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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
프리드리히 엥겔스
서문
칼 맑스는 그의 저서≪정치경제학비판≫(베를린, 1859년) 서문에서, 우리 두 사람이 1845년에 브뤼셀에서 ≪독일 철학의 관념론적 견해에 대립되는 우리의 견해≫ - 즉 주로 맑스에 의하여 완성된 유물사관 - 를 완성하기로 사실상 우리의 이전의 철학적 양심을 결산하기로 한 경위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 기도는 헤겔 이후의 철학을 비판하는 형태로 수행되었다. 두터운 8절판의 두 책으로 된 원고는 오래 전에 베스트팔렌에 있는 출판사에 가 있었으나 그후 우리는 사정이 달라져서 출판할 수 없다는 통지를 받았다. 우리는 자기 자신 문제를 이해한다는 주요 목적은 달성하고 있었던 만큼 즐겨 그 원고를 쥐들의 갉아먹는 비판에 맡겨두었다.
그 때부터 40여년이 지났고 맑스도 이미 세상을 떠났다. 그동안 맑스나 나나 이 문제를 가지고 다시 논의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헤겔에 대한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러저러한 데서 단편적으로 언급한 일은 있었으나 어느 곳에서도 전체 포괄적으로는 취급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어떤 점에서는 그래도 역시 헤겔 철학과 우리의 이론을 매개하는 고리인 포이에르바하에 관해서 말한다면, 우리는 그에 대해서도 다시 논의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 맑스의 세계관은 독일과 유럽의 경계를 멀리 벗어나 세계의 모든 개명한 언어들 속에서 신봉자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다른 한편 독일 고전철학은 국외 특히 영국과 스칸디나비아 여러 나라에서 부활하고 있는 감이 있다. 그리고 독일에서조차 그곳 대학들에서 철학이라는 명목으로 공급되는 절충주의라는 시래기죽에 사람들이 싫증을 느낄 때가 온 것 같다.
이렇기 때문에 바로 지금이야말로 나는 헤겔 철학에 대한 우리의 관계 - 우리가 어떻게 헤겔 철학에서 출발하였으며 또 어떻게 헤겔 철학과 인연을 끊었는가 - 를 체계적으로 간략하게 서술할 때라고 생각하였다. 이와 꼭 마찬가지로 또 나는 질풍노도 시대에 헤겔 이후 그 어느 철학자보다도 포이에르바하가 우리에게 더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우리에게 남아있는 응당한 의무라고 생각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잡지 ≪신시대≫ 편집부가 슈타르케의 포이에르바하론에 대한 비평을 써 달라는 요청을 쾌히 수락하였다. 나의 글은 이 잡지의 1886 년 제4호와 제5호에 발표되었는데 이제 나는 그것을 다시 검토하여 단행본으로 발행하기로 한다.
이 글을 출판에 회부하기 전에 나는 1845~1846년의 낡은 원고를 찾아내어 다시 검토하였다. 그 가운데 있는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편은 완결되어 있지 않았다. 이미 완결된 부분은 유물사관의 서술이었는데 이 서술은 경제사 분야에 대한 우리 지식이 당시 얼마나 불충분하였는가를 보여줄 따름이다. 원고에는 포이에르바하의 학설 자체에 대한 비판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당면한 목적을 위해서는 이용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대신에 나는 맑스의 어떤 낡은 노트 가운데서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11개 항목의 테제를 발견하였다. 여기에 부록으로 인쇄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맑스가 후일의 연구를 위하여 초를 잡은 것이고 결코 출판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테제는 새로운 세계관의 천재적인 맹아를 내포한 최초의 문헌으로서 헤아릴 수 없이 귀중한 것이다.
프리드리히 엥겔스
런던, 1888년 2월 21일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저서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에 발표. 슈투트가르트 저서에 의하여 인쇄. 원문은 독일어.
Ⅰ
이 저서*는, 시간적으로는 한 세대 전이지만 독일의 현 세대에게는 마치 거의 한 세기나 지난 것 같이 생각될 정도로 인연이 멀어진 시기로 우리를 돌아가게 한다. 그런데 그 시기란 실로 독일이 1845년혁명을 준비하던 시기였다. 그후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모든 것은 1848년의 계속에 불과하며 이 혁명의 유언을 집행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 철학 박사 C. N. 슈타르케 저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슈투트가르트, 페르드, 엥케, 1585년 (≪Ludwig Feuerbach≫, von C. N. Starcke, Dr. Phil. Stuttgart, Ferd, Encke, 1885).
18세기의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19세기의 독일에서도 철학혁명이 정치적 변혁와 전주곡으로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와 독일의 두 철학혁명은 어찌 이렇듯 다른가! 프랑스 사람들은 일체의 관변학문 및 교회 더 나아가서 때로는 국가와 공공연하게 싸웠다. 그들의 저서는 국외에서 네덜란드 또는 영국에서 출판되고 그들 자신은 흔히 어느 때 바스티유 감옥에 투옥될는지도 모를 처지에 있었다. 그와는 반대로 독일 사람들은 대학교수이며 국가가 임명한, 청년들의 교사이다. 그들의 저서는 공인된 교과서였으며 또 철학발전 전체를 집대성한 헤겔의 체계는 어느 정도 프러시아 왕국의 국가철학이라는 자리에까지 올라섰다! 그런데 이러한 교수들의 배후에, 그들의 현학적이고 애매한 논의 가운데, 그들의 졸렬하고 지루한 문장 가운데 혁명이 깃들어 있었는가?! 당시 혁명의 대표자로 인정되고 있던 사람들인 자유주의자들은 과연 인간의 두뇌를 몽롱하게 만드는 이 철학에 대한 그야말로 맹렬한 반대자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정부도 자유주의자들도 간파하지 못한 것을 이미 1833년에 적어도 한 사람이 보고 있었다. 그는 한인리히 하이네라는 사람이었다.
예를 들어 보자. 당시 철학 명제 가운데서
현실적인 모든 것은 이성적이며 이성적인 모든 것은 현실적이다.
라는 헤겔의 유명한 명제처럼 근시안적인 정부들의 찬사와 그에 못지 않게 근시안적인 자유주의자들의 분노의 대상으로 된 것은 없었다.
실로 이 명제는 확실히 현존하는 모든 것의 변호이며 전체주의, 경찰 국가, 전제 재판, 검열 등에 대한 철학적 축복이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도 이와 같이 생각하였고 그 신하들도 이와 같이 생각하였다. 그러나 헤겔의 경우 현존하는 모든 것이 곧 조건 없이 현실적이기도 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에게서 현실성이라는 속성은 동시에 필연적이기도 한 것에만 속하는 것이다.
자기의 전개 과정에서 현실성은 필연성으로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헤겔은 정부의 이런저런 조치 - 헤겔 자신은 ≪어떤 조세제도≫를 예로 들고 있다 - 를 조건 없이 현실적인 것이라고는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필연적인 것은 결국 또 이성적인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헤겔의 명제는 그것을 당시의 프러시아 국가에 적용한다면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하는데 불과하다. 즉 이 국가는 그것이 필연적인 한 이성적이며 이성에 맞는다. 그런데 만일 이 국가가 우리에게는 아무리 해도 악으로 보이는데도 그것이 계속해서 존속한다면 정부의 악은 이 악에 상응하는, 신민의 악으로써 정당화되며 설명된다. 요컨대 당시의 프러시아 사람들은 그들에게 알맞는 그러한 정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실성은 헤겔에 의하면 임의의 시기, 임의의 정세하에서 주어진 임의의 사회제도와 정치제도에 내재하는 속성인 것은 결코 아니다. 그와 반대이다. 로마 공화국은 현실적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몰아낸 로마제국도 역시 현실적이었다. 프랑스 군주제는 1789년에는 비현실적인 것으로 되었다. 다시 말하면 온갖 필연성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비이성적인 것으로 되었다. 따라서 프랑스 군주제는 헤겔이 언제나 매우 감격에 넘쳐서 말해 오던 대혁명에 의해서 전복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군주제가 비현실적이었고 혁명이 현실적이었다. 또 이와 꼭 마찬가지로 이전에는 현실적이었던 모든 것이 발전함에 따라 비현실적인 것으로 되어 자기의 필연성, 자기의 존재권, 자기의 합리성을 상실한다. 사멸하는 현실성을 대신해서 새로운, 생활력 있는 현실성이 나타난다. 이 현실성은 낡은 것이 충분한 사려를 가지고 저항하지 않고 사멸하는 경우에는 평화적으로 나타나지만 그것이 이 필연성에 반항하는 경우에는 폭력적으로 나타난다. 이리하여 헤겔의 명제는 헤겔의 변증법 자체에 의하여 그 대립물로 전화한다. 즉 인류역사에서 현실적이었던 모든 것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비이성적인 것으로 된다. 따라서 그것은 본성 자체로 보아 이미 비이성적이라는 운명을 지니고 있으며 당초부터 비합리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인간의 두뇌 안에 있는 이성적인 모든 것은 그것이 아무리 현존하는 외견상의 현실성과 모순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현실적인 것으로 될 운명을 지니고 있다. 현실적인 모든 것은 이성적인 것이라는 명제는 헤겔의 사유방법의 모든 규칙에 의하여 다른 명제,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은 멸망하여야 한다는 명제로 전화한다.
그러나 헤겔 철학(우리는 여기에서 칸트 이래의 철학운동 전체의 완결 단계인 헤겔철학에 대해서만 고찰하지 않을 수 없다)의 진정한 의의와 혁명적 성격은 다름 아닌 헤겔 철학이 인간의 사유 및 활동의 결과가 종국적 의의를 가진다고 보는 온갖 견해를 영원히 청산해버린데 있다. 철학의 진리를 인식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헤겔의 경우에 이 진리라는 것 은 일단 발견된 후에는 다만 암송하기만 하면 되는 기성의 교조적 명제들의 무더기는 아니었다. 진리는 이제는 인식과정 자체 가운데, 과학의 장구한 역사적 발전 가운데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 과학은 인식의 낮은 단계에서 더욱더 높은 단계로 올라간다. 그러나 과학은 소위 어떤 절대적 진리를 발견함으로써 그 이상 더는 나아갈 수 없고 팔짱을 끼고 발견된 이 절대적 진리를 놀란 눈으로 볼 수밖에 없게 되는 그러한 점에는 결코 도달하지 못한다. 그리고 비단 철학적 인식에서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인식 및 실천적 활동의 영역에서도 역시 그러하다. 역사도 역시 인식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인류의 어떤 완전무결하고 이상적인 상태에서 종국적으로 완결된 단계에 도달할 수는 없다. 완전무결한 사회라든가 완전무결한 ≪국가≫라고 하는 것은 환상 가운데만 존재할 수 있다. 이와는 반대로 역사에서 상호교체되는 모든 사회제도는 다만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상승하는 인간사회의 끝없는 발전과정의 과도적 단계들에 불과하다. 그 각각의 단계는 필연적이며 따라서 그 단계를 바생시킨 그 시대와 그 조건에 대해서 자기의 존재이유를 가진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자체의 태내에서 점차로 발전하고 있는 새로운, 보다 높은 조건들에 대해서는 공고하지 못한 것으로 되며 자기의 존재이유를 상실한다. 그것은 보다 높은 단계에 자라를 양보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데 이번에는 후자도 역시 마찬가지로 쇠퇴하여 멸망하게 된다. 부르조아지가 대산업, 경쟁 및 세계시장을 가지고 몇 세기를 내려오면서 신성화되고 공고화된 모든 제도를 실지로 파괴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 변증법적 철학은 종국적 의의를 가지는 절대적 진리라든가 이 진리에 상응하는 인류의 절대적 상태라고 하는 따위의 일체 관념을 타파한다. 변증법적 철학에는 종국적 의의를 가지는 것, 절대적인 것, 신성한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 이 철학은 모든 것이 필연적인 멸망의 운명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 철학 앞에는 발생과 소멸, 보다 낮은 것으로부터 보다 높은 것으로의 무한한 상승의 부단한 과정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이 철학 자체도 사유하는 뇌수에 이 과정의 단순한 반영에 지나지 않는다. 하긴 이 철학은 보수적인 측면도 가지고 있다. 즉 이 철학은 인식의 일정한 발전단계와 사회관계의 일정한 발전단계가 그 시대와 그 조건에 대해서는 존재이유를 가진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아니다. 이 이해방법의 보수성은 상대적이며 그 혁명적 성격은 절대적이다 - 바로 이것이 변증법적 철학이 인정하는 유일한 절대적인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 이해방법이 자연과학의 현 상태와 완전히 일치하느냐 않느냐 하는 문제를 고찰하는데까지 깊이 들어갈 필요는 없다. 자연과학은 지구 자체에 대해서는 있을 수 있는 종말을, 그리고 여기에 사람이 거주할 가능성에 대해서는 상당히 확실한 종말을 예언하고 있으며 따라서 인류역사에도 상승선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강선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하여간 사회역사의 운동이 하강할 전환점에 이르기까지는 아직 상당히 멀었다. 따라서 우리는 헤겔 철학에 대해서 당시의 자연과학이 아직 제기하지 않았던 문제를 연구하도록 요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 가지 지적하여야 할 것은 상술한 견해는 헤겔 자신이 그렇게 선명한 형태로 서술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 견해는 헤겔의 방법이 불가피하게 도달해야 할 결론이긴 하나 헤겔 자신은 그 결론을 다음과 같은 간단한 이유로 결코 그렇게 명확하게는 내리지 못하였다. 즉 헤겔은 체계를 세워야 하였고 또 철학체계는 전통적인 관습에 따라 어떤 절대적 진리로써 완결되어야 했다. 이리하여 그 영원한 진리란 논리적(또는 역사적) 과정 자체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라고, 특히 그 ≪논리학≫에서 강조하여 온 바로 헤겔 그 자신이 이제 와서는 이 논리적 과정에다 종지부를 찍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자기의 체계를 어느 한 지점에서 종말지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논리학≫에서는 이 종말을 다시 출발점으로 삼을 수가 있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이 종결점, 즉 절대이념 - 그것에 대해서 헤겔이 절대로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는 한에 있어서만 이 이념은 절대적이다 - 은 자신을 ≪소외(疎外)≫하여(즉 전화하여) 자연으로 되며 다음에는 정신 - 즉 사유와 역사 - 에서 또다시 자기 자신에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철학 전체가 그와 같이 그 종말에서 다시 출발점으로 되돌아가자면 하나의 길 밖에 없다. 즉 인류가 바로 이 절대이념의 인식에 도달한 때를 역사의 종말이라 하고 절대이념의 이러한 인식이 헤겔 철학에서 이미 달성되었다고 선언하는 그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헤겔의 체계의 독단적 내용 전체를 절대적 진리라고 선언하는 것으로 되며 그리하여 온갖 독단적인 것을 파괴하는 그의 변증법적 방법과 모순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동시에 그것은 지나치게 확대된 보수적 측면에 짓눌려서 혁명적 측면이 질식당하고 만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 그것도 비단 철학적 인식의 영역에서 뿐만아니라 역사적 실천에서도 그러했다. 인류는 이미 헤겔이라는 한 인물을 통해서 절대이념까지 안출해냈으니 실천적 영역에서도 응당 이 절대이념을 현실화할 수 있는데까지 이미 도달한 것으 로 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렇다면 절대이념은 자기의 동시대인들에게 지나치게 높은 실천적, 정치적 요구를 제기해서는 안될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법철학≫ 끝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절대이념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국민에게 그렇게 굳게 약속은 했으나 실시하지 않은 그 신분제적 군주제에서, 다시 말하면 당시의 독일의 소부르조아적 관계들에 적웅한 유산계급의 제한되고 온화한 간접적 지배에서 실현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여기서 또 귀족이 필요하다는 사변적인 논증까지도 우리는 받고 있다.
이와 같이 체계의 내면적 요구 하나만 가지고 보더라도 벌써 철두철미 혁명적인 사유방법이 왜 극히 온화한 정치적 결론에 도달하였는가하는 이유를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이와 같은 특수한 형식 의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은 물론 헤겔 역시 독일 사람으로서 그와 동시대인인 괴테와 마찬가지로 상당한 속물근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데에 기인한다. 괴테나 헤겔이나 각각 자기의 영역에서는 그야말로 올림푸스 산의 제우스였으나 두 사람이 다 독일의 속물근성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은 헤겔의 체계가 종래의 어떠한 체계보다도 비교할 수 없으리만큼 더 광범한 영역을 포괄하며 오늘날에 와서도 세인을 놀라게 하는 사상적 부를 이 영역에서 발전시키는 것을 방해하지 않았다. 정신현상학(그것은 말하자면 정신 영역에서의 발생학 또는 고생물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서, 개인의 의식의 서로 다른 발전단계를 인류의 의식 이 역사적으로 경과해온 단계의 축소된 재현으로서 고찰하고 있다), 논리학, 자연철학 그리고 정신철학(이것은 다시 역사철학, 법철학, 종교철학, 철학사, 미학 등등 개별적인 역사적 분파들에서 연구된다) - 이러한 서로 다른 역사적 영역의 어디에서나 헤겔은 일관한 발전의 줄기를 찾아내며 지적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비단 창조적 천재였을 뿐만 아니라 백과사전적인 박식한 사람이기도 하였기 때문에 그는 어디에서나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이 경우 ≪체계≫를 세워달라는 요구가 그로 하여금 매우 종종 무리한 구성에 매달리지 알을 수 없게 한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리고 이 구성에 대해서는 그의 보잘 것 없는 논적들이 지금까지 굉장히 떠들어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구성은 그가 세우는 건물의 틀, 발 판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쓸데없이 이러한 구성에 정신을 팔지 말고 그 웅대한 건물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사람들이라면 그는 지금까지도 완전한 가치를 보존하고 있는 무수한 보물을 발견할 것이다. 어느 철학자에게나 ≪체계≫ 그 자체는 잠정적인 것이다. 그것은 바로 체계라는 것이 인간 정신의 불멸의 요구, 즉 일체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요구에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체의 모순이 영원히 제거되고 만다면 우리는 소위 절대적 진리에 도달할 것이다. - 세계사는 종말에 이르게 될 것이며 동시에 그것은 이미 할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전진해야 하는 것으로 된다. 이리하여 해결할 수 없는 새로운 모순이 또 생긴다. 일체의 모순의 해결을 철학에 요구하는 것은 오직 전인류만이 그 전진적 발전 가운데서 완수할 수 있는 그러한 일을 한 사람의 철학자더러 하라고 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이것을 이해한 이상 - 그런데 우리가 이것을 이해하게 된 데는 누구보다도 헤겔의 덕택이 더 크다 - 종래의 의미에 있어서의 철학은 종말을 고한다. 우리는 이러한 노정을 거쳐서는 그리고 개인들이 개별적으로는 도달하지 못할 ≪절대적 진리≫는 내버려두고 그 대신에 실증과학에 의하여 또 변증법적 사유에 의한 그 성과의 개괄에 의하여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상대적 진리를 추구하는데로 매진한다. 일반적으로 말하여 철학은 헤겔에 의하여 완결된다. 왜냐하면 한편으로는 헤겔의 체계는 종래의 철학 발전전체의 위대한 결산이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헤겔 자신이 비록 무의식적으로나마 체계의 이 미궁에서 세계의 현실적 실증적 인식에 이르는 길을 우리에게 가리켜 주고 있기 때문이다.
헤겔의 체계가 독일의 철학 물이 든 분위기에 얼마나 거대한 영향을 주었겠는가 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그것은 수 십년 동안이나 계속되어 왔고 헤겔이 죽은 이후에도 좀처럼 멎을 줄 모르던 하나의 개선행진이었다. 멎기는커녕 도리어 1830년부터 1840년에 이르는 시기에 는 ≪헤겔풍≫의 독점적 지배가 절정에 달하여 많으나 적으나 헤겔의 반대자들까지도 감염시키고 있었다. 바로 이 시기에 헤겔의 견해는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각종 과학에 풍부하게 침투하여 중류의 ≪교양있는 의식≫이 자기 사상의 양식의 원천으로 삼은 통속서적이나 일간신문까지도 헤겔의 물이 들었었다. 그러나 모든 전선에 걸친 이 승리는 다만 내란의 전주곡에 지나지 않았다.
총체적으로 볼 때 헤겔의 학설은 우리가 본 바와 같이 실로 가지각색의 실천적 당파적 견해를 용납할 만치 광활한 여지를 남겨 놓았다. 그런데 당시 독일의 이론생활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실천적 의의를 가지고 있은 것은 종교와 정치의 두 개 분야였다. 헤겔의 체계에 주요한 의의를 부여한 사람은 이 두 분야에서 다같이 상당히 보수적이었다. 반대로 변증법적 방법을 주되는 것으로 인정한 사람은 정치에서나 종교에서나 아주 극단적인 반대파에 속하였다. 헤겔 자신으로 말하면 그는 저서에서 빈번히 혁명적 분노를 폭발시키고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말해서 확실히 보수적 측면에 더 기울어져 있었다. 헤겔이 그의 방법에서보다 그의 체계에서 훨씬 더 ≪괴로운 사고활동≫을 하게 된 것은 이유없는 일이 아니다. 30년대 말 경에 헤겔학파 내의 분열이 더욱 더 심해졌다. 좌파 - 소위 청년헤겔파 - 는 정통 경건파 및 봉건적 반동분자들과 투쟁에서 초미의 문제에 대한 철학자연한 경시의 태도 - 이러한 태도로 그들의 학설은 정부의 묵인과 비호까지 받아 왔다 - 를 점차 버리게 되었다. 그런데 1840년에 정통파의 위선과 봉건적, 절대주의적 반동이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라는 인물을 통하여 왕좌를 차지하였을 때에는 그들은 어느 한 당파의 편에 공공연하게 서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투쟁은 여전히 철학적 무기로써 수행되고 있었으나 벌써 추상적인 철학적 목적을 추구한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벌써 직접 전통적 종교와 현존 국가를 철폐하는데 있었다. 만일 ≪독일연보≫에서는 실천상의 종국적 목적이 아직 주로 철학적 분장을 하고 나타났다면 1842년의 ≪라인신문≫에서는 청년헤겔주의는 직접 급진적인 신흥 부르조아지의 철학으로 서 등장하였고 그의 철학적 가면은 겸열관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이용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정치분야는 당시 극히 험난하였기 때문에 주되는 투쟁은 종교 에 돌려졌다. 그런데 이 시기 특히 1840년부터는 반(토)종교투쟁이 간접적으로는 정치투쟁이기도 하였다. 최초의 충격을 준 것은 1835년에 발간된 슈트라우스의 저서 ≪예수의 전기≫였다. 그 후에 브루노 바우어는 이 저서에 서술된 복음서 신화의 발생론을 반대하여 복음서의 많은 이야기가 모두 다 복음서 저자들 자신에 의하여 꾸며진 것임을 증명하였다. 슈트라우스와 바우어간의 논쟁은 ≪자의식≫과 ≪실체≫간의 투쟁이라는 철학적 분장 밑에 진행되었다. 복음서의 신기한 이야기들은 공동체 내부에서의 무의식적인, 전통에 기초한 신화창조에 의하여 생겨난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복음서 저자들 자신이 꾸며낸 것인가 하는 문제는 세계사에서의 추동력은 무엇인가 - ≪실체≫인가 그렇지 않으면 ≪자의식≫인가 하는 문제에까지 확대되었다. 끝으로 현대 무정부주의의 예언자인 슈티르너 - 바쿠닌은 그에게서 대단히 많은 것을 채용하였다 - 가 나타나 자기의 지상(至上)의 ≪유일자≫를 지상의 ≪자의식≫ 위에 올려 놓았다.
우리는 헤겔학파 붕괴과정의 이 측면을 이 이상 더 상세하게 고찰하려 하지 않는다. 우리에게서 더 중요한 것은 기성 종교와의 투쟁의 실천적 요구로 수많은 아주 과감한 청년헤겔파들이 영국과 프랑스의 유물론으로 끌려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그들은 자기 학파의 체계와 충돌하게 되었다. 유물론은 자연을 유일한 현실적인 것으로 보는데 헤겔의 체계에서는 자연은 절대이념의 ≪소외≫, 말하자면 이념의 외화에 불과한 것이었다. 여하튼 사유와 이 사유의 산물인 이념이 이 체계에서는 1차적인 것이며 자연은 이념이 거기에까지 하강함으로써만 존재하는 파생적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모순 속에서 그들은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그러한 때에 포이에르바하의 저서 ≪기독교의 본질≫이 나왔다. 이 저서는 단도직입적으로 다시금 유물론의 승리를 선포함으로써 이 모순을 일격에 해소해 버렸다. 자연은 어떠한 철학으로부터도 독립하여 존재한다. 자연은, 다름 아닌 자연의 산물인 우리 인간이 성장한 기초이다. 자연과 인간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우리의 종교적 환상이 조작한 최고의 존재라는 것은 우리 자신의 본질의 환상적 반영에 지나지 않는다. 주문(呪文)은 파기되었다. ≪체계≫는 파열되어 포기되고 모순은 그것이 다만 상상 가운데만 있다는 것을 간단히 밝혀냄으로써 해결되었다. 이 저서의 해방적 작용은 그것을 체험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누구나 다 흥분에 싸여 있었다. 우리는 모두 곧 포이에르바하주의자로 되었다. 맑스가 얼마나 열렬하게 이 새로운 견해를 환영하였으며 또 그가 이 새로운 견해에서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았는가 - 일체의 비판적 보류에도 불구하고 - 하는 것은 ≪신성가족≫을 읽으면 알 수 있다. 심지어 포이에르바하의 이 저서가 가지고 있던 결점조차 당시는 그 영향력을 강화하였다. 문학적이며 군데군데 과장까지 섞인 문체는 이 저서로 하여금 광범한 독자충을 획득하게 하였다. 어쨌든 오래동안 추상적이고 난해한 헤겔풍이 지배한 뒤인지라 그 문체는 시원한 맛을 주었던 것이다. 사랑의 지나친 신화(神化)에 관해서도 그렇게 말하여야 할 것이다. 비록 그것을 시인할 수는 없었다 할지라도,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된 그 ≪순수 사유≫의 지상권에 대한 반발로서는 용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포이에르바하의 이 두 약점을 ≪진정 사회주의≫가 포착하였다는 사실이다. ≪진정 사회주의≫는 1844년 이래 독일의 ≪교양 있는≫ 인사들 속에 전염병처럼 만연하여 과학적 연구를 미사여구로 바꾸어 놓고 생산의 경제적 개조에 의한 프롤레타리아의 해방 대신에 ≪사랑≫에 의한 인류의 해방을 제창하였다 - 한 마디로 말하면 아주 구역질나는 미문조와 사랑에 가득찬 요설에 빠져 있었다. 이 유파의 전형적인 대표자는 칼 그륀씨였다.
한 가지 더 잊어서는 안될 것은 헤겔학파는 해체되었으나 헤겔철학은 아직 비판적으로 극복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슈트라우스나 바우어는 각각 헤겔철학의 한 측면을 끄집어내어 그것을 논쟁의 무기로 삼고 서로 갑론을박하였다. 포이에르바하는 체계를 분쇄해서는 그것을 그저 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어떤 철학을 잘못된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더구나 민족의 정신적 발전에 거대한 영향을 준 헤겔철학과 같은 그러한 위대한 창조물을 그저 간단히 무시함으로써 그것을 제거할 수는 없었다. 헤겔철학은 그 자신이 말하는 바와 같은 의미에서 ≪지양≫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즉 비판은 이 철학의 형식을 폐기하고 그것이 획득한 새로운 내용을 건져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 과제가 어떻게 해결되었는가는 추후에 보기로 하자. 그러나 그러는 동안에 1848년 혁명은 포이에르바하가 헤겔을 밀어젖힌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철학을 꺼림없이 밀어젖히고 말았다. 그리고 동시에 포이에르바하 자신도 후면으로 밀려가고 말았다.
Ⅱ
철학 전체, 특히 근대철학에서 중대한 기본문제는 존재에 대한 사유의 관계 여하 문제이다. 아득히 먼 옛날에는 사람들이 아직 자신의 육체적 구조에 대해서 아무런 개념도 가지고 있지 못하고 또 꿈도 설명할 줄 몰랐다. *
* 지금도 아직 야만인이나 낮은 단계와 미개인들 사이에서는 꿈에 나타나는 사람의 형상은 일시 육체를 떠난 영혼이라는 관념이 널리 퍼져 있다. 그리하여 현실의 사람은 꿈을 꾼 사람의 꿈속에 그가 나타나서 취한 행동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 예컨대 임투른은 1884년에 가나의 인디안에게서 이러한 것을 보았다.
그리하여 그들의 사유와 감각은 그들의 육체의 활동인 것이 아니라 그들의 육체에 깃들어 있다가 죽음과 함께 육체를 떠나가는 어떤 특수한 영혼의 활동으로 생각하였다. 그때로부터 사람들은 이 영혼의 외계와의 관계에 대해서 머리를 쓰지 않으면 안되었다. 만일 죽는 순간에 영혼이 육체를 떠나서도 계속해서 살아 있다면 영혼의 죽음을 또 따로 생각해낼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이리하여 영혼불멸의 관념이 발생하였다. 이 관념은 그러한 발전단계에서는 조금도 위안적인 것이 아니었고 피치 못할 운명으로 생각되었으며 예컨대 희랍인들의 경우에는 흔히 진짜 불행으로 생각되었다. 도처에서 개체 영혼의 불멸이라는 싫증나는 허구를 낳게 한 것도 종교적 위안의 필요에서가 아니라 영혼의 존재는 인정하면서도 일반적 제한성으로 죽은 후에 그 영혼이 어디로 가버리는지 도저히 설명할 수 없었다는 단순한 사정에 기인한다.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자연력을 인격화한 결과 최초의 신들이 생겨났다. 이 신들은 종교가 가일층 발전하는 과정에서 더욱더 초세계적인 힘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고 마침내 지력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전혀 자연 발생적인 추상과정 - 말하자면 증류(蒸溜)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 을 통하여 사람들의 두뇌에는, 어느 정도 제한받으며 또 서로 제한하는 많은 신들로부터 일신교적 종교들의 유일신에 관한 관념이 생기게 되었다.
이와같이 철학 전체의 최고문제인 존재에 대한 사유의 관계, 자연에 대한 정신의 관계 문제는 온갖 종교와 마찬가지로 야만시대의 인간의 제한되고 무지한 표상에 그 근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가 비로소 충분히 두드러지게 제기되고 그 완전한 의의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유럽 사람들이 기독교적 중세기의 기나긴 동면에서 깨어난 때부터였다. 존재에 대한 사유의 관계 문제, 즉 무엇이 일차적인가, 정신인가 그렇지 않으면 자연인가 하는 문제 - 중세기의 스콜라철학에서도 역시 큰 역할을 한 이 문제는, 교회의 의사와는 반대로 세계는 신이 창조한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본래부터 존재하는 것인가 하는 보다 첨예한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철학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대답하는가에 따라서 두 개의 진영으로 나누어졌다. 정신이 자연보다 먼저 존재하였다고 주장한 사람들 따라서 결국 이렇게나 저렇게나 우주의 창조를 승인한 사람들 - 그런데 이 우주의 창조는 철학자들, 예컨대 헤겔의 경우에 기독교에서보다도 왕왕 더 혼란되고 황당무계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 은 관념론의 진영을 형성하였다. 이와는 반대로 자연을 근본시원으로 본 사람들은 유물론의 각종 학파에 속하였다.
관념론이니 유물론이니 하는 이 표현은 원래 위에서 말한 것 이외의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여기에서도 이러한 의미에서만 사용된다. 그것에다가 다른 어떤 의의를 부여하는 경우에 어떠한 혼란이 생기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차후에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존재에 대한 사유의 관계 문제는 또 하나의 측면도 가지고 있다. 즉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 관한 우리의 사상은 이 세계 자체와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 우리의 사유는 현실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가? 우리는 현실에 관한 우리의 표상과 개념에 현실을 정확히 반영할 수 있는가? 이 문제는 철학에서는 사유와 존재의 동일성에 관한 문제라고 한다. 절대다수의 철학자들은 이 문제를 긍정적으로 해결한다. 예컨대 헤겔의 경우 이 문제에 대한 긍정적 대답은 아주 자명한 것이다. 왜냐하면 현실세계에서 우리가 인식하는 것은 바로 그 세계의 사상적 내용이며 세계를 절대이념 - 세계로부터 독립하여 세계 이전에 본래부터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던 - 의 점차적 실현으로 되게 하는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사유가 애당초부터 사상의 내용을 이루고 있는 그 내용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역시 자명한 일이지만 논증되어야 할 명제가 여기서는 이미 그 전제 자체에 암암리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헤겔이 사유와 존재의 동일성에 관한 그의 논증으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는 것을 조금도 방해하지 않는다. 즉 그의 사유가 그의 철학을 정당한 것으로 인 정하기 때문에 다름아닌 그의 철학이야말로 유일하게 정당한 철학이며 또 사유와 존재는 동일하기 때문에 인류는 다름아닌 이 철학을 이론으로부터 실천으로 옮겨 전세계를 헤겔의 제원리에 따라 개조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이러한 환상은 헤겔과 거의 모든 철학자들에게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밖에 또 세계의 인식의 가능성 또는 적어도 그 완전한 인식의 가능성을 부인하는 일련의 다른 철학자들이 있다. 근대철학자들중에서는 흄과 칸트가 그러한데 그들은 철학 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견해에 대한 결정적인 논박은 관념론적 견지에서 가능하였던 한에 있어서는 이미 헤겔이 서술하였다. 포이에르바하의 보충적인 유물론적 의견은 심오하다기보다는 재치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철학적 망상에 가장 결정적인 논박을 가한 것은 다른 모든 철학적 망상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실천, 즉 실험과 산업이었다. 만일 우리 자신이 어떤 자연현상을 만들어내며 그것을 그 조건으로부터 발생시키며 더욱이 또 그것을 우리의 목적에 이용함으로써 어떤 자연현상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정확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가 있다면 칸트의 포착할 수 없는 ≪사물 그 자체≫는 종말을 고하게 될 것이다. 동식물의 체내에서 형성되는 각종 화학적 물질도 유기화학에 의하여 그것들이 차례차례로 제조되기 시작할 때까지는 의연히 그러한 ≪사물 그 자체≫로 남아 있었다. 유기화학에 의하여 화학적 물질이 제조됨으로써 ≪사물 그 자체≫는 우리를 위한 사물로 되었다. 예컨대 꼭두선이의 색소인 알리자린이 그러하다. 우리는 지금은 그것을 전원에서 재배하는 꼭두선이의 뿌리에서 얻고 있는 것이 아니라 훨씬 값싸게 또 손쉽게 콜타르에서 얻어내고 있다. 코페르니쿠스의 태양계는 300년 동안이나 가설로 남아 있었다. 그것은 아주 믿을 만한 것이기는 하였으나 어쨌든 가설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르베리에가 이 태양계의 자료에 기초하여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또 하나의 유성이 반드시 존재하리라는 것을 증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계산으로써 천공에서 그 위치까지 확정하였고 그 후 갈레가 실지로 그 유성을 발견하였을 때 비로서 코페르니쿠스의 태양계는 증명되었다. 그런데 독일에서는 신칸트주의자들이 칸트의 견해를, 영국에서는 불가지론자들이 흄의 견해(거기에서는 흄의 견해가 결코 사멸한 적이 없었다)를 부활시키려고 - 그 견해들이 이론적으로도 실천적으로도 논박당한지 이미 오래임에도 불구하고 - 애쓰고 있는데 이것은 과학에서는 퇴보를 의미하는 것이고 실천에서는 유물론을 슬그머니 받아들이면서도 겉으로는 거부하는 수줍어하는 태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데카르트로부터 헤겔에 이르는 그리고 흡스로부터 포이에르 바하에 이르는 이 오랜 시기에 걸쳐 철학자들을 앞으로 추동한 것은 그 들이 상상한 것처럼 한갖 순수사유의 힘만은 결코 아니었다. 그와는 반대였다. 실제 그들을 앞으로 추동한 것은 주로 위력있고 급격하게 발전하고 있던 자연과학과 산업이었다. 유물론자들에게서는 이것이 직접 눈에 띄었다. 그러나 관념론적 체계도 정신과 물질의 대립을 범신론적으로 조화시키려고 애썼으나 더욱더 유물론적 내용으로 충만되어 갔다. 그러다가 마침내 헤겔에 와서는 그 체계가 그 방법으로 보나 내용으로 보나 관념론적으로 전도된 유물론에 불과한 것으로 되는데까지 이르렀다. 위에서 말한 모든 것으로써 어째서 슈타르케가 포이에르바하를 특징 지으면서 우선 존재에 대한 사유의 관계 여하라는 기본문제에 대한 포이에르바하의 입장을 연구하고 있는가를 알 수가 있다. 간단한 서론에서 그는 이전의 철학자들 특히 칸트 이후의 철학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의 견해를 필요 이상으로 어려운 철학적 용어로 서술하고 있으며 또 헤겔에 대해서는 그 저서의 개별적 부분들에 매달리는 필자의 지나친 형식주의적 태도로 그를 응당하게 평가해주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간단한 서론에 뒤이어 슈타르케는 포이에르바하의 ≪형이상학≫ 그 자체의 발전과정을 이 철학자의 관계 저작들의 순서를 따라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이 서술은 많은 노력을 들여 명료하게 되어 있다. 다만 슈타르케의 저서 전체가 그러한 것처럼 이 서술에서도 꼭 써야할 것도 아닌 불필요한 철학적 표현인 군더더기들이 들어차 있다. 이러한 군더더기가 더욱 거추장스럽게 생각되는 것은 저자가 어떤 한 학파나 또는 적어도 포 이에르바하 자신이 사용하는 표현만을 쓰는 것이 아니라 각종 유파, 주로는 오늘날 전염병처럼 만연되고 있는 자칭 철학유파들이 사용하는 표현을 혼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포이에르바하의 발전과정은 헤겔파의 한 사람 - 물론 그가 완전히 정통 헤겔파였던 일은 결코 없었지만 - 이 유물론에 이르는 발전과정이다. 이 발전의 일정한 단계에서 포이에르바하는 자기 선행자의 관념론적 체계와 완전히 인연을 끊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드디어 포이에르바하는 불가항력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식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헤겔의 ≪절대이념≫의 천지개벽 이전의 존재, 우주 생성 이전부터의 ≪논리적 범주의 선재≫등은 피안의 조물주에 대한 신앙의 환상적 유물에 지나지 않으며 또 우리 자신이 속해 있는 감각적으로 지각되는 물질적인 세계만이 유일한 현실적 세계이며 우리의 의식과 사유는 그것이 아무리 초감각적인 것으로 보일지라도 물질적, 육체적 기관인 뇌수의 산물이다. 물질은 정신의 산물이 아니며 정신이 물질의 최고산물에 불과한 것이다. 이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순수한 유물론이다. 그러나 여기까지 이르러 포이에르바하는 돌연히 발걸음을 멈춘다. 그는 보통의 철학적 편견, 즉 ≪유물론≫의 본질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유물론≫이라는 명칭을 반대하는 편견을 극복하지 못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즉
나에게 유물론은 인간의 본질 및 인간의 지식이라는 건물의 기초이다. 그러나 내가 주장하는 유물론은 생리학자나 좁은 의미의 자연과학자 예컨대 몰레쇼트가 주장하는 그러한 유물론은 아니며 그들의 견해나 그들의 전문에 따라 그들의 주장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러한 유물론은 아니다. 즉 내가 주장하는 유물론은 건물 자체는 아니다. 뒤를 향해서는 나는 유물론자들과 완전히 일치하나 앞을 향해서는 나는 그들과 일치하지 않는다.
포이에르바하는 여기에서 물질과 정신의 관계에 대한 일정한 이해에 기초한 일반적인 세계관으로서의 유물론과 18세기라는 일정한 역사적 단계에서의 이 세계관의 특수한 표현형태를 혼동하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는 그 일반적인 세계관으로서의 유물론과 그 천박하고 비속화된 형태를 혼동하고 있다. 18세기의 유물론은 오늘날 이런 천박하고 비속화된 형태로 자연과학자나 의사의 두뇌 가운데 존속하고 있으며 또한 50년대에는 행상식 설교자 뷔히너, 포크트 및 몰레쇼트가 유물론을 바로 이러한 형태로 유포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유물론도 관념론과 마찬가지로 일련의 발전단계를 거쳤다. 심지어 자연사 분야에서 획기적인 발전이 있은 때에도 매번 유물론은 그 형태를 불가피하게 변경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고 역사도 유물론적으로 설명되게 된 이후부터는 이 영역에서도 역시 유물론의 발전에 새로운 길이 열렸던 것이다.
지난 세기의 유물론은 기계적 유물론이었다. 왜냐하면 당시의 모든 자연과학 가운데서 다만 역학만이, 그것도 다만 고체(지상 및 천상의 물체)의 역학만이, 간단히 말하면 중력 역학만이 어느 정도 완성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화학은 아직 연소설에 기초한 유치한 형태에 있었다. 생물학은 아직 기저귀에 싸여 있었다. 즉 동식물 유기체에 대한 연구는 극히 조잡한 것이어서 순전히 기계적 원인들에 의하여 설명되고 있었다. 데까르트의 눈에는 동물이 하나의 기계였던 것과 같이 18세기 유물론자들의 눈에는 인간이 하나의 기계였다. 이렇게 역학의 척도만을 화학적 및 유기적 성질의 과정들에다 적용한 것 - 이 영역에서도 역학적 법칙은 계속 작용하기는 하지만 그 법칙은 더 높은 다른 법칙에 의해서 그 다음 자리로 물러간다 - 이것이 프랑스 고전유물론의 첫째가는 독특한 그러나 당시로서는 불가피한 제한성이었다.
이 유물론의 둘째의 독특한 제한성은 그것이 세계를 하나의 과정으로서, 끊임없는 역사적 발전에 처해 있는 물질로서 이해할 능력이 없었다는 데 있다. 이것은 당시의 자연과학의 상태와 그와 관련되어 있던 형이상학적인, 즉 반(反)변증법적인 철학적 사유방법에 상응한 것이었다. 자연이 영원한 운동 가운데 있다는 것은 당시에도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사람들의 견해에 의하면 이 운동은 영원히 동일한 원안에서 순환하는 것이었으며 그리하여 실은 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었다. 즉 이 운동은 항상 동일한 결과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와 같은 견해는 당시로서는 불가피하였다. 칸트의 태양계 발생이론은 당시 방금 나타났을 뿐이고 아직 하나의 진기한 설에 지나지 않았다. 지구의 발전사인 지질학은 아직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다. 오늘의 생물들은 단순한 것으로부터 복잡한 것으로의 오랜 발전과정을 거쳐 발생한 것이라는 사상은 도대체 당시로서는 아직 과학으로 확립될 수 없었다. 따라서 비역사적인 자연관은 불가피하였다. 이 결함은 헤겔조차 면할 수 없었던 것인 만큼 18세기 철학자들이 이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여 그들을 비난할 수는 더욱 없다. 헤겔에게 자연은 이념의 단순한 ≪소외≫로서 시간적으로 발전할 능력은 없고 다만 공간적으로 그 다양성을 전개할 수 있을 뿐이다. 이리하여 동일한 과정을 영원히 반복할 운명을 지닌 자연은 자체 내에 포함되어 있는 모든 발전단계를 동시적으로 또 병립해서 전개한다. 한편 이 시기에 지질학도, 발생학도, 동식물 생리학도, 유기화학도 이미 충분히 연구되고 이 새로운 과학들에 기초하여 후일의 진화론을 암시하는 천재적인 추측(예컨대 괴테와 라마르크)이 이미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때 헤겔은 발전이 공간에서는 진행되나 온갖 발전의 기본조건인 시간 속에서는 진행되지 않는다고 하는 그런 허망한 주장을 자연에 강요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체계가 그렇게 요구한 것이며 방법은 체계를 위하여 자기자신을 배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역사의 영역에서도 사물에 대한 역사적 견해가 결여되어 있었다. 여기에서는 중세기의 잔재와의 투쟁이 시야를 구속하였다. 중세기라는 것은 천년에 걸친 전반적 야만상태에 의하여 역사 행정이 중단된 것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중세기에 달성된 거대한 성과물, 즉 유럽 문화영역의 확대, 상호 인접한 지역에 형성된 생활능력 있는 대민족들, 끝으로 14~15세기의 거대한 기술 성과들에 대해서는 아무도 주의를 돌리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위대한 역사적 연관에 대한 옳은 견해는 있을 수 없게 되었고 역사라는 것은 기껏해서 철학자가 이용할 수 있도록 준비된 실례와 설명의 묶음에 지나지 않았다. 50년대 독일에서 유물론의 행상인의 역할을 자임했던 속류학자들은 자기 스승들의 학설의 이러한 한계를 조금도 넘어서지 못하였다. 그 후 자연과학에서 이룩된 모든 새로운 성과를 그들은 우주창조자의 존재를 반대하는 새로운 논거로 삼았을 뿐이었다. 그들은 이론을 가일충 발전 시키려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이 시기 관념론은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으며 1848년 혁명에 의하여 치명상을 입었지만 그래도 당시 유물론 이 일시 더욱 저급해진 것을 보고 만족해 하였다. 포이에르바하가 이러한 유물론에 대한 온갖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한 것은 아주 옳았으나 행상식 설교자들의 꼬리를 유물론 일반과 혼동한 것만은 잘못이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두 가지 사정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첫째로 포이에르바하의 생존시에도 자연과학은 맹렬한 발효과정에 있기는 하였으나 그 과정은 최근 15년간에야 비로소 어느 정도의 명확한 결실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전례없이 방대한 새 인식재료들이 수집되기는 하였으나 미처 어찌할 사이 없이 막 쌓인 발견의 무더기에다 연관을 설정하며 따라서 또 질서를 세우는 것은 최근년에 와서야 비로소 가능하게 되었다. 하긴 포이에르바하는 세 가지의 중대한 발견 - 세포의 발견, 에네르기 전환에 관한 학설 및 다윈의 이름으로 불리는 진화론 - 을 목격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농촌에 은거하고 있던 철학자가 자연과학자들 자신도 아직 일부는 논쟁을 하고 있었고 일부는 적절하게 이용할 줄 모르고 있던 그러한 발견을 완전히 평가할 수 있으리만치 충분히 과학을 연구할 수 있었겠는가? 이 경우에 죄는 오로지 당시의 독일의 가련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로 말미암아 철학 강단은 유독 박식한 체 하는 절충주의적 현학자들에 의하여 점령되었고 그 반면에 그 모든 철학자들 위에 한없이 우뚝 솟아 있던 포이에르바하는 궁벽한 시골에 들어 박혀 농민과도 같이 그날 그날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프랑스 유물론의 모든 일면성을 제거하는 역사적 자연관이 오늘에 와서야 가능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당시 포이에르바하가 이해하지 못하였다고 해서 그를 책망할 것은 아니다.
둘째로 포이에르바하가 지극히 자연과학적이기만 한 유물론을 다만 ≪인간지식의 건물의 기초를 이를 뿐이고 아직 건물 자체는 아니다.≫라고 말한 것은 어디까지나 옳았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만 자연 속에서만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사회 속에서도 살고 있는데 인간사회는 자연에 못지 않게 자기의 발전사와 자기의 과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업은 사회에 관한 과학, 즉 소위 역사적 및 철학적 과학들의 총체를 유물론적 기초와 일치시키며 이 기초에 알맞게 그것을 재건하는데 있었다. 그러나 포이에르바하는 이 과업을 수행할 수 없었다. 그는 유물론적 기초 위에 서 있기는 하였으나 이 문제에서는 아직 낡은 관 념론의 굴레를 벗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은 그 자신이 ≪뒤를 향해서는 나는 유물론자들과 완전히 일치하나 앞을 향해서는 나는 그들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말함으로써 인정한 바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포이에르바하 그 자신으로 말한다면 그는 다름아닌 이 사회문제 영역에서 ≪앞을 향해서≫ 나아가지 못하였으며 1840년 또는 1844년의 자기 견해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리고 이것도 역시 주로 그의 은거생활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는 원래 다른 어느 철학자들보다도 훨씬 풍부한 사교성을 가진 사람이었으나 이 은거생활로 인하여 자기와 대등한 다른 학자들과의 우의적인 흑은 적대적인 논쟁 가운데서 자기의 사상을 확립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고적한 생활 속에서 자기의 사상을 확립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사회의 영역에서 어느 정도로 여전히 관념론자로 남아 있었는가 하는 것은 후에 상세히 고찰할 것이다.
또 한 가지 지적하여야 할 것은 슈타르케가 포이에르바하의 관념론을 부당한 곳에서 찾고 있다는 점이다.
포이에르바하는 관념론자이다. 그는 인류의 진보를 믿고 있다(19페지). 전체의 기초, 토대는 여전히 관념론이다. 실재론은 우리가 관념적인 지향을 추구할 때 우리가 미로에서 방황하는 것을 방지해 줄 따름이다. 과연 진리 및 정의에 대한 동정과 사랑 그리고 복무는 관념의 힘이 아니겠는가?(8페지).
첫째로 여기에서 관념론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상적 목적을 추구하는 지향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목적은 다만 칸트의 관념론이나 그의 ≪지상명령≫과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칸트조차 자기의 철학을 ≪선험적 관념론≫이라고 부른 것은 결코 그의 철학이 도덕적 이상까지 문제로 삼았기 때문이 아니라 전혀 다른 이유에서였다는 것은 물론 슈타르케도 잘 알고 있는 바이다. 도덕적 이상, 즉 사회적 이상에 대한 신앙이 철학적 관념론의 본질이라고 하는 편견은 철학 밖에서, 즉 실레르의 시편들에서 자기들에게 필요한 철학적 지식의 단편을 추려낸 독일속물들에게서 발생한 것이다. 헤겔은 칸트의 무력한 ≪리상명령≫(그것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며 따라서 결코 현실적인 것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기 태문에 무력하다)을 어느 누구보다도 준렬하게 비판하였다. 헤겔은 실레르가 부식한 실현불가능한 이상을 공상하는 속물근성을 다른 누구보다도 냉혹하게 조소하였다(예컨대 ≪현상학≫을 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겔은 가장 철저한 관념론자였다.
둘째로 인간으로 하여금 활동하도록 자극하는 모든 것은 인간의 두뇌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은 아무리 해도 피할 수 없다. 즉 사람이 먹으며 마시는 것까지도 그의 두뇌에 반영된 기갈감의 영향하에 시작되며 또 그의 두뇌에 포만감이 반영되기 때문에 먹지 않으며 마시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외계의 영향은 인간의 두뇌에 새겨지며 감정, 사유, 충동, 의사표시 등으로서, 한 마디로 말하면 ≪관념적인 지향≫으로서 반영되며 이러한 형태에서 그것들은 ≪관념의 힘≫으로 되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관념적인 지향을 추구하며≫ 그가 자기에 대한 ≪관념의 힘≫의 영향을 인정한다는 사정만으로 관념론자가 된다면 다소라도 정상적으로 발달한 인간은 누구나 다 타고난 관념론자일 것이니 도대체 이 세상에 유물론자라는 것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없지 않을 것이다.
세째로 인류는 - 적어도 오늘날에 있어서는 - 전체적으로 보아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신념은 유물론과 관념론간의 대립되는 절대로 아무런 상관도 없다. 프랑스 유물론자들은 이신론자들인 볼테르나 루소에 못지 않게 거의 광신적으로 이 신념을 고수하고 있었으며 이 신념때문에 왕왕 크나큰 개인적 희생까지 당하였던 것이다. 만일 ≪진리 및 정의에 대한 복무≫ - 이 말을 선의로 해석해서 - 에 자기의 전 생애를 바친 사람이 있었다면 그런 사람은 예컨대 디드로였다. 그리고 슈타르케가 이 모든 것은 관념론이라고 선언한다면 그것은 다만 유물론이라는 말과 또 동시에 두 경향의 대립 전체도 이 경우에 그에게 있어서는 모든 의미를 상실하였다는 것을 증명할 따름이다.
사실상 이 경우에 슈타르케는 유물론이라는 명칭을 반대하는 속물들의 편견, 유물론에 대한 승려들의 장구한 비방의 영향하에 속물들에게 뿌리박힌 편견에 용서할 수 없는 양보 - 혹은 무의식적으로 그랬을는지도 모르지만 - 를 하고 있다. 이 속물들은 유물론이라는 것을 포식, 폭음, 허영, 육욕과 거드름, 금전욕, 인색, 탐욕, 사리사욕 및 사기, 간단히 말하면 그들 자신이 남몰래 즐기고 있는 그러한 더러운 모든 악덕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관념론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미덕에 대한 신앙, 전인류에 대한 사랑 및 ≪보다 좋은 세계≫에 대한 신앙을 의미한다. 그들은 ≪보다 좋은 세계≫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큰 소리로 외치지만 그들 자신은 술이 깨지 않아 골치가 아플 때나 또는 파산하였을 때에만 - 한마디로 말하면 자기의 습관으로된 ≪유물적≫ 방탕의 불쾌한 결과를 맛보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을 때에만 그것을 믿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속물들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반야수요 반천사다≫라는 노래를 즐겨 부른다.
다른 점에서는 슈타르케는 오늘 독일에서 철학자라고 떠들어대고 있는 대학강사들의 공격과 학설로부터 포이에르바하를 옹호하기에 열중하고 있다. 독일 고전철학의 타락한 후손들에 대하여 흥미를 가지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은 물론 중요한 것이며 또 슈타르케 자신도 이것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으로써 독자들을 괴롭히지 않으려 한다.
Ⅲ
포이에르바하의 실제의 관념론은 그의 종교철학과 윤리학을 보면 곧 드러난다. 포이에르바하는 결코 종교를 폐기하려고 하지 않고 그것을 완성하려고 한다. 철학 자체가 종교 속에 용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류의 각 시기는 종교의 변화에 의해서만 서로 구별된다. 일정한 역사적 운동은 그것이 인간의 심정에 깊이 침투하는 때에만 자기의 지반에 도달하는 것이다. 심정은 종교의 한 형식이 아니다. 그러므로 종교는 심정 가운데도 역시 있어야 한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심정은 곧 종교의 본질적인 것이다(슈타르케의 저서 168페지에 인용됨).
포이에르바하의 학설에 의하면 종교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감정에 기초한 심정관계로서 이 관계는 지금까지는 현실의 환상적 반영 가운데서 - 인간적 속성의 환상적 반영인 하나의 신 또는 많은 신을 매개로 하여 - 자기의 진리를 찾아왔으나 아제는 ≪나≫와 ≪너≫ 사이의 사랑에서 매개없이, 직접 진리를 찾는다. 그리하여 결국 포이에르바하에게 있어서는 성애가 그의 새 종교 실현의 최고형식은 아니라 하더라도 최고형식의 하나로는 되는 것이다. 사람들 사이의, 특히 이성간의 감정에 기초한 관계는 인류가 존재하는 그때부터 존재해 왔다. 성애로 말하면 그것은 최근 800년간에 굉장한 의의와 중요한 지위를 획득하여 모든 시와 노래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핵심으로 되었다. 현존하는 기성종교는 성애에 관한 국가의 법규, 즉 혼인법을 최고도로 신성화하는데만 그치고 있다. 이러한 종교는 내일에라도 완전히 없어질 수 있으나 애정과 우정의 실천에서는 티끌만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1793년부터 1798년에 이르는 기간에 기독교는 사실상 없어졌기 때문에 나폴레옹 같은 사람도 기독교를 부활시킴에 있어서 반항에 부딪치고 고난을 겪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이 기간에 기독교를 포이에르바하의 새 종교와 같은 것으로써 바꾸어 놓자는 요구가 나타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여기에서 포이에르바하와 관념론은 다음과 같은 점에, 즉 그가 인간의 상호애에 기초한 모든 관계, 즉 성애, 우정, 동정, 자기희생 등등을 그 자신도 이미 과거의 것으로 인정하는 그런 어떤 특정의 종교와 관계 없이 그 자체로서 의의를 가진 것으로서 단순하게 고찰하려 하지 않는데 있다. 이러한 관계는 ≪종교≫라는 말로 신성화될 때에만 완전한 의의를 가지게 될 것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그에게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순수 인간적인 관계가 존재한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것을 참다운 새 종교로 본다는데 있다. 그 관계에다 종교의 낙인을 놓는 경우에라야 비로소 그는 그것이 완전한 가치를 가진 것이라고 인정하는데 동의한다. 종교라는 말은 religare에서 나온 것으로 본래는 결합이라는 의미를 표시하였다. 따라서 두 사람이 상호결합하면 모두 종교로 되는 것이다. 이러한 어원학적 요술은 관념론철학의 마지막 피난처이다. 종교라는 말에는 그것이 실제로 사용되는 과정에서 역사적으로 발전한 결과에 획득한 그 의의가 아니라 어원상 가져야 할 그 의의가 부여된다. 오직 관념론적 추억을 위해서만 귀중한 ≪종교≫라는 말이 폐어로 되어 없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성애와 이성간의 관계를 종교라는 높은 자리에까지 받들어 올리고 있다. 40년대 루이 블랑 일파의 파리 개량주의자들도 이와 꼭같이 논의하였다. 당시 그들도 역시 종교를 가지지 않는 사람들을 어떤 괴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 따라서 무신론의 곧 당신들의 종교가 아닌가! 포이에르바하가 본질상 유물론적인 자연관의 기초 위에 진정한 종교를 건립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마치 현대화학을 진정한 연금술로 보려는 것과 유사하였다. 만일 신이 없는 종교가 있을 수 있다면 현자의 돌 없는 연금술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연금술과 종교 사이에는 극히 밀접한 연관이 있다. 현자의 돌은 신과 유사한 많은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기원 초의 두 세기의 이집트 - 그리이스의 연금술자들도 역시, 코프와 베르텔로가 인용한 자료들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기독교 교리를 수립하는데 있어서 일정한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인류의 각 시기는 종교의 변화에 의해서만 서로 구별된다≫고 하는 포이에르바하의 주장은 전혀 옳지 않다. 지금까지 존재해온 세계의 3대 종교, 즉 불교와 기독교와 회교를 두고 볼 때에만 역사의 대전환은 종교의 변화들을 수반하였다.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낡은 종족종교나 민족종교는 선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것으로 그 종족이나 민족의 독립성이 파괴되자마자 일체의 저항력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게르만 민족의 경우에는 당시 붕괴과정에 있던 로마 세계제국과 접촉한 것만으로도 그리고 로마에서 방금 받아들여 그 나라의 경제적, 정치적 및 정신적 상태에 적응하게 된 기독교라는 세계종교와 접촉한 것만으로도 민 족종교는 일체 저항력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많건 적건 인위적으로 발생한 세계종교, 특히 기독교와 회교의 경우에만 비로소 일반적인 역사적 운동이 종교적 색채를 띤다고 말할 수가 있다. 그러나 기독교가 전파된 범위 내에서조차 참으로 보편적인 의의를 가진 혁명이 이러한 색채를 띠게 되는 것은 오직 13세기에서 17세기까지, 즉 부르조아지의 자기해방 투쟁의 첫 단계에서였다. 그리고 이것은 포이에르바하가 생각하듯이 인간심정의 속성이나 그 종교적 요구에 의해서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의 이데올로기 형태, 즉 종교와 신학만을 알고 있었던 선행한 중세기 역사전체에 의해서 설명된다. 그러나 18세기에 이르러 부르조아지가 충분한 힘을 가지게 되어 자기의 계급적 처지에 적합한 자기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었을 때에는 그들은 주로 법률적 및 정치적 사상에만 의거하여 그들 자신의 위대하고도 철저한 혁명 - 프랑스혁명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종교 가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았을 경우에만 종교를 고려한 데 불과하였다. 그러나 이 때에도 그들은 낡은 종교 대신에 어떤 새 종교를 내세우려 고는 생각조차 못하였다. 로베스피에르가 이 점에서 어떠한 실패를 맛보았는가는 주지하는 바이다.
우리가 지금 그 안에서 생활하지 않을 수 없으며 또 계급대립과 계급지배에 기초하고 있는 사회에서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순전히 인간적인 감정을 표시할 가능성이 본래 매우 적은데 이 감정을 종교라는 높은 자리에까지 받들어 올림으로써 이 가능성을 더욱 적게 할 이유는 조금도 없을 것이다. 이와 꼭 마찬가지로 현재 널리 보급된 - 특히 독일에 - 역사편찬학은 역사의 대계급투쟁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이미 상당히 애매하게 하였으니 만큼 우리는 이 투쟁의 역사를 교회의 역사의 단순한 부록으로 전화시킴으로써 그 이해를 전혀 불가능하게 만들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것만 보아도 지금 우리와 포이에르바하와의 사이가 벌써 얼마나 멀어졌는가 하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제 와서는 사랑의 새 종교를 찬미하고 있는 그의 저작중의 ≪극히 아름다운 구절≫도 더는 읽을 만한 가치조차 없게 되었다.
포이에르바하가 진실로 연구하고 있는 유일한 종교는 기독교, 즉 일신교에 기초한 서방의 세계종교이다. 그는 기독교의 신이란 인간의 환상적 반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신 그 자체도 장구한 추상과정의 산물이며 고대의 수많은 종족신들과 민족신들의 집중적 정수이다. 이에 상응하여 신의 원형인 인간도 현실적인 인간인 것이 아니라 그것 역시 수많은 현실적인 인간들의 정수이며 추상적인 인간이며 따라서 그 자체가 머리 속의 하나의 형상일 따름이다. 그리고 포이에르바하는 그 저서의 페이지마다에서 감성을 설교하며 우리에제 구체적이며 현실적인 세계에 파고들 것을 설교하고 있으면서도 다름아닌 포이에르바하 그 자신은 일단 인간상호간의 이성관계가 아닌 어떤 다른 관계를 말하게 되자마자 극히 추상적으로 된다.
그는 이러한 관계에서는 포로이라는 단 하나의 측면만을 보았다. 그리고 여기에서도 헤겔에 비하여 포이에르바하의 놀랄 만한 빈약성이 다시금 우리를 놀라게 한다. 헤겔의 윤리학 또는 도덕론은 법철학을 이루며 그것은 1) 추상적인 법, 2) 도덕, 3) 윤리를 포괄하며 이 윤리에는 다시 가족, 시민사회, 국가가 속한다. 여기에서는 형식은 관념론적이지만 내용은 현실적이다. 그 내용은 도덕과 함께 법, 경제 및 정치의 모든 영역을 포괄한다. 포이에르바하에게는 그와 정반대이다. 형식을 두고 말하면 그는 현실적이며 인간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러나 그는 이 인간이 생활하고 있는 세계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도 말하지 않으며 또 그렇기 때문에 그의 인간은 여전히 종교철학에서 설교하는 추상적 인간 그대로이다. 이 인간은 모태에서 출생한 것이 아니라 번데기가 나비로 되듯이 일신교의 신에서 날아나온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인간이 역사적으로 발전하여 왔고 또 역사적으로 규정된 현실세계에서는 살고 있지 않다. 비록 그가 다른 사람들과 교제를 한다 하더라도 그 다른 사람들도 누구나 다 그와 마찬가지로 추상적인 인간이다. 그의 종교철학에서는 그래도 아직 남성과 여성의 구별이 있었으나 그러나 그의 윤리학에서는 이 마지막 구별조차 없어진다. 하긴 포이에르바하에게는 예컨대 다음과 같은 명제들도 간혹 볼 수는 있다. 즉
궁전에 사는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오막살이에 사는 사람이 생각하는 것은 다르다. - 만일 굶주림과 가난 때문에 당신의 육체에 영양물이 없을 때에는 당신의 머리 속에도 당신의 감정과 당신의 심정 속에도 도덕용 양식이 없을 것이다. - 정치는 우리의 종교로 되어야 한다.
그러나 포이에르바하는 이러한 명제들을 전혀 발전시킬 줄 모르며 이러한 명제들은 그에게 순전한 공담으로 남아 있다. 그리하여 슈타르케조차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처럼 정치는 포이에르바하에게는 도달하기 힘든 영역이며
사회에 관한 과학, 사회학은 미지의 영역이었다.
포이에르바하는 선악의 대립을 고찰하는데서도 역시 헤겔에 비하여 천박하다. 헤겔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의 그 천성이 선하다고 말하면서 마치도 자기가 매우 심오한 사상을 말하듯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의 천성이 악하다는 말 가운데 훨씬 더 심오한 사상이 담겨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다.
헤겔이 말하는 악이란 역사발전의 동력이 발현하는 형식이다. 여기에는 이중의 의미가 있다. 즉 한편으로는 어떠한 새로운 전진이든지 그것은 다 필연적으로 어떤 신성한 것에 대한 모독이며 낡아서 사멸하여 가고는 있으나 인습에 의하여 신성화된 제도에 대한 반역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계급대립이 발생한 이후로는 사람들의 추악한 욕심, 즉 사리사욕과 권세욕이 역사발전의 공간으로 되었다. 예컨대 봉건제도와 부르조아지의 역사는 이에 대한 부단한 증거로 되고 있다. 그러나 포이에르바하는 도덕에서 악의 역사적 역할을 연구하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역사의 영역은 그에게는 그야말로 불편하며 불쾌한 영역이다. 그의 다음과 같은 주장, 즉
인간이 자연의 품속에서 방금 태어났을 때에는 순전히 자연적인 존재에 불과하였고 인간이 아니었다. 인간이란 인간의 산물이며 문화의 산물이며 역사의 산물이다.
라는 주장조차 그에게 있어서는 전혀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였던 것이다.
상술한 모든 것에서 명백한 바와 같이 포이에르바하가 도덕에 관해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란 극히 빈약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행복을 추구하는 지향은 인간의 천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도덕의 기초로 되어야 한다. 그러나 행복을 추구하는 지향은 이중의 수정을 받는다. 첫째로는 우리 행위의 자연적 결과에 의해서 수정된다. 즉 몹시 취하면 그 이튿날까지 술이 깨지 않으며 상습적으로 방탕하면 병이 생긴다. 둘째로는 행위의 사회적 결과에 의해서 수정된다. 즉 우리가 동일한 행복을 추구하는 다른 사람들의 지향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그들도 우리의 행복을 추구하는 지향을 반대하며 방해한다. 이로부터 만일 우리가 자기의 행복을 추구하는 지향을 만족시키려고 한다면 우리는 자기 행위의 결과를 옳게 평가할 뿐만 아니라 동일한 지향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권리도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이성적 자제와 타인에 대한 사랑 - 또다시 사랑이다! - 이러한 것이 포이에르바하의 도덕적 기본규칙이며 기타의 모든 규칙은 이로부터 파생한다. 그리고 대단히 기지에 찬 포이에르바하의 논의도 아주 힘있는 슈타르케의 찬사도 이러한 2~3개의 명제들의 빈곤함과 공허함을 은폐할 수는 없다. 인간이 자기 자신의 문제만 돌봄으로써 자기의 행복을 추구하는 지향을 만족시킨다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며 또 만족시킨다 하더라도 자기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결코 유익한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다. 인간은 외계와 접촉을 가져야 하며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 즉 음식물, 이성, 서적, 담화, 논쟁, 활동, 소비 및 노동대상을 가져야 한다. 포이에르바하의 도덕은 누구나 다 이 모든 수단과 대상을 의심할 바 없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미리 전제로 하고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 도덕은 좋기는 하나 적용될 수 없는 충고를 줄 뿐이거나, 즉 이 도덕은 이러한 수단들을 가지고 있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빛 좋은 개살구와 같은 것이거나 둘중의 어느 하나일 것이다. 포이에르바하 자 신도 이에 대해서는 단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즉
궁전에 사는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오막살이에 사는 사람이 생각하는 것은 다르다. 만일 굶주림과 가난 때문에 당신의 육체에 영양물이 없을 때에는 당신의 머리 속에도, 당신의 감정과 당신의 심정 속에서 도덕용 양식이 없을 것이다.
그러면 행복에 대한 타인의 동등권을 인정한다면 형편이 좀더 나아지겠는가? 포이에르바하는 이러한 요구가 모든 시기와 모든 환경에 필수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언제부터 그것을 모든 사람이 인정하였는가? 고대의 노예와 노예소유자 사이에 또는 중세기의 농노와 귀족 사이에 만인의 행복에 대한 동등권이 문제로 된 일이 과연 있었던가? 피압박계급들의 행복을 추구하는 지향은 무자비하게 그것도 ≪법에 의하여≫ 지배계급의 동일한 지향을 위한 회생으로 되지 않았던가? 그랬다. 그러나 그것은 비도덕적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동등권이 인정되고 있다고 한다. 과연 그것은 문구상으로는 인정되고 있다. 그렇게 된 것은 부르조아지가 봉건제도를 반대하는 투쟁에서 또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을 위하여 모든 신분적인, 즉 인격의 특권을 폐지하고 처음에는 사법에서 다음에는 점차 공법에서도 인격의 법적 동등권을 실시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때부터이다. 그러나 행복을 추구하는 지향에 대해서는 관념적인 권리만으로는 극히 불충분하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물질적 수단을 더 많이 요구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생산은 압도적 다수의 동등권을 가진 사람들이 극빈한 생활을 유지하는데 극히 필요한 것만을 겨우 가질 수 있도록 한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행복에 대한 다수의 동등권을 노예제도나 농노제도보다 더 존중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 행복을 보장하는 정신적 수단, 즉 교육수단은 좀더 나은가? ≪사도 바에서 승리한 학교교원≫ 자체가 신화적 인물이 아닌가?
이 뿐만 아니다. 포이에르바하의 도덕론대로 하면 만일 사람들이 영리하게 투기하기만 하면 주식거래소가 도덕의 최고전당으로 된다. 만일 나의 행복을 추구하는 지향이 나를 거래소로 데려간다고 하자. 그리고 내가 거기에서 나의 행위의 결과를 옳게 타산할 줄 알기 때문에 그 행위가 항상 나에게 쾌락만을 가져다주고 어떠한 손실도 보지 않게 한다면, 즉 내가 항상 돈을 딴다면 포이에르바하의 지시는 이행된 것이다. 이 경우에 나는 나의 옆사람의 행복을 추구하는 지향을 조금도 구속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의 옆사람도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자발적으로 거래소에 온 것이고 또 그가 나와 투기를 함에 있어서 내가 나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지향에 따라서 한 것처럼 그도 역시 그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지향에 따라서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돈을 잃는다면 이것은 그가 그의 행위의 결과를 잘못 타산한 것으로서 그의 행위의 비도덕성을 증명한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상당한 벌을 주어 현대의 라다만트로서 뽐낼 수까지 있다. 사랑도 그것이 단순한 감상적인 문구가 아닌 한 역시 주식거래소를 지배할 것이다. 왜냐하면 각자는 자기의 행복을 추구하는 지향을 타인에 의하여 만족시키는데 이것이야말로 사랑이 하여야 할 일이며 바로 거기에서 사랑이 실제 적으로 실현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일 내가 자기의 거래행위의 결과를 잘 예견한다면, 즉 투기에서 이긴다면 나는 포이에르바하의 도덕의 엄격한 요구를 모두 이행하는 것으로 될 뿐더러 게다가 부자로도 될 것이다. 달리 말하면 포이에르바하의 염원과 의도는 여하튼 간에 그의 도덕은 결국 현대 자본주의사회의 척도에 의하여 재단된 것이다.
그런데 사랑은! - 그렇다. 포이에르바하에게 있어서는 사랑은 언제나 또 어디서나 실제생활의 모든 곤란을 타개해 줄 의무를 지닌 기적 수행자이다. - 그리고 이것은 정반대의 이해관계를 가진 계급들로 분열된 사회에서 그렇다! 이리하여 그의 철학에서는 그의 혁명적 성격의 마 지막 흔적까지 사라지고 낡은 노래, 즉 서로 사랑하라, 성과 신분의 구별없이 모두 서로 입을 맞추라고 하는 보편적 화해의 도취만 남는다!
간단히 말하면 포이에르바하의 도덕론은 그의 모든 선행자들의 도덕론과 동일하다. 그것은 온갖 시대, 온갖 민족, 온갖 사정에 맞도록 꾸며진 것이며 또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어디서나 또 언제나 적용될 수 없는 것이다. 현실세계에 대해서는 그것은 칸트의 지상명령과 마찬가지로 무력하다. 실제로는 각 계급마다, 심지어 매 직업마다 자기의 고유한 도덕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위반하여도 처벌당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들은 언제든지 이 도덕을 위반한다 그리고 모든 것을 통일시키려고 하는 사랑은 도리어 전쟁, 쟁의, 소송, 가정불화, 이혼 및 일부 사람들에 의한 다른 사람들의 최대한의 착취 가운데 발현된다. 그러나 포이에르바하가 정신적 운동에다 준 그 강력한 충격이 포이에르바하 자신에게는 전혀 성과없는 것으로 되어버린 것은 무엇 때문이었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은 포이에르바하 자신이 그렇게 중요한 추상의 왕국에서 생동한 현실세계로 나갈 길을 발견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하여 자연과 인간에 매달린다. 그러나 자연이나 인간이나 그에게는 한갖 공허한 명사에 불과하다. 그는 현실적인 자연에 관해서도 현실적인 인간에 관해서도 아무런 확정적인 것도 말하지 못하고 있다. 포이에르바하의 추상적 인간으로부터 현실적인 산 인간으로 이행하자면 이 인간들을 역사에서의 그들의 행동에서 연구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포이에르바하는 이 점을 집요하게 반대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이해하지 못하였던 1848년이라는 해는 그에게 있어서는 현 실세계와 최후의 절연, 은거생활로의 이행을 의미하였다. 이에 대한 책임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주로 그를 이러한 가련한 종말에 끌어넣은 독일의 사회관계에 있다. 그러나 포이에르바하가 이룩하지 못한 진보는 어쨌든 이룩하여야 하였다. 추상적 인간의 숭배라는 포이에르바하의 새 종교의 핵심은 현실적 인간 및 그 역사적 발전에 관한 과학으로 교체되어야 하였다. 포이에르바하 철학의 한계를 넘어 포이에르바하의 견해를 앞으로 더 발전시키는 일은 1845년 맑스에 의하여 ≪신성가족≫에서 시작되었다.
Ⅳ
슈트라우스, 바우어, 슈티르너, 포이에르바하는 그들이 아직도 철학의 지반을 떠나지 않았던 한 헤겔철학의 분파들이었다. 슈트라우스는 자기의 저서≪예수의 전기≫와 ≪교의론≫을 발표한 이후로는 르낭식으로 철학적 및 교회사적 미문학만을 연구하였다. 바우어는 다만 기독교 발생사의 분야에서만 다소 가치있는 일을 하였을 따름이다. 슈티르너는 심지어 바쿠닌이 그와 프루동을 뒤섞어 그 혼합물을 ≪무정부주의≫라고 명명한 후에는 단순한 기인(奇人)으로 남아 있었다. 포이에르바하만이 탁월한 철학자였다. 그러나 그는 비단 모든 개별과학 위에 군림하면서 그것들을 하나로 결합시키는 어떤 과학의 과학으로서 자칭하던 철학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 이런 철학은 그에게는 신성불가침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 철학자로서도 그는 철저하지 못하여 하부에서는 유물론자였고 상부에서는 관념론자였다. 그는 헤겔을 비판의 무기로써 극복하지 못하고 다만 그를 무용지물이라 하여 포기하였으나 동시 에 그 자신은 헤겔 체계의 백과사전적인 부에다 과장된 사랑의 종교와 빈약하고 무력한 도덕 이외에는 아무 것도 적극적인 것을 대립시킬 수 없었다.
그러나 헤겔학파가 해체되자 거기에서 다른 한 유파가 형성되었다. 그것은 참으로 성과를 거둔 유일한 유파였다. 이 유파는 주로 맑스의 이름과 결부되어 있다. *
* 나는 여기에서 나 자신에 대해서 몇 마디 말하려 한다. 최근에 이 이론을 완성하는데 내가 기여를 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그러므로 나는 여기에서 이 문제를 명백히 하기 위해서 몇 마디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맑스와 40년간에 걸친 공동사업을 하기 이전에 있어서나 그 공동사업 기간에 있어서나 이 이론을 창시하여 특히 그것을 완성하는데 어느 정도 독자적으로 기여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지도적인 기본사상의 대부분(특히 경제 및 역사 분야)과 더우기 그 기본사상의 최후적인 예리한 정식화는 맑스의 몫이다. 내가 기여했다고 하는 것은 아마 2 - 3개의 전문 부문을 제외하고는 맑스가 나 없이도 용이하게 해 놓을 수 있었을 그러한 것이다. 그러나 맑스가 해 놓은 것은 나로서는 결코 해내지 못하였을 것이다. 맑스는 우리들중 그 누구보다도 훨씬 높이 서 있었으며 더 멀리 앞을 내다보았으며 더 많이 그리고 더 빨리 관찰하였다. 맑스는 천재였으며 우리는 기껏해서 수재였다. 그가 없었더라면 우리의 이론은 도저히 오늘과 같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이론은 정당하게도 그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것이다.
헤겔철학과 인연을 끊게 된 것은 여기에서도 유물론적 입장으로 되돌아감으로써 수행되었다. 그것은 이 유파의 사람들이 현실세계 - 자연과 역사 - 를 선입견적인 관념론적 변덕없이 그것에 접근하는 모든 사람에게 보이는 그대로 이해하려고 결심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어떤 환상적인 연관에서 파악된 것이 아니라 그 자체의 연관에서 파악된 사실들과 합치되지 않는 모든 관념론적 변덕을 무자비하게 내던지려고 결심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유물론이란 원래 그 이상의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새로운 유파가 남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다만 여기에서 처음으로 유물론적 세계관이 참으로 진지하게 취급되었고 그것이 세상에 문제로 되고 있는 모든 지식 영역에 철저히 - 적어도 기본적으로는 - 관철되었다는 것 뿐이다.
헤겔은 단순히 포기되지는 않았다. 반대로 이 유파는 위에서 지적된 헤겔 철학의 혁명적 측면, 즉 변증법적 방법을 섭취하였다. 그러나 이 방법은 헤겔식 형태로는 쓸 수가 없었다. 헤겔에게서는 변증법은 개념의 자기발전이다. 절대개념은 옛날부터 -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 존재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 현존하는 전세계의 참다운 산 넋이다. 그 절대개념은 ≪논리학≫에서 상세히 고찰되고 있는 모든 예비적 단계, 절대개념 자체에 내포되어 있는 그 예비적 단계를 통과하여 자기자신으로 발전한다. 다음에는 그것은 자기자신을 ≪소외≫하여 자연으로 전화하고 거기에서 자기자신을 의식하지 못하면서 자연필연성의 형태를 취하여 새로운 발전을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에게서 다시금 자의식에 도달한다. 이 자의식은 이번에는 역사에서 또다시 미숙한 상태에서 점차 벗어져 나오며 그리하여 드디어 절대개념은 헤겔철학에서 다시 완전히 자기자신에 도달한다. 이와 같이 헤겔에게서는 자연과 역사에서 나타나 는 변증법적 발전, 즉 모든 우여곡절과 모든 일시적 퇴보를 통하여 낮은 데로부터 높은 데로 자기의 길을 개척하여 가는 전진적 운동의 인과적 연관은 다만 어디서인지는 모르나 사유하는 모든 인간의 두뇌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여 영원히 진행되는 개념의 자기운동의 모사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관념론적 왜곡은 제거되어야 하였다. 유물론적 견지로 돌아온 우리는 현실의 사물을 절대개념의 일정한 발전단계의 모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개념을 제대로 현실의 사물의 모상으르 보았다. 이리히야 변증법은 외부세계와 인간사유의 두 영역의 운동의 일반적 법칙에 관한 과학으로 환원되었다. 이 두계열의 법칙은 본질에서 동 일하며 다만 그 표현에서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을 뿐이다. 즉 인간의 두뇌는 이 법칙을 의식적으로 적용할 수 있으나 자연에서는 - 이때까지는 대체로 인간역사에서도 - 이 법칙이 외견상의 무한한 우연성 가운데서 외부적 필연성의 형식을 취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길을 개척한다는 그것이다. 그리하여 개념의 변증법 자체는 다만 현실세계의 변증법적 운동의 의식적 반영에 불과한 것으로 되었다. 이와 함께 헤겔의 변증법은 전도되었다. 즉 정확히 말한다면 그것은 바로 서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전에는 그것이 거꾸로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목할 만한 것은 이미 다년간 우리의 가장 좋은 노동도구이며 가장 예리한 무기로 된 이 유물론적 변증법은 우리들만이 발견한 것이 아니라 독일의 한 노동자 요제프 디쯔겐도 그것을 우리와 또 심지어 헤겔과도 독립적으로 발견하였다는 것이다. *
* ≪한 육체 노동자에 의하여 서술된 인간의 정신노동의 본질≫, 함부르크 마이스너 판을 보라.
이리하여 헤겔철학의 혁명적인 측면은 복구되고 또 동시에 그것은 헤겔에게서 이 측면의 철저한 관철을 곤란하게 하였던 외피로부터 해방되었다. 위대한 기본사상. 즉 세계는 기성의 완성된 사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과정의 총체이며, 여기에서는 불변적인 것으로 보이는 사물도, 두뇌에 의하여 구성된 사물의 사유적 모사의 개념도 다 같이 부단히 변화하면서 혹은 발생하며 혹은 소멸한다는 것 그리고 또 전진적 발전은 모든 외견상의 우연성과 일시적인 퇴보에도 불구하고 결국 자기 자신의 길을 개척한다는 것 - 이 위대한 기본사상은 헤겔시대 이래 일반의 의식에 깊이 침투되어 있었기 때문에 위에서 말한 일반적인 형태에서는 그것을 논박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러나 그것을 말로 인정하는 것과 그것을 매개의 개별적 경우에 또 매개의 주어진 연구영역에 적용한다는 것과는 다르다. 만일 우리가 연구에서 항상 이러한 견지에서 출발한다면 우리에게서 종국적인 해결이나 영원한 진리에 대한 요구는 온갖 의의를 영원히 상실할 것이다. 우리가 얻은 모든 지식은 필연적으로 그것을 얻을 때의 환경에 의하여 제한되어 있으며 또 제약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이와 동시에 진부한 것이기는 하지만 아직 매우 널리 보급되어 있는 형이상학으로서는 극복할 수 없는 대립, 즉 진리와 오류, 선과 악, 동일성과 차이성, 우연성과 필연성간의 대립과 같은 것은 벌써 우리의 눈을 현혹케 할 수 없다. 우리는 그러한 대립이 상대적인 의의를 가질 따름이라는 것, 즉 지금 진리로 인정되고 있는 것은 지금은 숨어 있으나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나타날 오류의 측면을 가지고 있으며 또 그와 꼭 마찬가지로 지금 오류로 인정되고 있는 것도 진리의 측면을 가지고 있으며 일찌기 진리로 생각될 수 있었다는 것, 또 필연적인 것이라고 확인되고 있는 것은 순수한 우연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우연적인 것이라고 간주되는 것은 필연성이 감추어져 있는 형식이라는 것 등등을 알고 있다.
헤겔이 ≪형이상학적≫이라고 부른 낡은 연구방법과 사유방법은 주로 대상을 완성되고 불변한 어떤 것으로 취급하는 방법으로서 그 잔재는 아직까지도 사람들의 두뇌 속에 강하게 남아 있으며 또 한때에는 충분한 역사적 존재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그 어떤 과정의 연구에 착수할 수 있게 되려면 먼저 대상을 연구할 필요가 있었다. 대상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연구할 수 있게 되려면 그 대상이 무엇인가를 우선 알아야 한다. 당시 자연과학에서의 사정은 바로 이러하였다. 대상을 완성된 것으로 간주하던 낡은 형이상학은 죽을 대상들과 산 대상들을 어떤 완성된 것으로 연구한 자연과학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별적인 대상에 대한 연구가 발전하여 결정적인 일보전진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다시 말하면 자연 자체 내에서 이 대상들이 받는 변화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로 넘어갈 수 있게 되었을 때 철학 분야에서도 역시 낡은 형이상학의 임종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그리고 사실상 만일 전 세기 말까지는 자연과학은 주로 수집하는 과학, 완성된 대상들에 관한 과학이었다면 현 세기에는 그것은 본질상 정리하는 과학, 과정에 관한 과학, 이 대상들의 기원 및 발전, 자연의 이 과정들을 하나의 큰 전일체로 통일시키는 연관에 관한 과학으로 되었다. 동식물 유기체 내의 과정들을 연구하는 생리학, 개별적 유기체의 맹아상태에서 성숙에 이르기까지 발전을 연구하는 발생학, 지각의 점차적인 형성을 연구하는 지질학 - 이러한 과학은 모두 현 세기의 산물이다. 자연에서 진행되는 과정들의 상호연관에 대한 인식은 특히 다음과 같은 3대 발견에 의하여 비약적으로 전진하였다. 즉
첫째로, 식물체와 동물체가 세포를 단위로 해서 그 증식과 분열로써 발전한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이 발견은 우리에게 모든 고등유기체의 발달과 성장이 하나의 일반적인 법칙에 따라서 수행된다는 확신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또 세포의 가변설을 중시함으로써 유기체에서 종의 변화가 일어나며 또 그러한 변화가 유기체로 하여금 개체적 진화 이상의 진화 과정을 수행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을 가르쳤다.
둘째로, 에네르기 전환의 발견이다. 이 발견은 무엇보다도 무기계에서 작용하는 소위 모든 힘 - 역학적 힘과 그 보충인 소위 위치에네르기, 열, 복사(광선과 따라서 복사열), 전기, 자기, 화학적 에네르기 - 은 보편적 ≪운동의 서로 다른 발현형태들로서 이 형태들은 일정한 양적 비례를 가지고 한 형태로부터 다른 형태로 이행하며 따라서 어떤 양의 에네르기의 한 형태가 소멸할 때에는 그 자리에 일정한 양의 다른 형태가 나타나며 이리하여 자연의 모든 운동은 결국 한 형태로부터 다른 형태로 끊임없이 전화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끝으로 다윈이 처음으로 전반적 연관 속에서 제시한 다음과 같은 증명이다. 즉 현재 우리 주위의 모든 생물체들은(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처음에는 많지 않은 단세포 배아(胚芽)로부터 장구한 발전과정을 거쳐 발생한 것이며 이 배아는 또 화학적 작용으로 발생한 원형질 또는 단백질에서 형성된 것이다.
이 3대 발견과 자연과학의 그 외의 큰 성과들에 의하여 우리는 지금 자연의 개별적 영역 내에서의 그 과정들간의 연관 뿐만 아니라 이 개별적 영역들 상호간의 연관도 역시 전체적으로 밝힐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경험적 자연과학 자체가 제공한 자료들에 의하여 연관된 전일 체로서의 자연의 일반적 모습을 상당히 체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자연의 일반적 모습을 설명하는 것이 이전에는 소위 자연 철학의 임무였다. 그러나 자연철학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현상의 현실적 연관을 관념적, 환상적 연관으로 대체하고 결여된 사실을 허구로 대치하면서 현실적 공백을 다만 상상으로 메꿈으로써 그 임무를 수행하였을 따름이다. 이 경우에 자연철학에 의하여 많은 천재적인 사상이 발표되고 또 후일의 많은 발견이 예측되었다. 그러나 황당무계한 진술도 역시 적지 않게 있었다. 당시는 또 그렇게 밖에는 될 수가 없었다. 오늘에 와서 우리 시대로서 만족할 수 있는 ≪자연의 체계≫를 수립하자면 자연연구의 결과를 변증법적으로, 즉 사물 자체의 연관의 견지에서 고찰하기만 하면 되며 또 이 연관의 변증법적 성격에 대한 의식은 좋든 나쁘든 자연과학자의 형이상학적인 두뇌에까지도 침투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철학은 종말에 이르렀다. 그 자연철학을 부활시키려는 어떤 시도든 그것은 다 헛된 일일 뿐더러 일보후퇴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역사적 발전과정으로 이해하는 자연에 대하여 적용할 수 있는 그것은 사회역사의 모든 영역과 인간(및 신)에 관계되는 것들을 취급하는 모든 과학 전체에 대해서도 역시 적용할 수 있다. 자연철학과 마찬가지로 역사철학, 법철학, 종교철학 등등도 사건들에서 밝혀야 할 현실적 연관을 철학자들이 고안해 낸 연관으로 대체하였으며 또 역사를 - 그 전체에 있어서나 개별적 부분에 있어서나 - 이념의 점차적인 실현으로 보았으며 그것도 물론 언제나 다만 철학자들마다 애호하는 이념의 점차적인 실현에 불과한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리하여 결국 역사는 무의식적이기는 하지만 필연적으로 미리 확정된 일정한 이상적 목적의 실현을 위하여 움직이고 있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예컨대 헤겔에게서는 이러한 목적은 그의 절대이념의 실현이었으며 또 그의 견해에 의하면 이 절대이념에 도달하려는 확고부동한 지향이 역사적 사건들에서 내적 연관을 이루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아직 알려지지 않은, 현실적인 연관 대신에 그 어떤 새로운 무의식적인 또는 점차적으로 의식에 도달하는 신비적인 섭리가 설정되었다. 따라서 여기에서도 자연의 영역에서와 꼭 마찬가지로 현실적인 연관을 발견함으로써 허구적이고 인위적인 연관을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이 과제는 결국 지배적인 법칙의 형태로 인류사회의 역사를 일관하고 있는 일반적 운동법칙을 발견하는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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