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 13. 불법[佛法]에도 어느 한 법이 짓거나 보거나 아는 일이 없나니,
[문] 듣는다는 것은 어떻게 듣는가? 귀[耳根]로 듣는가, 귀의 의식[耳識]으로 듣는가, 뜻의 의식(意識)으로 듣는가? 만일 귀로 듣는다면 귀는 감각이 없기 때문에 듣지 못한다. 만일 귀의 의식으로 듣는다면 귀의 의식은 한 생각뿐이기 때문에 분별치 못하며 또한 듣지 못한다.
만일 뜻의 의식으로 듣는다면 뜻의 의식 또한 듣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먼저 5식(識)이 5진(塵)을 안 뒤에야 뜻의 의식이 알기 때문이다. 뜻의 의식은 현재의 5진을 알지 못하고 오직 과거와 미래의 5진만을 아나니, 만일 뜻의 의식이 현재의 5진을 알 수 있다면 소경이나 벙어리도 빛과 소리를 알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뜻의 의식이 파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 대지도론/용수보살/구마라즙 한역/김성구 번역/동국역경원
질문자는 출가자일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또 저렇게 상당히 예리하게 질문하는 걸 보면, 상당히 공부를 많이 한 자로 여겨집니다.
저 때 당시에도 논리학과 논쟁을 많이 익혔고,
그 방식이 그 당시 공부법이였을 겁니다.
이 논쟁 방식으로 대지도론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 전통이 티벳불교에 그대로 전수되어졌고, 지금도 그 방식 그대로 논쟁을 합니다.
질문자의 질문도 상당히 예리하지만,
아래 용수보살의 답변은 더더욱 대단합니다.
[답] 귀로 소리를 듣는 것도 아니요,
귀의 의식이나 뜻의 의식으로 소리를 듣는 것도 아니다.
여러 인연이 화합함으로써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니,
한 법이 소리를 듣는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귀는 감각이 없기 때문에 소리를 듣지 못하고,
식은 무색(無色), 무대(無對), 무처(無處)인 까닭에 역시 소리를 듣지 못하고,
소리 자체는 감각이 없고 감관도 없기 때문에 또한 소리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귀가 망가지지 않고, 소리가 들을 수 있는 곳에 이르렀고,
뜻으로 듣고자 한다면 정(情)과 진(塵)과 뜻[意]이 화합하였기 때문에 이식(耳識)
이 생기며, 이식(耳識)이 생기기만 하면 의식이 갖가지 인연을 분별하여 소리를 듣게 된다. 이런 까닭에 “누가 소리를 듣는가?”라며 힐난하지는 말아야 한다.
불법에도 어느 한 법이 짓거나 보거나 아는 일이 없나니,
이런 게송이 있다.
업도 있고 과도 있지만
업과 과를 짓는 이가 없다.
이는 가장 높고 심히 깊으니
이 법은 부처님만이 아신다.
공하지만 단절됨[斷]은 아니요
상속하지만 항상함[常]도 아니다.
죄와 복 또한 잃지 않으니
이런 법을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 대지도론/용수보살/구마라즙 한역/김성구 번역/동국역경원
여러 인연이 화합함으로써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니,
한 법이 소리를 듣는다고 말할 수 없다.
여러 인연, 즉 근경식 삼사화합으로 인해 소리를 듣는 것이지,
어느 단 하나의 법이 독립적으로 듣는게 아니다....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상호의존의 연기법입니다.
왜냐하면 귀는 감각이 없기 때문에 소리를 듣지 못하고,
식은 무색(無色), 무대(無對), 무처(無處)인 까닭에 역시 소리를 듣지 못하고,
소리 자체는 감각이 없고 감관도 없기 때문에 또한 소리를 알지 못한다.
귀 자체는 감각이 없습니다.
만약 귀 자체에 듣는 감각이 있다면, 죽은 시체도 소리를 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의식은 물질도 아니고, 대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머무는 장소도 없는 까닭에
의식 그 자체만으로는 결코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의식에 대한 정의가 참 명확합니다.
의식은 물질도 아니고,
의식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대할 수도 없고, 머무는 장소도 없다.
또 소리는 그냥 소리지 그 소리가 뭘 알겠습니까?
하지만 귀가 망가지지 않고, 소리가 들을 수 있는 곳에 이르렀고,
뜻으로 듣고자 한다면 정(情)과 진(塵)과 뜻[意]이 화합하였기 때문에 이식이 생기며,
이식이 생기기만 하면 의식이 갖가지 인연을 분별하여 소리를 듣게 된다.
근경식(根境識) 삼사화합(三事和合)이 되어야 소리를 듣는다는 말씀입니다.
귀도 기능이 멀쩡해야 하고,
또 소리가 들리는 장소에 머물러야 하고,
또 식도 있어야 삼사화합 (三事和合) 으로 이식 (耳識) 이 생기고 그걸 제 6식인 의식(意識)이 안다는 말씀입니다.
3사화합(三事和合)은 근(根) ·경(境) ·식(識)의 3가지[三事]가 화합하는 것을 말한다.
불법[佛法]에도 어느 한 법이 짓거나 보거나 아는 일이 없나니,
정말 훌륭한 명언입니다.
그 모든 것에는 독립적인 실체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제법이 다 인연이 화합돼서 생겨나고 작동한다는 의미지요.
근데 중생은 이걸 결코 모릅니다.
모든 게 다 독립적으로 홀로 작동하고, 홀로 뭘 이뤄어 내는 줄 압니다.
업도 있고 과도 있지만
업과 과를 짓는 이가 없다.
업도 있고 과도 있다는 말씀은 인과법에 대한 설명이고,
업과 과를 짓는 이가 없다는 말씀은 공성에 관한 설명입니다.
연기법은 크게 두가지,
즉 인과법과 공성의 가르침으로 분류됩니다.
짓는 업도 있고, 그 과보도 있지만,
업과 과를 짓는 이는 없다는 것은 어떤 실체로써의 존재가 없다는 의미지요.
다만 있는 것은 인연화합에 의해 생겨난 오온 뿐입니다.
오온 그 자체엔 실체가 없지만,
번뇌로 인해 업을 지으니, 그 과보도 역시 있고,
그 과보를 받는 것도 어떤 자아나 영혼이 아니고,
역시나 실체가 없는 오온이 그 과보를 받을 뿐 입니다.
오온엔 실체가 없어서
업과 과를 짓는 자가 없다고 하신 것이지요.
물론 중생은 그 오온에 실체가 있다고 여기므로, 온갖 업력을 짓습니다.
공하지만 단절됨[斷]은 아니요
상속하지만 항상함[常]도 아니다.
죄와 복 또한 잃지 않으니
이런 법을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위 게송은,
공성은 항상함이나 무상함이 아닌 중도를 의미함을 말씀하신 것 입니다.
공은 중도입니다.
그래서 단절됨, 즉 단멸론[무상]도 아니고,
또 상속하지만 항상함, 즉 영원하다는 상주론[항상]도 역시 아닙니다.
공하기에
단멸되지 않으므로 지은 죄와 지은 복은 내생에 받는 것이고,
또 영원한 것도 아니기에 그 죄와 복을 받고 나면 그것은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물론 계속 업을 짓고, 계속 과보를 받는 걸 이어갑니다. 끝없이...
공이 곧 중도입니다.
양 극단에 치우치지 않지요.
대지도론 13. 불법[佛法]에도 어느 한 법이 짓거나 보거나 아는 일이 없나니,
[출처] 대지도론 13. 불법[佛法]에도 어느 한 법이 짓거나 보거나 아는 일이 없나니,|작성자 마하보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