 큰 두 나무와 가장 진실한 계위의 여섯 가지 계위로 나눈 位妙, 다섯째, 앞의 境?智?行?位의 깨달음의 원인인 수행에 의해 이르는 결과의 덕을 眞性(理)?觀照(智)?資成(用)의 3軌로 하여 이러한 모든 세 가지 법, 세로와 가로의 세 가지 법, 세로도 가로도 아닌 세 가지 등을 나누어 상세히 설하고 다시 열 가지의 流通三法을 논하여 자세하게 三法과 三德의 미혹?깨달음의 원인과 결과에 통하는 것을 설명하는 三法妙가 있다. 이상의 다섯 묘는 自行 인과에 관한 모든 법문을 망라하는 것이고, 이하는 깨달음의 결과를 얻은 이후에 중생을 교화하여 이익을 얻게 하는 경우로서 교화하는 주체로서의 부처님의 미묘한 역용과 교화되어지는 중생이 이익을 얻는 것에 관해 설명한다. 즉 여섯째, 부처님의 힘을 움직이는 중생의 感과 이에 응하는 부처님의 應을 4句, 25有, 별교와 원교로 나누어 자세히 설하는 感應妙, 일곱째, 교화하는 주체로서의 부처님의 身業과 부사의한 전변을 生得?報得?修得?육근이 서로 쓰임 등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神通妙, 여덟째, 여래의 口業에 관계된 가르침을 9部?12部?연에 머무름?설명하는 것?원묘한 법 등에 의거하여 설명하는 說法妙, 아홉째, 설법의 이익을 얻어 여래의 권속이 된 것을 理性?業生?願生?神通生?應生의 다섯 가지로 나누어 자세히 논하는 眷屬妙, 열째, 부처님의 권속이 얻는 공덕 이익을 먼저 正說分과 流通分의 두 가지로 나누는 가운데 정설분의 이익을 먼 이익[遠益]?가까운 이익[近益]??법화경?의 이익[當文益]의 세 가지로 하여 자세하게 일곱 가지 이익과 열 가지 이익 등을 설하고, 유통분의 이익에서는 末代 유통의 일곱 가지 이익 등을 밝히는 利益妙 등으로 이루어진다.

이상의 열 가지 법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모두 ?와 妙로 판단한 다음 다시 開顯하여 ?法卽妙法이라 하는 것이다. 자신이 수행의 원인을 닦아 결과를 얻는 모든 법문과, 타인을 교화하는 교화의 주체와 교화의 대상에 관계된 모든 것이 하나로서 제법실상의 한 이치가 아닌 것이 없음을 밝히는 것이다.

사종석 가운데 관심석은 마하지관에서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천태대사는 그의 깨달음인 圓頓止觀의 대의를 나타내면서 發大心?修大行?感大果?裂大網?歸大處로 설명하고 있다. 이것이 소위 ?마하지관?의 五略이다. 먼저 發大心이란 원돈지관을 닦는 자는 첫째 大菩提心을 일으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四諦?六卽?四弘誓願에 맞추어 眞正發大心을 설한 것이다. 大菩提心이란 四弘誓願인데, 苦諦의 境을 緣하여 衆生無邊誓願度을, 集諦의 境을 緣하여 煩惱無數誓願斷을, 道諦의 境을 緣하여 法門無盡誓願知를, 滅諦의 境을 緣하여 佛道無上誓願成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런데 四諦에 生滅?無生?無量?無作의 차별이 있으므로 일으키는 보리심에서도 네 가지 차이가 있다. 따라서 修觀의 원교인은 모름지기 원교일승의 대보리심을 세우지 않으면 안되는데, 원교일승의 대보리심이라면 因果의 法體가 다르지 않은 점에서 初後不二로 된다. 요컨데 圓實의 대보리심의 기반이 아니고서는 원돈지관의 실천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 이후에 修大行이란 앞의 보리심은 그에 상응하는 행을 닦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제2에 修大行을 세우는 것이다. 그 行으로서는 원돈지관의 삼매행법인 四種三昧가 설시되어 있다. 이 네 가지는 坐行이라는 身儀의 형식에서 분별된 것으로서 오직 坐만을 쓰는 常坐三昧, 오직 行만을 쓰는 常行三昧, 坐와 行을 함께 쓰는 半行半坐三昧, 따로 坐行을 떠난 非行非坐三昧이다. 그러나 이 四種三昧는 천태대사가 자신의 깨달음 위에다 경론에서 설한 禪定삼매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그런 이후에 感大果란 四種三昧를 닦아 無明을 끊고 中道를 증득하여 勝妙의 果報를 받는 것이다. 지관수행이 中道不二의 이치에 위배되고 바르지 않을 때에 두 邊의 과보를 받아 方便土에 그치지만 만약 中道不二의 이치에 따라 바로 행할 때에는 勝妙의 과보가 나타나고 實報無障碍土를 거주케 된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 裂大網이란 中道를 증득하여 自行을 化他行으로 바꾸는 것이다. 원돈지관의 수행이 성취되면 內慧가 명료하여 漸頓의 가르침에 통달하기 때문에 利他를 위해 근기에 따라 중생을 이익케 하는 시설을 하고 방편을 이끌어 진실로 돌아가게 하는 교묘한 작용을 나타내고 자재로이 十法界에 現身하여 중생제도를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歸大處란 法身?般若?解脫의 3德으로 돌아갈 것을 나타내고 있다. 원돈지관의 수행에 의해 自利利他의 이익을 얻은 결과 初後에 법신?반야?해탈의 三德이 구경처에 귀입하고 일체 모두가 성불도의 이상을 이루어간다는 것이다.

五略과는 달리, 十廣으로 되어 있는 원돈지관은, 方便과 正修로 이루어진 가운데 각각 二十五方便과 十境十乘으로 설명되어 있다. 특히 正修는 천태 원돈지관의 핵심으로 十境十乘이 제시되는데, 十境이라는 실제적인 수행상에서 거치는 경계에서 공가중의 삼관이 중심인 십승관법으로 관찰하는 것을 그 주요 내용으로 삼고 있다.

三大部를 통해서, 開顯과 觀心이라는 두 축임을 재삼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전편을 통하여 끊임없이 제기되는 開?顯妙와 이어진 觀心으로 충분히 입증된다. 이러한 ?法華經?에 대한 천태대사의 기본적 입장은 實相의 이론과 실천이다. 實相에 의한 법화 해석의 기본 입장은 開顯사상에 있고, 그 토대는 觀心이다. 이런 측면에서 천태의 교관의 구극이 바로 開顯과 觀心이라 할 때, 이것을 구체적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점을 미루어 보면, 천태교관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남긴다.

첫째, 초기에는 으로 불교수행을 가리키다가 후기에는 止觀으로 통합하는 것처럼 온통 修行과 證悟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다. 보통 天台의 수행을 天台止觀이라 일컫는 가운데 50여 部에 육박하는 천태대사의 거의 모든 저작은 수행서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철저하게 관문저작의 특색을 보이고 있다. 심지어는 ?법화경?의 경문 해석인 ?법화문구?라고 해도 그 종착점이 觀心釋이라는 점에서 수행으로 귀결된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천태대사의 대부분의 저작은 드러내놓고 止觀의 수행서임을 자처하므로 두말할 필요도 없이 천태대사의 최대 관심은 證悟에 있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天台止觀을 三種止觀이라 하듯이 수행의 전반적인 조직과 체계가 천태대사의 전반기나 후반기에 이르기 까지 일관하고 있다는 점이다. 천태대사 스스로 三種止觀을 實相法이라고 하는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實相을 수행의 주안으로 삼고 있다. 이것은 천태대사 초기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전 생애를 걸쳐 수행법이 大乘法이고 實相法이라는 점은 변치 않는다고 하는 증거이다. 이런 점에서 천태지관은 大乘止觀 더 나아가서는 一乘止觀을 지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셋째, 천태의 수행은 전적으로 경전과 논서를 토대로 하여 세워져 있다는 점이다. 어떤 수행이라고 해도 경론으로 뒷바침할 수 없다면 그것은 참다운 수행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敎觀雙修는 후기에 이르러 완전히 조직되지만 초기의 법문저작도 수행중심의 대소경론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지만 十境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단지 경론에서만 그 경계를 찾는 것이 아니고 오랜 수행의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경계를 제시하고 있다. 물론 그 때에도 十乘觀法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일체의 모든 경론을 통해 수행법을 중요성에 따라 단계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도 아울러 주시해야 한다.

넷째, 교리가 있으면 반드시 그것에 상응하는 수행이 있다고 하는 점이다. 즉 교리와 수행을 별개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단지 이론만으로 끝나는 이론은 헛된 것이고 맹목적인 실천도 위험하기에 이론과 실천의 통합이야말로 천태에서 제일로 내세우는 旗幟이다. 천태에서 이론은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을 통일적으로 정리하는 것이고, 실천은 불교의 모든 수행법을 체계적으로 조직하는 것이기에 이론과 실천이 별개가 아니라 부처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바로 수행으로 이어지는 것이고, 실천을 올바르게 해간다면 그것은 바로 부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천태교관은 이론과 실천을 하나로 한다고 하는 것이다. 더구나 定慧를 가지고 말한다면 정혜가 반드시 균등해야 하는 것으로서 한쪽으로 절대 치우쳐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이다.

다섯째, 四種三昧나 三種止觀 및 四敎止觀에서 보는 것과 같이, 대승의 수행은 물론 소승의 수행까지도 아우르는 종합적인 불교 수행법 조직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소승인 三十七道品을 대승으로까지 변화시킨 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소승법을 대승법으로 각색하여 활용하고 있는 점은 중국적 수행법의 시초이자 압권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四種三昧에서 보는 바와 같이 비록 원교의 四種三昧로 설명하고 있지만 四敎의 四種三昧가 전제되어 있는 것에서도 천태지관의 체계성을 확인할 수 있다.

여섯째, 일경일론의 우월을 주창하기 보다는 보편적인 불교수행의 체계를 조직하였다는 점이다. 특히 ?법화경?을 소의로 하는 천태교관이지만 ?법화경?을 위주로만 하는 수행체계는 법화삼매에 한하고 천태의 수행체계는 대소승의 모든 경전을 대상으로 한다. 즉 四敎止觀이라 할 때, 원교지관은 법화뿐만 아니라 모든 대승경전의 일승법 가운데 담겨있는 수행법을 가리키므로 하나의 경전만을 가지고 하는 여타의 수행법과는 큰 차이가 있다.

일곱째, 마음을 관찰하는 觀心法이 바로 意止觀으로서 천태지관의 핵심이라는 점이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에 중심을 두는 唯心論에 경도되는 것이 아니고 色心을 하나로 보는 色心不二에 토대를 두고 있다. 원교의 지관이라면 色心의 어느것이나 卽空卽假卽中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경계의 대상이 될 수 있으나 그럼에도 자기 마음을 주로 살피는 것에 주안을 두는 것은 마음을 통해 경계를 살피는 것이 가장 수월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기의 마음을 볼 때에는 포장되거나 왜곡된 자기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자기를 통해 진정한 자기 즉 一念三千의 妙諦를 보는 것이 그 관찰의 핵심이다.

여덟째, 인도이래로 정통 불교로 인정되는 것들을 결코 깨뜨리지 않으면서도 그 발전적 해석을 감행하였다는 점이다. 원융적이고 중도적인 시각을 최고의 정점으로 삼으면서도 그것에 집작하는 것마저 경계하고 있다. 止觀이라고 해도 非止非觀이라는 식으로 해석함으로써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불교행의 전형을 그대로 담고 있다. 그것은 특히 不但中이라는 원교의 관점에 따라 원교의 지관으로 빛을 발한 것이다.

아홉째, 소승의 三十七道品을 대승으로 각색하여 활용화한 용례를 볼 때 중국적 토양에 맞는 수행법의 변형은 인도불교의 장벽을 넘고자 하였다는 점이다. 즉 중국적 특색에 따라 수행을 체계화한 것은 불교를 멋대로 고쳤다기 보다는 종래 불교 경론에 있는 것을 새로운 깨달음의 안목으로 찾아냄으로써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에 만들어진 종파에 중국적 자신감을 심어줌으로써 중국불교가 확립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열째, 理卽?名字卽?觀行卽?相似卽?分證卽?究竟卽으로 이루어진 六卽을 통하여 수행계위를 현실적으로 각색함으로써 수행자 자신의 위치를 분명히 가늠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열 가지 점에서 천태교관의 가치는 충분히 인정된다. 현실적이면서도 이상적이고, 정통적이면서도 파격적이며, 격식을 갖추면서도 자유롭고, 또 하나이면서도 다양하므로 그야말로 현대적 풍토에 알맞은 특징을 갖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점은, 이미 천태교관은 천사백년이 흘렀다는 점이다. 천태의 진가를 이 시대에 되살리기 위해서는 천태의 교의를 다시 한번 현대적으로 재해석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

 

 

4. 원융사상을 통한 인간성 회복과 사회도덕의 실현

 

새로운 교의 해석이 이루어진 이후에는 인간성 회복과 사회의 도덕적 실현이라는 과제가 요구된다. 천태에서는 중도적 원융사상을 제시하고 있다. 이것이 천태대사의 원융실상론이다. 그러나 諸法卽實相이라든가 煩惱卽菩提의 진리를 아는 것에 그친다면 그 圓理가 그대로 내 것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내 것으로 되기 위해서는 이 圓理를 체증하여야 한다. 그래서 천태에서는 그것의 실현을 위해 엄숙한 수행이 요구되는데, 그것이 바로 止觀이다. 止觀은 열반의 大果에 이르는 법문이며, 동시에 깨달음을 위한 수행의 길이며, 동시에 모든 덕을 원만하게 성취하는 귀결점이기도 하다. 止觀은 止(奢摩他)와 觀(毘婆舍那)을 합해서 일컫는 말이다. 止와 觀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서, 止는 靜止의 뜻이니, 마음을 단련해서 일체의 바깥 경계[外境]나 산란한 생각[亂相]에 흔들림 없이 특정한 대상을 향해 마음을 집중하여 멈추어 그치는 것을 말한다. 觀은 觀照의 뜻이니, 잡념을 그칠 뿐 아니라 바른 지혜[正智]를 일으켜서 비추어 보는 것[觀]을 말한다.

止觀을 좀 더 상세히 보면, 각각 세 가지 뜻이 있다고 한다. 먼저 止의 세 뜻을 보면, 息義, 停義, 不止之止義이다. 息義란 妄念을 쉬는 뜻이고, 停義란 如來說이 眞實不虛한 진리에 반연하여 그 생각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드러나므로 그대로 정지하여 머무르고 움직이지 않음을 가리킨다. 不止之止義란, 진리를 說한 如來敎說의 입장에서는 法性을 止라 하고 無明을 不止라 하겠지만 진리의 본바탕에서 보면 無明이 곧 法性이고 法性이 곧 無明이어서 無明과 法性도 止도 아니며 止도 아닌 것도 아닌 [非止非不止] 것이나 無明을 不止라 하고 法性은 止라 하게 됨을 일컫는다.

觀의 세 뜻을 살펴 보면, 첫째 貫穿義는 지혜의 예리한 작용이 번뇌를 꿰뚫어 파멸시킴을 뜻하고, 이것은 깨뜨려질 대상에 맞추어 貫穿이라 이름한 것이다. 둘째 觀達義는 관하는 지혜[觀智]가 통달하여 眞如에 계합해 만남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觀하는 주체에 표준한 이름이다. 셋째 不觀之觀義는, 진실한 眞理로 보아서는 法性을 觀이라 하지만 無明도 法性도 觀이 아니고 不觀도 아닌 非觀非不觀 것인데 無明을 非觀이라 부르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 法性을 觀이라 부른 것이다.

그런데 絶待止觀의 원리로 볼때는 이 三止三觀의 해석은 다 상대적인 범주에 입각한 것이고 생각으로 분별할 수 있는 可思義止觀이다. 따라서 참된 止觀의 뜻을 다했다고 할 수 없다. 이에 대해서 상대적인 一切를 초월한 경지의 止인 것이 絶待止이다. 그러므로 이 絶待止는 번뇌?업?果?敎觀?證得 등을 다 超絶한 一切不生을 전제로 한 止이기 때문에 이 止도 또한 不可得이며 止라고 할 수도 없는 不止인 것이다. 觀은 경계인 대상과 마음인 주관이 冥合하는 것이지만 絶待止觀에 있어서는 경계가 寂滅淸淨하기 때문에 觀이 存在할 수도 없으니, 止觀이 不可得이며 止觀이 이미 없다면 不止觀 또한 말할 수 없고 不止觀에 대한 止觀도 말할 수 없게 된다. 思議할 수도, 說明할 수도 없으므로 名相도 없으며 따라서 번뇌가 生하는 일도 없고 生死도 없고, 파괴할 수도 없어 滅絶絶滅이므로 이것을 絶待止觀이라 한 것이며, 不可思議止觀이라 하고 無生止觀 또는 一大事止觀이라고도 한다. 원교 이전 교에서는 제법과 실상, 현실과 이상을 격별하는 것으로 봄으로 所止와 能止, 所觀과 能觀, 無明과 法性을 대립적으로 고찰하지만 원교에서는 諸法卽實相이라고 설하므로 제법의 바로 그 모습이 그대로 실상의 전제이고 이상국토임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能所?事理의 대립을 설정한 것이 아니라 止도 아니고 觀도 아닌 非止非觀을 그대로 止觀이라고 하는 것이다.

生死卽涅槃?邪淫卽佛道라고 하는 원융원리를 근본으로 하는 원교는 비록 無作의 원리를 설하지만 이것은 理法의 입장에서 설하는 것이지 원교에 실천수행이 무용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생사즉열반의 진리를 실제로 證悟하지 못하면 원교의 목적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므로 끊을 만한 번뇌는 없지만 그것을 실증할 때까지 무작의 원리에 기초하여 원교의 수행을 엄숙히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점차적 수행으로 보이는 五悔도 五品弟子位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계위에서 필요하다. 반드시 三觀을 가지고 번뇌를 끊고 지혜를 얻어서 눈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참다운 천태수행이라고 할 수 있다. 번뇌[惑]를 見思惑과 塵沙惑 및 無明惑으로 나누는 가운데 初後不二의 원리를 갖는 원교라고 할지라도 見思惑과 塵沙惑과 無明惑이 차례로 끊어지는 것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원교의 無作觀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無作의 관점으로 苦?集?滅?道를 보는 것이다. 둘째,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卽空卽假卽中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三界六道도 卽空卽假卽中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苦諦인 三界六道를 無作으로 볼 뿐만 아니라 나머지 集?滅?道 모두를 無作으로 보는 것이다. 넷째, 모든 것이 卽空卽假卽中이기에 그것을 보는 것이 無作의 해탈이요 즉 無作의 열반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세상은 별교와 달리 空假中이 隔歷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卽空卽假卽中으로 이루어진 것으로서 空에도 假와 中이, 假에도 空과 中이, 中에도 空과 假가 있는 것으로 된다. 이 의미를 찾는 것에 깨달음이 있다. 다섯째, 無作이란 有作이 아니라 바로 諸法卽實相이라고 하는 것이다. 즉 諸法 그대로 實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 현실은 단순한 고뇌가 아니라 오히려 열반이라는 것이다. 즉 生死卽涅槃이 된다. 그러면 集諦는 煩惱卽菩提가 되고, 멸제는 涅槃卽生死가 되며, 도제는 菩提卽煩惱가 된다. 여섯째, 그러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은 번뇌 즉 見思惑?塵沙惑?無明惑을 끊을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상과 현실이 하나로 되는 세계이다. 나에 집착하는 번뇌를 끊어 버림으로써 그 理法으로서의 성질과 계합될 수 있고 또 고통을 받고 있는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두 번째 길이며 마지막 중도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 세 번째 길임을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명시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바로 우리의 극락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점진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이지만 그 이치는 원돈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자세야말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길이라고 한다. 이러한 無作은 물론 無作觀은 영원히 좁힐 수 없는 이상과 현실이 너무나 조화롭게 되어있어서 오히려 가장 현실성이 없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면 이와 같은 無作의 이론을 통해 보면, 세상은 전혀 손댈 것이 없는 그 자체로 완벽한 것인가. 그것은 원리만이 그렇다는 것이고 세상은 얼마든지 고쳐야 할 부분이 있다고 한다. 거기에 참 뜻이 있다. 그래서 원교야말로 더 많은 수행이 필요한 것이다. 물론 그 때에는 無量과는 달리 卽이라는 원리를 가지고 들어가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원융적으로 바라보는 세계관은 인간 소외의 현대사회에서는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너와 내가 한 몸이라는 사고방식은 우리 모두의 공존을 위해 절실한 것이다. 내가 무시하고 우리가 져버린 저들이, 나에게나 우리에게나 똑같은 위해를 가져오리라고 하는 것은 明若觀火한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와 나는 나의 생각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우리는 하나라는 생각은 방치되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 뒤쳐진 그들이 우리 모두의 가족이며 소중한 우리의 친지들이다. 그들에게 등을 돌리는 순간 그들은 우리에게 등 뒤에서 비수를 꽂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自他一如는 우리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말이다. 원융적 세계관은 우리의 공존의 해법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이야말로 南岳慧思가 주장한 無諍이고 元曉가 강조한 和諍이 아니겠는가. 남들과 다툼이 없고 대립이 없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에 절실하게 필요한 궁극적인 가치가 아닌가 한다. 원융사상은 인간의 유연성을 마련해 줄 것이고, 공가중으로 바라보는 원융사상은 단편적인 사고로부터 탈피하게끔 할 것이다. 인간성 회복은 천태의 원융사상 앞에서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나아가 사회도덕의 실현도 이 원리 앞에서야 가능하다. 사회의 억압적인 사회심리는 바로 원융사상에 의해 풀어내어진다. 사회에 대한 적대적인 의식을 원융사상에서는 인정되지 않는다. 나와 사회는 바로 혼연 일체라는 것이다. 나의 발전은 바로 사회의 발전이고 사회의 발전이 바로 나의 발전이라는 방식이다. 이 점에서 제법실상 즉 원융사상은 구시대의 유물이 아니라 바로 이 시대에서 적극적으로 구현되어야 할 사상인 것이다.

5. 한국적 특색의 천태종 확립과 불국토 구현

 

한국의 천태는 중국천태로부터 전래되었으나 한국 토양에서 자라나고 성장함으로써 한국적 특성이 발휘되었다. 법화삼매를 한반도에 전래시킨 玄光스님을 위시한 여러 스님들을 통해서 해동천태의 역량을 읽을 수 있고, 義湘에서 知訥로 이어지는 계통과는 달리 원효대사에서 의천 대각국사로 이어지는 계통은 한국 불교의 또 다른 전통을 갖게 한다. 고려의 백련결사도 고려 천태의 법맥을 찬란하게 빛나게 하였다. 또한 중국에 천태를 보급한 諦觀법사는 불휴의 명저 ?천태사교의?를 통해 고려천태의 역량을 만방에 떨쳤고, 그리고 ?천태사교의?를 계승한 無寄스님의 ?석가여래행적송?은 한국 고려 천태종의 중국천태에 못지 않는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또한 조선말에 月窓거사의 존재는 더욱 더 빛난다. 그의 ?禪學入門?이나 ?述夢鎖言?은 한국적 해석의 가능성을 던져 주었다.

이와 같이 한국 천태의 특질은 여지없이 드러나 있고 게다가 한국인의 정서에 맞는 것이기에 이것을 가지고 한국적 특질로 삼아도 될 것이다. 특히 원효대사의 존재는 천태로 하여금 더욱더 한국적인 특성을 갖게 한다. 사실 천태와 원효는 큰 동질성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경전관으로부터 비롯하여 교판 및 나아가 사상 그리고 수행에 이르기 까지 전반에 걸쳐 너무도 흡사하기 때문이다. 물론 두 분 사이에는 분명 차이점도 있다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나 이런 차이점은 오히려 시대와 장소의 차이일 뿐이다. 오히려 이런 차이점이야말로 중국불교와 한국불교의 차이를 보여주는 좋은 대목이다. 이런 토대 위에 원효의 사상을 한국적 특색으로, 또는 한국 천태종의 특색으로 삼아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굳이 말하면 천태대사와 원효대사의 차이 정도로 생각하면 좋을 것 같기에 중국천태를 모방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러나 천태대사의 위대한 사상은 살려야 하고 그런 가운데 한국적 천태의 특색은 더욱 살려야 한다. 역사적으로 그 모범을 보인 이는 바로 원효대사이고, 의천대각국사이며, 제관법사이고, 雲?無寄이며, 圓妙了世이고, 또 월창거사이다. 이들의 천태 해석과 구현은 우리의 현실을 반영한 것이기에 한국적 특색이라 할 만하다.

고유한 천태의 특성을 우리 한국천태종에서는 살려 왔고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전통이 지금까지 그대로 계승된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전통을 계승해야 하는 천태종단은 오늘날 그 역할을 주목받고 있다. 우리만의 모양을 만들어서 그것을 꾸미고 가꾸라는 것이다. 백 년, 천 년이 흘러도 퇴색되지 않을 천태사상을 이 시대에 알맞게 되살리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물론 천태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발전적으로 우리 국토 토양과 정서에 알맞게 발전시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천태가 마음껏 자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사실 한국 천태종에는 천태의 종풍이 달리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천태의 저작을 번역하고 천태사상을 연구하며 천태의 지관을 수행해야 한다. 천태로 중무장해야 할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종단의 천태연구기관에 전폭적인 지원을 해야 하며 금강대학교의 설립취지도 천태의 선양에 맞추어야 한다. 그러나 이 보다 중요한 것은 종단 내에 천태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절실하다. 따라서 승려들의 천태 재교육은 말할 나위없이 중요하다. 금강대학교 불교학과나 강원의 교육과정도 철저하게 천태교관식으로 진행되어야 하고, ?법화경?을 중심으로 한 교판 해석 및 관심 수행이 시도되어야 한다. 이렇게 해야만 천태종은 좀 더 내실있는 발전을 이룩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또한 천태사상이 사회 전체에 파급되어야 한다. 사회복지와 문화사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져야 함은 당연한 수순이다. 그러나 이제는 시대가 달라졌으므로 과거의 교리와 수행을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따라서 시대상황에 맞는 불교의 변형이 필요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런 점에서 시대의 대세인 과학이라는 것을 불교에 접맥하고 그것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의학불교나 과학불교라 하는 분야를 개척해야 한다. 그런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서는 종립대학을 적극적으로 이용해야 한다. 대학의 시설을 인적 자원을 활용하여 천태심리학, 천태과학, 천태의학 등 천태불교만의 고유한 영역을 살려내야 하는 것이 한국천태종이 앞으로 천 년을 발전할 수 있는 길일 것이다.

천태사상의 실현은 바로 복지사업에서 그 성패를 가를 것이다. 양로원 고아원 등 복지사업을 확대해야 하고, 대학을 위시한 각급 학교 등도 설립함으로써 폐쇄적인 종단의 이미지를 벗어나 신뢰받는 종단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신문도 중앙일간지로 유도하고,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방송으로도 진출함으로써 그 매체를 통해 천태의 원융사상을 품위있게 설득하고 조장하여야 한다. 아울러 천태지관을 활용하여 명상센터나 수련원 등으로 사회 일반층을 접촉해야만 단일 계층이 아닌 다양한 계층을 모을 수 있으므로 본종에서 주장하는 대중불교를 구현할 수 있을 것이다. 천태사상을 일반에 포교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문화사업도 바람직 할 것이다. 문화사업 특히 예술 즉 음악이나 영화나 연극이나 오페라를 매개로 하여 ?법화경?을 무대 위에 올려야 한다. 이런 법화천태의 문화야말로 불교의 현대적 발휘이며 시대의 문화 중추를 가꿀 초석이 아닌가 한다. 또한 종교간의 갈등이나 정치적 대립 등도 원융사상에 의거하여 계도하는 것이 한국 천태종이 부여받은 이 시대의 권리이자 의무이다.

6. 한국 천태종의 과제

 

한국 천태종의 발전은 선종 일변도에 떨어진 한국불교의 다양화를 위해서 매우 고무적이다. 비록 본격적인 천태지관은 아니더라도 관음주송이라도 한국불교를 풍부하게 할 수 있어 좋다. 이런 점에서 한국천태종의 유례없는 발전을 두 손 모아 반긴다.

천태대사는 一實諦의 깨달음을 통해 원융 불교를 제창하신 분으로서 중국불교를 확립하신 분이다. 또한 천태지관을 통해 중국선관을 이끈 분으로서 그 영향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위대한 종조를 계승한 한국천태종은 천태학이 체계적으로 연구되어 한국 천태학이 제대로 설 수 있도록 천태학자들에게 많은 지원을 해야 한다. 그리고 관음신앙 뿐만 아니라 법화신앙도 포함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천태종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만 한국적 천태종의 특색이 분명해 질 것이다.

이제 한국 천태종은 50년을 지났을 뿐이다. 앞으로도 계속하여 천태종으로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천태대사와 천태교관에 적극적으로 애정과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것을 천태종의 본분으로 절감하는 것이야말로 향후 천태종 발전의 향배가 달려 있다고 본다.

한국 천태종과 관련하여 끝으로 피력해 보고 싶은 것은, 이제는 우리도 우리 사고나 환경에 맞는 교리와 수행법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시기라는 점이다. 그동안 구태의연한 틀 속에 묶여 있었던 우리 불교의 病狀을 과감하게 진단해야 하는 것이다. 이제 와서 21세기의 불교로 천태의 교학이나 止觀을 그대로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1400 년 전에 만들어진 천태교관이 오늘날 그대로 빛을 발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기 때문이다. 다만 중국인들이 인도의 불교에서 벗어나 그들의 교관체계를 만들어 갔듯이, 우리도 이 시대에 알맞은 교관체계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시대적 의무를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이것은 한국 천태종으로서는 더 이상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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