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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양무리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grace
스위스 일치신조와 개혁파 스콜라주의
이 은선(안양대 목회학과)
들어가는 말
종교개혁이 진행되는 동안에 루터파, 개혁파, 로마 카톨릭을 비롯하여 각 진영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표명한 많은 신앙고백서들이 작성되었다. 이러한 신앙고백서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표명하는데 관심을 두었으나, 로마 카톨릭이 1563년 트렌트 종교회의를 통하여 트렌트 신조를 작성한 후에는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 사이에 논쟁이 격화되었다. 로마 카톨릭이 트렌트 신조를 통하여 자체의 정체성을 확립한 후에 벨라르민(Robert Bellarmine, 1542-1621)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개신교를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동시에 개신교 안에서 루터파와 개혁파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개혁파 진영 안에서도 논쟁이 발생하였다. 그리하여 개혁파 진영도 이러한 논쟁을 거치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하여 도르트 신조와 웨스트민스터 신조를 작성하였고, 마지막으로 작성된 것이 1675년의 스위스 일치신조(Helvetic Consensus Formula)이다. 도르트 신조는 알미니안주의를 비판하기 위하여 작성되었고, 웨스트민스터 신조는 영국의 국교회와의 논쟁 속에서 작성되었는데 반해, 스위스 일치신조는 프랑스의 소우물 학파를 비판하기 위하여 작성되었다. 소우물학파의 오류를 지적하고 개혁파의 입장을 명확히 하기 위하여 작성되었던 스위스 일치신조는 스위스 신앙고백의 통일성을 기하려는 마지막 신조이었을 뿐만 아니라 개혁파 정통주의의 입장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종교개혁에서부터 시작하여 개혁파 신앙고백이 발전하여 가는 과정을 살펴본 후에 집중적으로 스위스 일치신조의 작성경위와 내용을 분석해보고자 한다. 이러한 스위스 일치신조의 분석을 통하여 17세기 스위스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이 관심사와 함께 그들의 성격을 규명해보고자 한다.
I. 종교개혁기의 개혁파 신앙고백서
개혁파 종교개혁은 루터의 종교개혁에 뒤이어 1520년대에 스위스에서 시작되었다. 취리히에서 종교개혁을 진행하던 츠빙글리가 1523년 카톨릭과의 논쟁을 위하여 작성했던 67개 조항이 개혁파 신앙고백의 최초의 형태라고 볼 수 있겠다. 그 이후에 스위스의 베른과 바젤을 비롯한 여러 칸톤에서 종교개혁이 진행되었고 각자의 신앙고백을 가지고 있어 이러한 칸톤들의 신앙의 통일을 위하여 27개 항목으로 된 제일헬베틱 신앙고백서가 1536년 2월에 작성되었다. 그 후에 앞의 신앙고백이 너무 짧아 내용을 보강하고 다시 스위스의 연합의 결속을 보여주면서 개혁파 신앙을 채택하여 루터파에 의해 이단으로 몰리며 위기에 당하고 있던 독일의 팔라티네이트의 프레데릭 3세를 돕기 위하여 불링거가 개인적으로 작성했던 신앙고백서가 제네바, 베른, 샤프하우젠, 비엘, 세인트 갈, 뮐하우젠, 그리고 바젤 등의 동의해 공적으로 채택된 것이 제2헬베틱 신앙고백서였다. 이러한 신앙고백서들은 츠빙글리의 신학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들로 개혁파 신앙을 간결하고 명확하게 표현하여 평신도들의 신앙교육에 이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앙의 통일을 유지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칼뱅은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하면서 어린이들의 올바른 신앙교육을 위하여 1541년에 제네바 요리문답(Genevan Catechism)을 작성하였다. 이 요리문답은 사도신경의 해설인 신앙에 대하여, 십계명의 해설인 율법에 대하여, 주기도문의 해설인 기도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그리고 성례에 대하여 라는 5개 부분으로 되어 있으며, 고대교회의 요리문답의 교훈을 회복하고 흩어진 개혁파 회중들에게 신앙의 통일을 기하려는 것이었다. 이 작품은 이탈리아어(1551년과 1556년), 스페인어(1550년), 영어(1556), 독일어, 화란어, 헝가리어, 심지어 헬라어 히브리어로까지 번역되었고 프랑스와 스코틀랜드를 중심으로 개혁파 교회에서 오랫동안 사용되었다. 그 후에 그의 신학사상의 영향을 받은 신앙고백서는 1559년 작성된 프랑스 신앙고백(Gallican Confession), 1560년의 스코틀랜드 신앙고백( Scottish Confession), 1561년의 화란의 벨직 신앙고백(Belgic Confession), 1563년에 작성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Heidelberg Catechism) 등이 있다. 프랑스 신앙고백은 이 작업을 위임받은 찬디우(Antoine de Chandieu)가 칼뱅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칼뱅이 베자와 비레의 도움으로 신앙고백의 초고를 작성하여 세 명의 대표단을 파송하였는데, 그 초고가 확대되어 총회에서 채택된 것이다.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은 제네바에 거주하며 칼뱅의 영향을 받았던 낙스가 중심이 되어 작성한 것이었다. 그리고 벨직 신앙고백은 브레스(Guido de Bres)가 1561년에 사라비아(Adrien de Saravia), 모데투스(H. Modetus), 윙겐(Wingen) 등의 도움을 받아 준비하였는데, 개혁파 신앙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왔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목적으로 작성되었다. 그 후에 칼빈의 제자인 유니우스(Francis Junius)가 수정하였고 제네바를 비롯한 다른 교회들에 보내 승인을 받았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팔라티네이트 영주인 프레데릭이 개혁파 신앙을 채택한 후에 이 신앙을 해설하는 요리문답의 작성을 우르시누스와 올레비아누스에게 요청하여 작성된 것이다. 우르시누스는 1550-57년 사이에 비텐베르크에서 멜랑히톤의 지도를 받은 후에, 스위스와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이 과정에서 취리히에서 불링거와 피터 마터를, 제네바에서 칼뱅과 베자를 만났으며, 개혁파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1561년 하이델베르그 신학교수가 되어 프레데릭의 요청으로 요리문답을 작성하였다. 올레비우누스는 제네바와 취리히에서 공부하면서 칼빈, 베자, 그리고 베르미글리에게 영향을 받은 개혁주의자였다. 이와같이 이러한 신앙고백서들은 칼뱅의 신학사상을 중심으로 개혁파 신학사상들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신앙고백서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간결하고 명확하게 제시하면서 아직까지 논쟁적인 성격을 띠지 않았다. 이러한 신앙고백서들은 일반적으로 성경과 해석, 삼위일체 하나님에서 출발하여 구원의 서정, 교회와 성찬 등을 다루고 있다.
II. 정통주의 시기의 개혁파 신앙고백
그러나 16세기에 후반에 접어들면서 카톨릭과 종교개혁 진영사이에, 루터파와 개혁파 사이에, 개혁파 진영 안에서 다양한 신학적 논쟁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신학적 논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개혁파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하여 다양한 신앙고백서가 작성되었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의 주장에 반대하고 개혁파의 교리를 확립하기 위하여 1618-9년 걸쳐 도르트에서 열렸던 종교회의는 도르트 신조(Canons of Dort)를 작성하였다. 이 신조는 알미니안주의의 주장을 인간의 전적 타락, 인간의 무조건적 선택, 제한 속죄론,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 그리고 성도의 견인의 관점에서 비판하면서 개혁주의의 올바른 입장을 제시하였다. 예정론에서는 알미니안주의의 예지예정론을 비판하면서 타락전선택설과 타락후 선택설이 대립하는 가운데 타락후 선택설을 채택하면서도 타락전 선택설을 비판하지는 않았다. 인간의 타락에 대해서는 전적인 타락과 원죄의 직접적인 전가를 주장하였다. 이러한 인간의 전적인 타락에서 인간의 구원은 인간의 자유의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이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적 행위인 선택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택은 모두 사람을 구원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제한된 예정된 사람만을 선택한다는 제한속죄론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선택된 사람들의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의해 이루어졌으므로 중도에서 탈락하는 일이 없이 온전하게 보존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도르트 신조는 인간의 타락 이후에도 인간의 자유의지의 능력을 인정하며 구원에서 인간과 하나님의 협력을 인정하는 알미니안주의의 신인협동성을 철저하게 비판하였다.
그 이후에 영국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작성되었다. 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영국의 성공회와 갈등을 빚고 있던 청교도들의 신앙고백서로 스코틀랜드의 장로교와의 협력 하에 작성된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청교도 혁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군사적 협력을 위하여 영국, 스코틀랜드, 그리고 아일랜드의 신앙을 장로교로 통일하기 위하여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를 소집하여 작성되었다. 이 신조 작성 배경에는 이러한 정치적인 것 이외에 정통주의 신학이 자리잡고 있다. 도르트 신조는 알미니안주의를 비판하는 다섯 가지 사항을 중심으로 작성된데 반해 이 신앙고백은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여 인간의 구원 과정과 최후 심판까지 신학의 전체적인 범위를 다루고 있다. 또한 이 신앙고백서도 도르트 신조의 영향을 받아 예정론을 근본원리로 삼고 있다.
이렇게 화란과 영국을 중심으로 알미니안주의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중심으로 하는 개혁파 신학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하는 신조들이 작성되었다. 이러한 신조들은 알미니안주의의 오류들을 비판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예정론을 강하게 강조하였을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사상을 정밀하게 체계화시키는 스콜라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신조들은 여러 학자들의 논의를 거쳐 치밀하게 아주 체계적으로 작성되었다.
III. 스위스 일치 신조의 작성 배경과 작성과정
개혁파 진영에서 이러한 스콜라주의적인 신앙고백서로 마지막으로 작성된 것이 스위스 일치신조이다. 이 스위스 일치신조는 프랑스에서 발전하던 소우물학파의 신학의 오류를 비판하고 개혁파 정통주의의 입장을 정립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신조의 작성배경은 바로 프랑스의 소우물 아카데미에서 발전하였던 소우물 학파의 신학사상 때문이었다. 이 소우물 학파는 라무스주의를 채택하여 정통주의를 비판했던 카메론의 신학사상의 영향을 받아 카펠, 플레이스, 그리고 아미로의 신학사상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카펠은 정통주의자들이 주장하던 맛소라 사본의 모음점의 영감설을 부정하며 새로운 본문비평방법론을 채택하고자 하였다. 카펠은 1624년 Arcanum punctationis revelatum을 저술하여 맛소라 사본의 히브리 본문의 모음점의 영감설을 부정하였다. 종교개혁 이후에 신학에서 최고의 권위의 문제를 둘러싸고 로마 카톨릭과 종교개혁자들 간에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트렌트 종교회의 이후 벨라르민을 중심으로 맛소라 사본보다 로마 카톨릭의 불가타 성경이 더 권위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벨라르민은 1581-1593년 사이에 Disputationes de controversis christianae fidei adversus sui temporis Haereticos를 저술하여 개신교 교리를 전반적으로 공격하는 가운데 De Verbo Dei라는 글에서 성경과 함께 전통의 권위를 주장하면서, 또한 맛소라 사본의 난외주가 광범위한 수정의 필요성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사본들은 서기관들의 오류로 가득차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을 반박하여 개혁파에서 폴라누스가 제일 먼저 1617년에 Syntagma theologiae christianae에서 모음점이 모세와 선지자들에 대한 원래의 계시에 속한다고 주장하였고, 그 이후에 Buxdorf가 1620년에 Tiberias sive commentarius Masorethieus라는 책을 써서 모음점의 영감을 주장하였다. 이렇게 로마 카톨릭의 교리를 반박하며 종교개혁자들의 sola scriptura의 원리를 확립하려고 노력하고 있을 때 카펠은 히브리 모음의 영감설을 부정하였다. 그의 목적은 모음점의 영감을 부정한다고 하더라도 성경의 교리들은 온전하게 유지될 수 있다고 보았고, 모음점의 영감을 둘러싼 로마 카톨릭과의 논쟁을 피하면서도 성경의 권위를 확립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은 이러한 카펠의 주장은 종교개혁자들의 sola scriptura의 원리를 위협한다고 보고 강력하게 반론을 제기하였다.
또한 플레이스는 아담의 원죄의 죄책의 직접적인 전가를 부정하고 간접적인 전가를 주장하였다. 플레이스는 아담의 죄책의 직접적인 전가는 인간의 죄에 대한 책임을 부정한다고 보아 수용하지 않았다. 그는 아담의 범죄의 결과로 우리의 본성이 부패한 채로 태어나고 그 부패의 결과로 우리가 범죄한다는 간접적인 전가를 주장하였다. 그는 아담의 본성적 부패의 유전은 인정하지만 죄책의 직접적 전가를 부정하였다. 아미로는 인간의 타락의 결과를 본성적 타락이 아닌 도덕적 타락으로 보았고, 언약론에서 자연언약, 율법 언약, 그리고 은혜 언약의 3중 언약을 주장하였는데 자연언약의 약속은 영생이 아니라 에덴동산에 지속적이고 복된 삶이라고 주장하였으며, 제한속죄론을 부정하고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는 누구에게나 제공되지만, 실제적인 구원은 선택된 사람에게만 제공된다는 가정적 보편주의를 주장하였다. 이러한 신학사상은 소우물 학파에 공부하러 갔던 학자들을 통하여 제네바로 유입되었고, 제네바 아카데미에 칼빈과 베자의 신학사상을 이어받아 형성되었던 개혁파 정통주의를 위협하게 되었다. 이러한 인물들은 1640년대 중반부터 제네바 아카데미의 교수로 진출하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들은 모루스, 꾸에, 그리고 루이스 트론친 등이었고 이들 밑에서 교육받은 인물들은 점차적으로 소우물학파의 신학사상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통하여 가장 충격을 받았던 인물이 바로 프란시스 튜레틴이었다. 튜레틴은 제네바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에 소우물 아카데미를 비롯한 유럽의 여러 교육 기관을 순회하며 교육을 받고 1647년 말에 귀국하였다. 그는 제네바에 귀국한 후에 제네바 아카데미 안에 이미 소우물 학파의 영향력이 확산되어가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고, 이러한 영향력을 차단해야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소우물 학파의 신학사상을 포괄적으로 비판하는 신조를 작성하여 제네바 아카데미의 학생들에게 교육시킬 뿐만 아니라 스위스 칸톤의 신학사상의 통일을 기하고자 하였다.
제네바에서의 소우물 학파와의 첫번째 충돌은 프랑스 출신으로 소우물에서 공부하고 제네바 아카데미의 신학교수가 되었던 모루수(Morus, 1616-70)가 소우물 학파의 가르침에 공감하는 발언을 했던 1647년이었다. 신학교수 가운데 소우물 학파에 동조하는 분위기가 감지되자 목사회는 1649년에 소우물 학파의 교훈에 반대하는 규정(theses of 1649)을 작성하였는데, 이것이 나중에 일치신조를 작성하는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규정을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에 제네바 아카데미에는 계속하여 소우물에서 공부한 인물들이 교수로 채용되었고, 그러한 결과 공식적인 신조의 작성의 필요성이 강조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소우물 학파의 영향력은 제네바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스위스의 여러 칸톤들에서도 발생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1667년에 바젤의 게른러(Lucas Gernler)가 취리히의 하이데거(Johann Heinrich Heiddegger)에게 적어도 4개의 스위스 칸톤들이 제네바 아카데미에서 소우물 학파의 영향력을 제거하려는 튜레틴의 노력을 지원해야할 것이라는 편지를 썼다. 그 후 프란시스 튜레틴은 1669년 11월 6일 취리히의 하이데거에게 스위스 모든 칸톤의 신학생들이 서명해야만 할 새로운 신조의 작성을 제안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가 이러한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은 제네바에서 발생된 두 가지 중요한 상황때문이었다. 첫째로 새로 임명된 신학교수인 메스테리자트(Mestrezat)와 트론친이 도르트 신조의 정통주의를 범하고 1649년의 규정에 서명하지 않고 이 규정에 위반되지 않는 내용만을 가르치겠다는 타협 조항에 서명하였다. 이러한 사태를 겪은 얼마 후에 철학교수로 데카르트주의자인 꾸에(Robert Couet)가 부임하여 제네바 아카데미와 목사회 안에서 소우물학파의 영향력이 더욱더 증대되었다. 동시에 이러한 사태가 발생하자 취리히, 바젤, 베른, 그리고 샤프하우젠의 보수파들의 자기들의 칸톤 출신의 학생들을 제네바 아카데미에서 철수시키겠다고 위협하였고, 결과적으로 아카데미 지원학생들의 숫자가 1669년 이후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그리하여 1669년에 바젤의 훔멜(Hummel), 샤프하우젠의 오트(Ott), 바젤의 게른너가 바덴에서 만나 스위스 일치신조 작성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신조작성 움직임에 대하여 콕세이우스주를 포함하여 조그만 이단 혐의가 있는 모든 교리를 반대하자는 보수적인 입장과 그러한 신조작성을 반대하는 자유주의적 입장의 반대가 있었으나, 결국 소우물학파의 견해만을 반대하는 신조를 작성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리하여 스위스 복음주의 의회는 1674년 6월에 이르러 신조작성을 명령하였고, 스위스 일치신조는 취리히의 하이데거를 중심으로 작성되었다. 이 신조는 1675년에 작성되어 취리히에서 제일 먼저 채택되었고, 제네바에서는 소우물학파의 신학사상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반대로 제일 늦게 1679년에야 채택되었다. 제네바가 이 신조를 채택하게 된 배후에는 스위스 칸톤의 압력이 중요한 요인이었다. 이들은 제네바가 이 신조를 채택하지 않으면 제네바 아카데미에서 그들의 학생들을 철수시키고 제네바와 교류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제네바는 이러한 압력에 굴복하여 이 신조를 채택하였으나, 내부적으로는 진통이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이 신조는 프란시스 튜레틴의 아들인 장 프란시스의 노력으로 결국 1705년에 서명이 폐지되었고, 1721년에 이르러 신조 자체가 폐지되었다.
스위스 일치신조는 이와같이 소우물학파의 신학사상을 구체적으로 비판하면서 아주 치밀하게 당시 스위스 칸톤의 일치된 개혁파 신학사상을 제시하였다. 그러므로 이 일치신조를 분석하면 우리는 당시 제네바를 비롯한 스위스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정통주의 신학사상을 명확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IV. 스위스 일치신조의 신학사상
이 일치 신조를 구체적으로 26개 항목으로 되어 있다. 이 26개 항목들은 바로 소우물 학파의 대표적인 학자들인 카펠, 플레이스, 그리고 아미로의 신학사상들의 오류를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개혁파 정통주의의 신학사상을 제시하였다. 전체적으로 볼 때 26개 항목 가운데 처음의 세 항목은 카펠의 본문 비평을 비판하였고, 다음으로 4-9항목과 13-25항목까지는 아미로의 교리들의 오류를 지적하였으며, 10-12항목은 플레이스의 교리의 잘못된 것을 분석하고 정통주의 교리를 밝혔다. 이렇게 볼 때 이 신조에서 가장 집중적으로 비판한 것이 바로 아미로의 신학사상인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당시에 아미로의 사상이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고, 개혁파 정통주의의 가장 핵심적인 항목 가운데 하나인 예정론, 속죄 범위, 그리고 인간론 등의 포괄적인 내용을 부정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1. 카펠의 주장에 대한 비판과 성경 영감
일치신조는 1-3항에 걸쳐 카펠의 주장을 비판하고 성경영감설을 제시한다. 당시 개혁교회가 로마 카톨릭과 신학에서 최고의 권위가 성경인가 아니면 교회인가를 둘러싸고 치열하게 논쟁하고 있는 가운데 카펠이 히브리 성경의 모음의 영감을 부정하게 전승과정에서 성경 사본의 부패를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해 신조의 1항은 하나님은 모세, 예언자 그리고 사도들에게 말씀을 기록하는 사명을 위탁하셨을 뿐만 아니라, 기록된 말씀이 부패하지 않도록 오늘날까지 보존해 주셨으므로 천지는 없어져도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하여 성경의 기록과 보존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설명하여 전승과정에서의 부패를 부정하고 있다. 다음으로 2항에서 히브리어 원문(Original)은 "자음뿐만 아니라 모음 - 그 모음의 점들 자체나 혹은 적어도 그 점들의 힘 -까지도, 그 성서의 재료(matter)에 있어서만 아니고 말들에 있어서도 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이라고 주장하며, 신약의 원본과 함께 신앙과 생활의 유일하고 완전한 규범을 이룬다고 하였다. 이와같이 일치신조는 카펠의 주장에 반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히브리 성경 원문의 모음점의 영감까지 주장하고, 성경의 재료 즉, 내용뿐만 아니라 언어까지 영감되었다는 축자영감을 주장한다. 동시에 히브리어와 헬라어 성경의 최고의 권위를 주장하면서 성경 번역본들은 당연히 원문 성경의 권위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일치신조는 히브리어 원문이 제시하는 본문이 사람에 의해 결정되었으므로 자신들이 적합하지 않다고 보는 히브리어 독법을 바꾸어 버리고 그것을 "70인역의 헬라어 역본과 다른 헬라어역본들, 사마리아의 모세 오경, 갈대아 탈굼, 혹은 다른 자료들로부터 수정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들의 의견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일치신조는 다른 언어의 번역본들과의 대조나 혹은 번역본들과 그들이 부패되었다고 판단하는 히브리 원문 자체의 다양한 독해(reading)들 사이의 비교를 통한 본문비평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의 히브리어 편집 이외에 다른 고대 해석자들의 판본(Version)들 속에 다른 히브리 원문들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부정한다.
결국 일치신조는 성경의 축자영감설을 보존하기 위하여 히브리 성경의 모음점까지 영감되었다고 주장하고, 다른 편집본들과의 비교를 통한 본문비평도 부정하고 당시의 히브리어 성경 본문 이외의 히브리어 원문들의 존재도 부정하고 있다. 이러한 정통주의자들의 입장은 종교개혁자들의 sola scriptura의 원리를 고수하여 신학에서 성경의 유일한 권위를 확립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2. 플레이스의 간접 전가설에 대한 비판과 직접 전가설
일치신조는 10-12항에 걸쳐 플레이스의 아담의 죄의 간접전가설을 비판하면서 직접 전가설을 주장한다. 10항은 아담의 죄의 전가를 언약의 대표 원리에 의해 설명한다. 아담은 축복의 언약에서 하나님과 자신뿐만 아니라 전체 인류의 머리와 뿌리로서 언약을 맺은 바와 같이, 범죄도 대표 원리에 의해 후손에게 전가된다(롬5:12,19; 고전15:21-22) 아담의 죄는 그의 모든 후손에게 하나님의 신비롭고 정당한 심판에 의해 전가된다. 그러나 죽음의 형벌을 초래하는 인류의 어떤 죄가 선행해야만, 하나님의 정당한 심판에 의해 영적인 죽음으로서 유전적 부패가 전체적인 인류에게 발생하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원죄때문에 본성적으로, 어떤 자범죄를 범하기 전에 출생에서부터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에 노출되어 있다. 원죄는 첫째로 아담의 허리에서 범한 범죄와 불순종이고, 둘째는 부모로부터 전달되는 유전적인 부패라는 이중적인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간은 대표의 원리에 의해 전가된 죄와 타고난 유전적 죄로 전체적인 본성이 부패하고 영적으로 죽어 있다.(11항) 그러므로 인간의 원죄는 전가된 죄와 내재적인 유전적 죄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원죄관을 가지고 일치신조는 간접적이고 결과적인 전가의 주장은 원죄의 전가의 파괴일뿐만 아니라 유전적 부패 교리도 위태롭게 하기 때문에 인정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일치신조는 아담이 하나님의 지명에 의해 그 후손을 대표하여, 그의 죄가 직접적으로 후손들에게 전가되는 직접적인 전가를 주장하였다.(12항) 그러므로 일치신조는 플레이스가 주장한 원죄의 간접적 전가설은 행위언약에 입각한 아담의 인류의 대표로서의 원죄의 직접적 전가를 부정하는 것이고, 그러한 결과는 부패한 본성의 전가마저 위태롭게 할 것이라고 하여 분명하게 거부하였다. 플레이스는 아담의 범죄의 전가에서 원죄의 직접적인 전가는 부정하고 부패한 본성의 유전만을 주장하였으나, 일치신조는 양자를 동시에 주장하였다.
3. 아미로의 가정적 보편주의에 대한 비판과 타락후 선택설
1) 타락후 선택설과 보편구원론의 부정
일치신조는 4-6항에서 타락후 선택설을 제시하며 아미로의 가정적 보편주의를 부정한다. 4항에서는 예지예정을 부인한 후에 타락후 선택설을 분명하게 제시한다. 창세전에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뜻의 순수하고 선하신 뜻에 따라, 행위에 대한 예지없이 주권적으로 선택하셨다는 것을 강조하여 예지예정을 부정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택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위를 통한 모든 무리가 아니라 일정한 무리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행위이다. 이러한 예정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는데 작정의 순서는, "맨먼저 사람을 완전하게 창조하시고, 그 다음에 그들이 타락하는 것을 허용하시고, 마침내 타락한 사람의 일부를 긍휼히 여기시어, 그러므로 일부를 선택하시나, 나머지는 부패한 무리 속에 남겨 두어, 마침내 그들을 영원한 멸망에 넘겨주시기로 작정하셨다"라고 하여 타락후 선택설을 주장한다.
5항은 하나님의 작정에서 그리스도 자신의 위치에 대하여 설명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선택의 은혜로운 작정에 포함되는데 선택 자체에 선행하는 공적있는 원인 혹은 토대로서가 아니라 자신이 또한 선택된 자로 포함된다.(벧전2:4,6) 그리스도는 자신이 선택되고, 예지된 분으로 선택의 작정의 시행에 첫번째 필수적 요소인 선택된 중보자로서 참여한다. 이러한 주장은 그리스도가 선택의 토대가 되어 모든 사람들을 선택한다는 보편선택설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치신조 6항은 1) 하나님이 박애심 혹은 타락한 인류에 대한 일종의 특별한 사랑에 의해, 그들이 믿고자 한다면 모두와 각각의 구원을 목적하였다. 2)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모든 사람과 타락한 사람 각자를 위한 중보자로 임명하셨다 3) 시간안에서 일부 사람들만을 구원한다는 아미로의 가정적 보편주의를 거부한다. 일치신조는 확고한 이중예정의 입장을 취하여 에서의 경우같이 유기자는 이름으로까지 분명하게 배제하고 선택한 자에게만 자비를 보이신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중보자로서의 지명도 선택자들을 위한 것이지,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는 선택의 토대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여 보편적 구원론을 부정한다.
2) 행위언약의 약속의 성격
다음으로 일치신조 7-9항목에 걸쳐서는 아미로의 행위언약의 개념을 부정하고 있다. 아미로는 하나님과 아담의 언약을 자연언약(natural covenant)라고 부르는데, 이 언약의 축복을 에덴에서의 축복되고 지속적인 삶이라고 하였으며, 이 언약에서 하나님의 자비는 충분하게 계시되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일치신조는 7-9항목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형상으로 우리들을 창조하사 행위언약 하에 두면서 약속을 덧붙였는데, 이 약속은 생명나누에 의해 상징되어 단지 지상적인 생명과 행복의 연속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였다면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다고 언급한다. 그리하여 행위언약이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조건으로 천국에서의 영원한 삶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아미로의 견해를 부정한다.
3) 제한속죄론
일치신조는 13-16항에서 걸쳐서는 선택의 시행에서 삼위일체의 사역을 제한속죄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13항에서는 영원전의 선택의 시행을 아버지의 선택과 아들의 구속 그리고 성령의 성화시키는 사역으로 설명하면서 삼위일체의 일치된 제한속죄론을 주장한다. 그리스도의 시간 안에서의 속죄사역은 새언약의 중보자로서 선택된 자들만을 대신하여 무서운 죽음을 당하셨고, 오직 그들만을 아버지의 은혜의 품으로 회복시켰으며, 분노한 하나님 아버지에게 화해시켰고, 율법의 저주로부터 구출하였다. 그래서 그러므로 이러한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의 뜻은 구원할 선민들에게만 그리스도를 주신 아버지의 경륜과 함께, 그리고 또한 선민들에게만 영생의 살아있는 소망으로 거룩하게 하시고 인치시는 성령의 사역과 함께 아버지의 선택, 아들의 구속, 그리고 성령의 성화는 하나이고 동일한 것이라는 완전한 조화 속에서 일치하고 다정하게 협력하신다.
그리스도가 선택된 자들만을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대신하여 죽은 사람들을 위한 구원 자체일 뿐만 아니라 구원의 방편, 특별히 중생시키는 성령과 신앙의 하늘의 선물을 제공하고, 실질적으로 그들에게 수여하시는데서 분명하게 드러난다.(14항)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한정되지 않고 그의 일생동안 율법에 대한 순종도 포함한다는 것을 언급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행동이나 고난 모두를 순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구속이 고난에 의해서만 성취되었다는 아미로의 견해를 거부한다.(15항)
그러므로 일치신조는 16항에서 다시 한 번 그리스도께서 그들이 믿는다는 불가능한 조건 위에서 모든 사람과 각자를 위해 죽으셨다는 주장, 그리스도는 모두를 위하여 구원을 획득하였는데, 이 구원이 단지 하나님의 정의의 장애물을 제거하였으며, 아버지를 위하여 모든 사람들과 은혜의 새로운 언약에 들어가는 자유를 획득하였다고 주장하는 아미로의 보편적 구원론을 완전히 부정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그의 능동적 의를 그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고, 그의 수동적인 의를 선민들에게 주고 분배한다고 주장할 정도로 그리스도의 능동적이고 수동적인 의를 구분하는 것도 부정한다.
4) 제한된 유효한 소명
일치신조의 17-20항은 소명이 보편적이라는 것을 부정한다. 이러한 항목들은 가시적 교회의 한계와 정상적인 은혜의 수단을 넘어 소명을 확대하는 아미로에 반대하여 소명이 제한적이라는 것을 주장한다. 17항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구약뿐만 아니라 유대인과 헬라인 사이에 차이가 없어진 신약시대에도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지적한다. 모두가 아니라 많은 사람이 부름받았다고 그리스도의 증언(마20:16), 비두니아로 복음 전하러 가는 바울과 디모데의 길을 허락지 않으시는 성령의 사역(행16:7),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도 소문으로도 그리스도를 듣지 못한 수많은 사람이 있다는 경험의 증거는 신약시대에도 소명이 보편적이 아니라는 것을 증거한다. 18항은 일반은총의 역할이 외적 소명의 기능이 아니라 변명하지 못하게 하려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이 보편적이라는 것을 부인한다.
복음의 설교를 통한 외적 소명이 모든 사람들을 향한 보편적인 것이지만, 이것이 보편적 구원을 위한 것은 아니다. 아들을 알고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이 영생을 가질 것이라는(요6:40) 것이 하나님의 의지이나, 이러한 "모든"은 오직 선민을 의미할 뿐 보편적 구원의 계획을 만든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 제한된 것이지만 하나님은 복음 선포가 보편적으로 이루어지게 하시나, 하나님의 뜻에 의해,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유기자들은 강퍅해지는 반면에, 선민만이 보편적으로 제공되는 외적인 소명을 통해 믿게 된다. 그러므로 보편적 복음 선포가 보편적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다.(19항)
일치신조 20항은 구원에 대한 부름이 유일하게 복음의 설교만이 아니라 자연과 섭리의 사역에 의해 드러난다고 하는 주장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한다. 이들은 구원에 대한 부름이 아주 무한하고 보편적이어서, 하나님이 자연의 빛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은혜의 빛을 더 많이 부어주실 것이라는 점에서 직·간접적으로 그리스도와 구원으로 충분하게 부름받지 않고 죽을 인생은 없다고 한다. 이러한 교리들은 성경과 모든 시대의 경험에 반대되고 명백하게 자연과 은혜를 혼합하며, 하나님의 알려진 것과 그의 숨겨진 지혜, 마지막으로 이성의 빛과 하나님의 계시의 빛을 혼합하기 때문이다.
5) 인간의 도덕적일 뿐만 아니라 본성적 무능력
일치신조의 21-22항은 인간의 복음을 행할 수 없는 도덕적 무능력 뿐만 아니라 본성적인 무능력이 우리 본성의 타락에 토대를 가지고 있으므로, 오직 성령만이 그것에서부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자연인은 성령을 받지 않고, 신령한 일들은 어리석은 것으로 여기며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에 알지도 못하여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중생할 수 없을 정도로(고전2:14) 완전히 무능력한데, 이 무능력은 도덕적 주체에 속하는 한에서 도덕적이라고 불려질 수 있으나, 사람이 본성적으로, 출생으로부터 불순종의 자녀(엡2:2)라 불려질 정도로 타고난 것인 한에서 또한 본성적이라고 불려져야만 한다.(21항) 인간의 타락의 결과인 인간의 무능력은 단지 도덕적 능력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지정의의 전인격과 관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도덕적 회심을 통하여 치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간의 본성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통해서만 변화될 수 있는 것이므로 본성적인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인간의 도덕적 무능력을 강조하고, 인간의 회심에서 도덕적 변화를 강조하는 아미로의 견해는 인간의 타락을 도덕적인 측면에서만 볼 뿐이고, 본성적인 타락인 것을 인식하지 못한 결과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무능력을 도덕적 무능력이라 부르고 신앙이 사람이 믿고자 하는데서 자체적으로 발생된다고 보는 것은 아주 부정하고 위험한 견해이다.(22항)
6) 이중적인 하나님의 언약
일치신조의 23-25항은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의 이중적인 언약을 취급하고 있다. 칭의의 방법이 행위에 의한 것과 은혜에 의한 전가의 두 가지 방법이 있는 것과 같이, 아담과 그 안에 있는 그의 후손들의 각자와 맺은 행위 언약과 그리스도 안에서 맺은 은혜언약이 있다. 행위언약은 죄에 의해 무효가 되었고, 은혜언약은 영원하고 전자와 달리 폐기될 수 없는 것이다.(23항) 은혜언약은 시대에 따른 경륜의 차이가 있으나, 그리스도는 언제나 동일하시기 때문에(히13:8) 믿음을 통한 구원방법에서는 동일하다. 물론 구약시대에는 그리스도와 거룩한 삼위일체의 이러한 구원경륜에 대한 지식이 신약 시대보다 약속과 그림자와 비유와 은유로부터 필연적으로 불완전하게 파생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과 양심의 평화를 획득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이 사실이다.(24항). 그러므로 자연언약, 율법 언약, 그리고 복음 언약이란 세 가지 언약을 주장하는 아미로의 견해는 적지 않게 견고한 진리와 경건의 핵심을 모호하거나 심지어 손상시킬 뿐 아니라, 아주 지나치게 느슨하고 적지 않게 위험한 것이다.(25항)
마지막으로 일치신조는 하나님의 교회가 무서운 방법들로 혼란되는 의견의 불일치의 두려운 점화를 방지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스위스 신앙고백과 도르트 대회의 신경에 반대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형제들의 공적인 회의에서 승인되고 인정되지 않은 신앙의 의심스럽거나 새로운 교리를 금지한다.(26항)
결론
17세기에 접어들어 개혁파 자체 안에서 다양한 신학적 견해들이 제시되어 격렬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므로 17세기에 작성된 개혁파의 대표적인 신조인 도르트 신조, 웨스트민스터 신조, 그리고 스위스 일치 신조가 모두 다 그러한 논쟁의 산물로서 탄생하였다. 이 가운데 웨스트민스터 신조는 우리의 신앙생활과 관련된 포괄적인 사항들을 취급하고 있지만, 도르트 신조와 스위스 일치 일조는 특정한 신학적 논쟁에서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작성되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신조들은 논쟁 상대방의 견해를 논리적으로 정확하게 분석하면서 성경적으로 반박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신조들은 대단히 논리정연하며 논쟁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어 반대되는 견해들을 엄격하게 정죄하고 있다. 그러므로 도르트 신조와 스위스 일치 신조는 우리의 신앙생활과 관련된 포괄적인 문제들을 다루지 않고 논쟁 상대방의 주장 가운데서 개혁파의 공인된 신학에서 벗어나는 문제들만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신조들이 취급하는 문제들은 상당히 제한적인 것들이고, 아주 특수한 것일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정통주의 시기의 신조 가운데 스위스 일치신조는 마지막으로 작성된 것이었고, 스위스에서만 공인되었다가, 짧은 시간 후에 폐지되어 현재 별로 알려져 있지도 않고 개혁주의 안에서도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스위스 일치 신조는 당시 제네바의 개혁파 정통주의를 위협하던 소우물 학파의 견해의 잘못들을 명확하게 지적하여 개혁파 신학의 올바른 형성에 기여하였다. 스위스 일치신조는 성경의 영감, 아담의 죄의 직접적인 전가, 그리고 그리스도의 가정적 보편구원론을 집중적으로 비판하고 성경에 입각한 개혁주의 신학을 제시한다. 성경 영감에서는 언어학적 접근보다는 이 교리를 유지하고자 하는 교리적인 접근을 하였으며, 그리하여 맛소라 사본의 모음점의 영감까지 주장하였다. 신조는 성경이 원본에서 영감되고, 성경의 내용과 문자까지 영감되었는데, 맛소라 사본의 자음뿐 아니라 모음까지 영감되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주장들 가운데 히브리 모음의 영감은 오늘날에는 인정되지 않고 있으나, 기본적으로 철저한 성경 영감의 교리를 확립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아담의 죄의 전가에서는 부패한 본성의 유전만을 인정하는 간접적인 전가를 부인하고 행위언약에 근거하여 아담의 죄와 죄책의 직접적인 전가와 부패한 본성의 유전의 양자를 확립시켰다. 그리스도의 가정적 보편구원론에 대하여 절대적인 이중예정과 그리스도의 구원은 제한된 구원이고, 하나님의 부르심도 제한된 유효한 부르심이며, 인간의 타락은 도덕적인 것뿐만 아니라 본성적인 타락이란 전적타락을 주장하고, 행위 언약은 영원한 생명까지 약속한 것이며,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이 하나님과 인간 관계의 기본적인 틀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스위스 일치신조는 절대예정, 인간의 전적 타락, 제한된 속죄와 제한된 유효한 부르심,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의 이중 언약에 의한 인간 구원계획의 이해 등 근본적으로 칼뱅을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을 정밀하게 논증하여 개혁파 정통주의의 신학의 확립에 크게 기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