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계수 맞춤 양복 협동조합은 최고 수준의 슈트를 지속적으로 생산할 수 있도록 우수한 리테일러들이 만든 협동조합이다. 앞으로 모든 주문과 생산을 공동으로 생산하고 판매할 것이다. 대한민국 최고의 리테일러들과 함께 일하게 되어서 영광이다.”
지난 2월 말 인기리에 종영한 주말드라마 <월계수 양복점 신사들>(KBS2)에서 주인공 이동진(이동건 분)이 맞춤 양복 장인들에게 협동조합을 소개하는 대목이다. 이 드라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맞춤 양복점이 기성복에 밀려나 폐업 위기에 몰린 상황으로 시작한다. 선친에게서 물려받은 ‘월계수 양복점’을 오랜 세월 운영해온 장인 이만술(신구 분)은 사업을 물려줄 이를 찾지 못해 애를 태운다. 외아들 동진은 대기업 의류회사의 부사장이 되었고, 수제자 역시 다른 일을 하고 있다. 그러나 가슴 따뜻한 드라마의 결말은 다시 전통을 이어가는 모습으로 막을 내린다. 다만 이전과 달리 외아들이 가업을 혼자서 물려받기보다는 다른 장인들과 함께 생산하고 판매하는 협동조합 방식을 택한다.
‘월계수 양복점의 신사들’처럼 장인들 협동조합 즐비한 이탈리아 볼로냐
드라마 속 맞춤 양복 협동조합은 온전히 작가만의 상상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다. 사실 구두나 양복 같은 상품은 대량생산, 대량소비 방식보다는 맞춤 제작이 오랜 기간 이어져 왔다. 또 완제품이 만들어지기까지 여러 공정이 결합하는 특성상 만드는 이들의 협동이 상품의 질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명품브랜드를 보유한 이탈리아의 기술력은 여러 공방의 유기적 협력에서 나왔다. 유럽에서도 ‘협동조합의 수도’로 불리는 이탈리아 중북부 도시 볼로냐에서 탄생한 ‘볼로냐 공법’이 그 예이다. 이 공법은 공기를 넣은 가죽을 신발 밑창에 삽입해 발가락과 그 주위가 신발 안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한다. 볼로냐는 신발을 제작하는 가죽공의 길드가 중세 때부터 명성을 떨쳐온 곳이다. 17세쯤에는 150여개 공방이 거대한 상권을 형성했으며, 지금까지 여러 장인이 대를 이어 전수해온 기술은 협동을 바탕으로 또 다른 공동기술을 쌓아오고 있다. 판타지 드라마 <시크릿 가든>에서 까칠한 백화점 사장 김주원(현빈 분)이 “이태리 장인이 한 땀 한 땀 만든…”이라고 표현한, 바로 그 섬세한 기술은 이처럼 수백 년 동안 축적된 협동의 성과이다. 볼로냐에만 다양한 협동조합 400여곳이 지역경제의 주춧돌로 자리 잡고 있다. 작은 공방들은 여전히 협동을 바탕으로 세계 어느 곳에서도 따라오기 힘든 기술과 브랜드를 쌓고 있다. 혼자서는 명품 브랜드를 만들 수 없다는 오랜 기간의 학습 효과이다.
우리나라 역시 조선 시대 가죽구두를 만들었던 갖바치를 비롯해 오랜 장인의 전통이 있었다. 1980년대까지 잘 나갔던 장인들의 손길로 만든 수제화, 맞춤 양복 등은 이후 대형 제조업체나 유통업체의 등장으로 큰 변화를 겪었다. 대형업체들이 유통망을 장악하면서 개별 장인들은 하청업체로 전락하여 본사의 정형화된 디자인에 맞춰 생산하게 되었다. 뒤이어 중국산의 저가 물품의 공세가 몰아닥치며 그마저도 사라질 위기에 몰렸다. 장인들의 기술이 이어지지 못하고 사라지는 것은 사회적 손실이다. 장인들이 사라지면 청년들은 배우려 해도 배울 방법이 없다.
장인 전통 이어가기 위한 한국형 협동조합 모델 주목
이러한 장인들이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드라마처럼 협동조합적 생산과 유통 방식이 도입되고 있다. 먼저 중소기업청 산하 소상공인진흥공단의 소상공 협업화 사업이 있다. 5인 이상의 같은 업종 또는 다른 업종의 소상공인들이 모여 협동조합을 만들었을 때 교육과 컨설팅에 이어 공동 장소 임차와 설비 구축에 일정 정도 지원을 해주는 사업이다. 서울시의 경우 ‘수제화 1번지’ 성수동을 사회적 경제와 수제화·봉제 등 패션과 결합해 지역경제 발전을 이끄는 ‘성수 특화산업 클러스터’로 조성해, 사업을 2016년부터 본격 시행하고 있다. 성수동은 제조공장부터 유통업체·수선집·공방에 이르기까지 515곳의 수제화 업체에서 4000여명이 종사해 전국의 40%, 서울시의 80% 비중을 차지하는 대표적인 수제화 밀집 지역이다. 2018년까지 1만㎡ 규모의 ‘성수 특화산업 클러스터’를 만드는 ‘성수 사회적 경제 패션 클러스터 육성계획’도 추진 중이다.
다만 이러한 장인들의 협동조합 육성 정책과 관련한 몇 가지 한계들이 드러나고 있다. 먼저 지원금 위주의 정책 설계이다. 지원금은 ‘마중물’이여야 한다. 마중물은 펌프에서 물이 나오지 않을 때 물을 끌어올리기 위해 위에서 붓는 물이다. 일정 정도 자립이 가능할 때, 초기의 적절한 지원금은 약이 되지만 현장이 준비되지 않은 가운데 공급되는 지원금은 자칫 독이 될 수 있다. 자립능력을 위한 사업설계와 조합원들의 조직화보다 심사에 통과될 수 있는 사업계획 작성에 치중할 수 있다. 이는 비단 협동조합만이 아닌 우리나라 창업 생태계에서 반복되는 양상이다.
드라마 속 장인들이 만든 협동조합, 골목마다 생기게 하려면…
두 번째로 현장의 문제를 풀고 조직해나갈 실행가의 부재이다. 대학과 연구기관의 정책연구들이 나오고, 중간지원기관에서 여러 공모 사업들을 진행하고 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협동화의 실행 주체는 아직 미약하다. 성동 협동사회경제추진단의 신만수 단장은 “현장의 상황을 잘 이해하는 가운데 정책과 연계해주는 고민이 부족하다. 예를 들어 정책연구 보고서에는 9시 넘어 일이 끝나는 봉제업자들과 어떻게 만나고 협동해 나갈 것인가가 담아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사회적 경제 방식의 산업클러스터는 기술과 설비 중심이 아닌 사람 중심의 클러스터가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해당 업종에 종사하고 있거나 뛰어들고 싶은 사람들에 대한 이해가 우선되어야 한다. 특히 수제업자, 봉제업자 같은 장인들은 소규모로 뿔뿔이 생산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을 결집하고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데는 세심한 노력이 필요하다. 서울 성동구의 경우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현장(기술) 전문가, 학계 연구자, 관련 민간단체, 중간지원조직 등이 함께 모여 2014년 10월 한국패션 사회적 협동조합을 창립하기도 했다. 비영리법인인 사회적 협동조합이 패션봉제산업과 관련한 교육·생산·디자인·마케팅을 매개로 현장의 생산주체들과 정책을 연계하고 조정해 나가자는 방식이다.
‘월계수 맞춤 양복 협동조합’은 티브이 드라마 속을 벗어나 현실에서도 등장할 수 있다. 장인들이 협동조합 방식으로 개발하고 생산하는 제품은 시장에서 소비자들로부터 충분히 선택을 받을 수 있다. 다만 ‘이태리 장인이 한 땀 한 땀 만드는’ 것처럼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연결해가고, 현장과 정책을 보다 튼튼히 연계시키는 정성이 필요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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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788146.html#csidx913ba9ca730b79090f3ed48830f05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