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아주신씨(鵝州申氏)
신응태(申應泰, 1643∼1728)는 청주 미원에서 활동한 학자로 충혜왕 때 안렴사를 지낸 퇴재(退齋) 신우(申祐)의 11대손이며 충효를 겸전한 양일당(養一堂) 신지익(申之益)의 손자이다. 효자 신심(申鐔)의 아들이며 효자 신협(申鋏)의 종질(從姪)이다. 효문에서 태어나 어질고 효성스런행실로 향유들의 신망이 높았다.
신응태는 천품이 순수하고 아름다우며 성품과 행실이 높고 뛰어났다. 어린 나이에 부친과 조부를 여의었지만 집상(執喪)의 의젓함이 성인과 같았다. 조금 자라서는 조모와 모친을 지극히봉양하는 한편 사서를 읽으며 정미한 뜻을 구하였다. 부친의 명을 받들어 19세에 처음 과장에들어갔고, 문학을 일찍 성취하여 20세에 연이어 두 과방에 참여하니 만주(晩洲) 홍석기(洪錫箕)가 시권을 보고 크게 칭찬하였다. 그 후 대소과 초시에 여러 번 입격하였으나 시운이 돌보지 않아 향리의 처사로 지냈다.
25세에 회덕에 가서 우암 송시열을 뵌 후로 화양동과 회덕을 왕래하며 강문(講問)하였고, 주서절요(朱書節要)와 근사록(近思錄)을 읽고 그 긴요한 것을 간추려 책을 만들기도 하였다. 42세에 비로소 과업을 폐하고 화양동에 들어가 스승 송시열에게 집지(執贄)의 예를 올리고 오로지 성리학에 전념하였다.1) 학력(學力)이 순수하고 깊으며 조예가 정밀하였고 학문을 좋아하는 정성은 늙을수록 더욱 독실하였다. 이렇듯 학업은 밝게 빛나고 기절은 높아 스승 송시열이특별히 추천하여 인정하였다.
그런 까닭에 김창협(金昌協)은 일찍이 ‘우암의 고제(高弟)’로 추숭하였고, 권상하(權尙夏)는 ‘일대의 선사(善士)’라 하였으며, 이수언(李秀彦)은 ‘사람됨이 충후하고 순수해서 고인의 풍모가 있다’고 하였다.
신응태는 타고난 효성으로 부모를 지극히 섬겼고, 선세사실(先世事實)을 엮는 등 계술(繼述)의 효를 다하였다. 또한 문학에 소질이 있어 칭찬과 인정을 받았고, 사서삼경과 제자백가의글을 정밀하게 연구하여 깊이 들어가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역학(易學)·천문(天文)·역수(曆數)에도 밝았다. 만년에는 후진 양성에 힘써 문하에서 많은 학자가 배출되었고 타고난 문장으로 비록 다작은 아니지만 시문도 적잖이 남겼다. 본고는 그가 남긴 용애집(龍崖集)을 통해 조선후기 학자이자 문인인 신응태의 삶과 교유, 그리고 시세계의 일단을 살펴 학계에 소개하는 기회로삼고자 한다.
2. 생애와 교유
1) 생애
신응태(申應泰)는 자(字)가 길래(吉來)2) 호(號)는 용애(龍崖)이며 본관은 아주(鵝洲)이다. 고려말 혼탁한 세상을 피해 경북 의성(義城)에 퇴거한 안렴사(按廉使) 신우(申祐)가 그의 11대조이다. 이후 대대로 선조들이 살았던 의성으로부터 청주 독박리(禿朴里)3)로 이거한 상의원(尙衣院)직장(直長) 신간(申幹, ?∼1539)4)이 그의 5대조이다. 고조는 신천령(申千齡)이고 증조는 문행(文行)이 있고 성품이 강직했던 생원 신노(申櫓, 1553∼1590)5)이다. 조부는 학행과 효행으로 널리알려진 참봉 양일당(養一堂) 신지익(申之益, 1588∼1649)6)7)이다. 부친은 천성이 순하고 행의(行義)로 스스로를 지키며 효성이 깊었던 처사 신심(申鐔, 1611∼1647)8)이고 모친은 광주반씨(光州潘氏) 반봉익(潘鳳翼)의 딸이다. 신응태는 1643년(인조 21) 청주 산동면(山東面) 송곡리(松谷里)9)에서 태어났다.10) 천품이 순수하고 아름다우며 성품과 행실이 높고 빼어났다. 5세에 부친상을 당하고 7세에 조부상을 당하였다. 8세(1650년)에 비로소 송곡공(松谷公) 신응사(申應泗)11)에게 배웠다. 12세인 1654년 조모평강전씨(平康全氏)12)를 모시고 괴산에 가서 감역공(監役公)13)으로부터 선조 안렴공[申祐]의효행사적을 듣고 돌아와 후에 <선세사실(先世事實)>을 완성하였다.
13세에 맹자와 중용을 읽었다. 정미한 뜻을 이해하고자 송곡공에게 질문하니 매우 기이하게 여겼다. 17세에 산방에 들어가 가정공(佳亭公)14)과 함께 논어를 읽었다.
19세에 처음 과장에 들어갔고 20세인 1662년 풍산김씨(豐山金氏)를 아내로 맞으니 첨지 김시좌(金時佐)의 딸이다. 그리고 이해 향시에 입격하였다. 문학을 일찍 성취하여 연이어 두 과방에 참여하니 시골의 오랜 친구들이 영광스러워하였다. 이때 만주(晩洲) 홍석기(洪錫箕, 1600∼1680)가 와서 시권을 보고 크게 칭찬하였다. 또한 겨울에 주역을 읽었다.
25세에 회덕에 가서 우암(尤庵)·동춘(同春) 두 선생을 뵈었다. 이듬해 7월 조모 전씨 상을 당하였다. 27세인 1669년 주서절요(朱書節要)를 읽었고, 29세인 1671년 홍석기에게 조부 양일당공과 부친 처사공의 사적을 적어 보내며 아울러 쌍죽도(雙竹圖)에 시를 지어 달라고 청하여오언시 10운을 받았다.15) 한편 화양동으로 우암 선생을 찾아뵈었다. 30세인 1672년 여름, 괴산소마사(小馬寺)16)에서 과거 문장을 공부하였고, 별시 초시에서 부(賦)·책(策)으로 입격하였으
며, 식년 초시에서 또 입격하였다. 그리고 회덕에 가서 동춘 선생을 곡하고 우암 선생을 뵈었다. 1673년 2월 회시(會試)에 낙방하였다. 모친의 병이 깊어 과거를 보지 않으려 했으나 모친이 권하여 부득이 본 것이다. 과거를 보고 돌아와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그 슬픔이 지나쳐 반나절을기절하였다.
1674년 곽세건(郭世楗)이 송시열을 모함하자17) 스승의 무고를 변론하는 논설을 지었다. 1675년 덕원(德原) 적소에 계신 우암 선생께 편지를 올렸다.18) 1675년 11월, 사사했던 송곡공상을 당하자 자신을 생장시킨 스승의 의리로써 가마(加麻)하였다. 1679년 주서절요(朱書節要)와 근사록(近思錄)을 순환하며 읽고 그 긴요한 것을 간추려 2권을 만들었다. 38세인 1680년묵방(墨坊)19)에 계신 우암 선생을 찾아뵈었다.20) 1681년 화양동에 가서 우암 선생을 뵙고 겨울에 또 우암 선생을 뵈었다. 이듬해 봄에도 우암 선생을 뵈었다. 41세인 1683년 농계(聾溪) 이수언(李秀彦, 1636∼1697)에게 편지를 보내 조부와 부친을 현양하는 일을 갖추어 말하였다. 이해5월 이수언이 회계(回啓)하였고 10월 임금의 특명으로 정포(旌褒)되었다. 42세인 1684년 4월, 과거의 생각을 끊고 드디어 우암 선생께 집지(執贄)의 예를 올리고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1685년 3월에 화양동에 가서 우암 선생을 뵙고 양일당의 묘표를 청하였다. 이때 화양동에서 하루 머물며 파곶(巴串)에 모시고 가서 놀다 돌아와 환장암(煥章庵)에서 잤다. 4월에 권상하(權尙夏, 1641∼1721)·김창협(金昌協, 1651∼1708)을 만나 화양동에 가서 우암 선생을 뵈었다.
21)1686년 9월 화양동에 가서 우암 선생을 뵈었다. <선세사실(先世事實)>이 편집되어 스승께 보여 드리고 명명(命名)과 아울러 권두의 글을 청하기 위함이었다. 송시열은 서수(書首)에 ‘아주신씨선세사실(鵝洲申氏先世事實)’이라 쓰고 권말에 발문을 써주었다. 1687년 화양동에 가서 우암선생을 뵈었다. 이때가 스승 생전 마지막이었다. 47세인 1689년 제주 적소에 있는 우암 선생께편지를 올렸다. 5월 송시열이 제주로부터 상경하라는 명을 받자 천안에 가서 기다리다 드디어대궐에 나가 스승을 신원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전달되지 못하였다. 6월 스승이 정읍에서 후명(後命)을 받자 연산(連山)에서 곡하며 맞이하고 상여를 따라 수원에 이르러 글을 지어 제사 드리고 병이 나 집으로 돌아왔다.
48세인 1690년 산방에 들어 독서하였다. 마을에 전염병이 돌아 산방으로 피해 동방 제현의문집을 모아 그 긴요한 것을 간추려 1권으로 만들어 때때로 펼쳐보다 몇 달 만에 돌아왔다. 그후 용애(龍崖)로 이거하고 인하여 호로 삼았다. 1693년(51세) 민박사(民朴寺)22)를 중건하였고1694년 3월 부인 김씨 상을 당하였다. 4월 우암 선생 복관(復官) 치제(致祭)에 시를 지었고, 1695년 만경대서원(萬景臺書院)이 완성되어 시를 지어 원장[권상하]에게 올리고 여러 친구에게 보였다. 55세인 1697년 이수언을 곡하였다. 이수언과는 지기지우(知己之友)였다. 이수언은일찍이 신응태의 문장을 칭찬하여, “당세의 전형이어서 적수가 되기 어렵다.”고 하였다. 1699년(57세) 사서제요도(四書提要圖) 2권을 완성하였고, 사문서설(斯文序說) 1권을 지었다.23)59세인 1701년 직재(直齋) 이기홍(李箕洪, 1641∼1708)을 방문하였다.
1703년(61세) 12월 장암(丈巖) 정호(鄭澔, 1648∼1736)를 방문하였고,24) 1704년(62세) 신종황제 제사를 청하는 상소를 썼으나 올리지 못하였다.25) 1705년(63세) 2월 문산(文山)에 가서 이기홍을 방문하여 <선세사실(先世事實)> 발문을 받았다.26) 66세인 1708년 이기홍과 김창협의부음을 들고 곡하였다. 1710년(68세) 2월 김정구(金鼎九)의 효행에 관한 글을 세 번 올렸다.27)1711년(69세) 3월 가정공을 곡하고 1716년(74세) 11월 <화양서원선액기(華陽書院宣額記)>를지었다. 75세인 1717년(숙종 43) 3월, 임금이 온천에 행행 시 조부 양일당의 사적을 적은 글을올렸다. 1719년(77세) �사서제요도(四書提要圖)�를 권상하에게 올리고 수정을 청하였다. 1721년(경종 1) 권상하의 부음을 듣고 곡을 하고, 순찰사에게 정유년 온양 행차 시에 상께 올린 말에기초하여 양일당 현양의 일을 올렸다. 82세인 1724년 여름에 병이 나 넉 달을 병석에 있었는데장자 상록의 부인 이씨가 극력 구완하니 사람들이 모두 효부라 하였다.
1728년 <사론시비옥하사담(士論是非屋下私談)> 1권을 완성하니, 동서분당부터 신임사화까지 피차 사정득실(邪正得失)의 본말을 통쾌히 논변한 것이다. 6월에 병이 나 8월 15일 86세로송곡(松谷)에서 생을 마쳤다.28) 문인 송윤상(宋允相)·정후기(鄭垕基)·신홍찬(申弘燦) 등이 글을
지어 제사지냈고, 청주 검암서원(儉巖書院)에 배향되었다. 부인 풍산김씨와의 사이에 육남(六男)을 두었으니, 상전(尙籛)·상록(尙籙)·상첨(尙籤)·상주(尙籒)·상범(尙範)·상림(尙箖)이다.29)
신응태는 조부와 부친이 모두 효행으로 정려된 효문의 후손답게 타고난 효자였다. 어린 나이에 부친과 조부를 잃고도 조석제전(朝夕祭奠)에 성인 같은 의젓함을 보이니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특히 평소 기가 허한 모친을 위해 조섭에 세심하였고 위급에 미쳐서는 단지(斷指)하였으며 마침내 돌아가시자 애훼(哀毁)가 극에 달아 예를 넘어 거의 목숨을 잃을 지경에 이르러도 여막을 떠나지 않고 거상(居喪)을 거두지 않았다. 또한 그의 효행은 계지술사(繼志述事)로드러난바, 부친의 뜻을 받들어 과업에 힘쓰고 평생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선조사실기(先祖事實記)�를 완성하고 조부와 부친의 행적을 현양하기 위해 노력한 것이 그것이다.
신응태는 학문을 좋아한 천생 학자였다. 부친의 명으로 과장에 출입하여 대소과 초시에 일곱번 합격하고도 시운이 돌보지 않아 이룬 바는 없었으나 그 또한 개의치 않았다. 모친이 돌아가신 후에는 과거를 폐하고 우암 송시열의 문하에서 성리학에 전심하였다. 대개 학문을 좋아하는정성은 늙을수록 더욱 독실하였다. ‘당리무사(當理無私)’30) 네 글자를 평생 공부로 삼았고, 스승송시열의 글[宋子之書]을 가장 좋아하여 동정어묵(動靜語默)에 한 가지로 법 삼았다.31) 또한 남는 힘으로 글을 배우며 문단에서 노니니 문장이 아름다웠다. 대개 그 처음 뜻이 초월함을 벗어나고 화려함을 씻어내며 오로지 실지(實地)에 뜻을 두었다.
신응태는 청빈자수(淸貧自守)한 선비였다. 생계를 세우려 하지 않았고 재물과 이익에 대한 이야기는 일찍이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화양(華陽)의 고족(高足)이 되어 동문 한수(寒水)·농암(農巖)·농계(聾溪)·직재(直齋) 등 제현의 추중(推重)을 받았다. 용애 선생(龍崖先生)으로 일컬어졌으며 만년에 문인들이 사사하니 후학을 양성하는 보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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