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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청산 - 청산도(靑山島) 산행기
"나는 수풀 우거진 청산에 살으리라 나의 마음 푸르러 청산에 살으리라 이 봄도 산허리엔 초록빛 물들었네 세상 번뇌 시름 잊고 청산에서 살리라 길고 긴 세월 동안 온갖 세상 변하였어도 청산은 의구하니 청산에 살으리라”
김연준이 작사 작곡한 ‘청산에 살리라’를 미샤 마이스키 첼로 연주로 듣는다. 삶의 깊은 고뇌를 간직한 듯, 이를 떨치기 위해 초록빛 산허리에 잠길 듯한 애잔한 울림을 보여준다. 청산도에서 돌아온 날 밤, 여전히 청산은 그립다. 청산도는 섬 이름부터 매혹적이다. 고려가요 ‘청산별곡’, 혹은 박두진 시인의 ‘청산도(靑山道)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살어리 살어리랏다 / 청산(靑山)애 살어리랏다. / 멀위랑 다래랑 먹고 / 청산(靑山)애 살어리랏다. /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 살어리 살어리랏다 바다애 살어리랏다. / 나마자기 구조개랑 먹고 바다애 살어리랏다. /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1, 6연)
고려 무신정권기의 혼란과 몽골의 침입으로 삶의 터전을 상실하고 유랑하던 민초들이 불렀던 노래, 청산별곡. 그들에겐 청산이 현실 도피처인 동시에 유토피아였으리라.
“산아, 우뚝 솟은 푸른 산아, 철철철 흐르듯 짙푸른 산아. 숱한 나무들, 무성히 무성히 우거진 산마루에, 금빛 기름진 햇살은 내려오고, 둥둥 산을 넘어, 흰구름 건넌 자리 씻기는 하늘. 사슴도 안 오고 바람도 안 불고, 넘엇 골 골짜기서 울어오는 뻐꾸기.” (1연)
박두진 시인은 해방 직후, 우리가 소망하는 세상이 아직 도래하지 않은 현실 속에서 여전히 청산, 이상향을 그리워하고 있다. 이렇듯, 삶이 무거울수록 그리운 곳, 현실 저 너머에 존재하는 상상의 공간이 무릉도원이요, 청산이고 청학동이며 이어도다.
청산도에서는 4월 한 달간 ‘슬로걷기축제’가 열리고 있다. 오늘은 그 마지막 날이고 평일이지만, 여전히 여객선은 붐비고 있다. 오전 11시에 완도 연안여객터미널을 떠난 배가 50분만에 청산도에 도착한다. 청산도가 가슴을 열어 우리를 맞아주기도 전에 우리의 몸과 마음은 이미 가벼워진 듯하다. 청산도의 관문인 도청항은 그래도 분주하다. 청산면사무소, 보건소 등 관공서가 있고, 작은 규모의 식당들이 즐비하여 청산도에서는 가장 번잡한 곳이다.
슬로길은 도청항에서 내리자마자 시작된다. 슬로길 푯말과 바닥에 그려진 화살표를 따라 도락리로 간다. ‘미항길’로 이름 붙여진 청산도 슬로길 1코스가 시작되는 구간으로서 자연의 고요와 삶의 활기가 정중동으로 어우러져 있다. 전형적인 청산도 풍경이 펼쳐져 절로 걸음이 느려진다.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청청한 남도 바다가 펼쳐져 있고, 왼쪽으로는 야트막한 동산이다. 유채꽃이 화사하게 피어 있고 청보리가 봄바람에 넘실거리는 구불구불 계단식 논밭 사이길을 걷는다. 무릎 높이의 야트막한 돌담들이 유채밭과 청보리밭을 끌어안고 있다.
세월이 흐르면 상처도 아름다움이 되는 것일까? 옹이가 박힌 나무결이 그러하듯이, 청산도 사람들의 고난과 한숨이 켜켜이 배인 돌담과 돌집이 아름답기만 하다. 추어내고 추어내도 끝없이 땅 속에서 나오는 돌들을 포개고 쌓아 그들은 돌집을 짓고 돌담을 쌓았던 것이다. 낭만과 관념의 눈으로 읽을 수 없는 삶의 애환이 청산도 마을의 정겨운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청산도의 상징이 된 유채와 청보리도 그러하다. 섬을 떠난 사람들이 남겨놓은 텃밭에 잡초만 무성했다. 그 슬픔의 땅, 황무지에 10년 전부터 유채와 청보리를 심었는데 육지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2007년 12월, 청산도는 아시아 최초로 슬로 시티(Slow City)로 지정된 것이다.
도락 노송길을 지나 경사가 제법 가파른 당리 입구를 향한다. 영화 ‘서편제’ 촬영장이 있는 당리 입구부터 드라마 ‘봄의 왈츠’ 세트장까지 420m의 언덕길을 를 ‘서편제길’이라 부른다. 한국 영화사상 최초로 100만 관객을 돌파한 ‘서편제’의 촬영장이었기 때문에 청산도를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하게 된 것이다. ‘서편제’를 촬영한 초가는 성처럼 돌로 축대를 쌓은 터에 지어져 있다. 영화 ‘서편제’는 전남 장흥 출신의 소설가 이청준의 원작 ‘서편제’ ‘소리의 빛’을 시나리오로 개작한 작품이다.
1960년대 초, 누나와 아버지를 찾아 다니던 동호(김규철)는 보성 소릿재에서 주막 주인의 판소리를 들으며 회상에 잠긴다. 마을 대갓집에서 소리품을 팔던 유봉(김명곤)은 동호의 어미 금산댁을 만나 자신의 양딸 송화(오정해)와 함께 새 삶을 꾸린다. 금산댁이 아이를 낳다 둘 다 죽자 유봉은 아이들을 데리고 소리품을 판다. 동호에게는 북을, 송화에게는 소리를 가르치던 중 동호가 생활고와 유봉 때문에 엄마가 죽었다는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떠난다. 그러자 유봉은 송화마저 자신을 떠날까 봐, 그리고 송화의 소리에 한을 심어주기 위해 그녀의 눈을 멀게 한다. 시력을 잃어가는 송화를 정성스레 간호하는 유봉, 그러나 그는 죄책감으로 죽어가며 송화에게 그 일을 사죄한다. 몇 년 후, 유봉과 송화를 찾아 헤매던 동호는 이름 없는 주막에서 송화를 만난다. 송화에게 판소리를 청하는 동호, 송화는 아버지와 똑같은 북장단을 치는 그가 동호임을 알지만 소리와 북으로 한을 풀고 헤어진다. 서로의 한을 다치지 않기 위해 '심청가' 중 모녀상봉 대목을 부르고 떠나는 것이다.
유봉은 우직한 예인의 삶을 고집하는 인물이다. 소리꾼들은 이미 생계를 위해 창극을 하지만, 유봉은 약장사를 따라 다니며 소리를 팔던 것마저도 집어치운다. 봄빛은 저토록 아름다운데, 유봉과 송이, 그리고 동호 앞에 놓인 길은 막막하기만 하다. 그 구불진 생의 행로에서 그들은 진도아리랑을 부르며 신명나게 한바탕 춤을 춘다. 한국 영화사상 가장 긴 5분 20초의 롱테크가 청산도의 산과 바다, 그리고 돌담길을 배경으로 촬영되었다.
“서편제는 말이다. 사람의 가슴을 칼로 저미는 것처럼 한이 사무쳐야 되는데 니 소리는 이쁘기만 하지 한이 없어. 사람의 한이라는 것은 한평생 살아가며 응어리지는 것이다. 살아가는 일이 한을 쌓는 일이고, 한을 쌓는 일이 살아가는 일이 된단 말이다.”
유봉의 대사는 남도 사람들의 삶과 예술을 대변한다. 남도 사람들은 삶으로 맺고 소리로 풀어내고 한스러운 삶을 살아냈다. 그들에겐 소리가 삶이고 삶이 소리였다. 삶의 아픔을 소리로 승화시키며, 척박한 삶을 보듬으며 살아왔던 것이다.
‘서편제’ 촬영장 앞에서 우리 회원 두 분이 춘향가 한 대목을 구성지게 뽑아낸다. 둘레꾼들이 이 아름다운 화음에 감탄하며 빙 둘러서 추임새를 넣어준다. ‘봄의 왈츠’ 세트장을 지나 숲으로 들어서니 선선해진다. 철쭉, 괴불주머니가 피어나고, 으름나무 꽃내음이 진동한 오솔길을 걸어 화랑포공원 입구에 도착했다. 화랑포에서 새땅끝을 연결하는 화랑포길이 있는데, 먼 바다에 파도가 일면 그 모양이 꽃과 같다 하여 꽃화(花), 파도랑(浪)자를 써서 화랑포라 부른다 한다.
다시 이정표와 지도를 보며 길을 찾는다. 서편제길에서 슬로길을 벗어나 도락리와 화랑포 사이의 포구에서 점심을 한 후 숲속을 걸었다. 그로 인해 방향 감각을 잃어 자칫 드라마 촬영장으로 되돌아갈 뻔했고, 그 때문에 더욱 신중해진 것이다. 우리 후미팀 일행은 화랑포길을 돌아보는 것을 포기하고, 보적산을 가기 위해 곧장 연애바위를 향하기로 했다.
연애바위 입구부터 청산도 슬로길 2코스 ‘사랑길’이 시작된다. 작은 섬마을에서 남녀가 눈이 맞으면 소문이 쫙 퍼지기 때문에 사랑에 빠진 연인들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이 호젓한 곳까지 와 사랑을 했다 해서 청산도 사람들은 ‘연애바탕길’이라 부르고 있다 한다. 사랑길 초입에 초분 모형이 있다. 전북의 선유도나 위도와 같은 도서 해안 지방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매장하지 않고, 풀이나 짚으로 묻어 놓았다가 3~5년이 지난 다음 유골을 수습해 안장했다. 자식은 그 초분 옆에 거적 등으로 집을 지어 시묘를 했다. 육탈을 해야 극락 정토에 갈 수 있다는 내세관에 따른 것이다.
연애바위에서 읍리 앞개 갯돌밭으로 가는 해안절벽길을 지난다. 연애바위 주변에 하트 모양의 나무들이 주저리주저리 달려 있고, 그 앞뒤에 갖가지 문구가 쓰여져 있다. 一切唯心造(일체유심조-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 있다)는 글구가 인상적이다. 사랑과 이별도 그러하고, 삶의 기쁨과 슬픔도 또한 그러하리라. ‘마음 한 번 돌리니 여기가 극락이구나’라고 하신 선사의 법문은 외물(外物)보다 내면의 마음을 강조한 것이리라. 처처청산, 청산은 어디에나 있다. 약속의 땅은 없다. 인간의 의지와 노력, 발상이 청산을 만드는 법이다. 야훼가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도 본디 황무지가 아니었던가. 돌담을 쌓고 바람벽을 만들며 허허로운 삶을 견디어낸 청산도 사람들은 마음으로, 피땀으로 청산을 만들었다. 예토와 정토가 둘이 아니듯, 우리에게 이상향으로 보이는 공간도 그들에겐 바람과 돌과 싸워야 하는 일상이다.
오염되지 않은 우주의 진리와 생명의 마음이 공명할 듯한 숲길을 지나는데, 문득 꽃비처럼 송홧가루가 날린다. 그 풍광에 취했는지 ‘비타민’님이 연신 민요 가락을 뽑아낸다. “어기야 어기야 어기어차 뱃놀이 가잔다”
당리재를 지나 앞개 포구의 갯돌밭에 이르렀다. 자그만 바닷가 한자락이 파도에 곱게 씻긴 조약돌로 덮여있다. 푸른 바닷물이 철썩철썩 밀려와도 조약밭이요, 쓸스릉쓸스렁 빠져나가도 조약밭이다. 무르익은 봄바다가 연두빛 몸을 뒤척이며 은비늘을 여기 저기 떨군다. 눈을 감자 남도 바다가 고요하게 일렁이며 내면에서 넘실댄다. 눈을 감아 세상은 검은 듯 흰데, 귀바퀴 몸 속에선 자그락 자그락 청환석과 몽돌들이 파도에 휩쓸리며 규칙적으로 소리를 토해내고 있다. ‘쏴아-ㄹ 딱 딱 돌 돌 쏴아-ㄹ 딱 딱 돌 돌’ 돌과 돌의 만남이 청아한 음색을 발하고 있다. 천년을 씻겨 다듬어진 존재들의 만남은 연(緣)의 깊음과 살아있음의 신비를 일깨워주고 있다. 우리의 만남과 그 울림도 저토록 아름답고 조화로울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구장리 마을에 들어섰다.
보적산(330m)을 지척에 두고, 등산로를 찾지 못해 터벅터벅 아스팔트길을 걸어 범바위와 등대 전망대가 보이는 고갯마루에 이르렀다. 청산도에서 가장 전망이 좋다는 범바위를 코앞에 두고 돌아서기로 했다. 말탄바위를 지나 범바위까지 가고 싶었지만 5시까지 되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보적산, 범바위를 오르지 못한 미련 때문인지 후미팀들은 스스로 패잔병 같다며 씁쓸하게 웃었다. 다행히 ‘풍경이 있는 집’ 펜션에 들어가 아름다운 풍경에 취해서 위로가 되었다. 정갈하게 가꾼 너른 잔디밭, 돌담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 담장 안에 심은 갖가지 야생화, 정원에 놓인 옥돌 테이블과 탁자 등이 참 인상적이었다. 고향이 남양주인 주인장은 애지중지하는 식물들을 남양주에서 청산도에 옮겨 심었다고 한다.
보적산을 등지고 내려가는 길에 사물들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다. 길가에 병꽃이 새 잎을 피워내고, 자생하는 팥꽃이 흰보라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다. 청산도 논에는 벌써 자운영이 붉게 피어나고 있었다. 광주 문학을 고집하는 소설가 공선옥의 수필집 ‘자운영 꽃밭에서 나는 울었네’를 떠올리며, 5월 광주의 상처를 문득 생각하기도 했다.
“내려갈 때 보았네 / 올라갈 때 보지 못한 / 그 꽃” (고은 ‘그 꽃’ 전문)
고은 시인의 시구를 떠올리게 하는 순간이었다. 내려가는 길은 늘 아쉬운 법. 모든 것을 남겨두고, 버려두고 떠나야 하는 인생 길 또한 그러하리라. 하지만 그 저무는 여로에 새로운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 눈이 열리기 시작한다는 것이 내려옴의 아름다움이다. 그렇게 내려올 수만 있다면, 그렇게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내려옴과 올라감이 어찌 다르랴. 길을 나서고 산에 오르는 것 또한 그러한 마음과 눈 하나 얻고자 함이 아니었던?
빠름, 초고속, 경쟁이 미덕인 직선의 도시에서 느림과 게으름, 조화와 굽은 삶을 생각하리라. 맹목적이고 결과지향적이며 소유적인 삶을 조금 탈피하고 인간적 시공간을 확보하리라. Andante로 사랑하며, 맑은 하늘에 감사하리라. 비록 내가 월든 숲에 오두막집을 짓고 살았던 스콧니어링처럼 살 수 없다 하더라도, 또한 도시문명과 자본주의적 삶을 버릴 수 없다 할지라도, 조금은 비겁하게 싸움에서 비켜나리라. 달팽이처럼 나의 내면의 호흡을 들으면서 느리게 걸어 보리라.
집이 그리워지는 시간, 6시 여객선이 우리를 싣고 완도를 향한다. 저무는 완도 상황봉, 달이 숨은 월출산이 새삼 반갑게 느껴진다. “가던 새 가던 새 본다 믈 아래 가던 새 본다. 잉무든 장글란 가지고 믈 아래 가던 새 본다” 새는 청산에서 속세(믈 아래)로 돌아가려 한다. 정동진 고현정 소나무가 태백산맥으로 굽어져 있듯, 청산은 늘 현실 저 너머에 있다. 하지만 언젠가 고단한 생의 여로를 걸을 때마다 마음속에 간직한 청산도의 산과 바다, 그 길을 꺼내 보게 되리라. 그리고 오늘 가지 못한 마음의 길을 따라 다시 청산도를 찾으리라.
가지 못한 청산도의 길들아, 산들아 잘 있거라. 언젠가 길을 잃고, 시간을 잊고 걸으리라.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화랑포(花浪浦)에서 꽃물결로 밀려드는 파도에 취하고, 당리 해변에서 해조음을 들으며 몽돌을 헤리라. 키 작은 나무들과 눈인사하며 범바위에 올라 여서도와 거문도를 눈시리도록 바라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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