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리고~♪)
비가 운치 있게 내린 날
용인휴양림 근처
약천 남구만의 묘원을
찾았습니다.
약천 남구만
생몰년 1629(인조 7) ~ 1711(숙종 37)
(왠지 병자호란과 장희빈이 생각나네요?)
남구만 선생은
여주의 능행길에 오른 숙종에게
남한산성의 현절사(당시 삼신사)를 세우자
건의하고 편액을 쓰신 분입니다~
여주 능행길이라면
세종과 효종능을 배알하는 길인데요,
남한산성을 꼭 들리게 되지요~
그래서 숙종은 그 건의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남구만은 오달제의 처조카라고 하니
현절사를 세우자
주장한 배경도 이해가 되네요~
북방 영토에 대한 관심도 많았는데요,
세조이후 방치되었던 폐사군을 시찰하고 나서
이곳이 비옥하고 따듯하니
다시 고을을 설치할 것을 주장했다고 합니다.
여성제 선생(광주시 인물)과 함께
장희빈의 측근이자
숙종의 총애를 받고있던
왕족 동평군을 견제하고자
간언을 올리다가
함께 유배길에 오른 분이기도 합니다~
이렇게나
광주시, 그리고 남한산성과
인연이 깊으신 분이에요~
그래서 이번 답사지를
남구만 묘역으로 잡게 되었다고 하시네요!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거진다
남구만의 유명한 시라고 하는데요
교과서에도 수록이 되어 있다죠~
저는 왜 기억이 안 나는 걸까요? ㅎ
이 시는 부지런히 농사짓기를 권하는
권농가적인 성격의 시라고 합니다
동창을 숙종에
노고지리는 조정 대신들로 빗대어
환국으로 어지러웠던 당시 정국을
표현했다 평가되기도 하지만
저는 이 시의 표면 그대로
서민들의 일상을
노래한 것으로 보고 싶네요~
남구만의 시는
애매하거나 거창하지 않고
일반인이 접하기 편한
시조들이 많다고 합니다
신도비
神道碑
직역하면 신을 인도하는
돌기둥이라는 뜻인데요
분묘의 남동쪽에 배치하여
묘의 주인이 북서쪽에 있다는
예측을 하게 하고
신을 분묘로 인도하는
기능을 가졌다고 해요~
(현실적으로는 사람을 인도하지만요ㅋㅋ)
남구만 선생의 사망 당시
바로 이곳에 묘를 조성하지 않고
양주에 초장을 했다죠
나중에 이곳에 이장을 하면서
부인과 합장하게 되는데요
그 이후에 언제 묘역을 새로 단장했는지
언제 용인시 향토문화재가 되었는지
언제 신도비를 올렸는지에 대한
내력을 간단히(?)
소개하는 비석입니다
이제 묘원으로 올라가 볼까요?
GO GO~
길가에 달린 탱자(?)들이
예쁘고 탐스럽습니다
옛날엔 위리안치할 때
탱자를 둘렀다는데
가시가 없고 덤불이 부드러운 것을 보니
이 나무는 탱자나무가 아닌가 봐요~
(맞나?)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남구만 선생 묘소
(두둥!)
단종릉보다 더 위세 있어 보이는 건
기분 탓이겠죠?
ㅎㅎ
남구만 선생과 함께 활동했던
여성제 선생의 묘역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어서 비교가 많이 되네요~
(역시 후손이 잘 되어야!)
이날은 관리를 하시는 날인가 봅니다
잔디를 깎을 준비를 하고 계시네요
남구만 선생이
기사환국으로 유배를 갔을 당시
마을에 약천이라는 샘물이 있어
호를 '약천'으로 지었다고 전해지는데요
그 약천을 만들고 있는 중일까요?
남구만 선생 약력과 가계,
관련 인물들과 철학 등 많은 내용을
소개해 주고 계십니다
자세하고도 방대한 지식의 향연!
어찌 저는 이곳에 다 담을 수 없는 것일까요~
반성합니다ㅠㅠ
이젠 묘소에 올라봐야죠!
그런데 헉!!
신도비에서 올라왔을 땐 좋았는데
이 짧은 거리가 왜 이렇게
힘이 들까요?
남한산성 1코스 완주보다 힘든 느낌!
높다 높아~
그래도 올라왔습니다~
약천 남구만의 묘소!
둘레석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후손에 의해 조성된 거네요~
망주석이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네요~
저 세호 꼬리의 고급진 컬!
귀여워요~
보통 장명등은 제단 앞
중앙에 위치하는데요
찍은 사진을 다시 보다가
왜 묘갈과 대칭으로 놓았을까
하고 문득 의문이 들었어요~
약천묘소략사에 의하면
본래에도 이곳엔 상석과 망주석만 있었습니다
남구만을 합장하면서 그분의 검소함에 어울리도록
장남이 묘갈만 썼는데요,
후대에 죄송하게 생각해
근래에 만들어 올렸다고 하니
후손들의 뜻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고 보니
영의정을 세번이나 하신 분이
유명한 사람은 다 올리고 싶어 하는
그 신도비를 안 올리고
지방 문화재에 지정된 후에야
종중의 뜻으로 올렸다 하니
약천 남구만 선생은
정말 검소한 분이셨군요!
남구만은 남극관을
매우 아꼈다고 하네요
소중한 손자가
총명하여 20세에 급제할 정도니
얼마나 예뻤겠어요~
아쉽게도 그 손자가 26세에
요절하게 되지만요~
이 두 사람의 일화가 있는데요
어느 날 할아버지 남구만에게
손자 남극관이 말하길,
"
아버지가 길을 가실 때
평시에는 저를 항상 돌아보시는데
오늘은 내가 나왔는데도
앞만 보고 가시니
나라에 큰일이 있나 봐요
"
라고 했다고 해요
아이인데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살피는 마음,
상황을 살피는 눈치가
제법이죠?
말년에는 병약한 손자에게
절대 자신의 장례에 참석하지 말라는
편지를 남길 정도였으니
그 지극한 사랑이 짐작이 갑니다~
남극관이 사망한 이후
그의 부인은 곡기를 끊고
1년 만에 사망하게 되는데요..
그래서 열녀비도 함께 있습니다
보통 조선시대 사대부의 묘는
부인을 좌측에 매장(부좌) 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하는데요
남구만 선생의 묘는 특이하게도
부인을 오른쪽에 모셨습니다(부우)
양주에 묻히셨다가
원래 이곳에 있던 부인과
합장하셨으니
아마 미처 전해지지 않은
이유가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드네요~
표지판이 있어 일반인이 와서 보기에도 좋네요~
표정이 귀엽습니다~
옛날 것으로 보이는 향로석과
새로 조성된 향로석
이곳이 고승(高僧) 일우(一愚)가
남구만 선생에게 천거한 명당이라고 하는데
묘소에서 바라보이는 전경을 보니
명당이 맞는 듯합니다~
남구만에 대한 정말 많은 내용을
자세하게 알려주셨는데
기록한 내용은 정말 얼마 안 되네요!
개인 공부 삼아 천천히 더 업데이트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도 무사히 답사 완료!!!
수고하셨습니다~
첫댓글 너른고을 광주시 문화관광해설사 역량 강화 활동의 일환으로, 해설사가 직접 찾아간 문화유산 답사 리뷰입니다 :)
답사를 준비하신 선생님들의 수고를 기억하며 리마인딩용으로 남기고 있는 기록입니다
혹여 잘못된 기억의 기록으로 선생님들께 누를 끼칠까 걱정됩니다
정정해야할 내용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
그날의 감상이나 소감을 댓글로 적어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간략하지만 답사의 전말을 일목여연하게 알 수있는 리뷰네요.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