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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근목피(草根木皮), 말 그대로 풀뿌리와 나무껍질을 벗겨 먹고 살아간다는 의미이다.
보릿고개를 넘긴다는 뜻은 굶어 죽지 않고 살아남는다는 의미였다.
불과 60∼70년전의 농촌생활이 실제 그랬다.
이른바 춘궁기(春窮期)라고 했다. 지난해 가을에 걷은 양식은 떨어지고 보리는 아직 여물지 않은 4월에서 6월까지는 먹을 것이 없는 기간을 그렇게 불렀다. 먹지 못해 얼굴이 누렇게 뜬 사람들이 거리를 헤매던 시절이었다. 머리는 종기투성이고 얼굴은 버짐으로 허옇게 찌든 어린이들이 많았다. 영양실조 때문이었다.
나무심는 식목일이나 송충이 잡기에 강제동원되어 산에 간 아저씨들은 낫으로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었다. 껍질을 벗기면 하얀 목질과 껍질 사이에 있는 갈색 부분이 먹을 수 있는 것이어서 조심스럽게 발라 내 먹었다. 쌉싸름한 맛에 입안에 퍼지는 송진 향이 침을 돌게하지만 소화가 잘 안돼 배탈이 나곤했다.
하루 한 끼 먹는 집도 많았다. 할머니는 아침 저녁으로 아궁이에 불을 지펴 연기를 냈다. 식사를 짓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한 것인데 사실은 양식이 없어 물을 끓이는 중이었다.
이 시절에 먹었던 음식이 갱죽과 개떡이었다. 가장의 가슴이 먹먹하고 주부의 마음에는 미안함이 가득한 눈물 젖은 음식들이었다
갱죽은 지역에 따라 갱시기라고도 불렀다. 지금은 갱죽이 별미를 찾는 사람들의 별식이지만 그 때는 주린 배를 채워야 살아갈 수 있는 음식이었다. 새 싻이 솟아나 제법 자란 시절이라 냉이와 비름, 쑥과 파, 콩나물과 김치가 주요 식재료였다. 물 한 솥에 쌀 한줌, 그리고 식재료를 가득히 넣고 끓이면 죽이 된다. 보리쌀은 끓이면 퍼져 없어지기 때문에 반드시 쌀이어야 했다. 하얀 쌀 알 몇 개라도 보여야 실망감이 덜하다. 수제비 몇 개라도 들어가는 저녁이면 온 가족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다. 한 그릇 그득히 먹을 수 있어 포만감을 느끼지만 금방 배고픔을 느낀다.
개떡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청보리를 잘라 즙을 내고 난 찌꺼기로 전을 부쳐 먹는 경우다. 이 경우는 다소간 여유가 있는 집에서 해 먹었다.
또 다른 개떡은 보릿가루로 만들었다. 이 개떡이 대부분이다. 보릿가루는 보리를 갈아 만든 가루가 아니다. 보리를 도정할 때 나오는 껍질의 아주 작은 가루다. 원래는 소쭉을 끓일 때 넣는 것인데 사람의 식량대용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보릿가루에 쑥을 삶아 넣고 간장과 참기름을 가미해 반죽한 뒤 솥뚜껑에 붙여 아침 밥을 하면 같이 쪄 진다.
왜 아침이냐고?
학생들의 점심도시락으로, 일 나가시는 아버지의 새 참이었기 때문이다.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도 1970년대까지 굶어 죽거나 일식당 쓰레기통에서 주워온 복어를 끓여먹고 일가족이 참변을 당한 경우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남북간 체제경쟁이 한창이던 때라 정부에선 이런 뉴스를 신문에 싣지 못하게 했다. 북한이 이런 기사를 악용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실제로 북한은 서울에는 판자촌에다 거지가 득시글거리고 굶어죽는 사람이 많다고 선전하곤 했었다.
이들 음식도 이젠 추억이 됐다.
첫댓글 하~ 그 때를 아십니까?.
눈물나는 세월 우리들의 역사
물질의 풍요를 마음껏 누리는 요사이는
예전에 비하면 엄청난 행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