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부의 길
원 준연
문화탐방 모임을 20년 남짓 하다 보니, 그동안 많은 고택을 다니게 되었다. 국내의 명성 있는 고택은 거의 다녀본 것 같다. 오래된 흑백사진처럼 이제는 다녀온 기억조차도 흐릿하다.
운이 좋은 날에는 종손이나 종부를 만나서 종택에서 사는 삶의 애환도 듣게 된다. 종가를 잘 지키며 사는 것이 현대 생활에서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대개의 종손은 선대의 유훈을 잘 지켜나가며, 자긍심을 가지고 열심히 살고 있었다. 비록 내부는 생활에 편리하도록 현대의 비품을 갖추고 살고 있기는 하지만.
얼마 전에는 경북 성주군의 사우당 종택을 찾았다. 사우당은 조선중종 때의 학자인 김관석(金關石)의 호인데, 사군자로 통칭되는 매난국죽을 벗한다는 의미다. 600년이 흐른 지금도 주변에 많이 심어있단다.
종부와 통화를 하면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점심식사를 부탁드렸다. 종가의 음식을 맛보고 싶어서다. 종부의 손맛을 느끼고 싶어서다. 다행히 종부께서는 곱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허락을 해 주셨다. 전통 있는 종가의 음식은 처음이다. 얼마나 감사하고 또기대가 되는지….
전화를 드리고 약속한 시간에 도착을 하였다. 의성 김씨종택(金氏宗宅)이라고 예서체로 멋스럽게 쓰여 진 입석 앞에서, 유성룡의14대 손인 종부 류정숙님은 붉은색의 옷고름이 달린 청색계열의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마치 출향한 가족 기다리듯 서 계신다. 우주만물을 상징하는 태극의 색인 홍과 청의 조화로움은 한복의 단아한 기품을 더욱 느끼게 한다. 미소도 잃지 않고 반갑게 우리 일행을 맞아주신다. 벌써부터 어렵다는 '종부의 길'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다.
종부의 안내에 따라서 집안 이곳저곳을 소개받았다. 고건축 분야에는 문외한이지만,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 등의 배열이 다른 지방에서 보아 온 ㅁ자 구조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닥나무의 냄새인지 질 좋은 중국 먹의 향내인지 빛바랜 한지의 고서와 아직도 곱고 화려한 빛을 잃지 않은 전통의상 그리고 뚜껑을 열면 미각을 자극하는 장(醬)의 구수함이 솟구칠 것 같은 장독대 등은 사우당의 또 다른 매력이며 보물로 생각되었다. 이 집에서 사셨던 분들의 체취를 마음속으로 느끼며, 잠시 옛 모습을 그려보았다.
점심을 들기 위해서 들어선 살림방에는, 오랜만에 보는 교자상 위에 기본 찬이 이미 놓여 있다. 일부 회원은 앉기도 전에 사진부터 찍는다. 잠시 후 메인 음식이 들어와서 상을 가득 메웠다. 서양의 시계열형(時系列型)과는 달리, 우리의 전통 방식인 공간전개형(空間展開型)으로 진설되었다. 아주 오랜만에 받아보는 귀한 진수성찬이다.
음식을 눈으로 즐길 새도 없이 맛보기에 바쁘다. 골고루 맛을 본 다음에야 조리법이나 식재료 그리고 색의 조화로움 등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 일행은 미식가 되기는 틀린 모양이다.
기본으로 있어야 할 것 같은 간장 대신에 초고추장이 놓여있다. 나물과 해산물과 소, 돼지, 닭 등의 고기류가 빠지지 않았다. 황,청,백, 적, 흑의 오방색이 조화롭게 갖춰져 있다. 음식의 간은 전체적으로 짜지 않고 조금 심심한 듯하여, 오히려 좋았다. 전복 요리가 일반음식점에서 맛보던 것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순박한 맛이라고나 할까. 대구가 양념 없이 찜으로 나왔고, 흔히 초계탕(場)으로 먹는 것을 국물 없이 무침으로 내왔다. 내가 처음으로 맛을 본 요리는 참외장아찌였다. 성주가 참외의 고장이라더니….
일본인들이 즐겨먹던 나라즈케(奈良貴)가 군산 지역에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는 보도를 접한 적이 있다. 울외의 속을 파내고 소금에 절인 후 다시 술지게미와 설탕에 절여 6개월을 숙성시킨다는 주박장아찌가 바로 그것이다. 음식의 유래나 만드는 방식이 다른지는 알 수 없지만, 참외로 만든 장아찌를 이곳에서 처음 접해 본 것이다. 사각거리는 식감이 참 좋았다.
초계탕은 원래 궁중 연회에 올렸던 국인데, 왕가음식이 반가음식으로 전해지면서 다소 변형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반가음식은 다시 서민음식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사악한 기운을 물리친다는 오방색의 고명과 양념을 중시하는 전통음식이 어느덧 한식의 특징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음식의 맛을 더하는 양념도 약념(藥念)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약식동원(藥食同源)이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음식을 만드는 모든 분들이 먹을 사람의 건강을 생각하며 정성을 다한 데에서 나온 이치라 생각된다.
종부께서 만드시는 음식에는 어떤 특징이 담겨있는지 여쭈어 보았다. 내림음식과 신토불이음식이라고 하셨다. 선조 때부터 이어오고 있는 음식을 그대로 전수받고 또 며느리에게 전수할 것이다. 그러면서 온고지신이라는 말과 같이 새롭게 발전시키는 역할도 게을리 하지 않으신단다.
요즘처럼 자유분방한 세상에서, 물려받은 종가에서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종가음식을 지키며, 육백년 예법에 어긋남이 없이 산다는것은 무척 어려운 일일 것이다. 오죽하면 어려움의 대명사로 '종부의길'이라는 말까지 생겨났을까?
종부의 호를 딴 예은다원(禮隱茶苑)으로 자리를 옮겼다. 역시 이미 정갈하게 다과상이 준비되어 있다. 사우당의 명차인 연잎 차와 구절판에는 예쁘게 담겨진 흑임자다식, 콩다식, 곶감, 무화과, 떡 등이 보기 좋게 들어있다. 손이 많이 갔을 것 같다. 다원은 예법을 강의하고 다도를 체험하는 공간이란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종부는 내려오는 교훈으로 ‘초승달과 같은 삶’을 말씀하신다. 지금은 초승달처럼 작고 힘들지만, 보름달처럼 차고 빛나는 만월이 되는 희망을 안고 당장의 어려움을 잘 극복하라는 뜻이리라.
21대 종손인 김기대 선생님은 시인이기도 한데, 노래 ‘종부의 길‘을 작사하였다. 종부의 어려운 길을 묵묵히 걸어 온 부인에 대한 고마움이 진하게 배어 있다. 구성지게 부르는 가수의 목소리도 애틋하여 종부에 대한 사랑을 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