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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의 악몽
최근 극장가에는 지난해 12월 27일 개봉한 ‘1987’이라는 영화가 ‘신과 함께', '죄와 벌’을 누르고 누적 관객수 1위를 달리며 5백만 명에 육박하고 있다고 한다.
흥행 속도로 보아 곧 1,000만 명을 넘길 것 같다고들 한다.
1987이라는 영화는 고문치사 당한 고 박종철군 사건을 다룬 이야기다.
영화는 그의 죽음이 87년 6월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사실만을 묘사할뿐, 경찰이 왜 그를 연행했는지는 밝히지않고, 단순히 그를 민주주주의를 위해 싸웠던 학생으로만 묘사한다.
1,6월 항쟁의 기폭제, 박 종철사건
박 종철사건의 발단은 전두환정권의 탄압과 그에 대한 저항이 1980년대 중·후반에 더 심각해가고 있던때에,경찰은 ‘민주화추진위원회사건’ 관련 수배자 박종운의 소재 파악을 위해, 그 후배인 박종철을 체포 연행하여 고문하면서부터 출발된다.
전두환정권 말기인 1987년 1월 14일, 경찰은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 박종철을 체포하여 그를 고문하다가 사망케 되었는데, 이 사건은 공안당국의 조직적인 은폐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 진상이 폭로되어 1987년 6월항쟁의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여기서 박 종철은 순수한 의도로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학생이었을까를 잠시 살펴보자.
결론은 아니올씨다 였다.
박 종철은 당시 학생운동권안에서 '제헌의회그룹'이라는 집단에 소속되어 있었다.
85년 2월 총선에서 김영삼,김 대중 양 김씨의 신민당이 제 1야당이 되고 이들이 대통령 직선제 헌법개정을 요구하면서 개헌국면이 시작되었다.
당시 제헌의회그룹은 직선제 개헌투쟁에 참여하기를 꺼려 했다.
까닭은 직선제 개헌투쟁은 정치적 주도권을 쁘띠부르조아세력인 신민당에게 넘겨주게 될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박 종철군이 속한 제헌의회그룹은 러시아혁명에서 영감을 받아 '파쇼하의 개헌반대,혁명으로 제헌의회라는 구호를 채택하고 86년 5월부터 혁명투쟁의 전위부대가 되어 비타협적인 선도적 투쟁을 시작했다.
그러기에 박 종철군도그를 고문해서 검거하고자했던 박 종운군도 사실은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가 만약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다면,어찌 다니지도 않은 북한의 김일성대학대학에서 졸업장을 수여할수 있겠는가!(통일 뉴스 2006년 1월 4일자 "南 열사 31명,北 명예학생 인사 등록 참고)
박 종철군은 우리나라 열사도 결코 아니며,그가 목적하고 추구하던 이상은 공산사회였으며,그들이 궁극적으로 원한것은 인민민주주의 였던 것이다.
제헌 의회그룹은 당시 주사파(NL파)와 대립하고 있던 영향력있는 학생운동세력이었다.
보다 구체적인 내용은 차후에 다루기로 하고, 고문치사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어보고자 한다.
당시 수사 담당자는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유명한 말이 나오기도 하였는데,은폐될수도 있었던 사건이 세상앞에 드러날수 있었던것은 H라는 교도관의 은밀한 폭로에서부터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좀더 구체적인 정황을 살펴보면, 경찰은 박종철에게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가하였는데, 박종철은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했다.
같은 달 15일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단순 쇼크사인 것처럼 발표를 하였다.
“냉수를 몇 컵 마신 후 심문을 시작, 박종철군의 친구의 소재를 묻던 중 '탁' 하고 치니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중앙대 부속 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 사망하였다”고 공식 발표했다.
부검의(剖檢醫)의 증언과 언론 보도 등으로 의혹이 제기되자 사건발생 5일 만인 19일에 물고문 사실을 공식 시인하였고, 수사경관 조한경과 강진규 등 2명을 구속하기에 이르렀다.
정부는 내무부장관 김종호와 치안본부장 강민창의 전격 해임과 고문 근절 대책 수립 등으로 사태를 수습하려 하였다.
하지만, 1987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모미사에서,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김 승훈 신부는 박종철 고문치사와 관련된 경찰의 은폐 조작을 폭로했다.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 등 대공간부 3명이 이 사건을 축소 조작하였고, 고문가담 경관이 2명이 아니라 5명이었다는 사실이 폭로되었다.
안기부, 법무부, 내무부, 검찰, 청와대 비서실 및 이들 기관의 기관장이 참여하는 관계기관 대책회의가 은폐 조작에 조직적으로 관여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박 종철 고문치사와 은폐 조작사건은 전두환정권의 정당성에 큰 타격을 주었고 정권 규탄 시위를 촉발했다. 이 사건은 1987년 6월항쟁의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여 민주화운동의 촉매제 역할을 했다.
이상이 당시 사건의 개요이지만, 1987년은 또 다른 악몽이 싹트고 있었음을 세상은 까마득히 모른다.
그 악몽의 사건을 추적해 보려는것이 필자가 이 글을 써보려는 의도이다.
2,민주노총의 출발점
민주노총이 세상에 고개를 내민것은 공교롭게도 박종철고문치사와 6월항쟁이 일어났던 그때와 시기를 같이하고 있다.
노동운동의 시발점을 논한다면 실상은 "도시산업선교회"가 그 출발점이라 해야 옳을것이다.
그렇다면 도시산업선교회란 어떤 단체인가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도시산업선교회는 한국의 산업화 과정에서 발생한 노동 문제, 도시빈민 문제를 해결하고, 노동자의 인권을 위해 활동한다는 목표하에 카톨릭 지학순 주교가 회장을 맡은 '한국 교회 사회 선교연합회' 산하 '한국 도시 산업 선교 연합회'라고도 불리었다.
초기 위원장은 정 진동 목사였으며, 인 명진 목사가 서기 및 총무로 일했다.
도시산업선교회를 배태한 신학은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이었다.
이들 신학은 내용을 분석해보면 종교속에 파고 들어온 좌파적 사회주의혁명 논리가 자리하고 있다.
공산주의는 놀랍게도 위장전술로 종교에 파고 들어 종교를 파괴하고, 세상을 오도하여 사회주의혁명으로 이끌고 가려는 무서운 술책이 담겨있다고 보아야한다.
이들 사상을 배경으로한 종교단체가 도회지에서는 도시산업선교회라는 이름으로 산업체에 파고 들어갔고, 농어촌에는 농촌계몽과 봉사라는 구실로 카톨릭농민회(카농)가 그 주축세력이다.
이렇게 출발된 도시산업선교회는 선교라는 순수목적을 떠나 산업체에 위장취업을 하여 기업 도산을 몰고왔고,카농은 농민들의 권익신장을 내세우며 농민들을 이용한 반정부투쟁을 끊임없이 이끌어왔다.
이중 도시산업선교회가 몰고온 대표적 사건이 YH 무역사건이다,
YH 무역은 1966년 설립된 가발 제조업체업체인데 여기에 여공들이 위장취업을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이 주축이 되어 일으켰던 사건이 그 유명한 YH무역사건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민주노총을 탄생시킨 그 주역은 어디에서 출발되었을까?
그 시발점이 된 곳은 다름아닌 경남 창원이라고 보아진다.
경남 창원에는 동양기계(이하 D로 표현) )가 있었고 T라는 방위산업체가 있었다.
T사는 1968년 법인화한 회사로써, 경기도 구리에서 경남 창원으로 공단 초기인 1974년에 이전을 하였다. 1981년 비상장 T사는 상장 D사와 합병했다.
관리본부와 4개 공장 및 자체 기술개발연구소를 두고 5,400명의 종업원이 일하는 곳이었다.
그 중 1,200여 명이 병역특례요원이었는데, 특례요원은 T사의 방위산업분야와 정부기간산업분야 그리고 연구 분야에 근무하는 조건으로 병역을 면제받았다.
선진 독일, 일본 등 외국인 기술요원도 50명이나 있었었는데, T사는 정부로부터 정밀기술 1급 공장으로 지정받아 4개 공장에서 공작기계와 방위산업제품, 자동차부품을 생산하면서 별도의 열처리 및 착색공장, 단조공장까지를 둔 종합금속제품제조업체였다
3. 1987년 당시 사회 분위기
영화 1987에 나오는 것처럼 서울대생 박종철군이 공안당국의 조사를 받던 중 사망했고, 이로 인해 전국 대학가에서 반정부시위가 벌어졌다.
그 후 이른바 ‘4.13조치’(호헌선언)가 발표된 뒤 대학가에서 일기 시작한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어갔다.
6월 초에는 연세대에서 시위를 하던 이 한열군이 최루탄 파편에 맞아 사망했다.
드디어 6.29선언으로 국민투표를 거쳐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이 확정되었지만 시위는 쉽게 그치지 않았다.
민주화 욕구가 사회각계에 터지면서 노사분규도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노사대립은 농성과 파업, 기물파괴와 방화로 격렬하게 확산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8월에는 경남 거제 대우조선 근로자 이석규군이 사망하면서 시위는 더욱 과격해졌다.
12월 대선과 이듬해 개최된 88올림픽으로 분규가 잠잠해진 듯했으나 1989년 3월 문익환 목사와 6월 임수경의 방북으로 인하여 사회 분위기는 혼미 상태가 계속되었다.
방북했던 문익환목사는 빨간 머플러를 매고 돌아왔는데, 노사분규 때 노조원들은 그 빨간머풀러를 매고 시위를 하기도 했다.
한편 1970년 평화시장에서 분신 자살한 전 태일의 사건도 노동운동에 불을 지른 획기적 사건이기도 했다.
이렇듯 1987년이후 사회적분위기는 심각하였는데,여기에 가장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나온것은 1980년대 중반이후에 등장한 김일성을 찬양하고 지지하는 김일성 주체사상이다.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사람들을 주사파라 약칭하는데, 그들은 김일성
주체사상은 1972년 12월 채택된 사회주의헌법에서 공식 통치이념으로 규정되었다.
김정일에 의하면 주체사상은 철학적 원리, 사회역사원리, 지도원칙 등으로 구성된ㄷ고 하였다.
철학적 원리는 일명 '사람중심의 철학'으로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것이고, 사회역사원리는 '혁명과 건설의 주인은 인민대중이며 혁명과 건설을 추동하는 힘도 인민대중에게 있다'는 논리로써, 지도원칙은 혁명과 건설에서 자주적 입장과 창조적 입장을 견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북한에서 주체사상은 정치·경제·사회·문화·외교·군사 등 사회 모든 분야를 규정·지배하는 통치이념으로 기능하고 있다.
북한에서 '주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55년 12월 28일 김일성이 당 선전·선동 일꾼들 앞에서 행한 연설 '사상사업에서 교조주의와 형식주의를 퇴치하고 주체를 확립할 데 대하여'에서 이다.
그러나 북한은 주체사상의 기원에 대하여 1982년 발표된 김정일의 논문 〈주체사상에 대하여〉에서, 김일성이 1930년 6월 중국 지린 성[吉林省] 창춘 현[長春縣] 카룬[卡倫]에서 열린 '공청 및 반제청년동맹 지도간부회의'에서 주체사상의 원리를 처음 천명했으며 조선혁명의 주체적 노선을 밝혔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주체사상의 이론은 황 장엽이 쓴것이라는게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4.1980년대의 창원공단 T사 노사분규
1979년 10.26 사태이후, 어수선하던 1980년부터 노동현장에선 이미 많은 분규를 겪었다.
대규모 사업장이 많은 창원, 마산, 부산, 울산, 거제 등지에서는 크고 작은 노사분규가 끊이지 않았다.
임금 등 근로조건 향상을 위한 투쟁이라기보다 학생들까지 합세한 정치투쟁이었다.
창원 마산 지역 뿐 아니라 전국이 그랬다.
그 중에서도 T사는 우리나라 노사관계 역사의 중심이었다.
T사가 1981년 D사와 합병하기 전 D사에는 우리나라 최초 위장취업자 문 성현이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서울대 상대를 졸업하고 영등포에서 직업훈련과정을 마치고, 선반공으로 입사해 노조 결성에 관여했고 그 후 T사 노동운동을 좌지우지했다.
그는 한 때 노동단체를 등에업고 정당대표에 오르기도 했고, 현재는 문 재인 정부의 노사정 위원장에 임명된자이기도 하다.
문은 노조 사무장으로 일하다가, 1985년 위장취업 사실이 탄로 난 뒤, 다시 노조위원장 자리에 올랐고, 그후 에도 분규는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노사분규란 임금 등 근로조건을 향상하려는 노동자와 사용자가 의견의 불일치로 인하여 생기는 갈등관계인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T사에서 일어난 노사분규는 상식과 이성을 초월한 초법적분규였다.
그 까닭은 T사는 방위산업체이며, 연구실을 갖춘 정부 주요 기간산업체였기 때문이다.
병역특혜를 받고 군대생활을 대신하는 인원이 1,200명이었다.
현행법상 방위산업체에서의 파업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특히 군대생활을 대신하는 병역특혜자의 파업은 두말할 나위 없이 불법이다.
그런데, 병역특례자 대부분과 비교적 순진하고 젊은 20~30대 연령의 근로자들이 가장 먼저 분규에 가담하였고, 그들을 선봉에 내세워 악랄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들은 하지도 않은 말, 있지도 않은 일을 꾸며 사실을 왜곡하며, 거짓 선동으로 분규에 가담하게 하는 것을 수도 없이 보여왔다.
그들 집행부는 현수막, 리본, 머리띠 등에 적힌 구호와 모든 문구, 바탕색이나 글자색, 민첩한 행동 등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은 누군가의 지령을 받고 있음이 확실해 보였다.
공안당국의 지침대로 따라야하는 회사는 속수무책일 뿐 노조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들은 전국 기계공고, 공고, 직업훈련원을 다니며 선발해서 기숙사에 입주시키고, 일정기간 교육을 거쳐 현업부서에 배치된 사람들인데, 일하는 본관 사무실을 휘젓고 다니며 쓰레기통을 발로 차고, 책상 유리를 우산으로 깨부수는 일을 서슴없이 저질렀다.
시간이 흐를수록 시위는 과격해져 회사 정문과 후문이 노동자들에게 뺏긴 체, 나갈 수도, 들어올 수도 없이 점거당한 본관에서 관리직 근로자들과 충돌하여 수많은 인원이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되는 처참한 광경이 수차례 벌어졌다.
문 밖에는 경찰과 노동자들이 대치하면서 화염병과 최루탄 가스가 난무했다.
차들이 달려야할 대로에는 불붙은 폐유 드럼통이 수 없이 뒹굴며 경찰과 노동자들이 전진과 후퇴를 거듭하는 전쟁을 수년간 치렀다.
그후 T사는 계속되는 노사분규로 제때 부품을 공급받지 못하게 되었고, 현대자동차 등 완성차 업체는 부품을 자체 생산하기에 이르렀는데, 지금의 현대모비스가 바로 그런 회사이다.
T사는 결국 1998년 부도처리 되어 2003년 타 업체로 넘어가 회사명도 바뀌었고, 5천4백 명이던 종업원이 1천명에도 훨씬 못 미친다고 하니 4천명이상의 종업원은 모두가 비참하게 직장을 잃고 말았다.
여기에 주동자는 두말할 나위없이 위장취업했던 앞서 밝힌 문 성현이란자였다.
문이 방위산업체 불법파업 주동혐의 등으로 구속되자, 부산의 민변변호사 노무현변호사가 변호를 맡았고, 후에 해고자 복직을 위한 변호는 그와 동업자였던 문 재인변호사가 맡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문 성현은 노사분규 당시에, 4.6배판 크기의 ‘러시아혁명사’라는 책을 보란 듯이 옆구리에 끼고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필자는 그 회사에 직접 몸담고 있지는 않았지만,당시 회사 최고 책임자와 인사담당,그리고 실무직에 근무했
던 여러 사람들의 증언들을 접할수 있는 기회들이 있기에 당시의 정황을 보다 정확히 알수있는 한사람이다.
당시 노사분규를 일으켰던 누군가 쓴 '끝나지 않은 저항’(1985~2015년 사이 T사 노조운동의 30년사)이라는 책에서 “T사 노조는 민주노조운동의 뿌리다, 방위산업체 최초로 파업을 벌였다, 투쟁을 통해 민주노조를 탄생시켰다, 1985년 임금인상투쟁에서 파업 농성을 전개해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의 임금인상투쟁과 구로동맹 파업과 더불어 97년 노동자 대투쟁의 전주곡으로 평가된다.”고 적고 있다.
그렇다면 민주노조,즉 다시말해 민주노총을 탄생시킨 그 출발점은 다름아닌 경남 창원에 있었던 T사라는 점이 명확히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5, 노동운동의 발전적 과정
노동운동은 노동자들의 권익신장과 복지향상을 위해 건전하게 노사간 절충을 통하여 노사 상호간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불행이도 우리나라 노동운동은 사측은 철저히 무시되고, 오로지 노동자들만의 목소리만 높여왔다.
민주노총이 출발되기전에는 한국노총의 전신인 대한 노총이 있었다.
그러나 대한 노총과 이어서 출범한 한국노총은 기업가들의 앞잡이 노릇을 한다는 비판을 받기 시작했고,여기에 반하여 노동운동의 양대축으로 등장하게된것이 다름아닌 민주노총이다.
민주노총의 등장은 1987년 6월 29일 민주화 이후 급격히 일어났던 노동운동의 불길과,1970년 전태일이 평화시장에서 분신자살한것도 그 촉매제의 하나였다.
법적으로 복수노조설립은 불가하였지만,1987년 노동자 재 투쟁 이후 복수노조 법안의 폐지가 논의 되었다.
노태우 정부 시절 전국노동조합합의회(전노협)가 생겼으나 이는 별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1990년 3당합당이 있었고 3당합당 이후 막강해진 여당은 전노협을 무력으로 짓밟아 버렸다.
이처럼 전노협은 일시적으로는 실패한것으로 보였지만, 노태우가 끝나고 1993년 김영삼정권이 수립된이후 전노협은 1993년 업종회의와, 대우노조와 현대노조들을 모아 새로운 노조 이른바 `전국노동자대표자회의`(전노대)를 결성하게 된다.
1995년 전노대는 정식 노동 조합으로 나가기 위해 권 영길을 초대 위원장으로 선출하였다.
김 영삼 정부가 끝나는 1998년 노동자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줄 정부를 간절히 원했다.
1997년 선거에서 김 대중후보가 당선되었고, 1998년 노사정위원회 이후, 1999년 전교조 합법화 이후 전노대는 세력을 불려 마침내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을 결성한다.
이후 민노총의 세력은 크게 5가지로 나뉘어졌는데, 이른바 전교조, 금속노조, 공공운수노조, 언론노조,공무원노조가 그들이다.
1998년 그들이 창당한 국민승리 21의 후속작인 민노당은 그들의 당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노동자 출신인 심 상정, 권 영길 등의 인사등이 민노당을 출범시켰고,이후 이 정희,이 석기등이 만든 통진당도 이들 노동운동 단체에서 출범된 정당이기도 했다.
종북세력에는 수많은 참여연대와 시민단체 들도 있는바, 이들도 대부분 주사파가 만들어낸 작품들로 이들은 정부지원까지 받아가며 국민들을 호도하고, 민주인사들에 대하여는 끊임없는 박해를 가하고 있다.
특히 민주노총은 새로 탄생된 귀족집단들이다.
그들은 노동과는 실제 무관한 사람들로, 막강한 권력과 호화로운 부를 누리고 있다고들 말한다.
그들의 지휘와 지령에 따라 움직이지 않으면, 누구도 살아남을수 없는 참담한 현실이 되었다고도 한다.
# 에필로그
한국사회는 이제 주사파와 민주노총등의 종북세력들이 지배하는 끔찍한 나라가 되고 말았다.
1987년에 뿌려진 악몽이 씨앗이, 2017년 정확히 30년만에 망령처럼 다시 되살아나, 대한민국을 송두리채 잠식하고 말줄은 누구도 예견치 못했던 일이다.
국민들이 순진함 때문인가,아니면 그만큼 어리석기때문인가?
대한민국 국민들은 지금 제 정신들이 아니라는 생각에 답답한 마음 금할길 없다.
얼빠진 사람들이 기만과 위선 모략등에 속아, 이미 저들과 한통속되어버린 현실은 땅을 치고 통곡할일이다.
그렇다면 저들이 추구하는 목적은 무엇일 것인가?
두말할 나위없이 자유민주주의체제를 부정하고,김 일성 주체사상에서 표방하고 있는 사회주의국가,곧 공산사회를 이땅에 실현하려는게 그들의 주 목적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북한과 호흡을 같이하고 있으며, 북한이 주장하는 자주 평화를 외치는 가운데,그들의 최대 걸림돌인 미군을 철수하고,반공법이나 국가정보원등을 철폐하는 것이 첫번째 목적이다.
다음에는 국민을 철저히 기만하여, 헌법을 자기들 의도데로 뜯어 고친 다음, 소위 고려연방제 운운하며 남북한 총선거를 하려고 할것이다.
남북한 총선거는 UN감시하에 하겠다고 하겠지만,우리는 거기에 대한 아무런 대비책이 없다.
북한은 오래전부터 이런 준비까지 대비하여, 행정구역도 일부러 분할해 놓았고,인구대비로 한다하더라도 우리는 저들을 당해낼수가 없다.
북한은 유일 후보를 내세우겠지만,남한은 너도 나도 서로 잘낫다고 우후죽순처럼 들고 나올것이 너무도 뻔한게 우리의 안타까운 현실이지 않는가!
그런데다 우리는 주사파들의 속임수에 국민들은 이미 제 정신들이 아니다.
만약 국민들이 제 정신이라면, 어떻게 김일성을 숭배했던 주사파일당들이 청와대를 접수하고,국정을 농단하고 있어도 아무일 없을 듯이 바라보고만 있을수 있겠는가!
대한민국은 이미 갈길을 잃었다.
적폐청산이란 이름으로 저들의 눈에 반동분자로 보이는 자들은 하나 하나 제거해 나갈 것이다.
우리는 월남이 공산화되었던 그 전철을 그대로 밟고있는 현실에 직면해 있다.
"1987년의 악몽"은 우리 현실앞에 망령으로 되살아 나고 있다.
박 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영화는 그 사건을 다시금 부각시켜 철저히 민주인사들을 탄압하고 말살하려는 망령이라 보아야 한다.
우리는 1987년을 전후하여 출범된 주사파를 비롯한 종북좌파세력들을 적폐청산 1호로 규정하고,그들을 이땅에서 몰아내지 못한다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영원히 사라지고 말 것이다.
2. 1987년 당시 사회 분위기
영화 1987에 나오는 것처럼 서울대생 박종철군이 공안당국의 조사를 받던 중 사망했고, 이로 인해 전국 대학가에서 반정부시위가 벌어졌다.
그 후 이른바 ‘4.13조치’(호헌선언)가 발표된 뒤 대학가에서 일기 시작한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어갔다.
6월 초에는 연세대에서 시위를 하던 이한열군이 최루탄 파편에 맞아 사망했다.
드디어 6.29선언으로 국민투표를 거쳐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이 확정되었지만 시위는 쉽게 그치지 않았다.
민주화 욕구가 사회각계에 터지면서 노사분규도 전국으로 번졌다.
노사대립은 농성과 파업, 기물파괴와 방화로 격렬하게 확산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8월에는 경남 거제 대우조선 근로자 이석규군이 사망하면서 시위는 더욱 과격해졌다.
12월 대선과 이듬해 개최된 88올림픽으로 분규가 잠잠해진 듯했으나 1989년 3월 문익환 목사와 6월 임수경의 방북으로 인하여 사회 분위기는 혼미 상태가 계속되었다.
방북했던 문익환목사는 빨간 머플러를 매고 돌아왔는데, 노사분규 때 노조원들은 그 빨간머풀러를 매고 시위를 하기도 했다.
한편 1970년 평화시장에서 분신 자살한 전태일의 사건도 노동운동에 불을 지른 큰획을 긋기도 했다.
이렇듯 1987년이후 사회적분위기는 심각하였는데,여기에 가장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나온것은 1980년대 중반이후에 등장한 김일성을 찬양하고 지지하는 김일성 주체사상이었다.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사람들을 주사파라 약칭으로 일컫는데, 그들은 김일성
주체사상은 1972년 12월 채택된 사회주의헌법에서 공식 통치이념으로 규정되었다.
김정일에 의하면 주체사상은 철학적 원리, 사회역사원리, 지도원칙 등으로 구성된다.
철학적 원리는 일명 '사람중심의 철학'으로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것이고, 사회역사원리는 '혁명과 건설의 주인은 인민대중이며 혁명과 건설을 추동하는 힘도 인민대중에게 있다'는 논리로써, 지도원칙은 혁명과 건설에서 자주적 입장과 창조적 입장을 견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북한에서 주체사상은 정치·경제·사회·문화·외교·군사 등 사회 모든 분야를 규정·지배하는 통치이념으로 기능하고 있다.
북한에서 '주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55년 12월 28일 김일성이 당 선전·선동 일꾼들 앞에서 행한 연설 '사상사업에서 교조주의와 형식주의를 퇴치하고 주체를 확립할 데 대하여'에서이다.
그러나 북한은 주체사상의 기원에 대하여 1982년 발표된 김정일의 논문 〈주체사상에 대하여〉에서, 김일성이 1930년 6월 중국 지린 성[吉林省] 창춘 현[長春縣] 카룬[卡倫]에서 열린 '공청 및 반제청년동맹 지도간부회의'에서 주체사상의 원리를 처음 천명했으며 조선혁명의 주체적 노선을 밝혔다고 주장하고 있다.
3.1980년대의 창원공단 T사 노사분규
1979년 10.26 사태이후, 어수선하던 1980년부터 노동현장에선 이미 많은 분규를 겪었다.
대규모 사업장이 많은 창원, 마산, 부산, 울산, 거제 등지에서는 크고 작은 노사분규가 끊이지 않았다.
임금 등 근로조건 향상을 위한 투쟁이라기보다 학생들까지 합세한 정치투쟁이었다.
창원 마산 지역 뿐 아니라 전국이 그랬다.
그 중에서도 T사는 우리나라 노사관계 역사의 중심이었다.
T사가 1981년 D사와 합병하기 전 D사에는 우리나라 최초 위장취업자 M이라는 이가 있었다.
그는 서울대 상대를 졸업하고 영등포에서 직업훈련과정을 마치고, 선반공으로 입사해 노조 결성에 관여했고 그 후 T사 노동운동을 좌지우지했다.
M은 노조 사무장으로 일하다가, 1985년 위장취업 사실이 탄로 난 뒤, 다시 노조위원장 자리에 올랐고 그후 분규는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그가 방위산업체 불법파업 주동혐의 등으로 구속되자, 부산의 N이라는 민변변호사가 변호를 맡았고, 후에 해고자 복직을 위한 변호는 M이라는 변호사가 맡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M은 4.6배판 크기의 ‘러시아혁명사’라는 책을 보란 듯이 옆구리에 끼고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필자는 그 회사에 직접 몸담고 있지는 않았지만,당시 회사 최고 책임자와 인사담당,그리고 실무직에 근무했
던 여러 사람들의 증언들을 접할수 있는 기회들이 있기에 당시의 정황을 보다 정확히 알수있는 한사람이다.
당시 노사분규를 일으켰던 누군가 쓴 ‘끝나지 않은 저항’(1985~2015년 사이 T사 노조운동의 30년사)이라는 책에서 “T사 노조는 민주노조운동의 뿌리다, 방위산업체 최초로 파업을 벌였다, 투쟁을 통해 민주노조를 탄생시켰다, 1985년 임금인상투쟁에서 파업 농성을 전개해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의 임금인상투쟁과 구로동맹 파업과 더불어 97년 노동자 대투쟁의 전주곡으로 평가된다.”고 적고 있다.
그렇다면 민주노조,즉 다시말해 민주노총을 탄생시킨 그 출발점은 다름아닌 경남 창원에 있었던 T사라는 점이 명확히 드러나고 있는것이다.
4. T사 노사분규 양상
노사분규란 임금 등 근로조건을 향상하려는 노동자와 사용자가 의견의 불일치로 인하여 생기는 갈등관계인 것이 상식이다.
학생들이 민주화를 내세우며 정치투쟁 하는 것과는 직접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없다.
T사는 방위산업체이며 연구실을 갖춘 정부 주요 기간산업체였다.
병역특혜를 받고 군대생활을 대신하는 인원이 1,200명이었다.
현행법상 방위산업체에서의 파업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특히 군대생활을 대신하는 병역특혜자의 파업은 두말할 나위 없이 불법이다.
그런데 병역특례자 대부분과 비교적 순진하고 젊은 20~30대 연령의 근로자들이 가장 먼저 분규에 가담했다. 그들은 하지도 않은 말, 있지도 않은 일을 꾸며 사실을 왜곡, 거짓 선동으로 분규에 가담하게 하는 것을 수도 없이 보여왔다.
그들 집행부는 현수막, 리본, 머리띠 등에 적힌 구호와 문구, 바탕색이나 글자색, 민첩한 행동 등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은 누군가의 지령을 받고 있음이 확실해 보였다.
공안당국의 지침대로 따라야하는 회사는 속수무책일 뿐 노조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들은 전국 기계공고, 공고, 직업훈련원을 다니며 선발해서 기숙사에 입주시키고 일정기간 교육을 거쳐 현업부서에 배치된 사람들인데, 일하는 본관 사무실을 휘젓고 다니며 쓰레기통을 발로 차고, 책상 유리를 우산으로 깨부수는 일을 서슴없이 저질렀다.
시간이 흐를수록 시위는 과격해져 회사 정문과 후문이 노동자들에게 뺏긴 체, 나갈 수도, 들어올 수도 없이 점거당한 본관에서 관리직 근로자들과 충돌하여 수많은 인원이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되는 처참한 광경이 수차례 벌어졌다.
문 밖에는 경찰과 노동자들이 대치하면서 화염병과 최루탄 가스가 난무했다.
차들이 달려야할 대로에는 불붙은 폐유 드럼통이 수 없이 뒹굴며 경찰과 노동자들이 전진과 후퇴를 거듭하는 전쟁을 수년간 치렀다.
그후 T사는 계속되는 노사분규로 제때 부품을 공급받지 못하게 되었고, 현대자동차 등 완성차업체는 부품을 자체생산하기에 이르렀는데, 지금의 현대모비스가 바로 그런 회사이다.
T사는 결국 1998년 부도처리 되어 2003년 타 업체로 넘어가 회사명도 바뀌었고, 5천4백 명이던 종업원이 1천명에도 훨씬 못 미친다고 하니 4천명이상의 종업원은 모두가 비참하게 직장을 잃고 말았다.
5, 노동운동의 폐해와 문제점
노동운동은 노동자들의 권익신장과 복지향상을 위해 건전하게 노사간 절충을 통하여 노사 상호간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불행이도 우리나라 노동운동은 사측은 철저히 무시되고, 오로지 노동자들만의 목소리만 높여왔다.
민주노총이 출발되기전에는 한국노총의 전신인 대한 노총이 있었다.
그러나 대한 노총과 한국노총은 기업가들의 앞잡이 노릇을 한다는 비판을 받기 시작했고,여기에 반하여 노동운동의 양대축으로 등장하게된것이 다름아닌 민주노총이다.
민주노총은 1987년 6월 29일 민주화 이후 급격히 노동운동이 불길이 일기 시작했는데,1970년 전태일이 평화시장에서 분신자살한것도 그 촉매제의 하나였다.
법적으로 복수노조설립은 불가하였지만,1987년 노동자 재 투쟁 이후 복수노조 법안의 폐지가 논의 되었다
노태우 정부 시절 전국노동조합합의회(전노협)가 생겼으나 이는 별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1990년 3당합당이 있었고 3당합당 이후 막강해진 여당은 전노협을 무력으로 짓밟아 버렸다.
이처럼 전노협은 일시적으로는 실패한것으로 보였지만, 노태우가 끝나고 1993년 김영삼정권이 수립된이후 전노협은 1993년 업종회의와, 대우노조와 현대노조들을 모아 새로운 노조 이른바 `전국노동자대표자회의`(전노대)를 결성하게 된다.
1995년 전노대는 정식 노동 조합으로 나가기 위해 권영길을 초대 위원장으로 선출하였다.
김영삼 정부가 끝나는 1998년 노동자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줄 정부를 간절히 원했다.
1997년 선거에서 김대중후보가 당선되었고, 1998년 노사정위원회 이후, 1999년 전교조 합법화 이후 전노대는 세력을 불려 마침내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을 결성한다.
이후 민노총의 세력은 크게 5가지로 나뉘어졌는데, 이른바 전교조, 금속노조, 공공운수노조, 언론노조,공무원노조가 그들이다.
1998년 그들이 창당한 국민승리 21의 후속작인 민노당은 그들의 당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노동자 출신인 심상정, 권영길 등의 인사등이 민노당을 출범시켰고,이후 이 정희,이 석기등이 만든 통진당도 이들 노동운동 단체와 무관하지않은 정당이다.
노동운동은 이렇듯 정계에도 깊숙히 관여하는 단계로 발전하여 자신들의 목소리를 높여오기도 하였지만,노조운동의 핵심 간부들은 노동운동과는 무관한 귀족집단들로 변모했다.
노동운동은 단순히 노동자들의 권익신장이나 복지향상에 그 목적을 두지않는다.
모든 노조지부는 민주노총이라는 거대한 조직 산하에 들어가 있다.
까닭에 중앙지부의 지시와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누구도 살아 남을수 없는 제재와 형별을 감수해야한다.
그런 만큼 막강한 권력을 지니고 있는게 민주노총이며,모든 한국사회를 좌지우지 흔들고 있는것도 바로 이들 민노총이라해도 과언이 아닌 단계에 들어와 있다.
반면 민노총과 주사파는 땔래야 땔수없는 불가분의 관계이기도 하다.
어쩌면 대한민국은 바로 이들 손아귀에 들어있는셈이다.
대한민국의 가장 큰 적폐도 다름아닌 이들이라 보아질때, 1987년의 망령은 박종철군 사망사건보다 주사파와 민노총의 탄생이라 말하지 않을수 없다.