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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 이회영일가의 의 만주 망명 100년과 그 역사적 의의
- 제6차 헌일자유공동체워크숍(2010. 7. 24) 기조발표 요약 -
이 문 창
1, 초장: 망명행렬(1910~1911)
일제에 의한 강제침탈 100주년을 논하는 자리에서 우당 이회영(이하 경칭 약) 일가의 만주망명과 그 역사적 의의를 논해보라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제목입니다. 우당 일가 집단 망명의 역사적 의의를 논하는 데 있어 반듯이 집고 넘어가야 할 일은 그 운동의 중심적 역할을 한 우당 이회영의 구국독립운동 방략이 무엇이었으며 이를 위한 그의 일관된 신념의 원천은 어디에 기초한 것이었던가 하는 점입니다. 그런 점을 감안하여 모처럼 주어진 이 소중한 기회를 우당선생의 행적과 사상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고 싶다는 것이 저의 소망입니다.
러일전쟁을 통해 러시아를 패망시킨 일본이 그 여세를 몰아 최종적으로 우리 강산을 강탈했을 때, 국가안위에 응당 책임을 져야 할 대부분의 권문세가들의 안중에는 조국이나 민중의 운명에 대한 생각이 털끝만큼도 있을 이 없었다. 그저 대세를 어찌할 수 없다는 핑계로 나라를 송두리째 왜적에게 넘겨주는 데 앞장서고 그 대가로 은사금과 작위를 구걸해서 대대로 누려오던 사사로운 영화를 보전하자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관심사였다.
그런 판국에 홀로 우당 가문 6형제(, , , 회영, , )가 구국의 한 마음으로 들고 일어나 솔선해서 일본 지배권이 미치지 못하는 낮설은 땅 만주대륙으로 이주하기로 결의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긴 것은 실로 고금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경이적인 사건이었다. 우당 형제는 이를 위해 비밀리에 전답과 가옥 등 가산을 모두 정리했으며, 특히 둘째 은 아우들의 뜻에 적극 동참해 양부(영의정 )에게서 물려받은 지금 돈으로 수백억이나 되는 부동산을 모두 팔아 만주 망명에 동참했던 것이다. 마침내 나라가 넘어가던 해인 1910년 12월 그 해가 저물기 전에 우당 일가 6형제 온 가족 60여명은 아녀자까지를 포함하여 하나도 빠짐없이 달구지에 실려 신의주로, 압록강 건너로 설한풍을 헤치며 떠나갔던 것이다. 우당 일가족이 나라를 떠났다는 소식이 온 장안의 화제가 되었을 때 기독교청년회의 월남 이상재는 이렇게 탄복하고 있었다.
"동서 역사상에 나라가 망한 때 나라를 떠난 충신의사가 수백 수천에 그치지 않는다. 그러나 우당 일가족처럼 6형제 일가족 40여명이 한 마음으로 결의하고 나라를 떠난 일은 전무후무한 것이다. 장하다! 우당의 형제는 참으로 그 형에 그 동생이라 할 만 하다. 6형제의 절의는 참으로 백세청풍이 될 것이니 우리 동포의 가장 좋은 모범이 되리라."
우당 일가족의 망명과 때를 같이하여 , , 등 안동의 거족들이 각기 온 가솔들을 데리고 이에 합류하였으며, 강화학파의 , , 등도 횡도천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등 전국 8도의 의병이며 우국지사들이 서로 앞다투어 국경 넘어로 이 대열에 합류하였다. 그것이 단순한 망명객의 도피행각이 아니었음은 바로 그 뒤에 그들이 남겨놓은 일련의 항일구국의 서사시가 이를 웅변해 주고 있는 것이다.
2. 늑약 저지투쟁에서 심니회운동으로(1905~1910)
우당 이회영이 본격적으로 민족운동에 발벗고 나선 것은 1905년 11월 을사늑약 반대투쟁 때부터 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을사보호조약이라고도 하는 을사늑약은 러일전쟁에서 이겨 한반도에 대한 패권을 독점하게 된 일본이 고종황제를 강압적으로 핍박해서 밀어부친 데 따른 것으로 그 이면에는 왜적의 괴수 이도히로부미의 흉측한 계략과 그 촉수노릇을 한 이완용 등 매국 5적의 농간이 있었다. 을사늑약의 내용을 요약하면 외교권을 일본에 이양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시정감독권 등을 행사한다는 5개조로 되어 있어 대한제국을 보호의 미명 하에 사실상 일본제국의 식민지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위암 장지연의 황성신문 사설 '시일야 방성대곡'이 온 장안 인심을 격앙케 하고, 을사늑약의 무효화를 절규하는 반대투쟁이 연일 온 나라를 소연케 했다. 원로대신 가 백관을 인솔하고 상소투쟁을 하다가 음독자결하고, 역시 국민에게 망국의 비통을 호소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인했으며 홍만식, 이상철, 김봉학, 이한응 등 수다한 충열의 신료들이 속속 그 뒤를 따라 순국했다. 이에 은 종로 거리에 서서 "백만년 우리 조국은 이제 망하게 되었다. 우리 동포는 모두 민영환공을 따르자"고 울부짖었고 이에 합세한 군중의 동향이 험악해 지자 왜적의 군경이 총을 쏘고 칼을 휘두르며 달려와 해산시켰다. 또한 전국 각지에서는 , , , 등이 이끄는 의병이 들고일어나 늑약의 부당성을 규탄하며 대일 결사항전을 선언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것으로서 해결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이 때를 당하여 우당 또한 관계요직에 있는 보재 이상설, 계씨 등을 통해 연신 정계의 정보를 입수하고 대책을 숙의하는 한편 가재를 아낌없이 털어 경향 각지에서 늑약의 무효화투쟁을 하는 동지들의 뒤를 보아주고 있었다. 그는 의병장이던 , 등을 앞세워 각지 의병부대와 연락을 취하고 특히 그들의 활동경비 조달에 진력하였으며, 한편으로 (나철, 대종교 창시자), 등 무력 협객들과 결교하여 등 5적 척살계획을 지원하는 일에 가담하기도 했다. 그러든 중 우당은 1907년 네더랜드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세계평화를 위해서는 동양의 화약고인 한국의 완전독립이 절대적인 필수조건인바, 만국평화회의야 말로 한국에 대한 일본의 야만적인 침략행위의 부당성을 세계만방에 호소하여 이를 시정할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우당은 설레는 가슴으로 이를 은밀히 고종께 상주하여 윤허를 얻었고, 마참내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 , 을 한국대표로 파견하는 헤이그밀사 계획을 성사시키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사건은 일본의 죄악을 만천하에 폭로하는 데는 어느정도 효과가 있었지만 국권 회복의 한을 풀기에는 이 또한 역부족일 수밖에 없었다.
한편 우당은 이 시기 다 기울어버린 국운을 계란으로 바위치기식의 즉흥적인 대응방식만으로 구제 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였다. 이에 우당은 집안의 제형제들 그리고 상동교회 청년학원을 중심으로 하는 목사와 , 등 가장 친신하는 동지들과 보다 근본적이고도 100년 앞을 내다보는 원대한 구국방략을 토구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위해 우당은 1908년 여름 헤이그밀사 사건 후 외지를 떠돌 수 밖에 없게 된 보재 이상설을 우정 우라디보스토크로 찾았다. 가장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구국운동의 동지이자 서로를 아끼는 고우인 양인은 만리타향에서 만난 벅찬 감격에서 한동안 헤어나지 못하는 듯 했은나 곧 정신을 추스르고 본론 협의로 들어갔다.
평소 정세 관찰력이 뛰어나기로 이름난 보재는 그 동안 해외에서 견문한 풍부한 지식을 토대로 자기 의견을 개진했다. 동양평화 교란의 원흉인 일본의 패권야욕은 필경 미, 러, 중 등 열강의 경계심으로 인해 고립될 수 밖에 없게 되고, 그에 따라 머지않은 장래에 우리에게 유리한 국제정세가 조성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보재의 거침없는 낙관론이었다. 하지만 우당은 헤이그밀사 사건이후 고종의 강제퇴위, 시위대 강제해산과 정미7조약 늑결 등 방약무인한 통감 이도히로부미의 횡포가 형해만 남은 국가체제의 마지막 숨통을 죄여들어가는 국내실정을 숨김없이 들이댔다. 현재 국내에서는 왜적의 앞잡이가 되어 매국적 주구행위를 하는 , 등 일진회 패들이 극성을 부리는 반면에,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등 배일언론의 역할과 국채보상운동, 그리고 특히 몰락 양반, 상인계급이 중심이 되어 전국적으로 봉기하는 항일의병운동이 우리에게 한가닥 희망의 끈이 된다는 것이 우당의 설명이다. 수일간 숙식을 같이 하면서 숙론한 끝에 양인 간에 도출된 앞으로의 적극적인 운동방침에 대한 결론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1. 국민교육의 장려보급으로 국민의 각성을 촉구할 것.
2. 넓이 우국지사들을 연결하여 비밀조직을 만들고 그 조직으로써 광복운동의 중추를 삼을 것.
3. 만주에 광복군 양성훈련의 기지를 만들 것.
4. 운동의 혈맥인 재정을 준비할 것.
3 서간도 망명기지 개척과 무력 양성(1911~1920)
보재와 헤여져 고국에 돌아온 우당은 곧 양인간에 합의된 당면 4개 운동계획에 대한 실천 작업에 착수했다. 보재 자신은 밀사사건으로 궐석재판에서 사형언도까지 받은 상태였으니 외지에서 외교활동을 하기로 하고 우당이 국내활동을 전담해서 획책하기로 하였다. 우선 우당은 상동교회 지하실을 거점으로 전덕기, 이동령, , , , , , , , , 등과 극비리에 회동( 이관직 [실기]에는 전덕기, 이동령, 양기탁 등 4인만이 회동한 것으로 되어있음)하여 모든 운동의 총본산이 될 비밀결사 를 조직하는 데 합의하고 그 실천에 옮겼다. 이 결사의 목적이 무엇이며 실지로 누구누구가 관여했는지 워낙 비밀이 철저하여, 후일 105인 대라우찌 암살음모사건 등으로 조직의 일부가 노출된 것 외에는 지금 것 그 실체를 아는 이가 거의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다만 양기탁을 주필로 하는 대한매일신보가 신민회의 기관지가 되어 연일 사설 등으로 배일사상을 고취하다가 페간 당하고, 사장인 영국인 베델이 3개월 선고를 받고 추방 당하는 필화를 겪었다는 것 정도가 알려진 전부다.
신민회 조직과 맥을 같이 하여 우당의 애국 계몽운동은 기호, 서북, 호남, 영남, 관동 등 5학회의 지우들과 연결하는 데서 그후 전국적인 교육진흥사업으로 뻗어나갔다. 우당은 이동령, 안창호, , 등과 협의한 끝에 (평양 대성학교, 유고로 부임 못함) (정주 오산학교), 이관직(안동 협성학교), 여준(상동 청년학워) 등을 교사로 추천하여 각지 학교에서 애국정신교육을 고취시켰으며, 우당 자신이 상동청년학원 원감에 취임하여 전국교육사업을 진두지휘하였다. 당시 교육계에서 우당과 손을 잡은 인사로는 전덕기, 이상재, , 안창호, 이승훈, , 박승봉, , , , , , , 여준 등이다.
일제의 말발굽 아래 [대한제국]의 이름이 세계지도 상에서 최종적으로 지워지던 1910년 8월, 우당은 서둘러 이동령, 장유순, 이관직 등과 같이 지물행상을 가장하고 만주로 기지 물색에 나섰다. 수년 전 같은 목적으로 보재와 함께 북간도 용정촌에 [서전의숙]을 개설했던 것이 밀사사건 등 국내의 다급한 사정으로 제대로 지속하지 못하고 중단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서전의숙]이 있던 북간도는 러시아 연해지방과 가까운 또다른 요충지였지만 유사시 적의 눈을 피해 서울 중부 이남지방에서 대가족이 이동하기에는 약간 무리가 있었다. 우당 일행은 일단 옛 고구려의 구지이자 압록강 국경을 사이에 둔 남만주를 목표로 초산진을 거쳐 강건너 대륙을 월여에 걸쳐 답사하고 돌아왔다. 그리고는 곧 준비에 착수해 이동령의 친척 가족을 선발대로 파견하여 환인현 횡도천에 식량, 김장 등을 마련해서 중간집결처가 되도록 했다. 또한신의주, 안동 등 요소요소에 현지동지들의 협력으로 비밀숙사를 마련해 두어 뒤따라오는 탈출행렬의 만전에 대비했다.
1911년 봄, 신민회 간부 등 전국적으로 모여든 집단망명자 가족들은 일단 에 집결하여 그때부터 우선은 각자의 생활토대를 마련하기에 분주했다. 그런 한편에서 우당 형제들 그리고 이동령, 이상룡 등 지도자들은 서로 긴밀히 협의하여 앞으로 추진할 단계적인 활동계획을 정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기로 했다. 이 방침에 따라 에서 망명자 가족 전원이 참석한 야외 군중대회를 열고 민단 성격의 자치기관인 [] 조직을 결의하였다. 경학사의 일차적 목적은 이주동포들의 생활 안정과 농사개척 그리고 교육촉진이었으며 이를 통해 앞으로의 국내 재진입에 대비한 혁명적 거점역할을 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한 경학사의 부속사업으로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강습소를 설치하여 대일항전에 대비한 무력양성에 박차를 가하자는 것이다.
낮선 이역 땅에서 수상쩍게 여기는 원주민들의 눈치를 보아가며 대일항전의 혁명적 근거지를 만든다는 사업은 결고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당 등 망명자들이 2년여에 걸쳐 가진 난관을 무릅쓰고 경학사 사업과 무관학교 설립이라는 중간목표를 성사시킬 수 있었던 데는 신생중국의 대총통위안스카이의 선의적인 배려와 영석 이석영공의 거재 투척이 큰 약이 되었던 것을 기억해 두어야 한다. 우당이 텃세를 하는 원주민들의 야료로 인해 정착사업이 난관에 부닥쳤을 때, 이전부터 한국과 인연이 깊은 위안스카이는 비서 후밍천을 우당과 함게 동삼성 총독 자오얼펑에게 보내 총통의 친서를 전달케했다. 그에 따라 자오총독 또한 비서 자오시슝을 시켜 우당 일행과 동반해서 회인, 통화, 유하 3현을 직접 순방하고 다니며 이후 관할지역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주거 또는 생산활동에 적극 협력하고 편의를 도모해주도록 훈령했다는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은 후, 통화현 합리하에다 땅을 사들이고, 모든 망명가족들이 거주할 막사와 함께 집단농장을 개척하는 데 힘이 되어 준 것은 우당의 둘째 백씨 영석공이었다. 뿐만 아니라 교사를 신축하고, 중학과정의 본과와 사관양성과정의 특별과로 된 신흥무관학교를 설립 운영하는 데 든 모든 경비 또한 영석공이 만석지기재산을 처분한 데서 나온 것이었다. 그 결과가 3,500명의 운동자를 배출하여 우리 독립운동사의 척주로 자리메김하게 괴었던 것이다. 그 많던 재산을 아우들의 뜻에 따라 망명기지 마련하는 데 흩어버리고, 1934년 상해 망명지에서 외로히 세상을 떠난 영석공이야 말로 우리 독립운동의 영원한 사표요 은인이라 할 만하다.
요컨대 을사늑약 저지운동에서 동지들과 국외 망명계획을 입안하고 실행의 제1보를 내딛던 시기 그것은 우당에게 있어 단순히 이미 재기불능 상태에 이른 봉건왕조의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자주적 생존권 탈환을 목적으로 굳게 뭉친 동지들이 국경 밖 안전한 곳에 조국 해방작전 수행을 위한 나공불락의 근거지를 확보하려는 운동이었다. 그 근거지를 중심으로 국내에서 이탈해 나오는 인적 물적 역량을 결집시키고 독립운동의 전위에 설 항일무력을 양성하여 국내 재진입에 대비하려는 것이 원대한 전략적 수순이었다. 한마디로 그것은 우리 민족에게 있어 빼았긴 생존적 자유를 자주적으로 탈환하기 위한 첫 출발점을 우당이 정확하게 짚어내어 행동화한 독립운동의 첫출발점이었다는데서 역사적으로 평가 받을 일이었던 것이다.
4. 아나키스트 항일혁명노선(1921~1931)
우당이 사회사상 중에서도 최첨단사상인 아나키스트를 자임했던 것은 대체로 3· 1운동 이후 북경 상해에 머물던 시기였다. 이 시기 우당의 행적에서 특이한 점은 대체로 혈기왕성하던 청장년기와는 다르게 조용히 뒷전에 앉아 젊은 동지들의 활동의 상담자 역할을 하는 방식이었다.
우당은 1919년 4월 상해에 집결한 운동자들 사이에 임시정부 수립논의가 한창일 때, 그 허명무실성을 들어 이를 비판하고, 그 대안으로서 독립운동총본부 조직을 주장했었다. 각지에 흩어저있는 항일운동대열을 각자의 독자성 위에 유기적으로 연대시키려는 것이 우당의 구상이었다. 우당이 임정 인사들과의 이견을 끝내 좁히지 못하고 등과 같이 북경으로 돌아오자, 그의 집은 연일 국내외에서 모여온 수많은 운동그룹 인사 또는 개인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그중에는 만주에서 임무를 띠고 달려온 독립군 전사들이 있는가 하면 국내에서 교복차림으로 갖나온 풋내기 문학도도 있었다. 의열단, 다물단과 같은 행동그룹 간부들도 있었고, 공산주의계 또는 무정부주의계에 속하는 청년들도 있었다. 우당은 마음 속의 초조함과는 다르게 그 모두를 정성스러운 의론의 대상으로 대해 주었고, 그들 하나하나가 독자적 자기의사에 따라 행동하면서도 공동의 운동목표를 향해 자진해서 참여하기를 기다리는 느긋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이 시기 우당은 조석으로 만나는 단재 신채호, , 등과 축일 상종하며 독립운동 중심체를 구상하는데 대한 어려움을 털어놓고 있었다. 그런 중에서도 우당이 가장 확신을 갖기 어려웠던 것은 사상적 기조를 어디에 두고 힘을 모을 것이며, 독립 이후에 건설할 나라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였다. 러시아혁명에 영향을 받은 공산주의자들의 이론적 공세와 유도전술에 어떻게 대처할 것이며, 문화정치를 가장한 일제의 회유 이간정책에 넘어가 전열을 이탈하는 기회주의자들을 어떻게 응징해야 할 것인가, 바로 이런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서라도 적극적인 중심사상의 버팀목이 필수적이라는 것이 바로 우당의 생각이었다. 마침내 우당은 그 길을 아나키즘에 기초한 이상농촌 양도촌 건설계획을 논하는 자리에서 확인하고, , , 형제, , 등 청년동지들과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이하 재중무련)을 조직하기에 이른다.
우당은 일직이 자기가 아나키스트가 된것은 "현재 우리 독립운동의 현실로 보아서 가장 실제적인 이론이오, 가장 적절한 방법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식의 것이 아니었음을 강조한 적이 있다. 우당의 아나키즘에 입각한 독립관, 정치이상을 (재만한족연합회의 중심인물)과의 대화내용을 중심으로 간추려 보면 대략 다음과 같은 줄거리다.
"나는 본래 벼슬을 원치 않는 사람이오, 불평등한 신분제도도 본래 반대하던 사람이다." 독립운동의 목적은 민족의 해방과 자유의 탈환을 통해 자유 평등의 복지사회를 실현하는 데 있다. 이 목적을 실현하는 수단 방법은 자유합의 자유연합적 이론에 근거한 조직이라야 한다. '을 '으로, 지배 없는 세상 억압과 수탈이 없는 세상을 독립한국에 실현하려면 그 수단방법 자체가 시작부터 강권적인 권력 중심의 명령조직을 배제한 것이라야 한다. 그렇게 하는 데서 독립 후 자연스럽게 권력의 집중화를 피할 수 있을 것이며, 자유 평등 자주자결의 원칙에 따른 지방분권적 자치제도가 정착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아나키즘의 궁극적 목적은 완전 독립의 주권을 가진 모든 민족, 모든 지역적 생활권이 상호 협력하는 대동의 세계를 실현하자는 것으로, 그것이 나의 처음부터의 일관된 신념이기도 하다.
1920년대 우당 주위에 모여든 한인청년들의 초기아나키스트운동은 대체로 두 방향으로 갈려 출현했다. 그 한 가닥이 유자명을 연락참모로 하는 의열단 다물단 등 열혈청년들의 직접행동 대열이며, 다른 한 축이 북경대학의 , , , 등 중국 원로아나키스트들 밑에서 학생들과 세계어학회 활동을 하던 이을규,정구 형제 등 사상연구 그룹이었다. 의열단이 공산당의 유혹전술에 말려들어 중도에 정치활동 쪽으로 변질하는 바람에 그들의 특징인 직접행동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된 것은 애석한 일이었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신채호, 유자명은 '조선혁명선언'(일명 의열단 선언)을 써서 의열단의 정체성을 고취하기에 힘썼으나 역부족이었다.
우당을 중심으로 하는 또 다른 한 가닥 재중 무련 동지들은 극도의 경제난을 이겨가면서 기관지 [정의공보] 간행, 크로포트킨의 소책자 번역 배포 등 사상 선전에 총력을 기울였다. '5·30 대 일,영총파업' 때는 이을규, 정규, 정화암, 백정기 등 청년동지들이 남화아나키스트연맹, 상해공단연합회의 중국· 대만 학생동지들과 합세하여 혁명적 노동운동에 열을 올리기도 했다. 이후 한인 아나키스트들은 계속 남화지역 중국동지들과의 제휴관계를 발전시켜 상해노동대학 설립준비, 복건농민자위운동 등 국제적 활동에서 선도적 역할을 하였으며, 그 여세를 몰아 한, 중, 일, 대만 등 각국동지들이 모인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여 팽창일로의 일본제국주의에 공동대처할 방안을 강구하고 있었다. 이 대회를 향하여 우당은 친히 "한국의 독립운동과 무정부주의라"라는 제목의 메시지를 보내 각국의 동지들이 한국독립운동을 적극 성원해 줄 것을 호소했고 그 메시지가 동 대회의 결의안으로까지 채택되었다는 것이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단재 신채호, 우관 이정규 등 국제적 아나키스트운동의 중심인물 들이 일경에 의해 연속 피체 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1929년 천진에 있는 우당에게 전해진 보다 긴박한 소식은 시야 김종진 등 북만에 모인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동지들이 신민부의 과 뜻을 합쳐 한족총연합회를 결성해 가지고 200만 재만 동포의 자치운동 전개에 나섰다는 것이었다. 우당은 이야말로 아나키스트들이 힘을 합칠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에서 각처에 흩어져 있는 동지들에게 연락하여 북경에서 회의를 여는 등 백방으로 그 지원 대책을 세우기에 고심했다. 그러나 북만운동이 착착 그 성과를 나타내기 시작하던 찰라에 청산리 대첩의 영웅 김좌진이 철없는 공산주의자들의 저격으로 쓰러지고, 뒤이어 시야, , 등 보석 같은 동지들이 연속 희생 되는 참화를 입었으며, 그 보다 앞서 자금 마련을 위해 복건으로 가던 회관 이을규까지 천진에서 일경에게 피체되고 말았으니 실로 분통을 터드릴 노릇이었다.
5. 종장: 다시 만주로(1932)
일제의 만주 침략으로 중국전토가 물 끓듯 하게 되니 각지에 흩어져 있던 동지들이 모두 상해로 모여들어 남화한인청년연맹에 거점을 두고 공동생황을 하게 되었다. 더 이상 물러설내야 물러갈 자리가 없어 고심하던 판인데 중국아나키스트 중의 실력파인 , 이 우당과 화암을 찾아와서 항전태세를 가추기 위한 한중공동전선 결성을 제안했다. 이렇게 해서 우당을 위수로 한 정화암, 유자명, 백정기, , 등 한인동지와 왕아초, 화균실,등 중국동지 그리고 (사노), (이도) 등 일본동지가 모여 연석회의를 열고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항일구국연맹은 적의 기관 파괴와 요인 처단, 친일분자 숙청, 배일선전 등을 목적으로 한 것으로 부설로 행동 담당의[흑색공포단]을 두었고, 재정 및 무기는 왕아초가 책임지고 공급하게 되었다. 흑색공포단은 외교부장 왕정위 피습사건, 아모이 일 영사관 폭파사건 그리고 천진 일본기지 및 기선 파괴사건 등을 주도하여 한동안 중국 지방신문의 갈채를 받었으나, 왕아초가 장개석정부의 기탄대상이 되어 홍콩으로 피신하는 바람에 모든 것이 중단되고 말았다.
바로 이러던 시기, 항일구국연맹의 우당은 화암과 더불어 중국의 원로 아나키스트 동지 이석증, 오치휘를 은밀히 찾아 한중합작의 만주 지하기지 건설안을 제안하므로 두 사람을 놀라게 했다. 만주에 남은 잔류 동지들 또는 동포들과 연락하여 항일 근거지를 만주지역 내에 확보하고 한중일 공동의 항일유격전을 펼처나갈 생각이니 이 일이 성사되도록 주선해달라는 것이 우당의 제안이었다. 이 의미심장한 우당의 제안에 두 중국 원로는 손뼉을 치며 이렇게 화답하더라는 것이다.
"```` 만일 한인들이 결속하여 만주에서도 금반 상해홍구공원에서 윤봉길의사가 일으킨 것과 같이 의거를 일으켜 일제 구축에 전력을 기우려 광범한 항일전선을 펼수 있다면 앞으로 중국정부로서도 당연히 (한인에게) 자치구를 인정해야 할 것 아닌가`````"
논의가 항전의 요소인 무기와 재정문제 등 보다 구체적인 데로 옮아 가자, 양씨는 "만일 한국동지들이 결심이 선다면 에게 연락해서 모든 것을 돌보아주게 할 것이며, 만주에 잔류하고 있는 장학량의 심복들과도 비밀연락을 짓도록 하는 중간 알선역을 자신들이 담당해 주겠다"고까지 쾌락했다는 것이다.
결국 남는 문제는 만주 지하기지공작 첫거름을 내딨기 위해 누가 앞장설 것이냐 하는 우리 내부의 인선문제였다. 여기서 다시 칠십 고령의 우당은 여러사람의 극구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 임무를 차질 없이 수행할 적임자는 자기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성공하면 천행이지만 불행히 성공치 못한다 치더라도 나는 죽을 자리를 얻은 것이니 얼마나 다행이냐"고 결연한 태도를 표시하였다는 것이다. (1913년 봄 서간도 망명생활 시절, 서울서 형사대가 급파되었다는 소식에 다른 동지들이 모두 우라디보스도크로 피신한 것과는 달리, 우당은 도리어 국내로 역진입하여 적으로부터의 위험을 정면돌파했던 고사가 있다.) 1932년 11월 초, 우당은 마침내 대련행 기선에 몸을 실어 적의 소굴을 향해 돌진하였고, 그것이 선생의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우당의 만주행! 누구나 한참 독이 오른 적군을 피해 꽁무니를 빼는 판국에 칠십 노령의 우당이 홀로 불구덩이로 뛰어들다니! 우당의 최후에 대한 의문점을 더듬으면서 오늘의 우리로 하여금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것은 '항일해방의 한중공동전선'을 상해나 중국 내부 아닌 만주로 옮기려 했든 깊은 뜻에 대해서이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 당시 우당의 눈에는 중국인이건 조선인이건을 막론하고 언제나 뒤로 빠질 길만을 생각하는 약삭빠른 군상들이나 기회주의자들이 대상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비록 극소수나마 적지내에 남아 자유를 되찾으려 안간힘을 다하는 운동자들, 그리고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발버등 치는 피압박민중이 있음을 확신했다는 점이다. 그들 속에 뛰어들어 그들과 더불어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가운데 지하연락의 근거지를 확보하고 편의대, 유격대를 편성하여 적을 괴롭히면서 점에서 선으로 탈환구역을 만주 전역과 조국 내부로 확대해 나가자는 것이 당시 우당의 관점이요 전략이었다. 이야말로 신민회운동, 서간도 망명기지개척과 무력양성사업에서 시작하여 자유연합적 독립운동 조직을 동아시아 항일공동전선으로까지 일직선으로 확대발전시키던 우당 행적의 최종 결산점이오, 그를 위해 기꺼이 생명까지 바칠 수 있었던 것이 우당의 살신성인 정신이었다. 그런 점에서 우당의 마지막 만주행을 일시적인 의협심이나 단순한 노불리스 오부리쥬로 처리하려 드는 것은 너무도 우당을 모르는 소치라 할 것이다. (대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